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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경배의 가치와 단계

LNCK 2018. 12. 13. 18:54

7강 경배의 가치와 단계                      계4:11                      출처

   

여주봉 목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찬양과 경배할 때 이런 가치를 전제로 하고 나갑니다.

매번 가치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체들이 이런 가치를 알고 이런 가치의 토대 위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렇게 나갈 때 하나님 앞에 더욱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1.찬양과 경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계시록 411절입니다.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예배가 찬양과 경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는 말에 대해서

반박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고 실제로는 그렇게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찬양과 경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되게 위해서는

아래의 몇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찬양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위로와 기쁨을 주실 수 있으나 우리 위한 것은 아입니다.

우리가 찬양을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안에 감격이 넘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과 경배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찬송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저기 집회 인도하러 다니면서 예배분위기 맞추기 위해 다니는 찬양팀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인도하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찬양의 제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1315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제사라는 말은 희생을 말합니다. 자기부인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이 내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사역하던 알 티 킨달 목사님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일 때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인가를 끊임없이 해야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는가 우리를 기쁘게 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선물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고민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편에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찬양과 경배는 사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2)인도자가 먼저 경배해야 합니다.

 

하늘나라 예배가 우리의 모델입니다. 하늘나라 예배를 보면 스랍들이 먼저 경배합니다.

그들은 예배인도자인데. 여러분 그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고 믿고 하나님을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그들의 초점이 온갖 사람들에게 있으면서 다시 말하면 24장로들과 천천만만 천사들과

앞서간 믿음의 성도들에게 있으면서 이제부터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쪽이 먼저 하고 다음에 저쪽이 합니다 돌림노래로 한번 해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한번할까요. 베드로 사도 한번 춤을 춰보시죠.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초점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들 자신이 먼저 보좌를 바라보며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께 경배와 찬양과 찬사와 영광을 돌릴 때 24장로 천천만만 천사들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경배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말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경우에 찬양인도자들이 자신들은 경배하지 않습니다. 예배 인도하는데 바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신 것 중 하나가

예배를 인도하려고만 했지 자신은 예배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도자가 먼저 하나님을 경배하며 나갈 때 회중들도 온전히 예배하며 나갈 수 있습니다.

 

앤디 파크가 간증했어요.

수천명 수만명과 함께 찬양과 경배할 때 자신도 모르게 연주회 형태로 변해감을 깨닫고

다시 한발짝 뒤로 물러선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을 경배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아야지 자신이 영광을 받으면 루시퍼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봐도 찬양과 경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예배한다는 것에 대해서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는 전혀 그렇게 안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3)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이 부분은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한 가지 예만 살펴보겠습니다.

미국 분인데 그분이 집회를 인도하고 피자집에 갔답니다. 옆 테이블에서 생일축하곡을 부르더랍니다.

직원들이. 그날만 해도 수많은 사람에게 한 것이지요. 그런데 직업상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는데 하나님께서 감동을 하셨답니다.

오늘날 내 백성이 나를 예배하는 모습이 바로 저런 모습이다고 하더랍니다.

 

4)예배드리기를 선택해야합니다.

 

여러분 예배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 이해해서 나와서 앉아있으면

저절로 입이 벌려지고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 마음 속에서 경배가 드려질 줄 압니다.

아닙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만 감으면 저절로 기도가 나오던가요. 아닙니다.

기도하려고 해도 생각나는대로 다 해도 5분도 안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하니까 기도를 통해서 나가면 나갈수록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경배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주일날 아침에도 어떤 때는 여러 가지로 복잡합니다. 항상 충만하고 임재로 함께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저는 이것을 생각합니다.

내가 여러 가지 방해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방해된다면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갈 예배가 방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갈 예배가 방해되는 것을 인식하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집중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되 하나님에게 돌아갈 합당한 예배가 드려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선택하고 추구합니다.

생각이 여러 가지로 복잡하면 복잡한 생각을 잠잠케 해달라고 기도하고

마음이 모아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은혜 달라고 구하지만 적극적으로 주님을 예배하기를 선택합니다.

