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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낭독 <가슴 찢는 회개> 5편
2기 사역 시작, 교회와 신학교 개척
◑1기 사역을 마치고 안식년으로 돌아오다
내가 상파울루에서 언어 공부를 마치고 벤자민 콘스탄치로 들어갈 때부터
선배 이원경 목사님은
“내가 은퇴하면 이 신학교를 김 선교사에게 물려줄 것이다”고 여러 번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내게 용기를 주려는 덕담으로 흘려들었다.
주님의 뜻이 거기에 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고
아니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보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전도 종족을 찾아 나선 선교사가 아닌가.
1993년 11월 말 선배 목사님이 전화해서 상파울루 일류 대학에서 공부하고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마친 1.5세 선교사가
아마존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순간 나는 “때가 되었다. 너는 여기를 떠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신학교가 방학에 들어가자 브라질 호라이마 주 Roraima
주도(州 都)에 있는 메바(Missao MEVA)라는 선교단체를 찾았다.
제2기 사역을 위한 선교지를 소개 받기 위해서였다.
오래전부터 LA에서 거주하는 여성 사업가가 이 선교단체를 후원하고 있었다.
우리가 소개 받은 곳은 야노마미 부족이 거주하는 뚜꾸싱이라 는 마을이었다.
백인들과의 접촉이 없었던 이 마을에는 약 500명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뚜꾸싱에서 가까운 메바 선교회 기지까지 항공 선교회 비행기를 타고 갔다.
야노마미 부족은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의 오리노코강 주변까지 거주하고 있으며
모두 3만 5천여 명에 이른다.
브라질 호라이마주와 아마조나스주에 이 부족 1만 9천여 명이 살고 있다.
뚜꾸싱의 야노마미 부족은 남녀 모두 위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성기만을 가리는 옷을 입었다.
남자는 성기 위에 노끈을 묶어 서 술을 내렸고,
여자는 목화로 된 노끈을 10cm쯤 풀어서 만든 한 겹 치마를 입었는데
기혼자는 두 겹 치마를 입었다.
여자는 첫 번째 월경이 지나면 결혼이 가능한데,
엄마의 나이가 어려서 아기를 키우면서 동시에 엄마도 자라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부족에 비해 몸이 왜소하며 눈 색깔이 갈색이나 피부는 더 흰 편이다.
주변에 샛강이 흐르지만 잘 씻지 않는다.
백인들과의 접촉이 없어서인지 백인만 보면 도와달라고 말했다.
뚜꾸싱 지역의 야노마미 부족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나무를 쌓아 놓고 시체를 화장한다.
그런 다음 뼈를 거두어 빻는다.
사냥을 해서 음식을 만든 다음 고인의 지인들을 불러 먹고 애곡을 한 다음,
빻아 둔 뼈를 바나나죽에 타서 타서 마시는 것으로 장례식을 마친다.
우리는 뚜꾸싱 지역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사역을 정리했다.
먼저 그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그들의 언어학을 공부해야 했다.
이는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사역이었다.
둘째는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간호보조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었다.
이는 휴가를 맞아 한국에 나갔을 때 도전해 볼 만했다.
우리는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뚜꾸싱 지역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백인들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적이 염려되었지만
한편으론 한국을 출발할 때부터 품었던 미전도 종족 복음 사역을
드디어 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설렜다.
뚜꾸싱 지역으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한국을 다녀왔다.
휴가를 떠날 겸 총회 세계선교부와 신촌교회에
그동안의 사역과 새로운 사역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전의 신학교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모든 면에서
나보다 탁월한 선교사가 합류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20명의 학생들이 말씀으로 변화되어 소명을 키워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감사와 기쁨으로 제2의 사역지로 떠날 수 있었다.
선교사로 출발한 첫 3년 동안
주님은 평생 선교사로 사역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선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장비인 언어를 배우도록 기회를 주셨다.
어떻게 선교해야 하는지를 선배 이원경 목사님으로부터 배우게 하셨다.
언어와 문화 차이로 인한 갈등과 외로움,
아마존 환경의 열악함을 자아를 죽이는 훈련으로 기뻐하며 받아들이게 하셨다.
◑2기 사역으로 교회의 파송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다
1994년 한국으로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나는 신촌교회에
그동안의 사역 과 제2기 사역을 위한 계획을 보고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포부를 가지고 세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만일 선교사님이 부족들에게 살해당하면 누가 가족을 책임집니까?
