마7:13-27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 여러 사람이 모여 있지만 참석하게 된 동기는 서로 다를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의 극성스런 독촉으로 억지로 온 분도 있을 것이고, 종교는 다 좋은 것이니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오신 분도 있을 것이고, 병고침이나 문제 해결을 기대하고 오신 분도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 믿어져서 한번 제대로 예수를 믿어보려고 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모인 분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이 자리로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이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자리로 부르신 이유는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들을 때에 귀를 기울이시고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만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영원한 운명에 관계된 다섯 가지 엄숙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영원불변한 진리이며,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이 한없이 중요한 다섯 가지 사실을 여러분들께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1. 첫번째 사실 :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도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은 멸망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13-14) 이와 같이 하나의 문과 하나의 길이 아니라 두개의 문과 두개의 길, 즉 좁은 문과 넓은 문 그리고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산을 오를 때 정상에 오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길도 여러 가지다. 그러므로 종교란 다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엉터리입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은 "어느 문으로 들어가거나 어느 길로 걸어가도 괜찮다. 어쨌든 똑같은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로 걸어가면 영생이지만, 넓은 문을 통과해 넓은 길을 따라가면 멸망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느 길이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일까요? 우리는 경솔한 판단을 삼가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지혜자 솔로몬이 말한 대로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잠14:12)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 그리고 사람들이 종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피상적인 생각들을 생각할 때 이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권고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에는 두 가지, 즉 재물을 갈취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람을 억압하는 사교집단과 건전하고 무해하고 평등한 일반 종교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중 사교는 해로운 것이지만 다른 종교들은 다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거나 한 가지 자기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때로는 전도할 때 "나에게는 기독교가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맞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이상한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은 내게 맞지 않고 죽음이 내게 맞고, 진리는 내게 맞지 않고 거짓이 내게 맞고, 천국은 내게 맞지 않고 지옥이 내게 맞는다는 말과 결국은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기독교가 맞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좁은 길, 즉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구체적으로 어떤 길일까요? 예수님은 도마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이 곧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으로 예수님은 나를 믿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점이 있는데 예수님은 천국 가는 여러 길 중 하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국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침없이 그리고 단호하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구원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구원받는 사람뿐 아니라 멸망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2. 두번째 사실 : 구원받는 사람보다 멸망 받는 사람이 더 많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멸망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과 멸망 받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많을까요?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사실 이 질문은 그 자체에 구원을 얻는 자가 적다는 사상이 배어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4)
이와 같이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구원얻는 자가 많다는 말입니까? 적다는 말입니까? 적다는 말이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본문 13-1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또 22-23절에는 그날에 "많은 사람이" 버림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임할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는 사람은 적습니다.
물론 어떤 분은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은 사랑이신 데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노아 홍수심판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때 온 세상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몇 명이었습니까? 노아와 그의 가족 8명뿐이었습니다. 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도시의 심판 때는 모두 몇 명이 구원받았습니까? 의인 롯과 그의 두 딸, 고작 3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되면 세상이 노아의 때나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자는 적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구원 얻는 자와 멸망 받는 자의 비율이 얼마나 될까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는 간증 책의 저자인 박용규 목사님이 한 번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지옥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지옥의 크기에 깜짝 놀란 목사님은 천사에게 "천사님, 지옥의 인구는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하는 말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과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의 비율이 1,000 : 1이니라"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그대로 믿어야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구원받는 사람보다 멸망 받는 사람이 많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3. 세번째 사실 : 구원받을 줄로 믿었던 많은 사람이 멸망한다.
예수님은 본문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 '이것은 갓 믿은 사람들 중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아니면 교회에 다닌지 오래 되었어도 열심이 없고 체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도 이제는 역으로 '이것은 특별한 은사를 받고 하나님께 특별하게 사용되는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경고의 말씀이겠지'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최종적으로 24-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초신자 뿐 아니라 믿은지 오래된 사람, 열심 없는 사람 뿐 아니라 열심히 기도하여 은사 체험이 많은 사람,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엄숙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한편 우리가 여기서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21절에 나오는 "주여 주여하는 자", 22-23절에 나오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내어쫒고 많은 권능을 행한 자", 그리고 24-27절에 나오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들"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22절에 보면 버림받는 자들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항의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처럼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버림받아 지옥에 갔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구원의 확신만 가지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버림받지 않고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1-27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거듭 표현되고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은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3절에서 예수님은 굉장한 권능을 행한 자들이 버림받는 이유는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였기 때문이라고 밝히셨습니다. 26절에서 예수님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아니하는 자"라고 해석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버림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겠습니까?
바로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버리는 사람입니다.
아까 제가 박용규 목사님의 간증을 잠시 소개해드렸습니다만 그가 지옥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가를 물은 후, 연이어 "천사님, 지옥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천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옥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100% 지옥에 온다. 또 하나는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인데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모두 지옥에 온다."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을 믿어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자기 고집대로 행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4. 네번째 사실 : 죽은 후에는 구원의 기회가 다시는 없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보면,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간 반면,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서 불 속에서 눈을 들어보니, 자기 집 앞에서 걸식하던 나사로가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여러분, 한번 지옥에 던져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이 이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 싶습니다. 그 증거로 그는 감히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지옥에서 꺼내어 천국에 들여보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지옥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나사로를 자기에게 보낼 수 없으면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의 다섯 형제에게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회개하여 이 무서운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했을까요? 그것은 한번 지옥에 던져지면 아무런 희망도 없고 절대절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일단 지옥에 가면 더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오해하기가 쉬운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을 옹호하는 말씀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만일 그런 의미라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데 힘써서 뭣한단 말입니까?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그 다음 말씀을 읽어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누가복음 13: 25-27)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일단 한번 버림받아 지옥에 가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 모두 한번쯤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이라는 조각을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 없이 살아서는 안됩니다. 더욱이 종교는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생각 없이 아무것이나 선택하면 안됩니다.