 

▲2.찬양과 경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추구합니다.

 

1)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을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가 이처럼 경배로 나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성령의 조명으로 개인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면 당연히 예배를 올바로 드립니다.


반대로 삶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규례들을 지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면

예배만해도 절차와 규례를 지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배순서에 찬송가 하나 들어가고 부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처럼 반복하는 것을 못 견딥니다.


자기가 연애할 때는 애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했으면서.

신앙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구하기 위해 사모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더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게 됩니다. 더 원하니까 더 주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이해가 잘못되면 예배를 하나의 격식 규례와 규칙으로 이해하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종교적인 의식 하나 때우고 가는 것입니다.

예배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하나의 의식을 지키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어느 교회 이야기입니다. 11시에 시작해서 약 50분 드립니다. 그전에는 식사하고 오후예배로 다시 드렸어요.

그런데 식사하고 그리려니까 귀찮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50분 예배드리고 한 30분 쉬었다가 저녁예배를 또 드립니다.

30분 드린다고 합니다. 제가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마음에 아프던지요.


뭐하려고 또 예배를 드리는지 모르겠어요. 아까는 오전 예배 의무했고 이제는 저녁예배 의무하려고.

그것이 무슨 예배입니까? 하나님이 시간을 정해서 오전 예배의무하고 저녁예배 의무하면

아 너희들 의무 다했네. 오늘 출석 잘했어 내가 복줄게. 그런 하나님입니까?

거기에 무슨 하나님과 친밀함이 있겠어요. 그냥 격식 의무 하고 돌아가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되냐면 신앙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본질을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추구합니다.

 

그전에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열망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을 안다면 하나님을 우리도 예배하고 열망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여러분 아가서가 솔로몬과 술람이 여인의 사랑의 노래를 말하는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열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가서 49-15절까지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열망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12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86절입니다.

6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열망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17장을 보면 예수님의 기도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저들에게 알리리니 이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우리들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들안에게 거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이토록 열망하며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 또한 하나님께 그렇게 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처럼 찬양과 경배는 데이트와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도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올 때 하나님과 데이트 하러 나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침에 감동하시는데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을 깨뜨리라고 해서 명령하고 기도했는데

식사할 때 이런 감동이 와요. 우리 예배를 방해하는 가치관 중에 하나가 유교적인 가치관이라고 하셔요.

이것이 예배를 방해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엄하신 대왕님 앞에 나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체면을 차리고. 우리는 데이트하러 가야 하는데. 이렇게 신부에 대해서 안달이 나서

견디지 못하는 신랑 앞에 아버지 앞에 자녀로서 나가야 하는데 우리의 유교적인 관념이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데이트는 두 사람만을 위한 것입니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과 데이트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점점 진해지는데. 아가서 보면 내용이 대단히 진합니다.

찬양과 경배는 부부 사이의 은밀한 시간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두 사람만의 시간입니다.

거기는 아무도 끼어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자식도 부모도 이웃도 끼어들지 못합니다.

오직 두 사람만의 시간입니다. 찬양과 경배가 그렇습니다. 그 시간에는 아무도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사도적셀교회라는 책에서 보면 그분은 셀전체의 목적중의 하나로 전도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셀이 모일 때마다 전도대상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강조하는 분인데도

일단 하나님께 경배를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 신경 다 끄고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합니다.

왜요? 그때는 부부사이의 은밀한 시간처럼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야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부부사이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제가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시는 것 같아요.

야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한데요. 여러분 아내의 예쁜 속옷은 오직 남편만을 위한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보지 않지요. 우리의 경배가 그렇습니다. 우리의 경배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경배하러 나가는 자세입니다.


대왕 앞에 엄숙하게 체면을 차리고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신랑앞에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아버지 앞에

단 둘의 시간을 보내며 주 앞에 서는 것이 찬양과 경배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비유를 바꾸면 마음을 열고 어린아이처럼 나가야 합니다. 혹은 마음을 열고 아내처럼 나가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경배로 나갈 때 목사로 나가지 않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는 목사이고요.

