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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 받는 그리스도인 / R. A. 토레이

LNCK 2018. 10. 15. 19:53

◈응답 받는 그리스도인


R. A. 토레이   <녹음 안 합니다!>
 
R.A.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AD 1856-1928)는 1856년 뉴저지에서 출생했으며
예일대학과 예일대학원 신학부를 졸업했다.

무디의 권유로 무디 성경학원(Moody Bible Institute)의 전신인
시카고 복음화협회(Chicago Ebangelization Society)의 초대 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세계 각지를 순회하며 부흥의 불을 지핀 탁월한 신학자인 그는
4대에 걸쳐 한국교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신앙 명문가의 비조이다.
그의 아들 토레이 2세는 중국 선교사로 사역하다가
한국전쟁 때 한국으로 들어와 장애인과 고아들을 위해 사역했으며


그의 손자인 토레이 3세(대천덕)는 성공회 신부로서 강원도 태백에 예수원을 세웠고,
이는 현재 4세인 벤 토레이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교육자, 목사, 세계적 복음주의자, 저술가로 모두 성공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성령, 기도, 구원, 영혼구령 등의 실질적 주제를 포함하는 약 40권의 책을 저술했다.
 

..................................  
  

 
앞 장에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고 함께 연구했다. 이제는 '어떤 사람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찰해 보기로 한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에서 주신
기도 응답의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의 기도도 응답하신다는 약속을 믿고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생각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정된 특별한 사람에게만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 가운데서 응답의 대상은 무제한이 아니라 한정적이라고 하신다.
당신은 나의 말에 얼른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말씀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하시겠다는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조건을 갖춘 특별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 말을 할 때 회의와 불안과 갈등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도한 것을 응답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가"에 대한 해답을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아주 평이한 말로 가르쳐 주신다. 이것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 요일 3:22에 제시되어 있다. 이제 그 말씀을 들어보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당신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이 놀라운 말씀을 눈여겨보았는가?

그리고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있는가? 그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응답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내가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는가"라고 묻는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모두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 것 중에서 많은 부분을 응답 받는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도한 것 중에서 몇 가지만 응답 받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도한 것 중 하나라도 응답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마다 응답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을 수 있다."
 
 
◑1. 하나님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당신은 영어 성경에서 "왜냐하면" 혹은 "그 이유는" 그리고 "그러므로 "라는 단어들을 발견할 때마다

이 단어들이 어떤 사실에 대한 이유를 지적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의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하시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본문은 "우리가"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속에는 사도 요한이나 당신이나 혹은 내가 동일하게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는 원인과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기도의 응답을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이 말은 "날마다 그의 말씀을 읽고

그의 뜻을 발견하며, 그 뜻을 항상 행하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 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상호관계를 요구하신다. 그는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도 우리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약속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아주 예민한 귀를 갖고 있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간구에 아주 예민한 귀를 갖고 들으신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해 귀머거리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간구에 대해서 귀가 둔하여 진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요구 사항을 실천한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요구 사항을 들어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모든 기도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

이 모든 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원한다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하나님의 뜻을 항상 실천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가장 보편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일에 소홀히 하는 사람,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특별한 목적을 아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 또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서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가 없다.
 
내가 초창기에 목회하던 교회에 어떤 부인이 계속해서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 부인은 정식으로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지 않고, 또한 교회에서 아무 활동도 하지 않으며

예배에만 빠짐없이 출석하고 있었다. 그 부인은 그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지식층 여자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그 부인이 전에 내가 목회했던 교회에 정식으로 등록하고

교회의 활동에 참여했던 여자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나의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어느 주일 아침 교회에서 집으로 가다가 우연히 그녀와 동행하게 되었다.

그녀의 집은 우리 집과 같은 동네였기 때문이다. 내가 집 현관 앞에 왔을 때 집에 들어오기를 권고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우리 집에 들어왔다. 나는 그 부인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부인께서는 전에 내가 목회하던 교회에 출석하셨다죠?"


