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찬양과 경배 계4:2~11 출처
여주봉 목사
◑1.찬양과 경배는 최고 형태의 예배이다.
▲1. 찬양과 경배는 그 자체가 예배이다.
찬양과 경배는 예배를 준비하는 순서나 순서 사이를 매끄럽게 해주는 깍두기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준비찬송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집회를 가도 30분 동안 실컷 경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목사님이 올라와서 종을 치고
정식으로 예배를 시작하지요. 그것은 옳지 않은 이해입니다.
그랬다면 그동안 드린 찬양은 누구이게 드린 겁니까? 찬양 자체가 예배입니다.
찬양과 경배는 최고 형태의 예배입니다.
▲2. 우리의 모델은 하늘나라 예배입니다.
계시록 4장 5장에 나옵니다.
계4장 2-11절입니다.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것이 하늘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델이 하늘의 예배라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예배의 모델이 하늘의 예배인가?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것과 우리의 예배의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의 하나님께 중심에서부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계4장5장을 읽다보면. 어떨 때는 스랍들이 불쌍해요.
하루에 24시간 1년 365일 영원토록 계속 찬양합니다. 생긴 모습도 괴물 같아요.
얼굴에 눈이 가득찼어요. 온 몸이 껌뻑껌뻑합니다.
그리고 24장로도 불쌍해요.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다가 찬양과 경배가 시작되면
면류관을 벗어던지고 납작엎드려 찬양합니다. 그리고 찬양이 끝나면 다시 옷을 털털 털고 앉아 있다가
찬양이 시작되면 다시 면류관을 벗어던지고 엎드려 경배하고 그럽니다. 어떻게 보면 불쌍합니다.
그런데 죠나단 에드워드 이야기했지요.
'어느날 산책하다가 기도하는데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되었다.'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을 깨달아 안 것입니다.
그분의 낮아짐 겸손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성품을 보았을 때 모든 것이 비워지고
주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처럼 거룩해지기를 원하는 열망이 샘솟았다고 그러지요.
저는 방위 출신인데 폐결핵을 심하게 앓아서 방위였습니다. 휴가 나왔을 때 기도원에 기도하러 갔어요.
특별한 기도제목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강사가 치유사역자였습니다. 치유간증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뒤에 앉아 있는데 하나님이 그분은 매우 사랑하시고 나는 안사랑하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사실은 그것이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의기소침해 있었어요. 예배가 끝나고 기도실에 기도하러 가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배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게 방언으로 기도가 나와요.
용암이 분출되는 것처럼. 그때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리는 소리인데 하나님이 그러셔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내가 답변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느니라고 하셔요.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 다녔고 19살 때 집사가 되었습니다.
제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시고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날 하나님의 사랑의 일부를 깨닫게 하셨어요.
성경적인 표현으로 하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바 되었다고 했는데
그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만큼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어요. 대통령이 부럽지 않고 재벌이 부럽지 않았어요.
너무 너무 감사하고. 환경이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이땅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되 부분적으로밖에 못 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할 때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지요.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보고는 살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바위 틈에 두고 지나간 후에 등만 보이겠다고 합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게하겠다는 말입니다.
고전3장 18절은 너무나 중요한데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따라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땅에서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당
시 거울은 구리거울로 희미하게 보이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도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임하셔서 자신의 이름으로 반포하십니다. 그분의 성품을 계시하십니다.
그러자 그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그것이 죠나단 에드워즈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이사야에게 스데반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보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봅니다.
그래도 그분만을 원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우리의 모든 것이 비워지고 주님으로 충만케 되기를 바랍니다.
환경이 중요하지 않고 그분의 뜻만이 이루어지도록 그분의 뜻만을 구하는 자리로 나가게 되는데
하늘에 있는 스랍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원하겠어요.
그것은 그들에게 부담이 아니라 특권이요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장로들인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의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정확하게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모델입니다.
▲3 하늘의 예배가 신약의 예배입니다.
하늘의 예배가 우리의 예배의 모델인 것은 행15장에 나오는 말씀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행15:15-18절입니다.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 예배를 잘 살펴보면 하늘의 예배가 신약시대의 예배이며 우리의 예배의 모델이 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야고보가 하는 말입니다.
이 회의는 기독교의 성격 복음의 성격 예배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 핵심적인 사건입니다.