교회를 인도할 때는 목사지만 예배할 때는 목사로 나가지 않습니다. 자녀로 나갑니다. 신부로 나갑니다.

 

2)따라서 친밀함을 위해 마음문을 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이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밀함의 하나의 속성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 사이에도 친해야 속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부부 사이여도 친한 관계가 아니면 속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공식적인 이야기만 합니다.


여러분 친한 부부는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부부입니다.

여러분 다 그러시지요. 그런데 의외로 적잖은 부부들이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속 마음을 털어놓고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합한 자가 누구였어요?

다윗입니다. 다윗의 시편들을 보세요. 얼마나 속 마음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경배로 나갈 때 하나님 앞에 체면 차리고 나가면 안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앞에 나가는 것처럼 차려입고 자기 속 마음을 가리고 말도 점잖게 하고 그럽니다.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을 다 알고 계십니다.

어린아이처럼 나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경외함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친밀함에서 나옵니다.

YWAM에서 나온 책인 경외함이라는 책도 정확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회중이 다 참여하도록 합니다.

 

4-5장에 천상예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는 모두가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일부 사람들만 예배하고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지 않습니다.

일부가 회중을 위해서 노래하고 회중은 앉아서 듣고 감상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천천만만이 모두가 한 목소리로 물소리와도 같이 너무나 장엄한 모습이지요.

 

또 그러면서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각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민제사장설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가 하나님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높이고 하나님을 구하고 나가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어요. 인도자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경배하며 나가지만

각자가 하나님을 찾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찬양팀들이 찬양하는 것을 보지만 인도자들이 예배중에 멘트를 넣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한 것 외에는. ? 각자가 주님을 찾아 가는데 멘트를 넣으면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사람들로 어떻게 해서든 예배하려고 만드려고 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는 예배하지 않으면서.

 

이런 것과 같아요. 중매쟁이가 중매를 했으면 빠져야지요. 소개만 시켜주고 자리를 비켜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치고 앉아서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과 같아요. 이때는 손도 좀 잡아야지.

또 와서는 신랑이 좀 무드있게 이끌어야지 하면 완전히 산통을 다 깨는 것입니다. 분수를 알아야지. 그렇지요.

각자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나가야 하는데 자꾸 예배인도자가 멘트를 넣어서 방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도 그럽니다. 제가 자주 들어가지 못하는데 한번 들어갔는데 인도자가 자꾸 자기 간증이나 하니까

신경질나더라고요. 죄송합니다 표현이 좀. 다른 데였다면 팍 받아버렸을 것인데.

그분이 지금 여기에 있거든요. 제가 들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지금 그 시간은 하나님을 찾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게 해야 합니다.


인도자가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나가면 사람들이 따라갈텐데 자기 간증 들으려고 오지 않았거든요.

바쁜 시간에. 예배 시간에 멘트 하는 것 하나님이 특별히 하라고 하지 않았으면 안해야 합니다.

그런 짓은 하나님께 가야할 초점을 떼어서 자기에게 집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엄청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아까 제 표현이 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4.하나님과 사람을 조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1)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좋은 예가 바알 선지자들입니다. 엘리야와 대결하지요.

 

왕상1826입니다.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신을 조정하려고 합니다. 바알이여 바알이여 하면서 주문을 외웁니다.

오전 세 시간 내내 외웠는데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급해졌습니다. 더 빨리 외웁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조롱합니다. 야 니네 신 자는 모양이다. 외출한 모양이네, 큰 소리로 외쳐보아라 합니다.

그래도 안되니까 몸을 해하면서 바알이여 외칩니다. 그런데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께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해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하나님이 당연히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기도제목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물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 순종하고 나가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기도는 우리 삶에서 날마나 응답하시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악한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돌아올 생각은 안하고 바알선지자들이 했던 것처럼 합니다.

