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설교에 언급된 김용기 장로님 *여러 설교에서 스크랩, 모았습니다
1909~1988
▲한국에도 신앙 고백적 신앙공동체를 이끈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가나안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입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김용기 장로님(1909-1988)이
1954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 척박 한 땅
1만여 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기독교 신앙을 기본으로 근로, 봉사, 희생이라는
3가지 교육이념을 가지고
개척한 영농일꾼의 양성학교입니다.
1962년엔 ‘가나안 농군학교’로 발전하였고,
1973년엔 ‘가나안 복민운동’을 제창하였습니다.
그는 1966년 아시아의 대표적 지역공동체 농민운동의 공로자로서
막사이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용기 장로님은 “절대 벼슬을 하지 말고
남들이 싫어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며
기독교의 ‘신앙생활’을 ‘생활신앙’으로 승화시킨 개척적 이상농촌운동가였습니다.
김용기 장로님은 한국의 절대빈곤 문제,
특히 농촌사회의 빈곤과 도덕적 정신적 패배주의를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실천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근대화와 공업화의 주체적 시발이었다고 평가되는 제 3공화국의
‘새마을 운동’의 정신적 기반과 그 실천적 실험이
김용기장로의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서 공적인 책임들을 많이 수행해 왔습니다.
일찍이 한국의 기독교는 계몽차원에서 민족의 희망이었고,
한글을 보급하였으며,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세웠고,
평등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교육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일부일처제와 여권신장에 힘써 왔고,
삼일운동과 같은 나라 살리기 운동에도 동참하였으며,
신사참배운동도 일으켰습니다.
나아가서 1970년대의 반독재운동과 1980년 남북평화통일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공적인 책임에 등한시 하지 않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랬기에 세상 속에 있는 교회는 놀라울 정도로 부흥 성장하였습니다.
▲여러분, 키 작은 사람들이 큰 일을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 장기려 장로님,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우신 김용기 장로님,
다 키가 작은 분들이십니다.
이런 한국의 성자 믿음의 선배님들을 보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너무 작아서 놀라고,
두 번째는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차든지 놀라고
세 번째로는 심령을 울리는 그 설교에 감동해서 놀란다고 합니다.
▲가나안 농군 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이 쓴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계장에 피워둔 연탄난로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삭풍이 몰아치는 12월 한밤중이었습니다.
닭 500마리, 앙고라토끼 200마리가 그대로 타서 죽게 되었습니다.
교육을 받고 있던 교육생 수 십 명이 나와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도우려 해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닭도 토끼도 몸부림을 치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생지옥과 같았습니다.
김 장로님은 교육생을 데리고 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보신대로 갑자기 죽음이 오는 날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이 바로 저렇습니다...“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의 뿌리가 된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 이야기입니다.
김용기 장로님 기도하시는 처소에 ‘조국이여, 안심하라. 내가 있다.’라는 글이 있는데
그 글이 쓰인 동기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김일성이가 공작원들을 남파하고 남한을 적화시키겠다고 위협할 때
장로님께서는 하나님께 나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응답으로 생각하고
“조국이여, 안심하라. 내가 있다.
내가 기도하는 한 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라고 썼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처럼 하나님께서 평강에서 평강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신앙의 거장들은 이런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 이름을 지워주소서(모세, 출 32:32)’
‘주여, 스코틀랜드에 신앙의 자유를 주소서. 아니면 제게 죽음을 허락하소서(존 낙스)’
‘조국이여 안심하라. 기도하는 백성들이 있다(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
▲일제 말기 천황숭배를 거부한 김용기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경기도 양주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을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농촌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김용기 장로는
일제 말기에 광적으로 강요하던 신사참배, 동방요배, 정오묵도, 창씨개명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고 8.15 해방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김용기 장로 역시 신사참배와 국민의례 거부로 경찰서에 불려가
발길로 채고 얻어맞았습니다.
당시 양주 경찰서 고등계 주임인 일본사람 다치에게 끌려갔습니다.
