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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찢는 회개> 7편 인디오 형제들이 마음을 열다

LNCK 2018. 7. 16. 15:16

www.youtube.com/watch?v=q6aIBiaDxGQ&feature=youtu.be

도서 낭독 <가슴 찢는 회개> 7 

 

현지인처럼 생활하는 것을 보고

인디오 형제들이 마음을 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7개 폭포를 지나야 닿는 마을을 찾아갈 때도 있었다.

보트나 카누를 타고 가다가 폭포를 만나면

타고 가던 보트의 모든 짐을 미리 폭포 위로 옮겨야 한다.

 

짐을 이고 지고 손으로 들고 걸었다.

모든 짐을 옮기고 나면 보트나 카누를 폭포 위로 올려야 했다.

 

폭포 위로 보트나 카누를 끌어 올리고 내릴 때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물것은 또 얼마나 많은지 공기보다 삐융이라는 벌레가 더 많은 지역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병원선을 폭포 아래에 정박시킨 뒤

다시 보트를 타고 가다가 마을 어귀에서부터 정글을

4시간 동안 걸어서 가는 마을들도 있다.

 

이렇게 찾아가는 데만 나흘씩 걸리는 마을들도 있다.

이런 마을들은 보통 의료진들이 찾아가기 힘 든 곳이어서 1년에 한 번 방문한다.

 

그런 모든 곳을 허 선교사가 항상 동행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허 선교사는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윽고 마을에 도착해서는 청년들에게 기타와 복음성가를 가르치고

주일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설교를 했다.

 

인디오 형제 마을에 의료 선교나 부흥회를 초대 받아서 가면

우리는 형제들과 동일하게 생활하며 형제들의 집에서 묵었다.

 

야자나무 잎사귀를 덮은 지붕과 흙벽, 흙바닥의 집에 해먹을 걸고 생활하였다.

목욕과 세면을 형제들과 같이 검은강에서 해결하였고

형제들이 먹는 음식들을 먹었다.

 

아침에는 화링야죽과 훈제한 생선을 물에 넣고 끓이는 생선 개미 양념탕에

화링야를 적처럼 부친 베쥬(bezu)를 찍어 먹었다.

 

점심은 가끔은 사냥한 동물 고기를 훈제하여 역시 탕으로 끓여서

그 검은 국물에 화링야 가루를 넣고 말아서 먹었다.

저녁은 점심에 남은 고추를 넣은 국물에 베쥬를 찍어 먹었다.

 

이때 고추가 너무 매워 애를 먹었다. 화장실은 동네 뒤편 정글에 있었다.

어떤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남자들이 들어가는 입구의 정글과

여자들이 들어가는 정글 입구가 다른, 정글 자체였다.

 

우리가 독충들에 물려서 팔 다리에 성한 곳이 없이 상처로 짓물려 고생하는 것을 보고

인디오 형제들이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벌레가 물지 못하게 뿌리는 스프레이를

누구에게도 금한 적은 없다.

주님이시라면 아마존에서 형제들이 살고 있는 그 삶을

기꺼이 모두 경험하셨을 것이라 믿었을 뿐이다.

 

얼마간이라도 형제들과 같은 환경에서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은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심령 안에는 항상 큰 기쁨이 있었다.

 

분열의 위기를 넘긴 부족 교회

 

우리가 19952월 썽가브리에우에 들어갔을 때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각 교파들의 각축전이 벌어졌다.

 

원래 검은강 상류 지 역 인디오 부족들은 1950년대 미국계 여선교사

소피아 뮬러(Sophia Muller)로부터 처음 개신교 복음을 접했다.

 

이후 새부족선교회(NTM)의 선교사들이 부족 교회들을 돌보았다.

그러므로 모든 부족 교회들의 예배 전통과 문화, 헌법이 동일했다.

 

그러다 브라질 오순절교회와 침례교회들이

인디오 부족 교회들을 찾아가서 사역하면서

인디오 부족들의 교회 명칭이 바뀌었다.

 

부족 교회가 원해서 명칭을 바꾸기도 했고,

오순절교회와 침례교회들의 영향력으로 명칭이 바뀌기도 했다.

즉 브라질 교회 교단에 부족 교회들이 영입된 것이다.

 

이때 피해를 입는 것은 당연히 부족 교회들이다.