"그렇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에 출석하며 봉사도 했지요."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등록을 하지 않고 예배에만 참석하시죠?"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그것은 제가 이제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이죠."

"성경을 믿지 않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녀는 "그렇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하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성경을 믿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 부인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제가 성경의 약속들을 시험해 보았지만

결국 그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인이 체험하고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성경 구절을 하나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경에서 너희가 기도할 때 믿고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렇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의미 깊은 말입니다."하고 긍정했다.


그녀는 그 사연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저의 남편이 굉장히 아팠습니다.

저는 그의 회복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 남편은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성경 말씀이 진리가 아니며 그것은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어째서 실패하지 않았다는 겁니까?"하고 그녀는 소리쳤다.


나는 기도의 응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 했다.

그녀는 다시 이렇게 질문했다. "너희가 기도할 때 구하는 것마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틀림없이 이행하십니다.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왜 저에게는 그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을 까요?

나는 "너희가 기도할 때 구하는 것마다 응답 받는 것을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부인은 '너희가'라는 부류 속에 들어가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것이 무슨 뜻이죠?" "부인이 하나님의 약속에 해당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까?"

그 부인은 이렇게 반문했다. "그러면 그 말씀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나는 단호히 말했다. "부인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의 응답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야 그 부인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즉시 요일 3:22을 그 부인에게 펴서 읽도록 권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 부인이 성경 구절을 다 읽은 후에 나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부인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 앞에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고 있습니까?

부인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물론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부인이 정말 그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응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로 돌아갔습니까?"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이렇게 환성을 질렀다.


"아 이제야 하나님의 약속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잘못을 시인하고 아주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었으며

우리 교회에서 가장 유능하고 활동적인 훌륭한 교인이 되었다.
 
이 세상에는 그 부인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들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본문에 나오는 "우리"에 속한 그리스도인인가?

"우리"라고 하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과 말씀을 진지하게, 부지런히 공부하며,

당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그 발견한 것을 일상생활에 항상 실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당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요구 사항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 시카고의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 더 소개하겠다.

우리 교회에 두 여자가 있었는데 한 여자는 교회에 아주 열심히 나오는 근면한 사람이었고,

또 한 여자는 집에서 그 여자를 돕고 있는 가정부였다.


어느 날 밤 내가 집회를 마치고 나자 가정부가 와서

'토레이 목사님, 목사님한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고 면회 신청을 하였다.
 
나는 무엇 때문에 나하고 상담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저는 지금 큰 문제에 빠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당황해 했다.


나는 도대체 무슨 문제냐고 물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에 관해서는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어디에서나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 속에서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다시 요일 3:22을 펴서 그녀에게 읽도록 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자매님이 이 성경 말씀을 일고 과연 나는 무엇을 깨달았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매님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그리고 진지하게 공부하며

자매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또 그것을 자매님의 생활에 적용시키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솔직히 대답했다. 나는 그때 그 자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매님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 때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발견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와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은 정말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그리고 진지하게 공부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가? 그리고 그 뜻을 실생활에 옮기는가?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신실하신 약속에 의해서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며,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그 뜻을 찾지 못하면 당신의 기도 생활은 틀림없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당신은 기도의 응답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약속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시겠다고 그의 말씀 가운데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기도 응답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경 전체에서 찾아보면 요한일서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성경 구절 중의 하나는 바로 요 14:13-14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이 부분만 생각하므로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주신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구절에서 끝나지 않고 그 다음 구절에서 계속해서 말씀 하셨다.

이제 15-17절까지를 읽어보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또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의 명령을 지키면(그의 말씀을 날마다 알고 공부하며 그의 계명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항상 실천하면)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성령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인도하심으로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될 때 그들(그의 명령을 지키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가 시행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성경전체에서 우리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관한 아주 중요한 성경 구절을 하나 더 열거해 보자.