보통 때 하던 대로 안되면 더 세게하고 안되면 금식하고 안되면 자기 죽겠다고 그러고.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해결책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로,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하나님의 길을 찾는 자리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당연히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그런데 경배만 해도 적잖은 경우에 소위 말하는 영성사역을 한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경배해야

성령님이 오셔서 운행하시고 다른 일이 되어지니까 성령님이 오시도록 경배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껏 경배하고 찬양하고 주님을 구하고

주님으로 인해 감사하면 주님이 오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도록하기 위해서 경배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때는 성령님을 초청할 때도 성령님을 조정하기가 쉬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그분으로 하여금 이루시도록 그분을 부리시는 식으로 하기 쉽습니다.

알 티 킨달 예배에 대한 책에서 이렇게 말해요.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할 때 차를 렌트하는 식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차를 렌트하는데 우리 중에 아무도 차에게 인사하고 차의 의사를 묻고 따르는 자가 없듯이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할 때 이처럼 차를 렌트 하는 것처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경배 통해 사람을 조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조정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여러분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설교도 그렇고 리더로서 교회를 인도해 나가는 것도 그렇고 예배도 그렇고

모든 것 면에서 아주 중요한 구절이 고후4장입니다.

고후4장은 바울이 자기는 복음사역을 위해 부름받았기 때문에

소중한 소명을 위해서 모든 숨은 동기를 버렸다고 합니다.


고후4:1-2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말씀만 해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원하는 바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숨은 동기를 가지고 전하지 않고

혹은 말을 속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정직하게 전하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역사하도록 의지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설교할 때도 우리의 설교가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면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 목적을 가지고 그럴듯한 말을 가지고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숨은 동기가 있고요. 자기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표현할지 모르지만

숨은 동기가 있고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리더십 책에 보면 헨리 블랙가비는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전을 보이셨을 때

성도들에게 그 비전을 강요할 정도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까 광고 시간에 하나님이 새물결 선교회를 통해 행하고 계신 것을 나누었습니다.

제 머리 속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행하시고 계신 것이고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그러면 저는 그것을 어떻게든지 여러분이 받아들이고 헌신하도록 감정에 호소하고

그럴듯한 말로 설득하면 저는 여러분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부분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나누면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각자에게 마음속에 깨닫게 하시고 비전을 주시고 동참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비전만 해도 그것을 강요하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배도 그렇습니다. 인도자가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예배하러 나가면 하나님께서 각자의 마음 속에 역사하시고

각자가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인도자가 못하기 쉬운 것이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해서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든지 예배드리게 해보려고 노력하면 이것은 자신부터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예배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도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예배의 초점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시도를 버리고 마음을 가라않히고 자신부터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각 사람 마음을 감동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예배하는 것이건 설교하는 것이건 비전을 나누는 것이건 전도라는 것이건

모든 면에서 아까 말한 고후4장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바울은 숨은 동기를 가지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말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속임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탐심이 탈을 쓰지 않았습니다.

 

예배만 해도 사람의 감정에 호소해서 예배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안좋은 것입니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면 감정이 메마른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각 사람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그들로 예배하도록 인도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며 사랑을 알면 감정이 저절로 따라옵니다.

감정은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발로이되 감정을 불러 일으키려고 감정을 자극하면 타락한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그런데 심각한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 목회자들의 설교가 너무나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한 감동을 가져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마약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깨면 또 가서 먹고 또 취하고.

 

우리 신앙은 개인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그분의 인도를 따라 우리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설교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길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진리를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사람으로 하나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그들의 삶으로 하나님의 길로 전환하게 하시고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의 길로 돌이키게 하시면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서 회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감정에 호소해서 눈물을 뺄 수 있습니다.

진한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적인 노력입니다. 그런데 육신적인 노력으로 절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변화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설교를 한번 보세요. 감정에 호소하던가요.

예수님의 설교가 귀한 것은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주셔셔가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소중하게 여기면 그 길로 돌이키는 사람들은 그 말씀에서 진짜 귀한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도 감정에 호소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한 가지는 흥분을 하게 하면 안되고

오히려 흥분을 가라앉히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흥분시키려고 합니다.


'불길같은 성령이여 간구하는 우리게~'

더 크게 하세요 크게.