회의가 열리게 된 계기는 정통 유대인들이 이방 기독교인들에게도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라고 강요한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기독교인을 대표하는 바울과 바나바
유대기독교인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의 장로들 베드로 야고보 이런 사람들이 모여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핵심적인 회의입니다.
이 회의 이슈는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받게 해야 하고 율법준수의 의무를 지워야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모세의식적인 법이 기독교인에 의해 지켜져야 하는 것이 핵심적인 이슈였습니다.
행15장을 보면 이 회의에서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 이끄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합니다.
또 바울과 바나바도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들을 통해서 역사하셨는지를 보고합니다.
그들에게 유대인의 전통과 의식들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고 예배형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예수님을 전했는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반응하던 그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웠는지를 말합니다.
그러자 이제 최종적으로 야보고가 일어나서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가 잘 나누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정확하게 뒷받침한다고 하면서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세에는 하나님이 다윗의 장막을 세운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슈에 대해서 답변으로 제시하기를 아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모세의 언약의 부활이나 지속이 아니고 다윗의 장막의 회복이다고 답변합니다.
그래서 이 장막에서는 다시 말해서 기독교의 예배에서는 모세의 의식이 아무런 자리가 없다,
다윗의 예배의 질서가 세워진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 결과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모세율법을 따라는 의식과 예배가 놀랍게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데 이 회의 결과 교회는 모든 주장을 물리치고 즉 모세율법을 따르는 제사와 예배를 물리치고
다윗의 장막의 예배를 모든 기독교의 예배의 실천모델로 채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도 없어졌고 제사제도도 없어졌고 모세의 행위에 속한 모든 제사제도가 없어졌고
레위지파에 따른 제사제도도 없어졌어요. 그리고 신약의 예배에 있어서
모세의 질서를 따른 질서가 아니라 다윗의 질서를 따른 예배가 채택된 것입니다.
즉 다윗의 장막의 예배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장막은 무엇입니까? 아모스9장을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에 보면 다윗의 장막은 크게 두 가지를 의지합니다.
하나는 다윗의 왕국으로서의 다윗의 장막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다윗의 나라를 말합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이사야 16장 5절입니다.
5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여기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세운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나라 왕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됩니다.
이사야 9장 6-7절도 같은 구절입니다.
두 번째 종류의 다윗의 장막은 무엇인가?
다윗이 세운 새로운 예배질서로서의 다윗의 장막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위해 세운 장막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종류의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삼하 6:17절입니다.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대상 15장 1절입니다.
1 다윗이 다윗 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궐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위하여 장막을 치고
2 가로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택하사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영원히 저를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하고
이렇게 다윗이 언약궤를 들이고 장막을 친 다음에 그곳에 새로운 종류의 제사장을 세워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예배하게 했습니다. 거기에 어떤 종류의 예배가 드려졌는가?
다윗의 장막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아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영광도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시26:8절에서 말합니다.
8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여기서는 다윗의 장막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도 그곳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분의 영광을 구하며 그분을 알기를 추구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27편 4절입니다.
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이처럼 다윗의 장막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다윗의 장막에 자기가 처음에 봉헌했을 때 외에는 전혀 그곳에서
짐승의 제사가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은 그곳에 찬양사역자를 대신 세워서 24시간 365일을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바라보며 찬양하게 했습니다. 대상 16장 4절입니다.
4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5 그 두목은 아삽이요 다음은 스가랴와 여이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맛디디아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이라 비파와 수금을 타고 아삽은 제금을 힘있게 치고
6 제사장 브나야와 야하시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
이것이 다윗의 장막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아까 하늘의 예배를 보았지만 1000년 후에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오신지 100년정도 되었을 때
계시록을 쓰셨고 하늘의 예배를 계시해주셨는데 하늘의 예배가 1000년전 다윗의 장막에서 드려졌던 예배와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장막에서 정확하게 하늘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상징합니다.
스랍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을 경배했는데
다윗의 장막에서는 그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아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분을 경배했습니다.
24시간 365일을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찬양하고 예배드렸습니다.