그것은 바로 요 15:7에 나와 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그저 이렇게 읽는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이 빠져 있다.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분문을 읽어 보자.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서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 안에 필연적으로 거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기도했을 때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고 주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 안에 그의 말씀이 거하지 않고, 그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으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의 말씀을 공부하고

성실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9절과 10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당신이 요 15장을 계속해서 더 읽어 내려가면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의 뜻을 발견하며 그것을 항상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고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음으로 인해 신앙의 큰 혼란을 겪고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의 약속에는 이상이 없다. 그의 약속은 사실이며, 진리이며,

불가사의한 신비가 아니다.
 
당신이 지금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중대한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깊이 공부하지 않고 그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며,

그것을 날마다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에 응답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2. 하나님은 그의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그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고 배웠는데

이것만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은 한 가지를 더 요구하신다. 다시 요일 3:22로 돌아가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리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이 구절에서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라는 구절과 "그 앞에서"라는 구절 사이에

"그리고"라는 접속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양쪽의 중요성을 연결시키는 부분으로서 한쪽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이와 동시에 "그 앞에서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특별히 행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을 지라도

그 분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특별히 명령하시지 않은 것을 우리가 행했을 때 더욱 기뻐하신다.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설명해 보자. 하나님은 위대한 도덕적 통치자 혹은 지배자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많은 명령을 내리고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다.


즉 '너는 이것을 행하라. 그리고 이것도 행하라. 또한 너는 이것을 행하지 말라.

그리고 저것도 행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명령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명령하신 계명만을 지키고

특별히 명령하시지 않은 계명은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는 이상해 질 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도덕적 통치자가 아니다. 그분은 그 이상의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이 고백은 기도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성경적 교훈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교훈에 반대하여

어리석고 쓸데없는 철학적, 학문적인 논쟁을 하고 있다.

그들의 논쟁은 가장 근본적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구체적으로 응답하시는 것과,

그분은 단지 우리의 육신적인 세계와 도덕적인 세계의 창조자이며 통차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을 어떻게 다스리는가를 살펴보자.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에게 "너는 이것을 해라. 너는 저것을 해야 한다. 너는 이것을 하지 말라.

너는 저것을 해서는 안 된다."하고 많은 명령을 내리는가?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이 그가 명령한 것은 하고 명령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현명한 아버지가 아니다.
 
현명한 아버지라면 자녀들보다 인생을 더 많이 체험하고 무엇이 더 현명한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몇 가지 행위에 대한 규칙을 정해 준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가 정해준 규칙만 순종한다면 아버지가 만족하고 기뻐하겠는가?


아니다.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이 그를 완전히 알고 그와 친밀해 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버지가 무엇을 기뻐하며 무엇을 싫어하는가를 본능적으로 알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행하게 된다. 아버지가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행한다.
 
우리 가정의 예를 들어 보자. 아내와 나는 아이들에게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고 하는

많은 규칙과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들보다 더 많은 인생의 체험을 하고 아이들에 대한 최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몇 가지 행동의 원칙만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들에게 왜 그러한 행위의 원칙들을 주었는가에 대해서 항상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이들이 부모의 권위에 대한 순종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미국의 가정생활이나 학교생활 그리고 국가생활에서 권위에 대한 순종의 원리들이

거의 파괴되어 있다.

그리고 현대의 많은 교육자들이 우리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자녀들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일일이 다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녀들의 "인격"을 최대한으로 존중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며

"부모와 학교의 권위에서"탈피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현대 교육에서 가장 위험한 사상 중의 하나다. 이러한 무서운 교육을 받고 자란 자녀들이

가정과 학교에 대해서 반항하며 성장한 후에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국가에 대해서 반항하게 된다.
 
현세대에 이렇게 위험한 교육이 시행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그의 자녀들에게 권위에 순종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즉 가정에서는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며, 학교에서는 교사들에게 순종하며,

국가에 대해서는 정부의 통치자들에게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어떤 것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왜 그렇게 해아 하느냐"는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순종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지 않았다든지,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그것을 한다면 이것은 부모에 대한 큰 경종이며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나와 아내는 수년 동안 아이들에게 권위에 대한 순종의 원리와 방법을 계속해서 가르쳤다.

