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깨뜨림 스크랩
정원 목사
이상하게도 많이 야단맞고 지적 당하고
혼이 나야 영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이들은 참으로 많다.
가끔 독자님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는데 이와 같이 이야기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목사님. 정말 결심하고 왔습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다 해주세요. 다 듣겠습니다. 마음껏 혼내 주세요."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곤 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내 속이 다 드러날 것을 알면서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왔습니다. 다 지적해주시고 야단쳐 주세요."
어떤 형제는 직설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목사님. 저 좀 때려주십시오."
아니, 목사가 무슨 조직 폭력배인가? 사람을 때리게?
나는 혼을 내고 패고 하는 데에는 전혀 소질이 없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니 혼이 나야 성장한다고 믿고 있는 이들을 말리고 싶은 마음 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 이들은 맞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주로 혼이 나고 박살이 나게 터져야 믿음이 자란다고 배워왔던 것일까?
아무튼 그러한 인식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알기에는 그렇게 맞고 혼이 나고 그래서 영이 자라고 믿음이 자라는 이들은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정말 슬픈 일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 자기를 자꾸 때리고 혼을 내는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는 그 사람을 보고 애정을 느끼게 될까?
또는 만날 때마다 자기를 모욕하고 단점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를 보고 사랑을 느끼게 될까?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조금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영적 성장에 있어서, 그리고 자녀 교육에 있어서 징계는 필요하다.
그러나 징계는 악이 자라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것이지 선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전혀 징계가 없이 자란 아이들은 악을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징계를 통해서
악이 위축되고 자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선과 사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악을 멀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징계를 통해서 이루어질까?
아마 자기를 마구 때리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사람 같으면 그게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다.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상대방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사랑과 마음을 주고 받을 때
사람은 가까워진다. 야단을 맞고 혼이 날 때 마음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다.
정이 많은 부모가 있다.
그런데 그들은 가난하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며 자녀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표현한다.
아빠가 너희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구나. 하면서 운다.
하지만 그 눈물은 자녀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물질적으로는 받은 것이 없다 하더라도
자녀들은 그 사랑을 그들의 마음 속에 간직한다.
그리고 그 추억은 그들의 삶 속에 귀한 아름다움으로 남게 된다.
그들은 평생을 마음을 주고 받으며 삶의 동반자가 되게 되는 것이다.
몸이 떨어져 있더라도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한다.
반대로 어떤 부모가 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족하다.
하지만 그들은 물질적인 것을 주기는 하지만 마음을 나눌 줄은 모른다.
그들은 서로 깊은 대화나 애정의 표현을 나눈 적이 없다.
자. 그들은 서로 그리워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의무적으로 서로 만나게 된다.
그들의 사이에는 서로 오고 갔던 따뜻한 사랑의 나눔이나 마음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어떤 장성한 아들이 부모의 돈을 빼앗기 위해서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크게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식자층이었으며 아들은 유학까지 한 사람이었다.
물론 모든 언론이 아들을 크게 비난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질 만능의 사회가 된 것을 한탄했다.
물질적으로 충분히 지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원수로 갚은 아들을 질타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물론 그 아들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그 부모와 자식은 서로 마음을 교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바른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람이란 내적이고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원리이다. 우리의 삶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며
그 거두는 것의 종류는 뿌린 종류와 같은 열매이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게 된다.
진리는 단순한 것이다. 사람이 자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징계나 훈계가 아니고 애정이다.
따뜻한 사랑의 포옹과 용서이다. 애정의 표현이며 용기와 격려를 주는 언어이다.
그것을 먹고 자란 이는 밝고 맑고 아름답게 자라갈 수 있다.
이것은 신앙에도 같이 적용된다. 주님께 줄곧 징계를 당한 사람과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터치를 경험한 사람과 누가 더 주님을 사랑하리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다.
맞기 싫어서 순종하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것은 사랑이라기 보다는 두려움이다.
아니, 경건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로 행복한 믿음은 아니다.
이러한 두려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처럼 그러한 두려움의 신앙을 심어주는
이들도 또한 적지 않은 것 같다.
오래 전에 한동안 기도원에서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한동안을 영적 권능이 임하기를 사모하면서 부르짖는 기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기도원의 원장님은 여성인데 여러 은사가 많은 분이었다.
치유 능력이 많이 나타나서 거의 죽을 병에 걸린 이들도 많이 회복되곤 하였다.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능력과 은사가 나타나는 곳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 곳도 하나님의 가장 축복하시는 곳이며
거기를 떠나면 마치 죽을 것 같이 가르쳐지고 암시되곤 하였다.