그렇게 하면 감정은 업되지만 초점은 하나님께 안맞추어집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사역도 그럽니다. 감정이 업되어 있으면 훨씬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어떤 때는 집회를 가다보면 이런 분위기가 많아요. 어떤 분들은 제 소문을 듣고 사모함의 열정이 충만해요.

그런데 문제는 사모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사람을 본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왔으니 뭐가 되겠지.

분위기만 들떠 있는 것은 안됩니다.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불을 껴야 합니다.


진짜 성령이 역사하려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열망하는 잠잠한 가운데 있을 때 성령님이 움직이십니다.

우리의 기분이 들떠 있는 상태에서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예배만 해도 감정을 들뜨게 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할 수 있는 있어도 경배는 안됩니다.

진정한 경배가 되게 하려면 감정을 가라앉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만 경배하게 해야 합니다. 인도자가 그분만을 경배하게 시작해야 합니다.

   

5.정직성과 진실성을 중히 여깁니다.

 

정직성과 진실성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핵심입니다. 나다나엘을 보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참 이스라엘이라 네 속에 간사함이 없다. 이것이 나다나엘의 마음입니다.

우리 예배에 있어서도 모든 면에서 정직성이 중요합니다.

 

우리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하나님께 고백할 때도 정직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께 찬양으로 고백하는 말이 내 마음의 중심에서 고백할 수 없는 말이면 그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며 주님의 구해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경배만 해도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해 하면 안됩니다.

제가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는데 어떤 한분이 찬양하면서 춤을 추면서 야단이어요.

혼자만 돌아서서 회중을 보면서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침을 튀기면서 춤추며 그래요.

러니까 회중의 시선을 빼앗아요. 그래서 제가 일어나서 돌려놓았습니다.

혼자 침을 튀기며 방언을 하는 것도 좋아요. 그러나 다른 사람을 방해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 같으면 담임목사를 만나서 들었는데 교회에서도 그런답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자기도 흉내네고 방언을 받았다면 자기도 흉내네고 그런답니다.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아서 그런 다면 좋은데 그 배후에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

쇼하여 시선을 끌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정직성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가라지 뽑아 진짜를 뽑을 수 있지요.

그러니까 그분과 하나님과의 문제이니 어쩔 수 없지만 방해하는 것은 막아야 하니까

제가 돌려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6.문화에 발맞춘 예배의 중요성

 

우리의 예배의 본질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있는 옷은 문화에 따라서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몇십 년전만 해도 밴드를 올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피아노가 있는 것이 옳습니까?

벤드가 있는 것이 옳습니까? 손들어보세요? 피아노가 옳다는 분? 밴드가 옳다는 분?

여기에 피아노가 있는 것이 아니면 밴드가 있는 것이 더 옳은 것이 아닙니다.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옳고 그른 것은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에 있습니다.

양은 당시 문화에 따라 적응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중 하나가

교회의 예배가 그들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이 젊은이들을 붙잡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이렇게 예배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이렇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문화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알 티 킨달 목사님은 말합니다.

영국교회만 해도 오늘날 향을 피우면서 이전형태의 예배를 고집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그런 교회들은 대부분 침체되어있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향을 피우는데 대해 관심이 있다.(성공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엄격한 전통들을 가지고 있는 복음주의적 교회라도 하나님께 사람들을 인도하는데 실패할 수 있다.

그들은 매우 자주 순서에 지엽적인 것에 논쟁하는 일에 바쁜 나머지 복음전도의 일로 나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알 티 킨달 목사님은 그릇된 예배의 하나의 특징으로 엘리트주의를 듭니다.

엘리트주의는 한 종류의 문화적인 그룹을 선호하고 다른 문화적 종류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파이프 오르간을 좋아한다. 파이프 오르간으로 예배를 드려야지

무슨 드럼 같은 그따위 악기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어. 이런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흥의 시대에 강조되는 5가지가 있다.

기도 전도 제자훈련 교회연합 현대적 의미가 있는 예배에 대한 강조라고 합니다.

   

7.우리는 경배를 드릴 때 성령님의 사역을 어떤 모양으로건 환영한다.