그 후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조그마한 일에도 불순종하는 말이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 가지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보모는 자녀들을 위해 몇 가지 행동의 규칙과 원칙들을 세우고 있지만

실상 자녀를 가진 부모들은 그 자녀들이 부모의 심정을 깊이 알고

부모와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고 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가 기뻐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것을 행하라고 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가 명령한 것만 하고 특별히 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큰 슬픔을 느끼게 된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과 행위 그리고 모든 결정을 깊이 생각해 볼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는가를 냉철하게 자문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며,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틀림없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 앞에서 항상 그를 기쁘게 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신다.
 
당신은 이런 말을 들을 때 "나는 도저히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체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은 명령하시지 않는다.


당신은 과연 당신의 모든 말과 행동과 결정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는가?

아니,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과 행위와 말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가?


당신은 하나님이 하라고 한 것만 하고 언급하지 않으신 일은 당신 마음대로 하고 있는가?

당신은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요구조건을 얼마나 충족시키고 있는가?
 
오늘날 수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일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들이 극장에 가도 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춤을 추어도 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카드놀이를 해도 되는가?

이 외에도 수많은 문제를 갖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며 당황하고 갈등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 '너는 극장에 가지 말지니라.

너는 춤을 추지 말지니라. 너는 카드놀이를 해서는 안 되느니라"는 명령을 하셨는가?
 
이런 것은 어리석은 문제이다. 성경에는 이런 종류의 명령이 없다.

그러면 이런 경우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이 만약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라면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나의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인가?"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극장에 가는 문제를 갖고 고민하는데,

내가 극장에 가는 것이 안 가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든 간에 나는 극장에 가겠다.


그러나 내가 극장에 가는 것보다 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면

다른 사람들이 다 갈지라도 나는 가지 않겠다.
 
나는 시카고에 살 때 여러 극장, 특히 일류 극장에서 자주 초대권을 받았다.

그런데 그 초대권에는 훌륭한 유명 인사들, 그중에 어떤 박사나 감독도 초청되었다고 하는 인사말과 함께

나도 초청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거기에 초청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인격적으로 인정받는 훌륭한 사람들이다.
 
극장 측은 내가 만일 참석해 주면 그 영화나 연극이 더욱 빛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어떤 유명한 감독이나 박사들이 오든 안 오든 그곳에 가겠다.


그러나 그곳에 가는 것보다 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린다면

시카고의 모든 박사와 모든 목사들이 간다고 할지라도 나는 가지 않겠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런 문제를 스스로 기도하면서 결정해야 한다.

올바른 결정을 하는 데에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런 모든 문제가 성경이 제시한 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되면

자신 있게 결정하고,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양심적으로 판단되면 여지없이 거부해야 한다.
 
극장의 예를 또 하나 들어 보자. 하나님의 자녀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연극이나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에 대한 어떤 관념을 갖고 있다.


즉 인간과 영화에 대한 생각들이 각각 다르다. 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도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연극은 정말 높은 도덕적 성격과 수준을 가지고 우리에게 크게 영향을 준다.

또 어떤 연극은 도덕적으로 그렇게 좋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어떤 영화나 연극은 관객을 타락시킬 만큼 아주 형편없는 것들도 있다.
 
우리는 또한 여러 부류의 배우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떤 배우들은 높은 도덕적 수준을 소유하고 있는 한편,

어떤 배우들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타락하고 부패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어떤 여배우는 높은 도덕적 이상을 갖고 공연을 한다. 그러나 어떤 여배우는

그러한 도덕적 이상을 전혀 갖추지 않은 채 무대 공연을 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당신은 “그리스도인들이 극장에 가야 되느냐 안 가야 되느냐에 대한 결정은,

그 연극이나 영화가 높은 도덕적 성격을 띠고 있고

배우들도 높은 도덕적 이상을 실현하려는 영화나 연극인가에 따라 결정해야 된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만일 당신이 이런 방식으로 결정한다면 그렇게 많은 극장에 갈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히 생각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극장은 하나의 사회 공공 기관이며 건물이다.