그녀는 아주 강한 사역자였으며 영이 아주 예민하고 맑아서 사람의 생각을 거의 들여다보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람의 속을 거의 들여다 본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문이 되었는지!
이는 그녀가 사람은 오직 죽도록 맞음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성장된다고 믿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 예배 때마다 거의 치는 메시지가 선포되었다. 그 때마다 타케트가 있었다.
거기에 걸리는 것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녀는 항상 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했다. 조금만 불순종하면 치시는 하나님을 전했다.
그리고 그러한 실제의 사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또
한 맞을 짓을 했는 데도 아직 매를 맞지 않은 이들은 안심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언제 그것이 임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녀의 메시지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그 곳에서 빨리 도망치지 않은 이유는 단 한가지, 당시의 나는 아주 순진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면 5분 안에 도망간다. 나는 별로 두렵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으며
살벌한 하나님을 믿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40일의 작정기도를 하려고 작정을 한 터라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멍청한 생각을 그때까지는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도망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안에 있는 각자의 약점을 정확하게 끄집어내어
거의 저주에 가까운 수준으로 두들겨 패곤 하였다.
그녀의 말로는 그것이 사람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영을 움직일 줄 알았기 때문에 어떤 장소에 없었어도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았다.
어떤 아이가 아빠의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그 아이와 아빠와 나 밖에 없었다.
그 날 저녁 메시지는 아이 교육을 제대로 안 시켜서 아이의 버릇이 없다고 흥분하여 한참 패는
내용이 나왔다. 예배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내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원장은 은사는 많은 데 영이 어리구나. 그래서 사랑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더니 그 날 예배는 여지없이 강한 톤으로 원장이 말하기를
누가 어린 것이고 누가 장성한 사람인지 하나님이 아시는데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강한 톤으로 이야기한다. 물론 그런 메시지를 들으면 뜨끔할 수밖에 없다.
너무 지쳐서 이제 그만 기도원에서 나가야겠다 하고 생각하면 그 날 밤의 설교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나가서 이것을 해야지, 저것을 해야지.. 하고 해봤자
잘 될 것 같으냐는 것이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권위를 아주 강조했다. 기도원에서 그녀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권위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질서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녀에게 거스를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막강한 영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에게 거스르는 이들은 다 박살이 난다고 소문이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하나님께 맞아서 중풍이 걸리기도 하고
사고로 죽기도 하였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순진했었던 것 같다. 그녀의 믿음은 구약적인 면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율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성전 (그녀는 예배당을 꼭 성전이라고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에 놓인 방석을
똑바르게 쌓아놓지 않고 들쭉날쭉하게 쌓아놓아서는 저주가 임한다는 식으로 가르쳤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그 곳에 버티고 있었는지 참 신기하다.
그녀는 기도원 원장이었고 기도원에서는 봉사하며 일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여러 은사들,
권능이나 치유 능력이나 투시 은사를 받고 싶어했다. 그
러나 그녀를 두려워했고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기
도원에서는 많은 기적과 능력과 역사가 나타났지만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있다가 사라졌으며
다시는 오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은 아프면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병원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아픈 것이 나으면 병원을 떠난다.
누구나 자기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한다.
사람은 어디에서 안식을 얻는가? 바로 사랑과 그리움이 있는 곳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며 마음을 나누고 서로 보고 싶어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그러한 곳이 바로 고향이며 안식처이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능력 목회를 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가 만일 능력과 힘이 있으며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기적의 통로로 쓰여지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면 사람들은 그에게서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과 따뜻한 관계를 가지며 함께 있는 것이 서로 즐겁고 행복하며 헤어지면
그리움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에게서 오래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에는 사람들이 급할 때만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필요를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과 그리움을 먹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도원의 원장은 은혜를 입고 나서 찾아오지 않는 이들에게 서운함을 표시하며
그들이 계속 오지 않으면 중병에 걸릴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아들은 20대 초반에 갑자기 죽었다.
그녀의 남편도 죽었다. 가까운 사람들도 많이 떠나가고 그녀는 홀로 쓸쓸히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일의 원인에 대해서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나는 그녀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녀가 순수한 여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살벌하고 무서운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닌지..
그녀는 너무나 전투적인 믿음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녀는 몇 십 년을 부르짖고 기도하며 항상 예배당의 강대상 아래서 기도하면서 잠이 들었다.
