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더하소서 마6:31~33 출처
마틴 로이드존스 '산상 설교' 중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 아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적은 믿음’에 대한 의미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주요한 것은 보다 큰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주님은 여기서 우리 믿음을 증가시키는 적극적 방법을 보여 주시며
다시 논증의 형태로 표현하신다. “이는 다... 아시느니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방인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옷 입는 것과 이 세상에서 내 삶의 문제들,
그리고 부족한 것들로 염려하고 근심하다면
그리고 이런 것들이 나와 내 삶을 지배한다면 나는 이교도와 같이 살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교도들은 하나님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백성이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 세상의 삶과 그 삶을 어떻게 살며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관은 그들 자신의 생각에 제한되어 있었고 위에서 주신 빛이 없었다.
이 이교도적 인생관을 갖고 있던 이방인들 중에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우연발생적’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정 반대로 흔히 ‘운명론’이라 불려지는 것으로서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은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노력을 하든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삶을 계속하는 것이며, 이 세상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을 따름이다. 그리스도인도 이 두 견해의 하나를
무의식적으로 지니는 일이 있기 때문에
이 두 견해를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 산상 설교에서 가르치는 기독교의 견해는 ‘확실성의 이론’ 이라 할 수 있다.
삶은 맹목적인 필연성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며,
우리가 하나님 손 안에 있는 이상 모든 일이 확실성 아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본적 생활관이 우리의 생활방법을 결정할 것이며
우리의 행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더구나 이교도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게는 이 세상이 모두이며,
그 사람은 우연론을 촉진시키려 애쓰거나 그를 사로잡고 있는 이 운명론을
피하려 애를 쓸 것이다.
그는 존재하는 순간이 중요하므로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 시간을 위해 살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의 대다수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그 결과들에는 무관심하며,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는 아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이렇게 요약하셨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구한다’는 말씀은 매우 강한 말씀으로 그들이 열심히 구하며
실로 이를 위해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활적으로 중요하고 중요한 문제는 우리도 그와 같은가 이다.
만일 이런 것들이 우리의 생활에서 우선이 되고 첫째가 된다면,
우리는 이방인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속물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영적 속물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에게 구원에 대해 말해보면 그들은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삶을 논한다면 그들은 속물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놓고 근심한다.
그들은 항상 부귀와 지위와 각양각색의 소유물에 대해 말을 한다.
그들은 이것들로 해서 행복하기도 하며 불행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것들의 조종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믿음을 증대시키는 첫째 원칙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경적 신앙
생활관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물어야 할 질문들이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이방인들처럼 대처하는가?
의식주에 어려움이 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질병과 재앙과 손실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더 나아가 나의 기독교 신앙이 나의 인생관에 영향을 주며 모든 문제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는가?
나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접근 방법이나 삶에 대한 나의 견해가
비그리스도인의 견해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나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과연 분명한가?
산상 설교는 팔복으로 시작된다. 빛이 어두움과 다르고 소금이 부패물과
다른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로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면, 우리는 매사에 있어 견해와 반응이 달라야한다.
주님은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리스도인은 ‘남보다 더 하는 사람’이다. 만일 그의 기독교가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개입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매우 빈약한 그리스도인이요,
‘믿음이 적은 사람’이다.
나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 나에게 발생하는 모든 것을 항상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 놓으며 이런 관계에 비추어서 보는가? 이방인은 자신에게 발생하는 일에
기계적으로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런 일을 받아들여 즉각 우리의 신앙의 관계에 놓고
그것들을 다시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라는 말씀을 이해하며 알게 된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 일이 발생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떤 의미에서
그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리스도인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 여러분의 신분을 인식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보다 고귀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처신하라.
여러분의 혀까지도 주의하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주님은 앞서 새들과 들의 백합화에 관한 논증에서 말씀하신 바 있으나,
주님은 우리를 잘 알고 우리가 얼마나 잘 잊는가를 아시고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믿음을 증대시키는 둘째 원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의지해야 한다.
성경 전체에서 이보다 더 복된 진술이 또 있는가?