우리는 종종 가장 높은 순수성과 윤리와 도덕성을 지닌 영화와 연극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나 연극은 이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많은 감동을 준다.

중요한 것은 극장, 즉 극장 건물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무대 자체를 문제 삼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 연극의 내용과 목적과 배우들의 인격과 영적, 도덕적, 정신적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연극이나 영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타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 영향력이라는 것은 실로 가공할 만하다.


많은 여자들이 가장 높은 도덕적 이상과 기대를 가지고 무대에 서서 공연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공연을 끝마친 후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영화나 연극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실망 가운데서 계속하든지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계속적인 실망과 회의와 후회 속에서 마지못해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연극이나 영화에 대해서 악의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 연극이나 영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혹은 정신적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영국에서 일생 동안 연극이나 영화의 비평에 몸을 바친 ‘클레멘트 스코트’라는 유명한 비평가가

몇 년 전 영국의 주요한 신문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여배우가 무대의 공연에서 여성으로서의 교양과 정숙과 미덕을 보유하기는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기사를 읽은 극장 측 사람들과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이 크게 흥분하고 분개하면서

‘클레멘트 스코트’에게 그 기사에 대한 공개적인 사과를 강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클레멘트에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사과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알렉산더와 내가 런던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는데 ‘허버트 비어봄트리’라는 유명한 극작가이자 연출가가

나의 숙소에 찾아왔다. 그는 당시 연극에서서는 정상급 인물로 추앙 받는 사람이며,

그의 탁월한 재능으로 인해 영국 국왕으로부터 높은 작위를 수여 받기도 했다.


그는 그때 신문사 기자와 함께 왔는데 연극에 대해서 내가 편견과 악의를 갖고 있다고 도전하며

거기에 대해서 해명하고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그 문제를 갖고 오랫동안 대화를 했다. 나는 알렉산더를 초청하여 우리의 대화에 참여시켰다.

대화하는 가운데 알렉산더와 나는 비어봄 트리에게 몇 가지 아주 직접적인 질문을 했다.

그는 우리의 질문에 대해서 솔직하게 답변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행위에 대해서보다 무대 위에서의 행위에 대해서 문제점을 시인했다.


그의 솔직한 답변은 나로 하여금 연극에 대해서 더 나쁜 감정을 갖게 했다.
 
내가 오하이오 주의 어느 큰 군대에서 집회를 열고 있을 때

어떤 극장 지배인이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 전화를 해서

"당신이 연설에서 연극을 지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연극과 영화에 대해서 너무나 큰 편견과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우리 극장을 당신에게 더 이상 빌려 줄 수 없소.

당신은 설교를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 극장에 대해서 아주 좋지 않게 말하고 있지 않소?"
 
나는 그의 격한 어조를 듣고 잠시 그를 진정시킨 다음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무엇인가 저에게 큰 오해를 갖고 계신가 봅니다.

사실 많은 배우들이 영화와 연극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고 그러한 생각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배우들 자체를 비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당신도 오늘날의 예술이 유익보다는

얼마나 큰 해독을 끼치고 있는가를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정신과 인격과 사랑과 헌신을 차원 높게 하기보다는

난폭과 환멸과 증오와 타락을 조장시키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영화나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그 영향을 부지불식간에 믿게 된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내가 역시 클리브랜드 시에서 집회를 하고 있을 때 그 당시 가장 인기 있고 존경받는 연극배우 한사람이

그의 단원들과 그 도시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이 연극 단원들은

그 연기와 규모와 인기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극배우들이었으며 단체였다.

그런데 그 배우들 중 한 여배우가 우리 집회에 와서 감동을 받고 나의 동역자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하면 스타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실제적 묘안을 요구했다.


나는 그녀가 무대 위에서 너무나 훌륭하게 연기해내는 것을 상상해 보면서 복음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녀의 야심에 대해서 실망을 금치 못했다.
 
과연 그러한 여성이 연기하는 극장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가?

사실 현대의 세속적인 예술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장에 대해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나는 현대 예술에 대해서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그것에 대해서 느끼고 본 것을 다시 한 번 제고하려는 것이다.