그는 국민의례를 다 하는데 유독 하지 않는 이유를 대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김용기 장로는 솔직히 대답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오.
조선 사람이 일본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반대로 일본인이 조선인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요.
그러니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뿐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한 것이오.
묵념하면서 속으로 천황페하를 욕하는지 어쩌는지 누가 알겠소?
사람을 마음속을 측정하는 기계가 있다면 모르지만,
그러니 차라리 하지 않으면 천황폐하도 욕을 먹지 않고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니 서로 좋을 것 아니오?”
그러자 형사도 “네 말이 옳다”면서 그 따위로 하는 국민의례라면
당연히 그만두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형사는 자기 입장이 곤란하니까
다른 교회에는 그런 말 하지 말고
김용기 장로교회는 하기 싫으면 그만두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해방될 때까지 다시는 그 교회에 그런 일을 강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짓이 아닌 진실함의 열매를 나타낸 결과입니다.
*이 단락 출처 : 김광일 목사 설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중
▲새마을운동의 모태가 된 가나안농군학교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가 오늘날처럼 경제성장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경제성장의 불씨가 된 새마을 운동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김용기 장로님을 통하여
기업인들이, 농사꾼들이 교육을 받아 우리가 근면 성실히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산골 마을에 3세 소년이(※3세인지, 13세인지 확인 요망)
이름 모를 깊은 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듣지 않았습니다.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해도 낫지 않고 더욱 병세가 심해질 뿐이었습니다.
날로 여위어 가는 아들을 안타가워 했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장 너머로 하얀 쪽지 한 장이 날아들어 왔습니다.
그 쪽지에는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고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전도지였던 것입니다.
이 글을 읽은 소년의 아버지 김춘교씨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라는 구절에서 혹시 내 아들을 살릴 길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종이 쪽지을 넣은 청년을 수소문 찾았습니다.
그 청년은 마을에 있는 교회의 전도사님 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김춘교씨는 예수님을 소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그 가정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소생의 가망이 없어 보이던 소년의 병이 거짓말처럼 나았던 것입니다.
완쾌된 그 소년은 십리가 넘게 떨어져 있는 교회에서
믿음의 터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바로 훗날에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여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영향 끼치며 신앙의 모범이 되었던 김용기 장로님이었던 것입니다.
저도 거기에서 며칠 동안 자면서 훈련을 받았지만
그 분은 입으로가 아니고 실제 행동으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거장이었던 것입니다.
김용기 장로님이 기도하는 조그만 한 기도실 앞에는
“조국이여 안심하라!”고 기도문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기도하는 분들이 있기에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 나라를 지켜 주신 것 같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은
새벽마다 기도굴에 가셔서, 새벽 4시부터 두 세 시간씩 매일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뭐가 기도할 게 그리 많았길레... 불가능하지... 많이 졸으셨을 거야!'
그렇게 밖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그렇게 오래 기도하신 것은,
정말 다니엘처럼, 나라와 교회를 염려하시던 그 마음이 컸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분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고 외친 김용기 장로
본래 가나안 농군학교는 일제 강점기인 1935년부터
김용기 장로님께서 농민 운동과 복민 이념을 기초로
조국 광복과 그 이후의 복된 조국의 미래를 꿈꾸며 시작하신 운동이었습니다.
그분의 일생의 모토는 “한손에 성경, 한손에 괭이를!”이었습니다.
그는 용인, 광주, 원주 등에서 시작하여 조국 방방곡곡에
메마른 황무지를 개간하여 가나안의 이상촌을 건설하여
복된 민족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는 나라와 민족이 어려울 때마다 산 중턱에 있는 기도실에 들어가
민족을 위해 기도하시던 중보 기도자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기도실 입구에 무엇이라고 씌어있는지 아십니까?
“조국이여, 안심하라”이었습니다.
김용기 장로님이 ‘조국이여 안심하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깊은 기도 속에서, 어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조국은 망하지 않고,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나라가 될 것을..