1천년 후에 보니 다윗의 장막이 하늘의 에배가 이땅에서 드려진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보고가 모세의 질서를 따르는 예배가 아니라
다윗의 퇴락한 예배질서가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다윗의 장막이 회복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그 유업이 성취되는 것을 당연히 포함하지만
행15장의 문맥이 당시의 예배와 관련되었던 것을 본다면
이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다윗의 장막의 예배의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니까 정확하게 그것이 하늘의 예배가 우리의 예배 신약의 예배의 모델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찬양과 경배가 최고의 형태의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을 찾고 그분게 경배를 드리는 것이 우리가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 교회는 성가대를 세우지 않습니다. 왜 안세우느냐?
우리는 여기에 다윗이 세운 아삽의 무리들은 성가대의 원조라고 말하지요.
그리고 그 성경적 기초 위에서 오늘날 성가대를 세웁니다.
그런데 당시 아삽 무리들이 회중들 앞에서 찬양하고 회중들은 그들의 찬양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장막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머무는 그곳에서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동안
차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는 자들이었지 사람들에게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위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사람들을 향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우지 않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부흥이라는 책에서 신앙이 타락할수록 예배가 형식화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103쪽입니다.
교회가 부흥을 맞지 않을 때에 성가대를 강조하고 또 성가대에 있는 독창자들을 돈주고 사오기고 합니다.
그리고 회중들은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합니다.
성가대는 그들을 위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왜 성가대를 독창자들을 돈주고 사옵니까?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집회에 갔더니 그 교회 찬양팀들이 와서 찬양을 했어요. 그리고 나서 담임목사님이 그들이 어디 유학갔다 왔다고 자랑을 하더라고요.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했다면 초점이 전혀 다르지요.
성령을 소멸하는 일입니다. 원래 성가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찬양과 경배는 그 자체가 예배이며 최고 형태의 예배입니다.
찬양과 경배 끝나고 교회에 오면 예배 끝나고 교회에 온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예배 끝나고 교회에 오신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2.찬양과 경배
우리가 배워야할 중요한 제자도입니다. 왜냐하면 찬양과 경배는 노래를 배워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찬양과 경배하는 자세와 태도 가치를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찬양과 경배를 싫어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
분들은 하늘나라에 갈지 말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연일 연야를 경배만 드려야 할 것인데.
사실 우리가 배워야할 제자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찬양과 경배입니다.
이것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노래를 할지 몰라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워야 합니다.
가치관 자세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1 찬양과 경배의 정의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인하여 그분께 찬사를 드리는 것과
하나님 그분 자신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1)찬양과 경배는 찬사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하나님께 나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아름다운 일들을 보고 찬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창조하신 하나님 구원하신 하나님 날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찬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창조하신 하나님께 찬사를 드립니다. 그것이 찬양과 경배입니다.
시104:1-6절입니다.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2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5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6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계시록 4장 9-11절입니다.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직접화법의 찬양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십니다고 그분께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4장도 그럽니다. 주님께 직접적으로 찬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고 직접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개념이 거의 없어요.
지금 우리가 드리는 거의 많은 찬양들이 영어찬양을 번역했는데 영어찬양은 직접화법의 찬양인데
번역하면서 간접화법으로 바꾸었어요. 노래 부르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경배하는데는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은 곳에서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 높여 다 찬양하라 귀하신 나의 하나님 호산나 높이 외치세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원래 가사는 주님 우리가 찬양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호산나 높임받으소서 주님입니다. 하나님 그분께 찬사하고 높이는 찬양을 간증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경배가 아니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물결 찬양집을 새로 내는 이유는 직접화법을 살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간접화법의 찬양 간증도 자리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경배로 깊이 들어가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을 중심에서부터 경배하고 찬양하는 곳에서는 직접화법의 찬양이 필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깊이 예배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해보시면 압니다.
하나님을 찬사하되 구원의 하나님께 찬사드립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찬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계시록 5장 11절입니다.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날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찬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건 구원자 하나님이건 매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건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과 성품과 영광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만 분명하게 인식해도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 앞에 납작 엎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단순히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만큼 경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경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노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은 얼마나 노래를 잘하여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닌 오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나 에이든 토저는 오늘날 예배가 오락이 되어버린 것을 강력하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락이 되어버린데 사용된 것이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찬양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 노력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오락입니다.
너무나 타락된 예배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팽배해 있습니다.
예배인도자도 노래만 잘한다고 인도자가 될 수 없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어요. 본인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데요.