하나의 형식과 전통, 문화, 법률을 갖고 있던 이들이 나뉘게 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배척하고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500여 년 전 유럽인들이 중남미에 들어와서

자기들끼리 국경을 정하고 나라를 나누어 영토를 소유한 것과 같은 일이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인디오 마을들에서 사역하는 교단과 선교단체 선교사들을 찾아가

단일 부족 교회 총회를 만들자고 설득했다.

이런 식으로 선교하면 훗날 교회 분열의 책임을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교파로 나뉘지 않도록 하나의 기구를 설치하자고 설득한 것이.

 

그러면서 동시에 인디오 형제들을 찾아가 설득했다.

교파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결코 아니다.

서로 연합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라고 설득했다.

 

이 설득 작업은 1995년 우리가 썽가브리에우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했는데,

200172, 마침내 브라질 정부기관 후나이 대표, 새부족선교회 대표,

언어학선교회 대표와 인디오 교회 지도자 150여 명이 모여

단일 부족 교회 총회를 위한 정관을 통과시켰다.

 

그렇게 결성된 것이 검은강 인디오 단일 부족교회 총회.

Convencao Igreja Biblica Unida Indigena do Rio Negro

 

이 총회 결성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정관을 작성하고

마음을 모아 준 엘리야스 선교사님, 쎄르지오 선교사님,

에두와루두 선교사님에게 깊이 감사한다.

 

한국은 1880년대에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다.

그때 감리교회 선교사들이 주도하여 교파로 나뉘지 말고

민족 교회로 연합하자는 합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정부가 그 사실을 알고 중간에 방해해서 실효를 보지 못했다.

민족 교회로 연합하면 그만큼 힘이 커져서 일본 정부를 방해할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래서 나는 인디오 부족 교회들이 우리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고

단일한 교회로 연합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처음에 우리가 썽가브리에우에 들어갔을 때 어떤 인디오 마을의 교회에서

장로교회 간판으로 바꾸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때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님은 나를 장로교회를 확장하기 위해 아마존에 선교사로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보내셨다.”

 

신학교 역시 장로교회 소속도 아니고 장로교 교리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먼 길을 달려가는 병원선 의료 선교도

장로교와 상관없는 초교파적 사역이다.

 

그래서 나는 개신교회는 없으나 천주교회가 있는 마을에 가면

복음을 전한 뒤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에게 미사에 잘 참여하라고 권면한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말씀이 선포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비행기로 30분 거리의 싼타이사베우라는 도시와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의 바르셀로라는 도시에 세운 교회들은

모두 장로교 간판을 걸었다.

그곳에 이미 다른 교파 교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오 부족 교회 총회의 결성을 주도하면서

나는 이렇게 선교사들과 인디오 교회 지도자들을 설득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역사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언젠가 후손들이 선교 역사를 기록하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는 후에 내 이름이 기억되고

높여지기를 바라는 속셈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말은 과연 옳았다.

거룩한 것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한 것이 있다.”

 

신학생들을 아마존의 지도자로

신학교 최초의 입학생들은 모두 초등학교 4학년만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한 청년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포어를 1학년과 2학년에 집중적으로 가르쳐

성경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했다.

 

그러는 동시에 그들이 가능하면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의 검정고시를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왔다.

 

브라질에는 공부를 제때에 하지 못한 청년들에게 중학교 과정 2년과

고등학교 과정 2년을 공부시키는 에자’(Escola Jovem e Adulto)라는 시스템이 있다.

 

우리는 이 시스템을 신학교 안으로 가져오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연구했다.

브라질인 친구 제로니모(Jeronimo) 내외와 엘렝 선생님이

이 과정에서 많이 도와주었다.

그렇게 해서 2002년 드디어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신학교에서 개설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과정을 개설했을 때 브라질 정부의 문교부

썽가브리에우 책임자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곳에서 고등학교 과정이 개설된 것은

김철기 목사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 덕분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내가 신학교에 중고등부 과정을 개설하려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교회 지도자의 학력이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신학교를 책임질 교수를 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가 이곳을 떠났을 때 그렇게 양성된 그들이

신학교을 운영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 고등학교 과정을 통과하면

일반 대학에 입학시켜 학사는 물론 석사와 박사학위까지 마치도록 도움을 주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많은 청년들이 중고등부 과정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4년부터 문교부 법이 바뀌어

지금은 매일 저녁 도시에 나가 중고등부 과정을 공부해야 한다.