당신은 세속적 예술을 통해 진정한 기쁨과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가?
 
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사탄은 이 예술과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 활동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있으며 영혼을 파괴시키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탄의 음모와 조작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알렉산더와 내가 런던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 동안 나는 영화나 연극에 대해서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그 당시 런던에서 30여개가 넘는 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어떤 지배인이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여기 그가 쓴 편지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저는 런던에서 30여 개의 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지배인입니다.

저는 현재의 연극에 대한 목사님의 정확한 판단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 극장 사업을 하고 있지만 사실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연극의 어두운 면을 말씀하신 내용은 사실입니다."
 
런던에서 우리가 집회를 하고 있는 동안 연극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고 직업을 포기했다. 그렇다면 춤은 어떤가?

그리스도인이 춤을 추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에도 말했지만

춤추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춤추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가, 아니면 춤추는 것을 거부하기를 더 좋아하시는가?

이미 우리는 춤에 대해서 몇 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



첫째로 춤은, 특히 현대의 이성간에 접촉을 허용하며 실행되고 있다.

육체적인 접촉을 하면서 춤을 출 때 과연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갖게 되는가?
 
내가 오스트레일리아 발라라트에 있었을 때 춤에 대한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말했다.

그 결과로 많은 남녀들이 춤추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 도시에서 유명한 사교춤 단체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후 나는 타스마니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배 안에 바라라트에서 살고 있던 한 변호사도 함께 타고 있었다.

그 변호사는 나를 알아보더니 내게 와서 이렇게 말을 건넸다. "혹시 토레이 목사님이 아니십니까?"

"예,그렇습니다. 제가 토레이 목사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몇 달 전에 발라라트에서 목사님이 사교춤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아무래도 잘못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가 무엇을 잘못 말했지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저 목사님이 잘못 말씀하신 것 같다는 이야기 입니다.

목사님은 춤에 대해서 무엇인가 큰 오해와 편견을 갖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예 선생님 말씀대로 혹시 제가 춤에 대해서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러면 선생님께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선생님도 춤을 추시죠?" "그렇습니다." "선생님은 결혼하신 분이죠?" "그렇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의 부인도 춤을 추십니까?" "그렇습니다. 제 아내도 춤을 춥니다."

"그렇다면 만일 선생님의 부인께서 다른 남자와 춤을 추며,

무도회의 은밀한 곳에서 정체불명의 남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선생님이 보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그렇다면 큰 충돌이 생길 것입니다."
 
나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그 무도회에 아주 매혹적인 음악이 흐르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

그들은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할까요? 또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사회의 모든 각계각층에 특히 상류층에 정신적인 나병환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우리 모두는 상류 사회에 도덕적, 윤리적으로 부패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의 부인도 그런 사람들과 춤을 춥니까?"

"아, 그것은 제 아내가 그런 사람들의 인격을 전혀 모르고 있지요."

"그렇다면 선생님의 부인이 그런 정신적인 나병환자의 정체를 모른다는 이유로

그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군요?"
 
그는 더 이상 대답을 못했다. 그 이상 어떻게 대답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춤을 추는 모든 여자들이 순간마다 악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여성들 가운데는 정말 순수하고 순결하며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는 여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이 춤추는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안다면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
 
미국 동부의 어느 대학촌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는데 세 사람의 젊은 남자 대학생이 나에게 왔다.

"토레이 목사님, 왜 목사님은 춤에 대해서 그렇게 악평을 하십니까?"

"젊은이들도 춤을 춥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젊은이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이 춤을 출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 봅시다."
 
그들은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아주 순결한 여자와 춤을 출 때는 우리 생각이 깨끗합니다."

"물론 우리와 춤추는 여자들 가운데는 형편없는 여자들도 있지요."

"그러면 그런 여자들과 춤을 춥니까?" "춤을 춥니다."

"그러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군요. 젊은이들이 질문한 것을 젊은이들이 바로 대답한 것입니다."
 