그건 그렇고 로댕의 작품 속에 나오는 사람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본래 이 조각상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 앞에 있는 장면을 조각한 것입니다. 즉 지옥문 앞에서 한 사람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조각은 난센스입니다. 왜냐하면 지옥 앞에서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하려면 지금하고 결단도 지금해야 합니다. 지옥문 앞에서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생각하고 결단을 해도 운명이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버스 지나가고 손을 흔드는 격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진지하게 자신의 영원한 미래를 생각해보고 모쪼록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5. 다섯번째 사실 : 지금 이 예배가 어떤 이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서울의 압구정동에 가면 수 만명이 모이는 큰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담임하시는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 중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수요일 저녁 설교를 마치고 기도할 때가 되었는데, 갑자기 목사님에게 모여 있는 성도 중 한 사람에게 이 예배가 마지막 예배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이 마지막이 될 사람이 이 자리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철저히 회개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평소보다 길게 10분 동안 기도하고 성도들을 집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배후 교회 문을 나가다가 결혼한지 1년밖에 안된 새색시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 예배가 그 분을 회개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마지막 기회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이 예배가 누군가에게는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일전에 어느 책에서 저는 두 친구간에 오간 이런 대화를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한 친구가 자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되고 싶네. 하지만 먼저 세상 쾌락을 즐길 만큼 즐긴 후에 기독교인이 되겠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군. 가서 마음껏 세상을 즐기게나. 그런 후에 기독교인이 되도 늦지 않을 거야!"
"그런데 내가 구체적으로 어느 때에 기독교인이 되면 좋겠나?"
"죽기 5분전이면 족하네. 그때가 가장 좋은 시간이지."
"그러나, 그러나 말이야. 나는 언제 죽을 지 모르지 않는가?"
그러자 그 동안 엉터리 대답을 해오던 친구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아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이겠지."
그렇습니다. 이 친구의 대답이 옳습니다. 성경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성경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 2)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태어나는 것은 10개월 전부터 예측이 가능하지만 죽는 시간은 10초 전에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그것도 바로 지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한편, 오스왈드 스미스 박사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지적했습니다.
첫째, 생명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께서 언제 오실 지 모르기 때문이다.
셋째, 성령의 역사하심이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첫째와 둘째 이유에 대해서는 비교적 사람들이 잘 압니다. 그러나 셋째 이유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이끌고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니,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속히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아마 이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세계적인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의 간증에도 잘 나타납니다.
하루는 무디가 교실에서 청년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교실 안의 모든 청년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한 청년은 믿기를 거절하였습니다. 무디는 그 청년을 강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선생님. 나는 서부로 가겠습니다. 그 곳에서 성공을 거둔 후에 돌아와서 그때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무디는 무척 슬펐습니다. 그로부터 몇 주일 후 그 청년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무디는 그 청년을 방문하여 다시 한번 예수님을 영접할 것을 강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가날픈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나는 죽지 않습니다. 내 병은 나을 것이고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나는 서부에 다녀온 후에야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
또 다시 무디는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하루는 병이 나아서 건강해진 모습으로 그 청년이 무디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작별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나는 지금 서부로 떠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무디는 그 청년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또다시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을 강권하였습니다. 그때 그 청년은 귀찮다는 듯이 무디의 손을 뿌리치고 화를 버럭 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디 선생님, 내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 다시는 내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나는 약속한대로 서부를 다녀온 후에 믿을 것입니다." 청년은 이렇게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무디는 누군가 자기 집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그 청년의 부인이 서 있었습니다. "무디 선생님, 빨리 저희 집으로 가셔야겠습니다. 저의 남편이 또 병에 걸렸습니다. 그의 병은 절망적입니다. 저는 너무 너무 두렵습니다. 어서 저의 집으로 가 주십시오."
그러나 무디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용없습니다. 당신의 남편은 오늘 오후에 나에게 최종적인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넘지 못할 선을 넘었습니다. 내가 가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여인이 하도 애원을 해서 무디는 할 수 없이 그 청년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무디가 청년의 집에 가자 청년이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습니다. 무디가 가까이 가자 그 청년은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너무 늦었어요!"하고 말했습니다. 무디는 그의 침상 곁에 앉아 성경을 펴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성경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장만을 바라보면서 "너무 늦었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 청년은 그 말을 되풀이 하다가 죽었습니다.
여러분 이 두려운 사건이 보여주듯이 비록 아직 죽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령이 어떤 사람을 완전히 떠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이상 그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자꾸 뒤로 미루다보면 이런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구원을 뒤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것은 한 마디로 가소로운 헛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과 영원한 지옥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자기의 운명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 범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인간의 말로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겁없이 떠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들으신 설교는 전도설교입니다. 전도 설교의 끝머리에서 보통 설교자들은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런데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읽어보니까 그 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도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차마 여러분에게 예수를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독약이 든 컵을 놓고 '이것은 독약입니다. 먹든지 먹지 않든지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범죄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먹겠다는 사람이 나온다면, 멱살을 잡고라도 말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 이런 심정으로 현대문화아파트에 사는 분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또다시 이와 동일한 심정으로 여러분께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죄인은 모두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십자가 위에서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회개하십시오. 회개하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임금과 구주로 모셔 들이십시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