 

아마존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1997년 신학교를 개교하면서 여학생도 교육해서 지도자로 양성하고 싶었다.

주변의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 뜻을 전하자 모두 우려를 표명했다.

 

남녀가 함께 공부하는 중고등학교에서 여학생이 임신을 해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 교제를 철저히 금지해서 교육하겠다고

우리 뜻을 밀어붙였다.

 

신학교에 여학생을 유치하려면 무엇보다 기숙사가 필요했다.

20019, 한국에 나가 선교 보고를 할 때 이 사실을 알렸고,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었다.

 

일산광성교회 윤수연 권사님이 1만 달러를 헌금했고,

구미의 류재덕, 진수연 권사님이 5만 달러,

댈러스 빛내리 교회 청년들이 예배 후 커피를 판매해서 모은 5천 달러,

김태현 장로 님이 1만 헤알, 미국 샌디에이고의 백중필 목사님이 7천 달러,

신촌 교회에서 15천 달러를 헌금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12x9m 규모 의 기숙사를 2년에 걸쳐 건축했다.

덕분에 많은 여성 지도자가 배출되었다.

 

하지만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우려한 대로

실제로 많은 남학생이 교칙을 어겨서 퇴학과 정학 등 징계를 받는 아픔이 따랐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이 독신으로

또는 우리 신학교 출신 목회자와 결혼하여

훌륭한 사역을 하고 있음에 주님께 감사하고

여기숙사를 건축하도록 도운 동역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교회에 대한 고민과 감사

 

1995년에 개척해서 예배드릴 때부터 우리 교회에는

여러 부족의 인디오들이 함께했다.

인디오 부족은 관습이나 문화, 음식, 주거 등 여러 면에서 비슷했지만

한 가지, 언어가 달랐다.

 

언어가 다르면 무엇보다 소통이 어렵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렇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교회에서 연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들이 모두 우리 교회를 내 교회라고 여기며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까 여러 날을 고민했다.

 

나는 우선 성경 본문은 같되 설교는 세 가지 언어로 동시에 했다.

가장 많은 부족어가 넹가뚜와 바니와, 뚜까누인데,

내가 포어로 설교하면 이들 부족의 형제들이 각각의 언어로 설교를 했다.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더구나 설교 내용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래서 얼마 후엔 내가 포어로 설교하면

각각의 언어로 동시통역해서 전달했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설교는 동일하나 통역하는 동안 기다리는 시간이 많다 보니

설교의 흐름이 자꾸 끊겼다.

지금은 포어로만 설교한다.

가능하면 쉽게 해서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한다.

 

물론 나도 포어가 모국어가 아니므로 어려운 단어를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설교는 포어로 하지만 찬양 한 곡은 부족어로 부른다.

인디오 형제들 모두가 주체자로서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20058<뉴욕타임스>의 래리 로터

(Larry Rohter) 기자가 취재해 갔다.

래리 로터 기자는 수백 년 전 브라질 정부가 모든 부족에게

넹가뚜어를 가르쳐서 언어를 통일하려 했으나

브라질 정부의 언어 정책은 대체로 실패하였지만

아직도 그 언어를 쓰는 도시와 교회를 발견하고 그 실태를 취재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여러 인디오 부족들이 참여하는 우리 교회에

인디오 부족이 아닌 브라질인으로서 교인으로 등록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첫째, 형제들의 언어와 문화,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

 

둘째, 형제들은 사교적이지 않다. 먼저 일어나서 찾아가서

인사하되 교제하지 않아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훨씬 깊은 교제를 나누는 형제가 된다.

 

셋째, 형제들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애정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서로 입을 맞추는 일은 없다.

인사할 때 껴안을 수는 있지만 과도한 애정 표현을 하면 형제들이 난처해 한다.

 

넷째, 우리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선교라고 믿기에 여러 방면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진다.

교회의 선교 사역에 참여하여 활동하기 바란다.

 

다섯째, 군인으로서 2년간 우리 교회를 섬기고 떠난 형제들이

신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와 선교사가 되어 활동하고 있다.

포어도 잘 못하는 김 목사가 이만큼 사역을 하는데

만일 내가 사역을 하면 훨씬 잘할 수 있으리라

용기를 갖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약함이 다른 형제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얼마나 감사한가?

당신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여섯째, 우리 도시의 인디오 부족은 90%가 순수한 인디오들이다.