장로님은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조국이여, 안심하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용기 장로님의 고독
홍정길 목사님이 신학생 시절에, 신학교 친구들과 함께
한 번은 김용기 장로님 말씀을 듣고자
가나안 농군학교를 일부러 찾아가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장로님, 어려우셨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큰 아들은 군대 가 버리고,
둘째 아들은 이렇게 두더지처럼 땅만 파면서 사는 일을
평생 할 수 없다며 도망가 버리고
그처럼 말이 없던 아내마저도 하루는 이렇게 따지고 나왔습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만 하고 사는가?
땅을 개간하면 또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리고,
또 가장 조악한 땅을 골라서 농토로 만들고
우리가 무슨 두더지인가?
아들도 도망가 버리지 않았는가?’
그래서 너무 아프고 기가 막혀 하나님께 한 참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농사꾼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가족들도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여기로 부르셨기에, 제가 여기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괭이질 하는 그 자리에서 제 목숨을 거두어 가 주시옵소서!’”
주께서 나를 향하신 부르심이 무엇입니까?
그 부르심의 길을 가는 것은... 고독한 길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르신 그 길로 계속 가는 것은... 참으로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부르는 길’로 달려가서는 안 됩니다.
‘남들이 알아주는 길’로 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 한 분의 청중’이신 그리스도만 생각하며,
사람들이 많든지/적든지
오직 그 길로만 달려가는 고독한 외길 인생입니다.
▶제(홍정길 목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생에 가장 큰 축복은
예수 믿은 것이 첫 번째 축복이었다면, 두 번째는 좋은 사람 만나는 축복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어디 가서든지 '참 어쩌다가 이런 좋은 사람을 만났나..' 늘 이렇게 생각합니다.
안병욱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스승은 운명이라고.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만나진다는 겁니다.
처음 예수 믿을 적에는, 꿈의 사람 김준곤 목사님 만나서,
꿈이 있는 사람과, 꿈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를, 평생 옆에서 보고 자랐습니다.
내가 자라는 시간 동안, 참 좋은 모델이었습니다.
문제는 꿈만 가지고 살려고 들 적에, 내 발이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둥둥 떠 다녀야 되겠더라고요.
'어떻게 날마다의 구체적인 삶의 행보를 할 것인가?' 그래서 몹시 고민할 적에,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말씀대로 잘 사는가, 여러 곳을 알아본 결과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 얘기 듣고 좇아가서, 그 분과 함께 살았습니다.
제가 지금 그 모임의 부이사장입니다. 이사장은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거절해서
이번에는 손봉호 박사님을 또 세웠고, 그 이전에는 대법관하신 분을.
그 분과 같이 살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신실해야 하는가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야, 홍 군. 네 말 한 마디가 보증수표 같은 말하는 인생이 되게.’
쉽게 살 인생을, 그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제 인생을 어렵게 만드는지요.
김용기 장로님을 모시고 다닐 때 보니까, 여관의 창호지에 구멍이 나있지 않습니까.
그 분은 가방에 창호지와 가위를 넣어 다니시다가, 밥풀을 달라 해서, 붙여놓습니다.
‘장로님, 우리 것도 아니잖아요.’
‘왜, 하나님의 것이지!’
김용기 장로님이 돌아가신 지가 꽤 오래됐습니다. 그 분은 정말 가방끈이 짧은 사람입니다.
일종의 대안학교 같은 곳에 잠깐 다니셨고, 학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해방 전에는,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도산 안창호라면
해방 이후에는 김용기 장로님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학력이 그저 그래요.
인격자라는 것은, 돈 많은 사람 아닙니다. 학력 높은 사람 아닙니다.
경험 많은 사람 아닙니다. 자기 말에 책임지는 사람이 인격자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 인격을 믿는다고 말할 적에, 그 사람 인격 뭘 믿습니까. 인격이에요.
장로님은 그것을 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 말이 내 인격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목회 회고담 중에서
그리고 만난 분이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이었어요.
가나안 농군학교 44기 출신인데, 그 분을 통해서 땅을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흠뻑 빠졌어요.
