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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LNCK 2018. 12. 18. 12:08

https://blog.naver.com/karamos/220167878082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마14:15-21          2012.03.04.

 

지난 주일 9시 예배에 조희정집사가 기도를 하는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지난 성탄절 전날 교회 예배당에 왔더니 쾌쾌한 냄새가 나서 무슨 냄새인가 했더니

노숙자 한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노숙자를 밖으로 내보내고 성탄절 축하행사 준비를 했는데

그때부터 그 노숙자가 예수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늘 마음속에 자책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노숙자가 예수님이었다면 예수님이 나신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 주인이신 예수님을 내쫓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것 때문에

늘 마음에 걸리고 그 일로 인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예수님을 늘 만나고 싶어서

예수님께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이 아이에게 한번 만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그 말씀을 듣고 너무 기쁜 나머지 집안 청소도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기다리는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하필 거지가 세 번씩이나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그 거지에게 지금 귀한 손님이 오니 어서 가라고 쫓아내고

하루 종일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는데, 예수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날 밤 이 아이가 예수님에게 기도하면서 ‘예수님에게 오신다고 하시더니 왜 안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세 번이나 찾아갔는데 네가 쫓아내지 않았느냐’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거지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도 주일 학교 때 들었을 것입니다.

 

지난 23일 밤 우리 교회에 왔던 노숙자가 정말 예수님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웃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축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내쫓은 것입니다.

 

조희정 집사의 기도를 들으면서 여러분도 그러셨겠지만

저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조 집사 괜찮다. 나는 그래도 갈릴리교회 덕분에

지난 겨울 그렇게 추운 날씨에도 밖에서 떨지 않고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늘 갈릴리교회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여러 가지 선교 사역이 있습니다.

그중에 지난해부터는 영등포 시장 안에 있는 노숙자를 위한 쉼터

‘햇살보금자리’의 월세 반을 내고 있습니다.

 

[햇살 보금자리]라는 쉼터에서 매일 150명의 노숙자가 숙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쉼터의 월세가 한 달에 2백만원인데 우리 교회가 그 절반인 1백만원씩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노숙자 60명의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숙자 이야기가 나와도, 그나마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 지난 주일에 조희정 집사가 그런 기도를 했는데

우리 교회가 노숙자를 위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면

목사인 저의 마음이 너무 괴롭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저녁마다 따뜻한 이부자리에 누워 잠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주무시는지 알 수 없지만

저는 그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추운 겨울 밤 지하철 역 통로에서 쪼그리고 새우잠을 자는 노숙자들이 있지만

그나마 우리 교회 때문에 많은 수는 아니지만

60여 명이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발을 쭉 뻗고 잠자리에 들 수는 없어도, 반쯤은 뻗고 잠자리에 들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따뜻한 이부자리에 들어가면서

우리가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오갈 데가 없어서 지하 통로에서 종이박스를 깔고 자야 하는

노숙자들의 아픔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따뜻한 잠자리에 들어가면서 집이 없는 사람들의 아픔과 설움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낸 헌금 가운데 노숙자들을 위한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쓰여 진다는 것을 하나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제대로 예수님을 믿으려면, 잠자리에 들 때조차 편안할 수 없으며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도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정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눅18: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같은 말세에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1. 우선 황금만능주의의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는 우리가,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세상이 돈이 제일이다, 돈만 가지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아니다, 돈보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이 하나님이며

돈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핵가족제도 하에서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다 경험합니다.

 

사실 어느 때보다 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고 사는 때가 오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자식에게 쓰는 시간은 아깝지 않고

하나님에게 쓰는 시간은 아깝다면, 자식을 우상으로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려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까지를 포함해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라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사죄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긴 것을

우리가 다 절절한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두 번째 우리가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기가 힘든 것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계명을 주셨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가 농촌에서 살 때는, 한 동네에서 가난한 사람이 손에 꼽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이웃사랑이 가능한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말미암아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삽니다.

 

가난한 사람의 종류도 다양해졌습니다.

집이 없는 노숙자를 비롯해서, 이 땅에 돈을 벌러 온 외국인 노동자,

누구도 돌보지 않는 혼자 사는 독거노인 뿐만 아니라,

많은 고생을 하고 굶주림 가운데 있다고 하는 북한의 동포들,

최근에 보는 대로 많은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장애인들도 있고, 가난한 사람의 종류가 참으로 많아졌습니다.

지역적으로도 한 동네였지만, 이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나 미얀마, 캄보디아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

전 세계에 걸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범위도 광범위하고 종류도 다양해서 우리가 이웃사랑을 실천한다고 할 때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어떤 사람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이웃사랑입니다.

 

또 이웃사랑을 하고 싶어도 혼자 힘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돈을 가진 부자도 아니고 재벌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뻔 한 것인데, 이것으로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노숙자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질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 교회에 온 노숙자가 설사 예수님이었다고 해도,

그러나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합니까?

 

그 사람이 예수님이었다 한들 우리 교회가 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어떤 방을 내서, 교회에서 살게 할 것입니까?

그리고 노숙자가 그 사람 한 명입니까?

그 사람을 우리 교회에서 살게 한다고, 노숙자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서울에만 해도 수 천 명의 노숙자가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보살필 것입니까?