(2)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인하여 찬사를 드릴 뿐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신을 인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둘째가 대학원 졸업반인데 초등학교 때 그래요. 하루는 그래요. 저는 아빠가 좋아요.
왜? 그러니까 아빠가 옷도 사주고 학교도 보내주고 그러잖아요. 학교 선생님이 하라고 한 것 같아요,
선생님이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는 아이니까. 그런데 제가 그 말을 듣는데 기쁘지 않더라고요.
왜냐하면 내가 자기 아빠니까 기뻐해야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아름다운 일들을 인하여 그분께 찬사도 드리지만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 그분 자신을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빌4장 4절입니다.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말은 주님이 너희의 기쁨이 요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시35:9절입니다.
9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다윗을 보십시오.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올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춤추며 찬양합니다. 그런데 미갈이 싫어하지요.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서 찬양했고요 미갈은 그것을 싫어했어요.
그날짜로 미갈은 다윗의 신임을 잃었어요. 그래서 아이가 없었어요.
다윗이 왜 그렇게 기뻐했을까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언약궤에 붙어있는 금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자기 고을로 찾아오신 것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주 찬양합니다. 내 마음을 다해
주가 하신 놀라운 일들을
세상에 모두 말하리라.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주님 자신께 집중하고 찬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이 찬양이 그런 찬양입니다.
예배는 생물이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왕이면서도 신하들 앞에서 자기 체면 집어던지고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어떤 분은 제게 이렇게 말해요. 목사님은 예배에 쉽게 몰입되는 것 같은데 자신은 잘 안된다고 해요.
여러분 예배가 갑자기 다윗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경배와 찬양을 통해서 함께하셨는데
교회에 돌아가서 이것을 도입한다고 당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생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주님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에
우리 온 삶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수록 우리 예배는 깊어질 것이고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형식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추구하고 찾는 것에서 소홀이 하면 우리 예배는 형식화됩니다.
어느 수준에 올라가면 영원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배는 살아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자라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도 어느 수준이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어요.
이런 생각을 갖는 자체가 잘못되었고 퇴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고 배고프고 찾는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이런 삶을 멈추는 순간부터 우리 예배는 퇴보하기 시작합니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왜?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행하심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모든 핍박에 대해서 말하면서 말합니다. 고후6장 4절입니다.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이처럼 핍박에 대해서 말하면서 10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주님으로 인해서 항상 기뻐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그의 모습을 보세요. 자기는 아시아로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막으셨어요.
환상을 통해서 빌립보로 갔습니다. 일은 진척되지 않고 핍박을 만났습니다. 채찍에 맞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았고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알았기에
하나님께 감옥 중에서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찬양하고 있지요. 이것이 예배입니다.
행 16장 25절입니다.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에 감동을 하셨든지 옥 자체를 흔드셨고 옥문이 열리고 그랬습니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다윗을 보세요. 시편 9:1절입니다.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시28편 1절입니다.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7절입니다.
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하박국 3장 17절입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8절입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핍박의 상황 가운데서도 말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 이것이 예배입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입니다.
10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헤미야 시대가 어느 시대입니까?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하나님의 성전을 불탄 채로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리멸열라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시대입니다.
느헤미야가 그 소식을 듣고 금식하고 기도한 다음에 와서 성벽을 재건하는 상황입니다.
낮으로 일라고 밤으로 보초서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보면 흉년이 들었어요. 이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일은 여호와의 성일이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함이 너희의 힘이다.
제가 이런 것을 잘 몰라서 개척초기에 하나님이 중보기도로 인도하셨는데
오늘날 처한 상황을 보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어떤 때는 예배시작하면서 중보기도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위기가 초상집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주일날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하 6장 41절입니다.
41 여호와 하나님이여 일어나 들어가사 주의 능력의 궤와 함께 주의 평안한 처소에 계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컨대 주의 제사장으로 구원을 입게 하시고 또 주의 성도로 은혜를 기뻐하게 하옵소서
시40:16절입니다.
16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사 56:7 습3장 17절 등등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찬양과 경배는 찬사와 기뻐하는 것입니다.
