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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15 에베소서 / 데이빗 파슨 교정 및 자막 예정

LNCK 2018. 12. 27. 20:41

에베소서                 교정 및 자막 예정



당시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하면서 기회를 타서 골로새 교회에도 편지를 했는데, 하지만 신기한 것은 그가 ‘골로새서’ 이 서신에서 말하기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의 크리스찬들도 이 편지를 읽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산골짜기에 거주하고 있는 크리스찬들도 똑 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동시에 바울은 또 생각하기를 내가 다시 편지 한 통을 써서 일반적인 문제를 논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신앙이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크리스찬에게 있어야 하는 신앙과 행위를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단을 경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정확하고, 착실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를 쓴 후 일반적인 서신을 쓰려고 결정했으며, 크리스찬들이 어떻게 신앙적으로 살 수 있는지를 논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견고한 기초를 닦아 주었고, 그들에게 다른 혼란스러운 사상이 스며들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으며,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에베소서’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두 서신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으며, 동시에 읽으면 이 두개의 서신은 동시에 기록하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가족 관계라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빌레몬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동시에 기록한 것이며, 모두는 특별히 노예에 관한 것을 논하였고, 다른 서신에는 없습니다. 바울이 이 세통의 편지를 쓸 때 마음으로 이 일을 특별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특정한 대상을 겨냥하지 않았고, 에베소 교회의 어떤 문제나 혹은 이단에 논하지 않았습니다. 이 서신의 초기 원본에서는 심지어 ‘에베소’라는 지명이 나타나 있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응당 일반적인 서신이며, 그 지역에 써서 돌려 가며 보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인지가 신약성경에서의 다른 교회보다 더욱 많이 알고 있고, 많은 구절에서 에베소 교회를 논했습니다. 예를들면, 사도행전 18-20장이 바로 에베소 교회를 논했고, 그리고 ‘에베소서’, ‘디모데전후서’도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쓴 것이며, 에베소 교회를 논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장에서도 말하기를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모르실 것인데, 하지만 우리가 뒤에서 논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는 에베소에서 쓴 것입니다. 사도요한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에베소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고, ‘요한복음’도 에베소에서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는 초대 교회의 역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이며, 성경에서의 많은 을들이 모두 에베소 이 도시에서 발생했습니다. 어쩐지 이 편지가 마지막에는 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로 남게 되었네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서신을 ‘에베소서’라고 합니다. 
이 도시는 동서의 길목과 남북의 길목 교차 지점에 위치해 있고, 큰 항구 도시이며, 그러나 항구는 진흙으로 꽉 차서 육지가 되었고, 오늘날 에베소는 이미 페혜되었습니다. 과거에 거기는 아이오니아 연맹의 12개 도시 중 하나였고, 상업과 경제 중심입니다. 하지만 거대한 이교 사당이 하나 있는데 면적은 420제곱피트입니다. 여러분이 그 규모를 상상해 보세요. 사당에 운석 하나가 모셔져 있고, 하늘에서 에베소 도시에 떨어진 검은 운석이며, 그것은 검고 거대한 운석인데 표면에는 많이 불거져 나와있고, 이 검은 운석들의 불거져 나온 것마다의 형태가 모두 여자의 젖가슴처럼 생겼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바로 다이애나 여신이라 생각하는데, 다이애나 여신은 바로 ‘성경’에서의 아테나 여신이고, 백성들이 여자의 젖가슴에 경배하는데, 이 사당이 바로 에베소에 있습니다. 이 형상은 마치 다유의 운석 같고, 제단에 모셔져 있습니다. 현지의 많은 장인들이 운석의 외형을 모방하여 작은 은상을 만들어 팔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사서 집에다 모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의 아테나 여신의 동상은 바로 다유 여신이고, 바로 집에 가장 눈의 띄는 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한 후 이 장사는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첫번째 번거로움을 야기한 것은 은장과 연관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그들더러 장사를 할 수 없게 했기 때문인데, 이 운석 은상을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에베소는 아주 특별한 곳인데, 하지만 교호는 여기에서 견고하게 건축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 여기에서 당시 요한이 목양했던 그 교회의 흔적도 볼 수 있고, 그리고 또 마리아의 무덤 흔적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로한 사도 요한이 마리아가 죽은 후에 자신도 여기에 매장하였다는 것을99% 확신합니다. 