이들을 배려해서 인디오 부족어로 찬양하는 교회는 우리 교회가 유일하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인디오 부족들이 이 땅의 주인임을 인정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를 부탁한다.

인디오 형제들은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혹은 질병 치료 등을 위해

도시에 나왔으나 머물 만한 곳이 없는 경우

그들은 강변에 비닐 천막을 치고 비와 햇빛을 피한다.

그러나 폭우가 쏟아지면 비닐 천막이 날아가 버려 비를 피할 수가 없다.

 

여러 번 형제들이 우리를 찾아와

자신들을 위해 임시 숙소를 만들어 달라고 눈물로 부탁했다.

우리는 눈물의 부탁을 들은 이후로 기도할 때마다

주님께 그것을 보고하였다.

 

우리 교회와 가까운 곳의 강변에다 상파울루 최유순 권사님과

전도명 목사님, 김두환 집사님의 헌금으로 땅을 구입할 수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아마존에 의료 선교를 다녀간 치과의사 장석렬 박사님이

올 때마다 헌금해 준 돈으로 가로 8m, 세로 17m 규모의 집을 지었다.

 

그리고 2년 후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2200달러,

안정태 집사님 이 1만 달러를 헌금해 주어

가로 15m, 세로 25m 규모의 집을 두 번째로 지을 수 있었다.

 

한편, 우리 교회 교인들의 기증으로, 몇 년간은

시의원인 제로니모가 후원하여 그들에게 저녁을 제공한다.

 

1995년에 개척한 제1교회는 현재 세 개의 지교회와

세 곳의 기도처를 가지고 있다.

 

지교회로는 우리 도시 외곽에 소재한 미게우 키 리누 지교회,

비행기로 30분 거리의 싼타이사베우 지교회,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의 바르셀로 지교회가 있다.

 

1교회가 이 세 곳의 교회에 목회자들을 파송하고 생활비를 책임진다.

기도처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인디오 형제들이 도시에 와서

여관처럼 머무르다 돌아가는 형제들의 집으로

이곳에서 일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린다.

 

매주 토요일에는 병원 치료를 받고 회복 중인 인디오의 집에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고,

매주 화요일에는 경찰서 감옥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교회를 개척한 지 올해로 23년째다.

 

그동안 한 번도 다툼이나 분열이 없었다. 인디오 부족들은

우리가 고난을 받아 고통 중에 있을 때 늘 위로하고 격려했다.

 

허 선교사가 투병 중일 때 우리 교회 교인들이 부목사 사모가

허 선교사를 3개월간 간호하도록 한국행 왕복 항공 요금을 모금했으며,

치료비도 보태 주었다.

 

무익하고 부족한 우리 내외를 영적 부모라면서 사랑하고 따르는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자랑이요 기쁨이다. 내가 우리 교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의 빚을 졌다.

 

그런데 이런 사역의 열매들이 내게 자부심과 자랑이 되었다.

이렇게 나는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마치 내가 이룬 것처럼

주님의 영광을 가로챘다.

         

1997년부터 우리 교회는 성금요일에 예수님 영화를 상영했다.

도시의 공회당(Ginasio Arnaldo Coimbra)을 빌려

처음에는 <나사렛 예수>, <누가복음에 따른 예수 그리스도>를 상영했으나

2005년부터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상영하고 있다.

 

매년 공회당을 가득 메운 수천 명이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

이제 우리 시에서 성금요일 영화 관람은 이 도시의 전통이 되었다.

 

비로소 아마존의 형제가 되다

 

20068, 안식년으로 한국에 들어왔을 때

브라질 시민권을 받기 위한 모든 서류를 준비했다.

 

총회 세계선교부와 신촌교회의 허락을 받아 브라질인으로 귀화하기로 한 것이다.

20061117일 브라질에 재입국하면서 나는 서류를 연방경찰에 접수했다.

 

항암치료 때문에 한국에 남게 된 허 선교사는 서류를 접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우리는 그동안 브라질인으로 귀화하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주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위해 보냄 받은 땅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들이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다가 죽었다.

우리도 보냄을 받은 브라질 땅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살아서 한국에 돌아가지는 못하리라, 아마존에서 죽으리라 생각했다.

브라질 사람으로서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고 싶었다.

 

특히 우리가 사역하는 곳은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브라질 3국의 국경에 있고

인디오 23개 부족이 집약적으로 거주하는 곳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민감하다. 이런 지역적 특성이

우리가 브라질인으로 귀화하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보통 15년 이상 장기 거주한 외국인이면 귀화 수속이 6개월 걸린다는데

나는 몇 년이나 걸려 브라질 시민권을 받았다.

