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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를 달게 받으라 / 존 비비어

LNCK 2018. 5. 3. 20:17

www.youtube.com/watch?v=yZu2flxSl-g

징계를 달게 받으라                   119:67            스크랩

 

존 비비어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 이니이다.” (119:67, 75)

 

그분이 징계하실 때 나는 이따금씩 내면의 고통으로 죽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달게 받으면 언제나

이 이루어졌고 마음속에 다시금 거룩한 불꽃이 타올랐다.

 

하나님은 우리의 편안보다 바른 모습에 훨씬 관심이 많으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심은 ......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12:10) 하기 위함

이라고 말씀한다.

 

성화작업이 징계의 목적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말씀한다. (12:12-13)

 

여기서 은 섬김 즉 우리가 주님 안에서 맺는 행위를 말한다.

무릎은 우리 행보 즉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말한다.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죄를 지어도 책망이 없다면 하나님과 분리돼 있다는 경고 신호다.

성경은 그분의 징계가 없는 자들은 사생아요 참 자녀가 아니라고 명백히 밝힌다.

그들은 그분을 아버지라 부를지 모르나 그 주장은 가짜 회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나면,

완전 딴판인 두 반응을 보곤 한다.

 

대부분의 경우, 한 쪽은 아버지의 징계를 달게 받지만

다른 쪽은 사실상 아무 영향도 입지 않는다.

하나님의 참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교회 내의 약한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일에서 손을 뗐는가?

우리는 왜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메세지를 말하지 않는가?

 

절실히 진리에 마주서야 할 우리이건만,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고 책으로 펴내는 메시지는

왜 대부분 평안과 형통과 행복에 관한 것 뿐인가?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당시 선지자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은 미지근한 백성에게 미지근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불타는 사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2:14).

 

예수님은 "화평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5:9) 라고 하셨다.

 

아마도 당신은 "이 둘이 서로 다른가?" 하고 물을 것이다.

물론이다!화평을 지키는 자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화평을 유지한다.

그는 싸움을 피하려고 진리를 타협한다.

 

그러므로 화평을 지키는 자는 자기에게 꼭 필요한 변화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그 결과 자신에게 경건한 변화가 필요한데도 현 상태에 편안히 안주한다.

반면 화평케 하는 자는 참된 평화를 구하며,

진정한 평화를 얻기 위해 필요하다면 진리나 의에 집요하게 대면한다.

 

화평케 하는 자는 의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한다.

그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죄를 실수나 연약함이라 부르지 않고 실체 그대로 죄라 부른다.

 

죄를 미워하는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의 참 욕심은 꼭 사람들이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장 잘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사람들의 호감이나 인기를 얻기 보다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사리사욕에 관심이 없다.

그는 참된 자비와 공의를 기뻐한다. 그는 거룩을 사랑한다.

그의 마음은 그것을 향해 불탄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불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길보다 높다.

이 거룩한 길은 예수님이 좁다고 설명해 주신 생명의 길을 말한다.(7:13-14)

 

그것은거룩함의 높은 길을 말한다.

마음을 열어 그분의 징계를 받아들일 때만 우리는 그 거룩함의 높은 길에 이를 수 있다.

 

오늘 징계를 거부하는 자들은 그부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을 놓치는 것이다.

거룩함은 쉽게 오지 않는다. 이 모두 회개 없이는 소용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19)

 

참된 회개는 죄의 결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죄와 죄의 원인에 대해서도 생각과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죄의 본성은 버리지 않고 죄의 결과만 슬퍼하도록 배웠다.

 

예수님이 이교회에 명하신 바 열심을 낸다는 것은,

현재의 모습에서 그분의 영광스런 성품으로

변화되려는 간절한 열망을 말한다.

 

직시하자.

예수님의 재림 때 우리가 그분처럼 되려면 (요일 3:2)

그분이나 우리 중 한 쪽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그분 쪽은 아니다!

 

그분의 훈련과 징계만이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영광을 갈망하면 열정으로 불탈 것이다.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들 그리고 나라들을 또 한 번 진동시키실 것이다.

바른 터에세워지지 않은 것들은 진동을 통해 제거된다.

진동은 죽은 것이나 선하지 못한 것을 없앤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살아 있는 것, 또는 순결한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진동케 하심을

두려워 해야 할 자들은 지금 그분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뿐이다.

 

그렇다. 그분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분의 거룩함을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는다.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되어 (19:2, 벧전 1:16)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려면 얼마나 절실히 은혜가 필요한가!

 

교만은 눈을 멀게 한다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자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1)

 

몇 해 전 나는 이사야가 영광 중의 주님을 뵈었다는 이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다.

'교회도 영광 중에 계신 예수님을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나는 그 구절을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다."

궁금하여 다시 성경을 보니"웃시야의 죽던 해에" 라고 돼 있었다.

 

주님은 나를 제지하시며 말씀하셨다.

"이사야가 나를 새롭게 보기 전에 웃시야 왕이 죽어야만 했다!"고 덧붙이셨다.

"(웃시야 왕)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대하 26:5)

 

"저가 강성하여져서 그 마음이 교만하여" (대하 26:16)

 

이런 변화는 하룻밤 사이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은 내게 경고하셨다.

", 내 나라의 실족한 자들은 대부분 곤고할 때가 아니라 풍족할 때 그렇게 됐다."