언어학을 공부하고 말을 배우고 문자를 만든다니 선교사님이 세종대왕입니까?
우리는 선교사님이 3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측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교단 세계선교부에도 도움을 요청했으나
후원 교회가 허락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했다.
우리가 더 쉽고 편안한 곳에 가서 사역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아니 오히려 더 어려운 지역에 가서 미전도 부족들을 전도하고
성경을 번역하겠다는데 박수갈채는커녕
도리어 반대하고 나서니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 교회의 선교에 대한 이해는 이처럼 많이 부족했다.
한번은 당회에 초대를 받아서 들어갔다.
나는 제2기 선교 계획을 적은 인쇄물 아래에
지난 3년간 장로님들이 내게 연락 한 번 한 적 있느냐는
항의성 글을 적어 넣었다.
선교에 대한 이해 부족과 이런 갈등들로 인해
신촌교회 당회는 더 이상 우리를 후원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당시는 주님이 그 일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몰랐기에 당회를 비난했는데
그 일은 나의 큰 실수였다.
나중에 나를 대신해 오창학 목사님이 장로님들에게 사과했다는 말을 듣고
민망하고 죄송했다.
오창학 목사님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매월 당회에서
얼마만이라도 후원하여 협력 선교사로 유지하자고 장로님들을 설득했다.
그러느라 몇 달이 흘렀다.
나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주님이 제2기 사역의 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간호보조사 학원에 등록했다.
매일 아침 돈암동 근처 간호보조사 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안암동 고대 병원에 가서 실습을 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자격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한국에 온 목적이 휴가였건만 휴가도 없이 공부만 하다 시간을 다 보낸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한 것이 나의 성실함의 증거라고 생각해서 뿌듯해했다.
어느 날 신촌교회 김상형 장로님이 새벽기도회에 다녀온 뒤
소파에서 쉬고 있는데 불현듯 이런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내가 하는 일을 인간의 잣대로 재지 마라.”
이후 장로님이 당회에서 나를 브라질로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서 당회의 여론이 반전되었고,
이를 표결에 붙인 결과 과반수로 통과가 되었다.
그런데 조건이 붙었다.
첫째, 야노마미 부족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지역에 들어가지 못한다.
둘째, 위험이 없는 안전한 곳에 가서 사역한다.
셋째, 신촌교회는 매월 생활비는 지원하되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지원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받아들여 우리는 브라질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국에 있는 6개월 동안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신촌교회 선교사를 사임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주님의 뜻이라면 다른 교회를 통해서라도 이뤄 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부르셨으므로 주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내가 사임하지 않은 이유는
교회가 처음 단독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뒤
그 기쁨을 누리다가 중단하면 낙심하여 이후로는
선교에 대한 열정을 잃게 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신촌교회 선교사를 사임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이후의 후폭풍이 염려되어 끝까지 사임만큼은 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주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는다.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우리가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포기할 때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이 중요하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선교사로 파송되고 나서도 우리는 안식년을 맞아 여러 번 한국 에 들어왔다.
두 번째, 세 번째 안식년은 길면 3개월가량씩 머물렀다.
그런데 언제나 안식년은 사역할 때보다 힘들었다.
무엇보다 온 가족이 함께 머물 숙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친척 집에서 신세를 지거나 교인들이 집을 비워 주기도 했지만,
이도 저도 여의치 않으면 여관이나 백주년기념관, 여전도회관 등을 전전했다.
도움을 준 교회와 후원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전해야 했으므로
일찍 출국할 수도 없었다.
특히 아이들에게 힘든 일이었다. 주님은 이미 떠난 한국도 선교지도
세상의 그 어떤 곳도 영원히 머물 수 없음을 가르치시는 듯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11:15-16
◑2기 사역 시작, 현재 위치 (썽 가브리에우) 에 자리 잡다 1994~1995
원래 세웠던 제2기 사역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브라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브라질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당신께 두 손을 듭니다.
당신은 십 수년 동안 부족한 종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브라질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매월 받는 생활비는 적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친히 인도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주님을 바라봅니다.”
허 선교사는 우리의 사역지에
수산나와 지훈이를 위한 학교가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LA로 갔다.
선교사 자녀들이 공부하는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브라질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브라질 장로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로서
브라질 선교회가 방문하라는 선교지 세 곳을 방문하고 보고서를 썼다.