그녀는 주를 위해서 안 입고 안 쓰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열정적으로 주를 믿기는 했지만 사랑하며 주와 함께 누리고 안식하며
삶과 신앙을 즐기는 차원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 같다. 그녀는 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다.
아마 그녀는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 같다.
그녀에게서는 크고 놀라운 권능이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그녀의 내면에서는
어린 소녀 아이가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단순하고 어리며 사랑 받기를 원하던 어린 소녀 말이다.
나는 이와 같이 맞고 터지고 혼이 나서 사람의 신앙이 자라고 영이 자란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 피곤한 신앙관이다. 거기에는 안식이 없다. 기쁨이 없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우리는 항상 잘못하고 실수한다.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면서도 날마다 넘어지는 것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누구나 죄책감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고 지적한다면 우리는 기가 죽을 것이다.
우리는 위축될 것이다. 그리고 숨어버리고 싶고 도망가버리고 싶을 것이다.
우리의 죄가 지적될 때 우리는 정말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어떤 이가 우리의 모든 죄와 악과 연약함을 알면서도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어떤 분이 우리의 모든 악한 행실과 악한 동기를 낱낱이 알면서도
그것을 야단치거나 혼내시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며
그 우리의 악함을 인하여 자기 목숨을 버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울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발 앞에 무릎꿇게 된다. 그 사랑 앞에서 거꾸러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
바로 주님이 그러하셨다.
그분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
그것은 그녀의 마음, 그녀의 과거, 그녀의 인생, 그녀의 죄악을 모두 아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분이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리라."
다시 말하자면 이것이다. 주님은 그녀의 모든 악을 세세히 낱낱이 아시면서도 그녀를 정죄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얘.. 너 너무 외로웠지? 너무 힘들었지? 삶이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었기 때문에 여태까지 방황하고
고독한 인생을 살아왔지 않느냐.. 하지만 이제 그러한 삶은 끝이란다. 내가 너에게 생수를 줄 것이다.
더 이상 외롭지 않고 더 이상 절망하지 않고 네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는 삶..
이제 내가 너에게 그것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변화되었다.
수많은 꾸짖음과 질책과 정죄가 아닌 단 한번의 사랑이 그녀의 마음을 열고 녹였다.
사랑하는 제자가 주님을 저주하고 욕했다.
그건 정말 치사한 짓이었다.
사랑하는 이, 자기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푼 이가
가장 힘든 상황에 있을 때 그를 저주하다니..
죄책감에 빠진 제자에게 나중에 주님이 오셔서 물으셨다.
사랑하는 시몬아..
네가 여기 있는 사람들보다..
그 무엇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거듭 반복되는 그 질문 앞에서
제자는 거꾸러졌다.
그 질문에 대하여 눈물로 마음 중심으로 대답하면서
그 제자는 마음 속의 죄책감이 사라졌다.
그리고 일생을 주를 위하여 살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평생을 주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갔다.
당신에게 죄책감이 있는가?
당신의 안에 나는 참으로 악하다. 못됐다. 하는 마음이 있는가?
주님은 당신에게 물으신다.
너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그 질문에 대해서
마음을 쏟아서
대답하라.
주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대답할 때 당신의 죄책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째찍으로 맞을 때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때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당신도 사랑으로 주님께 응답할 때
그 때 당신은 회복되고 치유되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어떤 사모 사이트에서 어떤 사모님이 나에 대해서 물었던 모양이다.
아내가 우연히 그것을 알고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하면서 나의 글을 하나 거기에 실었다.
.....................
<사랑의 깨뜨림>이라는 글인데 사람은 꾸짖고 얻어맞을 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 변화되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이다.
나의 신앙관을 가장 쉽게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실었던 것이다.
글을 올린 직후 어떤 사모님이 답글을 달았다.
이런 식의 귀에 듣기 좋은 사탕발림의 설교만이 강단에 차고 넘치니 그리스도인들이 변화되지 않으며
엉망이라는 것이었다. 강단에서는 두렵고 엄위하신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슬펐다.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 꾸짖고 혼을 낼 때만 그렇게 마음이 열리고 행복해지는 것일까.
주님에 대한 사랑이 생기는 것일까.. 그녀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성도들을 그렇게 대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나의 메시지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꾸짖음에 대한 메시지가 필요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호보완적인 문제일 것이다. 어떤 것은 옳고 다른 것은 틀린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사랑과 긍휼과 용서, 그것이 신앙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초 위에서 우리의 삶과 신앙과 인격은 밝아지고 아름다워지며 풍성해진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변화를 위해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부디 우리 모두에게 그 풍성하신 사랑이 임하시기를..