▲2 경배의 자세
(1)마음을 다해
찬양과 경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곡조도 화음도 음정도 아닙니다. 물론 이것들도 중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악기를 다루더라고 실력있게 다루라고 합니다. 이런 부분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배자의 마음입니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의 자세인데 핵심은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예배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말은 가사 하나 하나에 마음을 실어 그분께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교회 초기에 200명 이상이 방문했는데 다섯명만 남았어요.
두 가지 이유였는데 예배형식이 달랐기 때문이고 두 번 다시 못 올 정도로 메시지가 강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들이 떠나가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분당으로 이사온 것이 94년 9월 말이었어요.
처음에 가정에서 모이기 시작했어요. 주일날 두 가정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저녁예배는 가까운데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드리고 오면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과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입술 뿐의 예배드리고 있었어요.
찬송도 사람에게 하고 있고 대표기도도 사람 들으라고 합니다.
기도라는 형식을 빌어 자기 정견발표를 합니다.
설교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길은 영어조차도 없었어요.
하나님이라는 말만 빼면 민방위교육장에서도 해도 다름이 없었어요.
그것이 무슨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까? 이런 예배를 드리고 오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예배를 안드리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어요. 제 속에서 성령님이 그러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방문했다가 그들이 생각했던 예배의 모습과 다르다고 돌아갈 때
그들을 붙잡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예배할 수가 없었어요.
여러분 오늘날 현실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전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일말의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데이트와도 같은데 남녀가 만나서
서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어요. 오히려 딴 여자 생각하고 있고 딴 여자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 교제가 되겠어요. 그런 사람과 결혼하시겠어요.
오늘날 예배하러 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갖 머리 속에 딴 것으로 가닥하고 하나님에 대해 관심도 없어요.
하나님께 예배한다 하면서 사람들만 있어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까?
어떻게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까? 어떻게 해서 저들을 감동시켜서 교회에 붙잡아 놓을까? 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교회 성장할까? 여러분 축제예배를 드린다는 많은 교회들이 교회성장의 수단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줄 아세요? 하나님께 대한 일말의 관심도 없이 그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차라리 예배라는 말을 빼고 오늘 엔터테이먼트가 있겠습니다고 하면 죄나 안짓지.
만군의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그러고 있어요.
그렇게 하면서도 전통적으로 순서만 지키면 참다운 예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주일날 찬송가를 부르면 괜찮고 경배와 찬양을 부르면 이상하게 생각하고요.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어떤 가치를 가지고 예배해야 하는가는 따져보지도 않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불러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바라보며 잡다한 생각들을 다 내리고
안내려지면 하나님께 내려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찬양가사 하나하나에 마음을 실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인도자가 그날 어떤 찬양을 드릴까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더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저는 지체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찬양은 우리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어쩔 때는 곡조를 따라 고르는 분들이 있어요.
그것은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곡을 골라야 합니다.
그리고 지체들은 마음을 다해서 경배해야 하는데 마음을 실어서 예배할 수 없으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찬양과 경배 중에 주님 내 삶을 드려요 내 삶의 소유 하나님의 것입니다는 곡이 있지요.
그런데 자기는 전혀 그렇게 살지 않아. 살지 않으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은 입술 뿐입니다.
그것은 거짓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부르지 말고 하나님 내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주님의 피로 사셨기에 하나님의 소유 삼으셨으니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제가 지금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시고 내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훨씬 정직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오히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해 경배할 수 없으면 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2)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서야 합니다.
시24:1절입니다.
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그러니까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누구도 우리 의를 가지고 나갈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그래서 버림받았습니다.
그 당시 누구보다도 뛰어난 소위 말하면 종교생활을 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자기 의를 의지해서 나갔습니다.
하나님 나는 토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는 토색하고 간음하지 않는 자와 같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는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 말로는 하지 않아도 자기 행실을 의지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애통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십자가의 공로만 의지해서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처럼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로 나오는 자세입니다. 사실 성도들이 예배 가운데 그런 자세로 나와보세요.
하나님께서 그런 예배 가운데 얼마나 함께하겠어요.
그렇게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의지해서 나오기 때문에 담임목사가 주일날 아침에 부부싸움을 해도
애통하는 마음으로 나와서 예배할 수 있지요.
▲3 삶이 예배로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 예배와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예배로 드려져야 합니다.