그리고 선교지가 정해지기까지 마나우스 경찰공원에 나가 개인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성경책을 가지고 하다가 나중에는 사영리를 가지고 했다.
주로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전도했는데,
여러 사람이면 말씀에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 사람당 40분이 걸렸는데 아침 9시에 나가면 오전에 네 사람,
오후에 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어떤 날은 하루 8명 중 에서 6명이 영접기도를 했다.
주님을 영접한 사람에겐 가까운 교회를 소개해 주었다.
이미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겐
구원의 확신을 위한 말씀을 전했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대개 과거에 여러 번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거절하긴 했으나 이미 말씀이 심겨져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보다 먼저 복음을 전한 사람은
밭을 일구고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이고,
나는 주님이 자라게 한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다 낙심할 필요가 없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결실할 것을 믿고 전적으로 주님께 맡겨야 한다.
그럼에도 결실을 거둘 때는 감사함으로 기뻤지만,
결실이 적을 때는 낙심이 되었다.
하지만 낙심도 유익한 것은 그럴수록 더욱더 주님께 매달리며 기도하기 때문이다.
전도는 하면 할수록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마음이 간절해진다.
입술을 열어 복음을 전하는 일과 삶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 일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살아야 할 이유임을 더 절실하게 마음에 새기게 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주님이 전도하는 나에게 능력을 더하시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의 개인 전도는 훗날 새로운 사역지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주님이 예비하신 선교지
1995년 2월 25일, 나는 새로운 사역지로 지명된 썽가브리에우
다 까쇼에이라(Sao Gabriel da Cachoeira)를 방문했다.
마나우스 장로교회의 선교부원들이 썽가브리에우 다 까쇼에이라 지역에
인디오 부족이 가장 집약적으로 거주한다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썽가브리에우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에게 연락해서
방문 소식을 알린 다음 마나우스 공항에서 8인승 택시 비행기를 탔다.
8인승이지만 자매 한 명을 더 태워서 그녀는 의자가 아닌 곳에 앉아서 갔다.
그런데 문제는 비행기가 기압 차로 갑자기 아래로 떨어질 때
멀미가 몹시 났다. 더구나 의자가 아닌 곳에 앉아 가던 자매가
멀미로 인해 구토를 해서 그 냄새가 견딜 수 없었다.
마침내 3시간이 걸려 썽가브리에우에 도착했다.
거기서 승합차 를 타고 20분을 더 갔다.
점심때에 도착해서 혼자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데
바우떼이르 선교사님이 찾아와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집에서 2박 3일을 머물게 되었다.
그날 밤 바우떼이르 선교사님 집에
정글에서 일하던 여러 명의 선교사가 찾아왔는데,
그들은 무엇보다 인디오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내게 피력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당시 부족들과 함께 일하던 선교사들이 그들의 선교본부에
두 번 공식적으로 인디오 지도자를 위한 신학교 건립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둘째, 광대한 선교 지역과 곳곳에 산재한 위험 요소,
아직 남겨진 많은 미전도 부족들, 급격히 감소하는 선교사 숫자 때문이었다.
남북한 면적의 약 세 배가 되는 아마존 검은강 유역은 육로는
전혀 없고 수로만 있다.
급류가 휘몰아쳐 흐르고 폭포가 쏟아지는 등 검은강 주변에 산재한
약 80곳의 위험 지역이 이 지역 여행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열일곱 미전도 부족들이 있었다.
광대한 선교지와 위험 요소들 때문에 제한된 브라질인 선교사들이
모든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아마존 선교사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선교사 숫자가 줄어든 이유는, 브라질 정부가
인디오 사역을 원하는 외국인 선교사에게 비자를 허락하지 않았고,
브라질 선교사 후보들은 모두 외국으로만 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선교 현지에서 부족 출신의 목사와 선교사를 양성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이미 복음을 전해들은 다섯 부족들도 자유분방한 성 문화로 문제가 컸고,
예배의 형식은 있으나 재생산과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신학교를 세워 인디오 선교사를 양성하고
복음이 전해진 부족들의 재복음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고 내게 토로했다.
썽가브리에우를 방문하고 나서 나는 썽가브리에우가
주님이 예비하신 선교지이며
그곳에서 내가 적절히 사용될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하지만 두 가지가 걸렸다.
하나는, 그렇게 작은 비행기 택시를 늘 타야 한다면
내 몸이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도 멀미로 엄청 고생한 데다
돌아온 후에도 이틀간 두통으로 고통스러웠던 까닭이다.