그는 유일하게 천수를 다한 사도였으며, 다른 사도 모두는 처형을 당했고, 요한만이 늙을 때까지 살았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는데, ‘요한복음’의 메시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요한 복음을 기록할 때 이미 예수님과 60년을 동행했고, 예수님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매우 분명한데, 만약 아시아 교회의 신앙이 혼합 당하는데 방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그들에게 편지로 크리스찬이 응당 있어야 할 믿음과 행위를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서신에서 그는 복음을 매우매우 명확하게 해석했습니다. ‘로마서’는 복음을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로마서’를 논할 때 이 점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는 크리스찬의 믿음과 행위를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당시 에베소 도시의 번영했던 상황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에베소 도시의 흔적인데, 여러분이 당시 이 도시의 규모를 상상해보세요. 이것은 주요 도로이며, 이 산의 사당을 상상할 수 있는데, 420제곱피트 면적이며, 현지 이교도들이 경배했던 운석을 모셔 놓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응당 ‘에베소서’의 주요 분계점을 먼저 논해야겠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이 책은 두개의 등분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부분은 매우 다른데, 우리는 이 두개의 등분에서 바울 복음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논했고, 후반부에서는 우리가 주 안에서 서로 간의 관계를 논했습니다. 아주 재미있어요.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논할 때 그리스도로 하였는데, 하지만 우리 서로 사이의 관계를 논할 때는 주로 하였는데, 이는 주님이 우리 서로 사이의 관계를 통치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더러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였는데, 하지만 주가 우리 서로 사이의 관계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반부를 ‘안에서 일을 하시는’ 구원이라고 하였고, 후반부를 ‘밖으로 하시는’ 구원이라고 하였는데, 제가 바울의 ‘빌립보서’를 인용하였습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반드시 매일 밖으로 이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반부에서는 가르쳤고, 후반부에서는 책임을 말하였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구원 받는다는 것을 말하였고, 후반부에서는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인지를 말하였습니다. 중점은 우리가 선행을 했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니지만 우리 구원 받은 것은 선을 행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선을 행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사실상 구원 받은 것은 선을 행하기 위함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전반부에서는 죄 사함을 받는 복을 강조했고, 후반부에서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의롭다 함, 즉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는 것을 논하였고, 후반부에서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논하였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석방되었다는 것, 우리가 구속 되었다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논했고, 후반부에서는 우리의 반응을 강조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경개와 높임, 모든 영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로 논하였고, 후반부에서는 적용, 행동으로 하는 것을 논하였습니다. 전반부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한 것을 논했고, 우리가 예정론에 관한 문제를 논할 것이에요. 이는 첫 장에서 바로 나타났는데, 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사람의 책임을 논하였습니다. 모든 항목의 대응이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강조했는데, 뜻과 능력은 전반부의 관건적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는 그의 뜻을 달성할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우리가 응당 어떻게 해야 하는 것과 곧 대면하게 될 전쟁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응당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하며, 빛 속에서 행해야 하며, 사람됨이 마치 빛의 자녀 같아야 합니다. 우리도 영적인 싸울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전반부에서는 교회 내의 상황을 강조했고, 후반부에서는 교회 외의 상황을 논했으며, 전반부에서는 복음의 수직면을 강조했고, 후반부에서는 복음의 수평면강조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기에서 두가지 점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첫번째 우리는 반드시 양자를 함께 돌보아야 합니다. 복음이 만약 생활 속에 정착하지 않으면 완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할 뿐이고 우리에게 천국의 티켓만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데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이 첫번째이며, 반드시 두개 양자를 함께 돌보아야 합니다. 두번째는 더욱 중요한데, 우리는 반드시 이 순서대로 해야 하고,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찬은 선만 행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인데, 하지만 기독교를 믿는 것은 단지 구원을 위해서라고 하면 이것 또한 마찬가지로 복음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양쪽 모두를 돌보아야 하는데, 하지만 반드시 이 순서대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다른 종교들은 먼저 선을 행해야만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먼저 좋게 변해야 하나님이 용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사람이 먼저 일을 잘 해야만이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데, 하지만 기독교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의 본상을 받아 들이고, 그리고 그의 뜻대로 우리를 만들어 가는데, 반드시 먼저 의롭게 되어야만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먼저 구원을 받아야만이 그리스도의 생명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반드시 양자를 함께 돌보아야 하고, 그리고 순서도 절대로 틀리면 안됩니다. 