 

왜 일까?

대단한 업적을 이룰 때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이 주셨다는 사실을 더 쉽게 망각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실족하는 자들이 많다.

처음 구원받을 때는 대부분 주님과 그분의 길을 알고자 갈급해 한다.

매사에 겸손한 자세로 그분을 구하고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굶주린 심령으로 교회에 온다.

"주님 주님을 알고 싶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 권위와 위임된 권위에 복종한다.

징계가 어떻게 누구를 통해서 오든, 그들은 참된 겸손으로 그분의 징계를 달게 받는다.

 

그러나 경험과 성취를 통해 지식과 힘을 쌓기 시작하면 태도가 달라진다.

이제 그들은 성경을 "주님과 주님의 길을 제게 보여 주소서" 간구하는 마음으로  읽지 않는다.

 

자기가 믿는 내용만 취해 읽으며, 자신이 정한 교리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한다.

그들은 더 이상 목사의 음성 속에서 하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앉아 "뭐라고 하나 보자"는 태도로 듣는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 전문가가 되지만 유순하고 겸손한 심령은 잃어버렸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겸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교만이 찾아든다.(4:6)

 

이 문제는 현대 교회에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교육과 훈련의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라고 말한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섬기도록 부름 받은 자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

 

그러나 교만은 종교의 탈을 쓰고 자기 유익을 구한다.

하나님은 사랑 없이 얻어진 지식은 교만을 부른다고 설명하신다.

 

웃시야 왕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져 보자.

마음에 교만이 들어왔을 때 그의 종교적 열심은 커졌는가 줄었는가?

놀랍게도 답은, 그가 더 종교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교만과 종교심은 단짝과 같다.

 

종교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거짓 신앙'의 모양만 보고

스스로 겸손한 줄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은 교만하다. 

반면 교만은 인간을 종교심의 굴레에 묶어 둔다.

자신의 교만을 인정하기에는 그야말로 너무 교만한 까닭이다!

 

교만은 교회에서 감쪽같이 위장한다.

종교니 카리스마니 복음주의니 오순절이니 한는 탈 뒤에 숨기 때문이다.

 

"제사장 이사랴가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 인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을 막아 가로되..." (대하 26:17)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 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대하26:19)

 

웃시야는 노했다.

교만은 언제나 스스로 정당화 한다.

이 자기 방어에는 분노가 수반된다.

교만한 자는 자기만 빼고 모든 사람을 비난한다.

교만이 그를 눈 멀게 했다.

 

하나님이 말할 대상을 찾고 계신다.

나는 아주 경건한 내 친구 하나와 나눴던 대화가 생간난다.

내가 방문했을 때 그는 공항으로 나를 마중 나왔다.

그런데 내가 도착하기 몇 시간 동안 그는 묵상하며 기도했다고 했다.

그는 눈물 흘리며 내게 말했다.

 

", 하나님은 이 나라에 하실 말씀이 아주 많은데 말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계시네."

그의 말에 내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내가 주님의 대사 중 하나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시 이사야가 생각났다.

그가 일단 정화되고 나자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해졌고,

그는 단순한 원리가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 나라에 성경의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자신을 구별하고 낮추어 하나님의 성화 작업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듣고 그대로 선포할 사람들이 있는가?'

 

기름 부으실 만큼 순결하게 행하는가?

우리의 가장 위대한 날은 바로 코 앞에 와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한 백성을 예비하셨다.

그들은 그분 마음의 호소를 듣고 그분 앞에 거룩하게 행할 것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때를 벗고 거룩한 열정에 불타는 심령으로 그분 앞에 설 것이다.

그분이 그들을 위해 질투하시듯 그들도 그분을 위해 질투할 것이다.

 이 백성을 통해 그분은, 죽어가는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다.

 

"야곱아 내게 가까이 오라. 나도 네게 가까이 가리라."

 

"너희 중에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 (35:2)

 

잊지 말라.

우상이란 우리가 예수님 이상으로 힘이나 애정을 쏟는 대상이다.

상 숭배는 탐심이었다 (3:5).

그것이 그들에게서 영원한 열매를 맺는 데 필요한 열정을 앗아갔다.

"자신을 정결케하고 의복을 바꾸라"는 야곱의 지시는 순결과 바른 옷의 중요성을 재확인해 준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결케 할 때 그분 임재의 권위가 우리를 둘러싸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보인다.

 

나는 하나님이 그분께 완전히 성별된 백성을 예비하실 것을 믿는다.

내 마음은 그 생각으로 뜨겁다. 당신도 그런가?

주님은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며, 강력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그들을 감싸실 것이다.

 

옛날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녀들을 에워쌀 것이다.

우리는 여호수아 세대 같은 세대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이 당해 낼 수 없는 자들로 기름 부으실 만큼

그렇게 우리는 순결히 행할 각오가 돼 있는가?

이것이 당신의 기도가 되기 바란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22: 4)

 

"예수님이 이교회에 명하신 바 열심을 낸다는 것은,

현재의 모습에서 그분의 영광스런 성품으로

변화되려는 간절한 열망을 말한다.

자신을 구별하고 낮추어 하나님의 성화 작업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듣고 그대로 선포할 사람들이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이 당해 낼 수 없는 자들로 기름 부으실 만큼

그렇게 우리는 순결히 행할 각오가 돼 있는가?

이것이 당신의 기도가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