다른 하나는, 신학교를 세우려면 무엇보다 선교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내겐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이 같은 염려로 주님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주님이 건강도 비용도 해결해 주시겠다는 감동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다.
“주님, 저는 불가능합니다만 당신이 함께하시면 가능합니다.”
◑신학교를 개척하다
1995년 3월 말,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이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연합집회를 가졌다. 마지막 일정으로
2박 3일간 마나우스 여행을 할 때 김삼환 목사님 일행을 가이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목사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새벽에 호텔에서
새벽기도를 인도한 뒤 내게 선교 보고를 요청했다.
“내가 김 목사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
내 선교 보고를 듣고 나서 목사님이 한 말이었다.
그러면서 2천 달러짜리 수표를 써 주는 것은 물론
동행한 장로님으로부터 현금 5천 달러를 달라 해서 내게 주었다.
신학교 건립에 꼭 필요한 돈이었다.
얼마 후 내가 마나우스에 머물고 있을 때 썽가브리에우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에게서
신학교 부지로 딱 좋은 땅이 나왔다며 전화가 왔다.
도시에서 9km가량 떨어진 만큼 대지가 넓고
주변의 상황과 달리 신기하게도 그 땅에는 전기 시설이 되어 있다고 했다.
실제로 가 보니 20마리의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대지 구입비는 내가 김삼환 목사님에게 받은 돈 7천 달러보다
약 1만 2천 달러가 더 필요했다.
1994년 3월 말 한국에 휴가를 가던 길에
상파울루 동양선교교회의 문명철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때 목사님이 “김 목사가 다음 사역을 할 때, 도울 기회가 되면 협력하고 싶다”
고 한 말씀이 생각나서 연락을 드렸다.
문 목사님이 주선해서 고 최봉상 장로님과 안정삼 장로님으로부터
부족한 돈을 후원 받았다.
1995년 4월 중순에 가로 800m, 세로 2000m 대지를 구입하였다.
썽가브리에우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백인과의 접촉이 없고,
사방이 정글로 둘러싸여서 인디오 마을의 환경과 흡사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땅이 넓어 마을에서 하던 노동을 계속할 수 있어서 제격이었다.
주님은 이렇듯 전혀 예상하지 못한 통로를 통해
신학교 설립을 위한 대지를 구입하게 하셨다.
함께 협력하는 여섯 명의 브라질인 선교사들과 함께
그곳에서 감사예배를 드린 뒤 신학교 건립을 위하여
매월 일정액의 돈을 헌금하고 매주 기도회를 가졌다.
내가 썽가브리에우 다 까쇼에이라에 정착할 것을 결정하자,
브라질 장로교회 국내선교부는
나를 장로교회 아마조나스 노회 소속으로 활동하게 해 주었다.
썽가브리에우 다 까쇼에이라는 적도가 통과하는
아마존 강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검은강 상류에 위치해 있으며,
브라질 아마조나스 주와 콜롬비아, 베네수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에 있다.
아마존의 중심 도시 마나우스에서 비행기로 2시간 반이 걸리며,
수로 로는 건기에는 5일, 우기에는 4일이 걸린다.
인구는 약 4만 5천 명으로 도시를 둘러싸고 23개 인디오 부족이
500개의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검은강 유역에는 금과 함께 여러 광물이 풍부하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하얀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강 중간중간 섬들이 떠 있어 매우 아름답다.
하지만 그 땅은 산성이라 박토인 데다 검은강에 물고기가 많지 않아
인디오 형제들은 늘 식량 부족으로 고통을 당한다.
허 선교사는 나중에 이곳에 와서 깜짝 놀랐는데 이유인즉슨 이렇다.
예전에 타바칭가와 벤자민 콘스탄치에서 사역할 때
혼자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만일 주님이 선교지를 옮겨 주신다면 독충이 적은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산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강물이 좀 깨끗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썽가브리에우는 과연 그런 곳이었다.
다른 아마존 지역과 비교하면 썽가브리에우는 독충이 아주 적은 편이다.
또 다른 아마존은 산이 없는데 산도 많고 비록 강물 색깔은 검지만
수질이 좋다.
주님은 속으로 생각한 것마저 응답하시는 참 좋으신 분이다.
◑교회를 개척하다
신학교 대지를 구입한 뒤 우리는 썽가브리에우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아직 특별한 사역이 주어진 게 아니었으므로 개인 전도를 했다.