그래서 농촌으로 가고 싶었던 열정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것은 아마 전적으로 김용기 장로님 돌아가실 때까지
그 분이 어느 날 고려대 병원에서 저를 부르셨어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리고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랑을 많이 주셨는데, 그것이 오늘날 저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모델 설정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20년간 제 삶을 되돌아보면,
제가 강조했던 인물들은... 피터 드러커, 잭 웰치 같은 CEO들,
십일조를 많이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록펠러 등,
대부분 세상적 기준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들이 우리 삶의 모델이라고 (잘못) 제시했었습니다.
제 자신부터가, 이 블로그에 그런 분들에 관한 교훈을 많이 할애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탁월한 점들은, 우리가 반드시 존경하며, 겸손히 배워야 합니다.)
반면에 진짜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면서 모범을 보였던
성 프랜시스, 마더 테레사(mother은 수녀sister의 존칭. 수녀원장, 영적어머니)
장기려 장로, 김용기 장로
이런 분들에 대한 존경과 관심은... 아예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 사명선언문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제가 보고 따라가야 할 모델 설정이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성장'쪽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고무신 신고도 당당함
가나안 농군학교를 창설하신 김용기 장로님이 1988년도에 소천 하셨습니다.
지금 교장은 김범일 장로님으로, 둘째 아들입니다.
김범일 장로님은 어렸을 때부터 많은 일을 하고 자랐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부터 고되게 일을 했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학교에 가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습니다.
학교에 다니면 공부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가니 더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주장이 주경야독 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늘 일을 했고 ‘언제 한 번 일을 안 해보나?’가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출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범일 장로님께서 가나안농군학교를 자원해서 맡게 된 계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무신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1966년에 김용기 장로님께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셨습니다.
그 상은 필리핀 대통령이 주는 것으로
당시 아시아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상 중의 하나였습니다.
수상식에, 통역을 겸해서 아버지를 따라 김범일 장로님이 동행 했습니다.
출국을 얼마 앞두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여쭈었습니다.
“아버지! 수상식에 참석하려면 옷도 한 벌 맞추고, 구두도 한 켤레 사셔야죠?”
그러나 아버지는
“신발은 무슨 신발? 신던 신발을 신고가면 되지!”
라고 말씀하시며 신발 바꾸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시상식이 있던 당일, 수많은 사람들이 식장에 있었습니다.
기자들은 김용기 장로님의 신발을 비추고 플래시를 터트렸습니다.
아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수상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김용기 장로님은
자신이 고무신을 신고 온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은 농부라, 농사를 지으려면 고무신을 신어야 하기 때문이고,
대한민국은 몹시 가난하기 때문에 고무신을 신을 수밖에 없지만,
앞으로 고무신을 신지 않아도 되는
부자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소망해서
고무신을 신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연설을 듣고 난 후 모든 사람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갑자기 위대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대로 아버지입니다.
아들의 아버지를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다.
바뀌기 전에는 아버지가
고무신을 신고 수상식에 참석하는 것이 그렇게 싫었고 창피했지만,
눈이 열리고 나니 아버지가 그렇게 자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눈이 뜨여지자,
아버지의 일을 이어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김용기 장로님도 그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을 것입니다.
“고무신 신은 것 외에는 너도 나같이 살기를 원하노라!”
▲기도하는 생애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워서 어려운 한국을 살리려고 애쓰셨지만
장로님의 전 생애는 ‘기도하는 생애’이셨습니다.
장로님은 농군학교 산에다 기도처를 만들어 놓으시고
거기서 매일 이 민족을 위해 (오전 두 시간, 오후 두 시간 씩)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기도실 문 앞에 바로 “조국이여 안심하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이 나라를 보면서
누구도 이 나라의 미래를 장담하지 못하는 이 어려운 때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조국이여 안심하라. 내가 기도하고 있다!”
자기가 훌륭한 장관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지만,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자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가 있는 동안 이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믿었으니,
장로님은 정말 민족의 선각자요, 신앙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용기 장로님의 민족중보기도를
제(최남수 목사)가 이어가야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작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이 민족은 망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민족의 교회도 부흥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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