그러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지며 주님의 사람이 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그 메시지와 비슷한 메시지를 다시 한번 싣는다.
<사랑의 깨뜨림>
사람들은 자아가 깨지게 위해서
아픈 말을 많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을 치는 분들도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때리며
맞는 분들도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깨지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눈물이 날 만큼 야단맞고 혼이 나면
우리는 자아가 깨질까요?
온갖 모욕을 당하고
가슴이 찢기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성화되고 성숙될까요?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못 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안 되지요.
성질 더러운 사람이
자기 성질 더러운 것을 모르나요?
우유부단한 사람이
자기 마음 약한 것을 모르나요?
상처 잘 받는 사람이
누가 삐지고 싶어서 삐지나요?
자신의 한심스러움을 잘 알지만
힘이 없고 영이 어려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못하는 사람을
죽도록 팬다고 해서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사람을
다리를 분질러 버린다고 해서
잘 걷는 것은 아니지요.
진정 사람을 깨뜨리는 것은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고
온통 허물뿐이고
도무지 한심스러운 구석밖에 없는 우리를
그분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기가 막혀셔 거꾸러지고
그리고 깨지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용서가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하고
빛으로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깨지라는 이야기를
거의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정신차리고 똑바로 하라는 이야기를
거의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단순히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는 아름다운 존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단순한 메시지에
사람들이 깨지고 뒹굴고
울면서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족들과의 불편한 관계가 사라지고
그들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이 쉬워지고
그들이 아름답게 보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가족들에게 잘 하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친절하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야기를 안 해도
우리가 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안 되서 그렇지
그게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하면
그들은 속으로 그러지요.
아.. 누가 그걸 모르나?
그게 안되니까 그렇지..
그게 되면 내가 미쳤다고 고민하겠니? 하지요..
아무런 의무 사항을 요구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고
그저 단순히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렇게 가르칠 때
사람들은 깨어졌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랑의 메시지에
너무나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깨뜨리는 것은
위협이나 억압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용서입니다.
그분의 눈물입니다.
그분의 피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앞으로도
수천 번 수만 번
주님을 아프게 하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죄의 크기만큼
네 연약함의 무게만큼
내가 너를 사랑하리라.
왜냐하면
너는 나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눈물의 사랑 속에서
그 용서와 은혜 속에서
우리는 깨어지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많이 넘어지고
많이 용서받으면서
그렇게 우리는
주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보혈의 사랑>
나는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항상 혼이 나고 야단을 맞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야단도 많이 맞았습니다.
태어난 이래
야단은 많이 맞았지만
칭찬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야단을 잘 안 맞을 것 같았지요..
나는 참 자신이 없었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과연 제대로 맞게 하고 있는 것인지
항상 의심스러웠습니다.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면
나는 그제서야 안심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당연히 습관대로
주님께서 나를 야단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님은 나를 야단치시지 않고
기도 죽이지 않고
그저 사랑하시고 사랑하시고 또 사랑하셨습니다.
나는 정말 이상하고 이상하고 또 이상했습니다.
나는 아무 데도 사랑 받을 구석이 없었고
내가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기에
더욱 이상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내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연탄 공장 옆에 어떤 집에 갔다오라고 시켰습니다.
나는 아버지께 연탄 공장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연탄공장이 어디 있는지 정말 모르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너 바보 아니가?
나중에 나는 그 연탄 공장이 우리 집에서 5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집에 산지 약 2년쯤이 되었었습니다.
그것이 내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아무리 기다려도
주님이 나를 혼내시지 않아서 참 의아했습니다.
기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 이상했습니다.
어느 날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기도하다가 주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모습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마에 흐르는 피 정도가 아니라
그 얼굴 전체가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발 앞에 엎드러져서
나는 한없이 울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왜 나를 야단치시지 않고
혼을 내시지 않고
그저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시는지..
그것은 그분이
나의 모든 죄에 대하여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의아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내가 약하고 바보 같고 못되고 악하고
여전히 한심스럽지만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의 피가 내 맘속에 있기에
그의 고통이 내 뇌리에 선명하기에
이제 나는 그의 사랑과 은혜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야단치지 않고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사람들을 혼내지 않고
위로하고 축복하며 싸매어 줄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그분의 피를 의지하고 삽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주님의 보혈
그 보혈이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고통과
그분의 용서와
그분의 눈물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기에
오늘도 나는 그분의 피를 붙들고
날마다의 여행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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