그들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보살핀다고 하면, 그 방법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노숙자를 돕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제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노숙자 문제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나 혼자 따뜻한 잠자리에서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습니까? 이것은 양심을 가진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땅의 배가 고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하루 세끼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는다면

양심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나혼자 배부르게 밥을 먹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갈릴리교회가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1. 첫째로는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여럿이 힘을 합쳐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수많은 일을 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수많은 일들 가운데

꼭 해야 할 일을 상징적으로 선택해서,

우리 교회가 함께 힘을 합해서 집중적으로 이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몇 가지 선교 프로그램을 선택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1) 그중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독거노인을 위한 사랑의 도시락>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구로동 주위에 아파트가 많이 있지만

아직도 구석구석에 끼니를 못 챙겨 드시는, 많은 불쌍한 노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노인들을 외면하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토요일마다 사랑의 도시락을 준비해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부들은 우리 식구들에게 무슨 음식을 마련해서 식탁을 차릴까 늘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루 세끼 밥을 먹을 때마다

나와 내 식구들만 앉아서 밥을 먹는 식탁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식구 수를 셀 때, 거기에 한 명 더, 예수님이 우리 식탁에 계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비워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식탁에는, 예수님의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몫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은 밥을 지을 때마다, 예수님의 몫으로 성미를 떼어냈습니다.

이 신앙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몫을 떼어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몫이, 바로 우리 주위에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식탁이 진수성찬으로 차려졌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몫이 없으면,

축복의 식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없는 식탁은 제대로 된 식탁이 아닙니다.

 

‘사랑의 도시락 헌금’을 여러분이 하시는 지 안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도시락 헌금을 하시는 분들은 정신을 차리고 제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덜 먹고 절약해서 헌금을 해야 합니다.

160명의 예수님의 식사를 우리가 맡은 것입니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절약하고 헌금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우리 교회가 북한 어린이 500명을 위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6남매를 낳아서 키우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하나나 둘을 낳아서 기르고 있습니다.

 

북녘에 자식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뒤치다꺼리하기 위해서 돈을 아깝지 않게 씁니다.

한 달에 만원으로, 자식 한 명을 더 키운다고 생각하면 왜 못하겠습니까?

자식을 위해서 비싼 등록금도 내고, 명품 옷도 사주고, 맛있는 음식도 사줄 때

북녘의 자식도 생각하면 만원을 왜 못 내겠습니까?

 

그래야 우리가 통일이 되어서, 북녘의 동포를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만 자식으로 생각하고 아깝지 않게 돈을 사용하고 온갖 정성을 들이는데,

북녘의 자식을 위해서 한 달에 만원을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헌금 통계를 보면서 북한 어린이 돕기 헌금이 적자인 것을 보고

우리 교회의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노숙자들을 위한 헌금을 해서, 우리가 다리를 쭉 뻗고는 못 잘망정

반이라도 뻗고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잠자리가 불편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각오를 하고 나서야 합니다.

 

4) 우리 교회가 20년 동안 쉬지 않고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를 돕는 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정도의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양심에 꺼리지 않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이런 모든 이웃사랑은

여러분의 날마다의 구체적인 삶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헌금은 돈이 남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약하고 아껴서, 내가 쓸 것을 쓰지 않고 헌금해야 합니다.

 

노숙자를 돕는 일, 사랑의 징검다리 헌금은 우리 잠자리가 편안하기 위해서 하는 헌금입니다.

사랑의 도시락 헌금, 북한 어린이 돕기 헌금은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한 헌금입니다.

 

돈이 없어서 헌금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먹을 것 다 먹고 헌금할 수 없습니다. 먹을 것을 덜 먹고 절약해서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양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즐거운 일, 기쁜 일 슬픈 일이 있을 때,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절약해서

베트남의 가난한 농부들에게 송아지 한 마리를 보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베트남에서 우리나라가 저지른 많은 나쁜 짓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잔칫집에 가난한 사람이 와야 한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잔칫집에는 부자만 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와야 진짜 잔치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우리의 잔치에 초대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잔칫집에 가난한 사람의 몫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정도의 삶을 살아야 이 시대를 사는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 앞에 설 때도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예수님 앞에서 심판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이

이주노동자를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이 세상을 떠나 장례를 지내는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이분이 지금쯤 예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텐데

그 마음이 기쁜 마음일까 아니면 민망할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배고팠을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느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가 맞아주었느냐?’ 하고 물으실 때

‘우리 성도님은 뭐라고 대답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에게 큰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분도 있고,

고생 좀 할 것이란 생각이 드는 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물어보실지 성경에 질문지가 있습니다. *마25장

우리가 이 대답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고 당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두 군데를 읽었습니다.

 

하나는 열왕기상 17장은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가난하기 짝이 없는 과부에게 보냈습니다.

엘리야가 이 과부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자

이 과부가 말하길, 오늘 아들과 함께 먹을 한 끼의 양식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것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사실 과부가 가지고 있는 한 끼의 양식은, 그냥 먹고 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 평생을 살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냥 가지고 있으면 한 끼의 양식이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면 평생의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한 끼의 양식을, 자신이 먹지 않고, 자식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기름통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으면 한 끼의 양식이지만,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영원한 양식이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14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한 끼의 양식을 예수님의 손에 들려드렸더니

오천 명이 넘고도 남는 엄청난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가기고 있으면 그냥 만원이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렸을 때

수많은 생명을 먹일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예수님의 손에 가난한 사람을 먹일 양식을 들려드릴 때

만원이 만원이 아니고, (우리 교인) 오백 명이 오백 명이 아닌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혼자 벌어서 혼자 먹고 살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불을 덮고 자더라도 다른 사람과 따뜻한 잠자리를 나누지 않는다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가난한 사람과 함께 먹지 않는다면, 축복의 식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우리들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혼자 살기 위해서 돈을 벌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내 자식과 식구들과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생각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되고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 먹고 따뜻한 잠자리를 다른 사람과 나눌 때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행복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갈릴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런 행복한 삶, 하나님 앞에 칭찬받고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삶, 역사 앞에 당당하고 떳떳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