신앙이 기초가 되어야만이 좋은 행위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교의에서 크리스찬의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에베소서’에서 처음부터 논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전반부를 보겠는데, 즉 제1장에서 제3장입니다. 우리는 1-3장의 내용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순서와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경배하는 태도로 크리스찬 구속의 진리를 가르쳤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리고 다시 기도했으며, 그리고 설교를 했습니다. 강의하고 나서 다시 기도했고, 마지막에 다시 경배 찬양을 드렸는데, 여기에서 경배의 순서를 볼 수 있습니다. 응당 경배의 마음을 가지고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전후는 기도와 경배로 하여야 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끊임없이 찬송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끊임없이 끊임없이 찬송했고, 모든 찬송과 영광을 우리 하나님께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여러가지 영적인 복을 주었는데, 이것은 하나의 찬송시입니다. 이어서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찬송한 목적은 만유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려는 목적이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만물을 그의 아들 예수님에게 주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이 이 편지의 독자를 위해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구했고, 하나님의 뜻을 현명하여 달라고 구했으며, 그리고 완서을 위해 능력을 구했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논하였습니다.
이어서 그가 설교 한편을 하였는데 세가지 중점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능력과 뜻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게 했고, 하나님의 능력과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여 만유를 초월하게 하였습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능력과 뜻이며, 이방인을 구했고, 그들더러 하나님의 백성들과 다시 연합하게 하였습니다. 그들 전에는 이스라엘을 멀리했는데 지금을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막힌 벽은 이미 파괴되었는데, 이 구절은 여러분들이 응당 익숙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가지를 보여드리겠는데 바로 이 그림입니다. 몇 년 전 고고학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터가 발굴될 때 석회석 위에 글자기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붉은 페인트로 쓴 글인데, 전문가가 해독을 하니 그의 뜻을 발견했으며, 거기에 말하기를 ‘무릇 법을 어기고 선을 넘는 사람은 죽음의 형벌을 받으리라’고 씌였습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의 성전에서 분리된 벽의 돌입니다.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 사이에는 칸막이벽이 있는데, 이방인들이 이 벽을 넘기만 하면 반드시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고, 만약 누군가가 이방인을 데리고 이 벽을 넘게 되면 마찬가지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바울이 잡혔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어떤 사람이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이 경계를 넘었다고 무고했습니다. 바울이 비록 진짜로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위법자는 죽임’라는 경계를 보고 바로 알았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이제 너희들은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주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세가지 예에서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만유를 초월하였습니다. 두번째는 이방인이 구원 받아 하나님 백성의 행렬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세번째는 바울더러 주를 믿게 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현명하였습니다. 그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기를 바랐으며, 하나님은 만유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번에는 독자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구한 것이 아니고, 독자가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알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충족하게 성취할 수 있고, 우리의 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초워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이 권능을 찬송했고,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였습니다. 이것은 경배의 섬김입니다. 이 양식을 볼 수 있을 것인데,   찬송, 기도, 설교, 그리고 기도, 찬송입니다. 여러분이 아마 전에 이 점은 유의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전반부를 경배의 섬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 주제는 하나님의 능력과 뜻이고, 하나님의 뜻을 찬송함으로 시작했고, 그의 능력이 끝남을 찬송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을 뜻을 말씀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가 이 뜻을 완성할 능력이 있으며, 하나님이 그의 뜻을 완성하는데 막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제1-3장까지을 간략한 대강입니다.