롬12장 1절입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 신앙생활은 텔레비전 체널 바꾸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월요일 채널 화요일 채널 토요일 채널로 살다가 주일날 채널만 바꾸면 하늘이 열릴 줄 압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늘이 그렇게 열리지 않습니다.
지체들이 주중에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는지가
주일날 얼마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예배를 드리는가를 결정합니다.
오늘날 신앙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자기 방법대로
자기의 목적을 위해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가 자기중심적으로 살다가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드리면
신앙생활인줄 압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주일날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헌금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주중에 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 힘드니까 애통해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중에 살다가 주일날 나와서 함께 주님을 기뻐하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주중에 얼마나 성도들이 주님과 동행하느냐에 따라 주일예배가 결정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우리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야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진짜 하나님을 찾고 사모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가면서 삶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면 입술 뿐인 예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중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찾고 나가는 것은 많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삶에서 실제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예배 또한 입술 뿐인 예배가 됩니다.
삶과 예배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3.경배의 표현
우리가 어떤 표현으로 경배로 나갈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전 존재로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으로 우리 몸으로 생각으로 힘으로 전 존재로 예배해야 합니다.
▲1 엎드려 절하며
시138:1-2절입니다.
1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2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한다는 말은 엎드려 절한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보세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이름을 반포하셨습니다.
성품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하늘의 장로들을 보세요.
계시록 4장에서 보면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엎드려 경배합니다.
이렇게 경배하는 행위가 네로 황제 앞에서 대신들이 아부하기 위해서 엎드린 자세와 같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2 손을 들고
딤전 2장 8절입니다.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애가 3장 40절입니다.
40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보세요. 회개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높이는 자세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세로
마음과 손을 들어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꼭 손을 들어야 하느냐?
우리 찬양이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꼭 손을 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몸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있는 곳에 마음도 함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있는 것과 행동이 함께할 때 더 풍요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지금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지요. 4강에 올라갔다고 합시다.
지금 후반 30분인데 독일에게 3대 0으로 지고 있어요. 그런데 불과 15분만에 4골을 넣어서
결승에 진출했어요. 그러면 여러분 중에 잘했네 그러고 있을 사람이 있겠어요.
한 골 한 골 들어갈 때마다 온통 난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축구보다 못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축구장 가서는 진짜 망나니처럼 생쑈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체면 차리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찬양은 마음으로 하는 거 잖아요 합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기쁘면 마음 뿐아니라
몸으로 찬양하게 될 것인데. 사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진정한 예배를 드리려면 체면차리고 오면 안됩니다.
섬기는 것이 예배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라트르요가 섬기다는 말과 예배하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어요. 식사를 같이하는데 당시 식사는 한쪽으로 기대고 합니다.
발이 이렇게 가니까 창녀가 와서 머리를 풀고 와서 징징거리며 웁니다. 눈물 콧물을 다 쏟아요.
그리고 그것을 머리로 닦아요.
당시 팔레스타인은 흙먼지가 날리는 곳입니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발을 눈물로 닦았으니 어떻겠어요.
거기에다 입을 연속해서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화를 냈겠지요.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누구인지도 몰라 그러고 있습니다. 이 창녀는 돌이킨 창녀지요.
너희는 발을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기본적인 손님대접하는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럽니다. 큰 돈을 빚진 사람과 작은 돈을 빚진 사람이 다 탕감받았다면 누가 더 감사하겠느냐?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 죄가 더 작아서 작게 탕감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죄는 엄청납니다.
그런데 그들이 몰라서 그렇지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바리새인들처럼 나옵니다.
체면 다 차리고. 옷도 단정하게 입고 오는 것도 좋지만 여러분 잘못하면 외부적인 것을 따지다보면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데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어떤 분은 그럽니다. 우리가 대통령 앞에 갈 때도 정장을 하고 가는데 만군의 하나님 앞에 나가는데
옷을 대충입고 가면 되느냐? 그런데 여러분 그분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아세요.
내가 아버지 앞에 갈 때 정장하고 가서 아버지 문안 여쭙니다. 그러면서 공식적으로 할 말 외에는 안합니다.
자기 속은 전혀 드러내지 않아요. 그러면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가 가능하겠어요.
그러면 여러분 야 징그럽다 치워라 그러겠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대통령 앞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앞에 가는 것입니다. 체면 차리고 오면 무슨 예배가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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