 

이 부분은 아까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하나님께 경배하는 가치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매번 예배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지체들이 예배로 나올 때

이런 가치로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지금까지 가치를 살펴보았습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의 단계>를 살펴볼 것입니다.

 

회중이건 개인이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이런 단계로 나가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 교회를 보면 어떤 사람이 잘 되냐면,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잘 안되느냐면 자기가 융통성을 가지고 통박을 재서 자기가 취할 것은 취하고 해서

자기 생각대로 하는 사람은 안됩니다.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이 잘 됩니다.

금방 하나님과 관계도 열리고 예배 가운데도 하나님의 임재로 나가더라고요.

   

첫 번째 단계-경배에로의 부름

 

이 단계는 경배에로 초청입니다. 성도들이나 하나님을 향한 메시지가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 단계의 배경에 깔린 사고는 우리 하나님은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경배하자는 이해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겠는가 하는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배에로 부름의 찬양의 선택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찬양이 그날 부를 경배와 찬양의 전체를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배에로 부름의 첫 찬양부터 처진 찬양으로 시작하면 분위이가 가라앉고

정상으로 회복시키려면 엄청난 노력이 요구됩니다.

어떨 때는 찬양과 경배가 끝 날까지도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경배에로 부름에서 찬양은 경쾌하고 빠른 축제의 분위기의 찬양으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 둘 셋 꽝하고 시작할 수 있는 찬양들입니다. 그런데 이 찬양의 선택은

그 예배가 어떤 예배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주일낮 예배인데 참여한 성도들이 주중에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왔다면

그날 예배는 축제예배가 될 것입니다. 영적인 파도를 타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하늘을 닿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성도들이 주중에 하나님과 함께하지도 않고 온갖 세상일에만 바빠서 돈버는 일에만

아이들 학원보내는 일에만 주식 스포츠에만 관심을 갖다가 주일이라고 와서

졸음도 안깬 상태로 와서 예배한다면 그날 예배는 파도를 타는 예배가 안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따라서 곡 선택에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야말로 축제로 나갈 수 있는 찬양을 그렇지 않을 때 부른들 말짱 도루묵일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이번 컨퍼런스처럼 잘 모르는 낮선 사람들이 찾아와서 시작되는 세미나의 첫 시간의

경배에로의 부름의 찬양과 마지막 시간의 경배에로의 부름의 찬양은 달라집니다.


사실 마지막 시간에는 경배에로 부름의 찬양은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 하나님 앞에 경배가 되어지고 있고 하나님이 함께하기 때문에

바로 경배에로 들어가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이 경배에로 부름의 찬양에는 간접화접의 찬양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을 간증하는 찬양들 하나님을 향한 축제의 노래들 사람들에게 예배를 독려하는 찬양들 귀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경배에로의 부름의 찬양에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경배에로 부름에서

적절한 영적인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도록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단계-경배에로 들어감

 

본격적으로 경배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인하여 그분을 마음껏 높이고 찬사를 드리고 기뻐합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하여 마음껏 높이고 기뻐하면 하나님이 벌써 운행하십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을 마음껏 높이고 마음껏 경배하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도들을 하나님과

또 다른 성도들과 연결시켜주는 역동적인 단계입니다. 서로 연결됩니다.

각자가 하나님께 연결되면 서로 연결됩니다. 옆 사람과도 너무나 친해집니다.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위로하고 싶고 필요를 채우고 싶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경외하는 표현 찬사를 보내는 표현 하나님을 기뻐하는 표현이 성도들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같이 가는 것은 중보기도와 간구의 찬양들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서,

중보기도와 간구의 찬양들입니다. 내 자신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서.

주께 가오니 등과 같은 찬양

이땅 고치소서 같은 찬양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내 목적이 아닌 중보기도를 위한 찬양이라도

먼저 하나님을 마음껏 높이고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 그분을 기뻐하는 찬양이 오기 전에 드려서는

그것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기도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 그분 자신으로 인하여 그분을 높이고 마음껏 찬사를 드리고

그분을 기뻐하는 예배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때부터는 직접화법의 찬양이 매우 중요합니다.