우리가 어떤 처지. 어떤 상황에 있든 하나님의 이해와 배려 밖에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전지하심 밖에 있는 것은 결코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필요를 아신다.
이것으로부터 주님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도출해 내신다.
‘너희는 결코 근심해서도 염려해서도 안 된다.
이런 상태에 있는 너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
그는 너희 아버지이다. 땅의 아버지도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지 않느냐
이것을 무한 확장시켜보라.
그러면 너희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 하나님께서 너희에 대해 하시는
일에 완전을 다할 것이다. 한 순간도 여러분이 내버려져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므로 이 복되고 영광스런 보장에 확신할 수 있다’
“너희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믿음을 증대 시키는 셋째 원칙은, 우리가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완성시키는 일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주님은 ‘이 세상의 삶을 염려하지 말아라. 만약 너희가 염려하고 싶다면
아버지에 대한 너희의 관계를 염려하라.
이것이야말로 너희가 주의를 집중해야 할 것이니라.
이방인이 구하는 것을 구하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도 많다.
그러나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먼저 구하라’ ‘구하다’란 말씀에 ‘먼저’란 말씀을 덧붙여 강조하셨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란 뜻이요, 우선순위를 둔다는 뜻이다.
너희가 첫째로 놓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다.
주님은 이미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오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런 다음에야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한다.
먼저 ‘너희의 양식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과 그의 의를 구하라’이다.
주님은 청중들에게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법을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처신해야 할 법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며 그러한 까닭에 그 나라를 더욱 더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생에서 축복을 잃는 사람들이 허다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릎을 꿇기도 하지만 반드시 주를 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의 얼굴을 날마다, 변함없이 구해야 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특히 우리의 영원한 미래에 대해 더없이 생각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4:17-18)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골3:1) 고 말을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뜻이다.
‘의를 구하라’ 덧붙여진 이 말의 뜻은 의의 생활을 의미한다.
위의 것들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적극적으로 성결과 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의를 구하며,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구하며,
적극적 성결과 더욱 더 성결케 되기를 구하며,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고 있다.
이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증대시키는 방법이다.
우리가 성결해지면 성결해질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질 것이며,
믿음은 더 커 질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확신은 더 커질 것이다.
영적생활에는 절대적 규칙이 있다.
하나님을 가장 크게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다.
그 어떤 일도 우리의 평정과 평온을 뒤흔들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만일 무언가에 대해 염려하고 싶다면 너희의 영적 상태,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친밀함, 그에 대한 관계에 대해 염려하라. 이것을 첫 자리에 둔다면
염려는 사라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자녀요 영원한 나라의
상속자로 아는 사람은 이생과 이 세상에서 매우 다른 사물관을 갖게 될 것이다.
이 믿음과 지식이 커지면 커질수록 다른 것들은 상대적으로 작아질 것이다.
더욱이 이런 사람은 하나의 뚜렷한 특정 약속을 지니게 된다.
그 약속이란 우리가 먼저 이런 것들을 한 마음으로 마음을 다하여 구한다면
다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더하여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정 약속이다.
솔로몬은 부귀와 장수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고, 지혜를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 다른 것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네게 지혜를 주겠다. 그리고 이 다른 것들도 주겠다.
나는 네게 부귀와 장수를 덤으로 주겠다‘고 말씀하신 셈이다.
하나님은 항상 이렇게 하신다. 17세기의 청교도들, 특히 퀘이커교도들이
부유한 사람들이 된 것은 그들이 부귀를 축척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의를 위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돈을 무가치한 것들에 던지지 않았다. 그들은 부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 하나님과 그의 영광과 그의 나라의 임하심과 그에 대한 관계와
그에 대한 여러분의 가까우심과 여러분의 성결을 중심에 놓으라.
그러면 그의 아들의 입술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보증의 말씀을 받을 것이다.
곧 이 모든 것이 이생에서 여러분의 복지에 필요하므로 여러분에게 더하여질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을 증대시키는 길은 이와 같다. 이방인처럼 되지 말라.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모든 것을 아시며 여러분을 지켜보심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더욱 그와 같이 되며, 여러분의 삶을 그와 더욱 닮기를 구하라.
출처: 자기부인...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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