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믿음 마 6:30-31 출처
마틴 로이드존스 '산상 설교' 중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입히거든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0-31)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여기서 우리는 염려 문제에 관한 주님의 최종 논증을 본다.
의식주와 생존을 위하여 걱정하지 말라는 주님의 경고의 요약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주께서 새와 꽃들의 관점에서 풀이하신 상세한 논증의 결과이다.
이것이 문제의 궁극적 원인이다.
‘작은 믿음’ 주님은 그들이 믿음이 없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적은’ 믿음으로 해서 꾸짖으신다.
주님이 여기서 꾸짖으시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이 말씀은 팔복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 애통하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길을 잃고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 온유하고 따라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이 의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말씀인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주께서 ‘너희 하늘 아버지’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권리와 권세를 가지는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사람들뿐이다.(요 1:12)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의 자식이다’라고 하셨다.
복음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 두 그룹으로 구분한다.
이 사람들은 구원의 믿음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 머물러 서 버리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주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이 사람들이다.
구원의 믿음만을 가지고 더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이생에서 많은 것을 빼앗길 것이고, 큰 믿음이 없기 때문에
걱정과 염려와 근심에 더욱 굴복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근심은 궁극적으로 항상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① 큰 믿음을 얻는 첫 단계는 ‘작은 믿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유의 믿음은 영혼 구원의 문제에만 국한되고,
생활 전체와 삶의 모든 국면으로 나아가지 못한 믿음이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된 병이다.
영혼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하다.
그리고 영원 세계와 관련해서 구원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믿음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그들과 세상 사람들과는 별로 차이점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근심하고 염려한다. 그들의 믿음은 제한되어 있고, 적은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② 참된 믿음은 생활 전체에까지 확대되는 믿음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우리 주님에게서 본다.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위대한 믿음의 용사들에게서 본다.
‘적은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붙잡지 않는 믿음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우리 생활에서 하나님의 이 비상한 약속들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모두 얼마나 죄책이 많은가!
이것이 ‘적은 믿음’이다.
한때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주고 있는 한 마디가 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긴 해도 사실은 그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그를 믿기는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식과 마실 것과 심지어 의복까지 돌보시려 하심을
말씀하실 때는 그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에게 오는 자는 결단코 목마르지 않으리라고,
그가 주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굶주리지 않으리라고 주님은 보장해 주셨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문제이다.
‘적은 믿음’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 취하여
그대로 살며 적용하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③ ‘작은 믿음’은 무엇보다 우리가 환경을 지배하는 대신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의복과 기타 많은 것들에 대한 큰 염려들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고, 그들은 그 희생자들이다.
이것들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이 일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환경을 초월하며,
심지어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민이 이렇게 삶에 초연할 수 있으며
그러한 높은 경지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
어째서 적은 믿음의 사람은 이런 일들로 지배를 당하고
곤두박질을 당하는 것인가?
믿음은 근본적으로 생각이 문제이다.
먼저 적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증상은 그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것이 삶의 난제가 되고 있다.
주님의 교훈을 연구하며 관찰하며 추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성경은 논리로 가득하다. 믿음을 신비한 그 무엇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이다.
새들을 보고 생각해보고, 그리고 추론을 도출해 내라. 풀들을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고 그것들을 생각해보라.
믿음이란 만사가 그를 때려눕힐 것으로 결정된 것처럼 보일 때,
지성적인 감각으로 끈질기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적은 믿음의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대신
다른 것에 의하여 통제를 받으며 뱅뱅 맴돌고 있다는 것에 있다.
한밤중에 몇 시간 동안 자지 않고 누워 있다면 여러분은 뱅뱅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이 아니고, 이것은 생각이 없음, 생각의 부족이다.
그리고 이것은 근심이라는 저 비참하고 불행한 상태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로 적은 믿음은 삶으로 하여금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게 허용하는 것이다.
④ 작은 믿음은 성경의 진술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철저하게 믿지 못하는 것이다.
생태적으로 우리들 속에 있는 모든 것과 우리 밖에 있는 마귀는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다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진술들은 제자만을 위한 것이며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적은 믿음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⑤ 작은 믿음은 구원의 의미와 구원의 결과 되는 위치를 인식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문젯거리의 절반은, 우리가 믿는 구원론의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서신의 첫 부분은 교리적 진술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분은 무엇이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상기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 다음 실제적인 부분으로 이 부분은 항상 교리로부터 추론된 것이다.
‘그러므로’란 말씀으로 시작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주님께서 여기서 하고 계신 것도 정확히 이것이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자녀됨을 인식하지 못함에 있다.
이것을 인식할진대 다시는 결코 염려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을 위한 기도에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기를 구하노라”(엡 1:18-19)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깨닫지 못하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을 보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가 해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서의 우리들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그분이 어찌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여러 가지 고통과 문제와 슬픔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이기고도 남음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깨달아야 한다.
- 이것을 달리 말하면, 우리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그의 자녀와 관련된 하나님의 불변의 목적을 알라.
믿음의 영웅들은 하나님의 불변의 목적을 알았으며,
따라서 어떤 재난을 보고도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릴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칠 수 있었다.
둘째, 그의 사랑을 생각하라.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에
그 사랑의 크심을 증거 하셨다.
셋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을 묵상하라. 그분이 새에 관심을 가지신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관심을 가지시겠는가? 그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된다.
넷째, 그의 세력과 능력을 생각해 보라. 그는 이방과 모든 원수를 꺾으실 수 있다.
그 분의 세력은 무한광대하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굴복하고 내가 하나님 됨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이 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심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일들에 직면하여 강력한 추론을 도출해 내야 한다.
- 여러분은 누가복음에서 주님과 제자가 함께 배를 탔을 때 배에 물이
들어오는 사건을 알 것이다.
배에 물이 들어오는데 주님께서는 배의 고물에서 주무시고,
제자들은 근심하고 염려하며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했다.
주님의 대답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어째서 너희 믿음을 이것에 적용하지 않느냐?
우리의 믿음은 적용해야 한다. 어떤 주어진 순간에 그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나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적은 믿음‘은 이런 것을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염려할 권리가 없다. 그가 만일 염려한다면,
적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자기를 정죄할 뿐 아니라
자기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그의 복되신 주님께 불충성하는 것이 된다.
“염려하지 말라” 믿음을 발휘하라.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를 여러분의 모든 일상생활에 적용하라.
출처: 자기부인...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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