마침내 브라질 사람이 된 것이다.

 

브라질에서 선교사로 살면서 고통스러운 일들이 참 많았다.

모든 선교사들이 경험하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에서 오는 낭패와 고립감을

우리도 당연히 겪었다.

 

1년 내내 퍼붓는 아마존의 폭염과 습도,

물것들로 인해 고통스러웠다.

다른 선교사들로부터 온갖 중상모략도 받았다.

 

브라질 민간기구들로부터 사역을 중단하라는 협박도 여러 번 받았다.

그들이 독약을 물에 푼 것을 마시기도 했다.

대변을 투척해 저주하고 무명으로 편지를 보내 여기를 떠나라는 경고를 수없이 받았다.

 

여러 번 고소를 당하여 외국인으로 법정에 서야 했다.

한번은 내가 세례를 준 형제가 술에 취해 나를 죽이러 큰 칼을 들고

우리 집에 들어왔다.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나도 모르게 정보기관으로부터 여러 번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사역의 규모가 커서

혹시 검은 돈으로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브라질 뉴스 전문 방송국에선 우리가 외국인을 아마존에 끌어들이는

브로커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런 모든 일이 우리를 절망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만물의 찌꺼기 같은 대접을 받았다는 가장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울을 따라

 

우리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고난을 이기고자 했다.

 

우리의 자아를 죽음에 넘기도록 돕는 복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15년이 지나자 비로소 형제들의 문화에 눈이 열리고

그들과 더불어 살며 사랑할 수 있도록 내가 변화되었다.

 

그러자 우리 도시와 형제들이

우리를 외국인이 아닌 브라질인으로 받아들여 줬다.

 

나는 우리 도시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어 시의회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 도시에, 군부대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유지로 초대를 받는다.

 

전에는 가톨릭교회 주교만 초대 받는 자리에 같이 초대받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행하셨다.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한 자리라고 믿고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교활한지, 유지의 자리에 서서 고개를 들고

그 자리를 기뻐하고 있었다.

누가 세운 자리인데 내가 마땅히 차지할 자리라고 고개를 들고 있는가.

그런 나를 발견할 때면 자괴감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허 선교사가 음악을 배운 이유

허 선교사는 아마존에 오기 전에 기타나 키보드를 배워 본 적이 없다.

 

그러니 특별히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허 선교사는 신학생들을 돕기 위해 음악을 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우리 도시에서 찬양을 제일 잘하는 자매를 초대해 찬양하게 한 다음

그것을 녹음해 수없이 들어서 가사를 모두 외웠다.

그러더니 미국에 있는 아이들을 보러 갈 때마다 기타와 피아노를 배워 와서

그것을 아마존의 신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러고는 전혀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학생들을 데리고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로 나눈 다음 칸타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녹음된 음악을 계속 들려주며 12곡으로 된 노래의 멜로디를 따라 하게 하더니

마침내 12곡 모두 가사를 암기시켰다.

 

그리고 본인이 친히 지휘를 해서

아마존 검은강 상류 신학교에 인디오 성가대를 탄생시켰다.

 

허 선교사가 합창을 시작하고 기타와 피아노를 배워서 가르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인디오 형제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싶었다.

둘째, 그들이 앞으로 교회를 세우게 되었을 때 기타 연주가 가능하면

사람들을 모아 찬양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성가대는 매년 11월에 발표회를 열었는데, 평소에도 월, , 금 오후에

모여 찬양 연습을 하지만

발표를 앞두고는 거의 매일 모였다.

 

발표회를 앞두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허 선교사는 지휘하는 팔이 너무 아파

붕대를 감고 서기도 했다.

 

우리 성가대는 2008년 마나우스 근교 이따꽈치아라(Itacauatiara)에서 열린

인디오 목사 전국대회(Conplei)의 개회예배와 폐회예배에서

6곡의 성가곡을 부르는가 하면,

선교지 군인부대 군악대와도 여러 번 협연을 했다.

 

인디오 형제들을 사랑해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허 선교사,

그녀는 매년 졸업생들에게 기타를 선물했다.

지금은 지휘자 없이 매년 12월 초 칸타타를 공연한다.

성가대가 발표회를 할 때 항상 허 선교사의 사랑도 울려 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