간접화법의 찬양으로 나가면 하나님께 깊이 나가는데 방해됩니다.

 

제가 코치를 하기도 합니다만 어떤 때는 그냥 넘어가기도 하지요. 예를 들면 주일낮에 5곡 정도 드립니다.

그런데 두 번째 단계의 찬양들이 간접화법의 찬양들이 두 개 세 개 있으면 그날 예배 반드시 깊이 못들어갑니다.

? 우리 말이 우리 생각을 인도해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가사가 아니라 사람 앞에 간증하는 것 같은 가사를 가지고는

주님 앞에 깊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직접화법의 찬양이 필수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 찬양리더들은 외부 찬양을 할 때는 반드시 검사를 받고 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화법에 대한 이해가 안되어서 간접화법의 찬양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점검합니다. 가사가 잘못 번역되어 있으면 원래 의미로 다시 개사합니다.

   

셋째 단계-은밀한 사랑의 고백

 

경배에로 들어감의 단계에서 하나님께 더 깊이 경배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벅찹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알리시고 하나님이 신실하심으로 알리시기 때문에.

 

주 사랑 가장 높은 산보다 높고~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을 할 때 저는 어느날 비추어주셔요.

이러 가사로 찬양을 하는데 필름처럼 제 과거가 비추어져요.


제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사단이 저를 넘어뜨리려고 수없이 많이 노력했어요.

때로는 제가 넘어질 때도 많았고 그런데 그런 사단의 모든 노력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사랑이 지키셨기에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주님의 사랑이 어떤 사단의 시도보다 강한 것이 보여졌어요.

제가 그 찬양을 드렸을 때 어떻게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이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의 사랑이 비추어지고

하나님의 마음이 비추어지면서 동시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이 부어집니다.

하나님만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샘솟고 주님이 계신 곳에 같이 있고자 하는 열망이 솟아납니다.

 

이렇게 주님을 찾는 가운데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의 죄들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말을 잘못한 것도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의 그릇된 태도들을 생각나게도 하시고

우리의 실패와 부조화를 드러내시고 하시고 그러면서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도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면 죄가 드러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 중에 하나가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초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주님을 경배하는 삶으로 나갔는데 독일에 유학같다 온 한 분이 있었어요.

친구 소개로 오다가 안 오는 것입니다. 그분 왈 거기만 가면 자기 죄가 생각나서 안온답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예배였습니다. 성령이 임재하시니 죄가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돌이키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친밀함의 문제인데 죄를 짓는 것도 심각하지만 친밀함에 있어서 심각한 것은

무슨 죄 때문에 친밀함이 끊어져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알면 돌이킬 수 있는데. 몰라서 못 돌이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있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들추고 돌이키게 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넷째 단계-하나님의 방문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찬사와 기뻐하는 마음을 온 마음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방문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중단하고 그분께 집중하면 그분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방문은 경배의 부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문을 위해 경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방문하시든디 안하시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홀로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경배하는 백성중에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고 그분을 경배하고 예배할 때 우리를 방문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나갈 때 하나님의 방문을 준비하고 나가야 합니다.

 

이 방면에서 세계적으로 귀하게 쓰임받은 한분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만약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기만 한다면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주님이 방문하실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많은 예배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부의 방문 밖에서 조급하게 기다리는 신랑과 같습니다.

그런데 신부인 우리들은 분산되어 있는 우리의 관심사와 생각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것에 있는가를 잊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분은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구원을 위해 어떤 때는 자유케 하시는 일을 위해

어떤 때는 성화와 치유를 위해 어떤 때는 예언의 일을 위해 역사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대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수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경배의 4단계입니다.

 

한 단계를 추가한다면 헌금입니다.

경배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헌금만 해도 그래요. 우리가 주의 종으로 산다고 하면서 드릴 줄 모르면

달릴 줄 모르는 사람이 운동경기하는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내 삶의 필수입니다.

 

오늘 저는 경배의 가치와 단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잘 기억하시고 실천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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