오늘날 문명화된 사회에서 사회 각계각층, 특히 중류나 상류층에서 유행되고 있는 사교춤은

가장 무서운 타락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순결한 여자들이, 많은 젊은 남녀들이 춤이 끝난 후에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면,

그리고 상류층의 사교춤이 얼마만큼 위험하고 무서운 영향을 주는가를 개인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아마 자존심이 있는 여자들은 결코 다시는 그러한 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책에서 읽은 것이 아니라 관찰에서 온 나의 경험이다.
 
그러면 카드놀이는 어떤가? 그리스도인들이 카드놀이를 해도 괜찮은가?

솔직히 말해서 연극이나 춤에 대한 생각처럼 카드놀이에 대해서도 나는 상당히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카드놀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카드가 도박꾼들에 의해 가장 사랑을 받는 무기라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도박꾼들이 처음에는 가족들 사이에서 배우고 연습을 하다가

이것이 직업적인 도박으로 확대되고 발전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처음에 가정에서 그저 재미로 카드놀이를 하다가 결국 자기 패망으로 가는 것이다.

그들은 독약을 싫어하는 것처럼 카드놀이를 멀리 하지 않았음으로 인해,

또 도박이 잘못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너무 깊이 빠져듦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테네시 내슈빌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을 때 나의 아내는 내슈빌 근교에 있는 형무소를 찾아 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살인죄로 인해 사형 언도를 받고 복역 중이던 어떤 사형수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큰 교훈을 얻었다. 그 사형수는 친구들과 도박을 하다가 문제가 생겨 그 도박판에서 사람을 쏴 죽였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친구들과 카드놀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자기도 한번 시도해 본 것이

그것으로 인해 결국 사형수가 되었다고 말했다.
 
몇 년 전, 오하이오 주 총무가 주립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는 몇몇 죄수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가 형무소에 가기 전, 한 여자가 그에게 와서 이렇게 간청하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그 형무소에 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 아들이 그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는데,

죄송하지만 이 성경을 제 아들에게 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가 보내는 것이라고 말해 주십시오."
 
총무는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을 했다. 그가 형무소에 도착하여 그녀 아들의 면회를 신청했다.

드디어 그 아들이 면회실에 나왔을 때 어머니가 보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성경을 주었다.

그러자 죄수는 총무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의 어머니가 이 성경을 보냈다고요?" "그렇습니다."
 
죄수는 그 말을 듣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이 성경을 다시 저의 어머니에게 갖다 주십시오.

저는 어머니의 성경을 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나에게 카드놀이 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제가 여기 와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가 보낸 성경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을 다시 저의 어머니에게 갖다 주십시오."
 
내가 아는 어떤 부모는 그들의 세 자녀들을 즐겁게 해주며 밤에 나가서 다른 것을 못하도록 애썼다.

그 가정은 그 도시에서 가장 즐겁고 재미있는 곳이 되었다. 자녀들은 가정의 즐거움 속에서

아주 만족해하며 밤에 밖에 나기지 않고 때로는 밤새도록 보모들과 놀았다.
 
그런데 그 부모는 아이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들과 카드놀이를 했다.

세 아이들 중 하나는 카드놀이 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 아이의 관심은 다른데 있었다.

세 아이들을 항상 집에만 있게 한다면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이들은 자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으며 결국 그들은 그 부모의 곁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인 부모와 카드놀이를 자주 했던 두 아들은 그 후 결국 도박꾼이 되어 버렸다.
 
유명한 복음 전도자인 ‘메이저 코올’이 아칸소 시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였다.