인디오 형제가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인디오 형제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강변에 위치한 그들의 임시 숙소였다.
시청에서 건축한 곳으로 오랫동안 보수하지 않아 비가 새고 냄새가 지독했다.
사람들은 해먹을 걸고 누워 있거나 앉아 있었다.
나는 자주 그곳을 찾아가 미리 연습하고 간 부족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이때 복음을 제시했다.
그밖에 이곳을 드나들며 알게 된 경찰서장 베르네 호지의 배려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가 하면,
병원에서 치료 받은 뒤 회복하는 시설인 ‘인디오의 집’에 있는
인디오 형제들을 찾아가기도 했고,
군인병원 면회 시간을 이용해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이곳들은 나중에 내가 개척한 교회의 사역지가 되었다.
복음을 듣고 결신한 사람들이 주일이면 나를 찾아와 예배를 드리자 했다.
나를 통해 주님을 영접한 이들을 위하여 목양의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다.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
브라질인 친구가 예배 처소 몇 군데를 추천했다. 그중 한 곳이
마음에 쏙 들었는데 넓은 대지에 목조 건물 두 채가 세워져 있었다.
큰 건물은 예배당으로, 작은 건물은 사택으로 사용하면 좋을 듯했다.
시내 중심가는 아니나 두 길이 합쳐지는 사각지대에 있고 주변에 교회도 없었다.
수중에 돈도 없는데 친구는 주인에게 매매 의향을 물었고,
주인은 처음엔 작은아들 몫으로 남겨 둔 곳이라며 거절하더니
얼마 후 생각을 바꿔 팔겠다고 연락을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무려 3만 헤알 (REAL)로 당시 3만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궁리 끝에 상파울루의 김태현 장로님에게 사정을 말했다.
전에 신학교 땅을 구입할 때 장로님한테 계약금을 잠시 빌린 적이 있는데,
당시 장로님이 다음에 자신도 헌금할 기회를 달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서
연락을 한 것이다.
장로님은 부인 권사님과 의논한 후 다 음 날 연락해서
3만 달러를 헌금하겠다고 했다.
김태현 장로님이 여유가 있어서 그런 거금을 헌금한 것은 아니었다.
브라질에 이민 온 지 10년 만에 아파트 한 채를 장만했으며,
결코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위해 향유 옥합을 깬 마리아와 같은 결단이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그런 거금을 헌금한다고 했을 때 놀라웠고 감사했고
한편으로는 죄송했다.
감사하게도 3만 헤알에 팔겠다던 주인이 5천 헤알을 깎아 주었고,
우리는 그 돈으로 건물을 수리했다.
1995년 6월 25일 수리가 마무리되지 않은 채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전도한 사람들 20여 명이 우리 교회 교인으로 출석했다.
첫 주일, 예배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예배를 드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택이 수리되기 전까지 나는 선교회 숙소에서 교회까지
걸어서 45분여 거리를 하루 두 번씩 오고 갔다.
한 번은 건물 수리 진행 상황을 보기 위해서였고,
또 한 번은 병원 면회 시간을 이용한 전도를 위해 병원에 갔다 오는 길에 들렀다.
걸어 다니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어떤 사람에겐 길에서 복음을 전했다.
사실은 우리 수중에 오토바이 한 대도 구입할 돈이 없어서 걸어 다닌 것이지만,
그로 인한 유익이 더 컸다.
당시 동네 사람들이 나를 두고 일본인 정치가가 표를 얻기 위해
동네를 돌아다닌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나는 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티켓을 소개하기 위해 걸어 다닌 셈이 되었다
◑존귀하신 협력자, 동역자들 (5~6년 차 당시 1995~1996)
▲LA 실로암교회의 헌신
1995년 당시 허 선교사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LA에 있었고
나만 썽가브리에우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0개월 가까이 혼자 있으면서
나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과 함께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혹시 선교에 방해가 될까 봐 내 사정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힘겨운 싸움을 했다.
“주님, 어떻게 하면 이 우울증과 불면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없었다.
매일 밤 출구 없는 전쟁을 혼자 치렀다.
그렇게 수개월이 흐른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잠을 못 자지?
마귀가 내게 두려움을 심어 주고 있구나, 두려움은 실재가 아닌데
내가 실재가 아닌 것으로 고통당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순간 주님의 빛이 임함을 느꼈다. 마귀의 정체가 폭로되는 순간
나는 그 두려움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밤 나는 이렇게 선포했다.