이젠 제4-6장까지의 대강을 보겠는데, 이 단락의 주제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의 중점은 우리의 반응인데, 경배 후에 우리는 응당 무엇을 해야 할까요? 1-3장까지 이해한 후 우리는 응당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는 우리의 생명에 무슨 영향이 있을까요?
그는 먼저 말하기를 ‘우리는 반드시 행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 안에서 뛸 수 있으며, 영 안에서 뛸 수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영 안에서 걸어다니는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뛰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닌데 하지만 걷는 것은 사실 재미있습니다. 먼저 한 발을 들고, 발 앞 부분에서 대개 45센치 쯤에 놓고, 그리고 뒷 발을 들고 다시 다른 발 앞에 놓습니다. 걷는 것이 왜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까요? 걸음은 한번에 한 걸음이며, 정확한 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걷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닌데, 하지만 하나님은 걷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행하고, 하나님 자녀다운 모습을 행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걷는 것이지 뛰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은 뛸 필요도 있는데, 하지만 중점은 걷는 것이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걷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의 여정이며, 하나의 길입니다. ‘길’은 기독교 신앙에서의 하나의 호칭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곧 길이요’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명에는 여덟가지 태도가 있다고 말하였는데, 첫번째는 겸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가 되는 비결입니다. 크리스찬이 만약 겸속하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교만은 하나가 되는 것을 파괴하고, 그래서 첫번째 태도는 겸손입니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바로 겸손히 행할 것입니다.
한동안은 제가 매우 화가 났었는데,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거짓으로 저를 훼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써 제가 섬기는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것은 7-8년 전 일인데, 제가 화가 난 것은 섬기는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잔소를 했더니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여러분 맞추어 보세요. 그가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훼방했든지 너의 진정한 모습보다 흉하지 않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웃었습니다. 제가 와이프하고 말하니 그도 웃었고, 저는 해방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저를 사랑했고, 저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누구 저를 훼방하면 저는 주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저의 진짜 모습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저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으며, 당신을 손금 보듯 잘 알고 있어서, 우리더러 겸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당신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견손히 행해야 하며, 우리는 겸손히 행해야 합니다. 제가 시 하나를 읽을 테니 여러분이 들어보세요.
이 죄인이 성도의 진정을 가지고 상심해서 구하기를,
주여 저의 마음이 이렇게도 흉하다니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때 저의 수호천사가 저의 뒤에서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허된 인간아, 너는 아직 줄을 설 수도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아십니까. 겸손까지도 가짜가 있습니다. 가짜 겸손은 겸손이 아닙니다. ‘안되요, 안되요, 얷은 제가 안됩니다’라는 것은 가짜 겸손입니다. 진짜 겸손한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요.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 어떤 상황일까요?’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하나가 되는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몸은 하나밖에 없고, 영도 하나밖에 없고, 한 믿음, 한 세례, 한 분인 하나님과 하나님ㅁ 아버지이기 때문에 하나가 되는 태도를 품고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방면의 견해가 다르든지 모두 한 예수님을 의지하여 구원 받고, 동일한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받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우리에게는 동일한 영이 있으며, 하나가 되는 태도를 품고 행해야 하며, 성숙된 태도를 품고 행해야 커서 성인이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도, 선지자, 목사, 부흥가, 교사 그리고 많은 은사를 주셔서 우리를 세워갑니다. 우리더러 성숙하고 성장하게 도와주는데,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다는 증거는 하나 같은 신앙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기초는 신앙의 일치에 있지 않고, 동일한 한 영에 있으며, 마지막에 일체한 신앙에 달성하게 됩니다.
많은 복음파 인사들의 교의는 하나이고, 하나의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다른 교파들과의 왕래를 반대하는데, 예를 들어 카톨릭이나 영은파입니다. 사실 하나가 되는 기초는 돌일한 영이 있습니다. 내가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와 왕래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혹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는 성숙하게 되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더러 동일한 한 영이 있어야 한다고 분부했습니다. 우리가 일치한 신앙이 있기까지 목표는 일치한 신앙이고, 이것은 마지막 목표이지 시작점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성령 내주한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그는 바로 우리 주 안에서의 지체입니다. 설령 그의 어떤 교의에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해도, 사실 우리도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이 어떤 교의에 대한 견해를 수정할 필요는 있습니다. 목표는 성장하여 성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루는 것입니다. 일치한 신앙이 있어야 다른 가르침에 좌우지 하지 않습니다.