집회 중 아주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들어와 교회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집회 중에 간증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여러 사람이 간증을 마쳤을 때 갑자기 그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온 교인들은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모든 교인들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모두가 저에게 낯익은 분들이군요. 저는 아주 어렸을 적에 이 교회에 다녔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이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바로 이 자리가 저희 가족들이 앉아 예배를 드리던 곳이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열심히 주일 학교에 참석했습니다. 저희 반은 모두 일곱 명이었는데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저희 선생님은 아주 친절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여선생님은 저희들에게 매주일 성경을 잘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토요일 오후에는 우리들을 초청하여 성경도 가르쳐 주며 또한 우리와 함께 여러 가지 놀이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그 선생님 집에 가서 놀고 있을 때 선생님이 카드를 한 뭉치 들고 오더니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카드놀이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후에 카드놀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얼마 안가서 카드놀이에 재미를 붙여

더 많은 시간을 카드놀이 하는데 소비했고 결국 성경 배움은 줄이고 카드 놀이하는 시간을 더 늘리자고

선생님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자 주일날과 토요일 오후 내내

다른 곳에 가서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일하교 시절이 지나간 후에 우리 반 일곱 명 중 둘은 이미 교수형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은 현재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고 그리고 또 한명은 행방불명이 되어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방불명된 친구는 재판 중에 탈출하여

지명수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방이 알려지면 그도 곧 체포될 것입니다.

이제 저도 그 일곱 명 중 하나로서 경찰 당국에 의해 지명수배가 되어 있고

저의 거처가 알려지면 곧 체포될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치자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두 손을 내 저으며 뛰어 내려오더니 이렇게 외쳐댔다.

"오, 나의 하나님! 제가 바로 그 선생이었습니다."

녀는 그의 발 앞에 쓰러져 죽은 듯이 있었다. 온 교인들은 그 여자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여, 당신의 자녀들이 세상에 살면서도 카드놀이를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정말 카드 뭉치가 있다면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것을 불태워 버려라.
 
마지막으로 영화에 대해서 한 번 더 언급하고자 한다. 당신은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길게 논하고 싶지 않다. 영화는 이미 언급했던 연극보다도

더 사악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사로잡는 영화는 오늘날 사람들을 형편없이 타락시키며 범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배우들의 인격에 대해서 실망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영화배우들이 다 부도덕한 비윤리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배우들의 사생활이 매우 복잡하고 순결하지 못하며

재혼의 경력이 많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현대 여성 가운데서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 자매를 알고 있다.

그 자매는 어느 목회자인 아내였다. 내가 처음 그녀를 알았을 때 그녀는 영화 배우였다.

그녀는 배우였지만 모든 면에서 훌륭하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배우들의 생활이 가장 무서운 유혹을 받고 있으며

또 실제로 많은 남녀 배우들이 그 유혹에 빠졌다.


대부분의 영화들이(나는 교육적인 영화는 여기서 제외시킨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의 삶과 순결한 가정생활에 가장 큰 위협과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러한 현상을 알면서도 영화를 보러 갔을 때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다른 여러 가지를 많이 이야기 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다만 몇 가지 예를 들어

그 원리들을 제시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토레이 목사님,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하며 더러운 농담을 하는 것이 죄인 것처럼,

춤추고 연극 구경하러 가고 카드놀이를 하며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까?"


아니다.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그러면 도대체 그러한 것들이 뭐가 해롭다는 말입니까?"하고 되물을 지도 모른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즉 그러한 일에 탐닉하고 몰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러한 일에 빠져 즐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되며,

자연적으로 그것에 기도의 능력을 빼앗겨 버린다.


나는 우리의 모든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되기를 원한다. 아무리 그러한 것들이 순수하고 차원 높으며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그것이 나에게서 기도의 능력을 빼앗아 간다면

나는 그것들을 여지없이 포기하고 말 것이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한 나의 모든 진술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 이상 춤을 추지 말 것이며,

더 이상 카드놀이를 하지 말 것이며, 더 이상 영화관이나 극장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율법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나는 지금 이러한 문제들을 세상 불신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현재 그들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기도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느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춤을 추고, 극장에 가며, 카드놀이를 하고

그 외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일들을 습관적으로 행할 때

그들은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게 되고 무기력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제까지 진술한 것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자. 하나님은 날마다.

그의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것을 일상생활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무엇이나 다 응답하시고 시행하신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연구하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을 본능적으로 판단하여,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그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은 잘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우리 모두 본문에 서술된 기도의 응답에 대한 놀라운 특권의 장소로 들어가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