“마귀야 괜찮다. 내가 잠을 못 자도 괜찮다.
나는 네가 주는 두려움에 잡히지 않겠다.”
그날부터 나는 우울증과 불면증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부족한 잠도 끝을 알 수 없는 외로움도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우울증으로 홀로 싸움을 하고 있을 때
허 선교사는 LA에서 20일간 금식기도를 했다.
그녀는 마룻바닥에서 잠을 잤다.
홀로 남겨 두고 온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속상해서
“당신 미쳤어? 당신이 잘 있는 것이 내게 기쁨이야”라고 소리쳤지만,
과연 허 선교사다웠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내 아내다웠다.
허 선교사가 작정한 금식기도가 끝나기 전에
LA 다우니에 있는 실로암교회의 조창훈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분이었다.
지난 4월에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과 상파울루 두 분 장로님을 통해
신학교 부지를 구입했고,
김태현 장로님을 통해 교회 개척까지 할 할 수 있었으나,
조창훈 목사님이 아마존을 방문하기 전까지
더 이상 진전 없이 신학교 부지는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허 선교사를 통해 아마존을 방문한 목사님은
우리의 계획을 듣고는 돌아가 이를 위해 모금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실로암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전혀 몰랐다.
나중에 도움을 받고 나서 교회를 방문해 보니
고작 100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인 데다
교회 건축 후 부채가 남아 있는 어려운 교회였다.
그런 교회에서 1년 동안 12만 달러를 모금해 준 것이다.
거기에 는 조창훈 목사님의 사례비가 포함되어 있었다.
1년 동안 허리띠를 졸라매며 생활하면서 사례비를 선교비로 헌금한 것이다.
▲뜻밖의 고난
1995년 12월 허 선교사와 아이들이 브라질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마나우스 시내에 있는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마나우스에 중학교 3학년으로 들어온 수산나가
졸업 후 모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 자녀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영어 실력이 부족해 학교에서 받아 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생각지 못한 낭패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 선교사가 많지 않다 보니
자녀를 위한 대안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한 수산나는 허 선교사와 함께 집에서 십자수를 놓았다.
마음의 고통을 한 땀 한 땀 수놓는 것 같았다.
수산나보다 허 선교사가 더 고통스러워했는데,
마음의 고통이 몸으로까지 나타나 위경련을 일으키더니
마침내 치료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지경이 되었다.
나는 매일 밤 예배당 안을 돌면서 “주님, 주님”만 부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중학생 나이가 된 수산나가
아마존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시간이 되었다.
처음엔 원망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주님은
수산나의 마음을 돌려놓으시고 단련해 가셨다.
역시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고 뛰어나시다.
▲1996년 12월 성탄절 주간에 <방지일 목사님>이 아마존에 오셔서
일주일 동안 머물렀다. 방지일 목사님은 내가 10년 전 농촌 교회를 목회할 때도
먼 길을 마다 않고 와서 말씀을 전해 주신 분이다.
10년 전 에 75세였으니 당시는 85세였다.
그런 노구를 끌고 상파울루에 거주하는 손연희 전도사님과
장로님 한 분과 함께 나도 멀미가 나서 견딜 수 없었던 택시 비행기를 타고
아마존까지 찾아오신 것이다.
목사님의 방문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위로이자 격려였다.
방 목사님은 과거 중국 선교사로 나갔었는데
당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사람들과 교제하고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활보하고 다니는 자유는 10년 동안이었다.
이후 10년은 가택 연금되어 교인들이 던져 주는 음식으로 연명해야 했다.
당신은 그렇게 고생했으면서도
당시 내게 자동차가 없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목사님은 아마존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예배 시간에 말씀을 전했다.
퇴행성 관절염으로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도,
40℃를 오르내리는 아마존의 더위에도,
정장 차림으로 설교단에 오르고 신학교 부지 등을 방문했다.
“김 목사,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순종하느냐가 중요하다네.”
목사님이 해 준 이 말씀은 내가 평생 마음에 심고
수시로 돌아보며 나를 점검하는 말씀이 되었다.
목사님은 선교의 풍성한 열매는
사역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헌신과 영혼을 향한 사랑이라는 걸
중국 선교지에서 깨달았다고 했다.
목사님이 몸소 보여 준 그 아름다운 모습,
나는 이후로 신앙인으로서, 목회자로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목사님의 자취를 확인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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