다음은 단정해야 합니다. 제5장 처음부터 도덕적 성품을 열거했습니다. 음탕한 농담을 하지 말라는 것처럼, 바로 이렇게 실제적인 행동입니다. 제5장의 중간에 정직한 성품을 구비해야 한다고 논했으며, 쉽게 넘어지지 않고, 우호적인 태도로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서로 용서하라고 다시 언급했는데, 마치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한 것처럼입니다. 크리스찬들은 우호적이어야 하고, 서로 감싸줘야 하는데, 하지만 잘못이나 죄를 감싸주어라는 것이 아니고, 서로를 감싸주고, 서로가 우호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다음은 순결을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성령충만해야 한다며, 성령충만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동기가 순결해야 하고, 마음이 순결해야 한다고 했으며, 동기와 마음입니다. 그리고 또 순종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나 문제는 ‘종’과 ‘순종’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순종하는 태도를 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순종해야 하는데 이것은 성숙된 표시이며, 순종의 태도를 품어야 합니다. 그는 이 세가지 관계를 다시 언급했는데, 즉 아내가 남편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종이 주인이나 혹은 고용주에게 모두 기꺼이 순종해야 하는데, 하지만 다른 방면에서도 책임의 태도를 품어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남편으로서는 큰 도전이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데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 해야 합니다. 저의 와이프가 저에게 한번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때 나도 당신께 기꺼이 순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책임의 한 면입니다. 남편, 부모와 고용주는 그들이 거느린 사람들한테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을 책임져야 하는데,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걸음입니다. 매일 한 걸음 한 걸음씩 착실하게 걸어야 하고, 정확한 방향으로 걸어야 합니다.
다음 우리가 영적인 전쟁을 논하겠는데, 이것은 ‘에베소서’에서 매우 환영을 받는 구절입니다. 교회에서 이 구절을 자주 낭독하는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을 논합니다. 우리는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싸우는 것은 훨씬 쉽습니다. 어떤 크리스찬들은 일상 생활에서 사람과 쉽게 싸우는데, 우리는 혈육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집권자, 통치자와 싸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있습니다. 여러분 진자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여기에서 서 있는 줄로 알고 있지요? 여러분의 감관이 여러분을 이렇게 알려주는데, 하지만 틀렸습니다. 사실 지금 제가 앉아있지만 진짜 저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저의 진정한 상황입니다. 저의 몸은 지금 여기에 서 있지만 제가 일단 숨이 끊어지면 저의 몸이 어디있는지를 모릅니다. 저의 영이 어디에 있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있습니다.
크리스찬은 이미 확실히 하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감관만 우리가 여전히 땅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진짜인지를 자주 잊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하늘의 영적인 복을 주셨고, 또 우리더러 그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하늘에 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계시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진정한 거처입니다. 몸의 감관 작동이 일단 멈추게 되면 그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하늘의 집권자, 통치자들도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매번 하늘에 속한 영역에 들어가면 바로 전쟁에 부딛히는데 이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읿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래야 막아 낼 수 있고, 절대로 후퇴하면 안됩니다. 이 갑주는 당신의 등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돌아서 뒤로 달리면 안됩니다. 앞으로 전진할 방법이 없을 때도 최선을 다하여 똑바로 서 있어야 하고, 절대로 후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여기에서 말하는 방패는 가죽을 씌운 나무 방패인데, 매우 부드러운 목재입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이런 방패는 무엇에 사용될까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 병사들이 사용하는 방패입니다. 적의 부메랑이 날아올 때 나무 방패에 빠져서 불이 꺼집니다. 악인의 부메랑이 당신의 믿음을 만나면 바로 모두 꺼져버립니다.
이 갑주의 모든 부분이 필요한데, 머리를 막아 주어야 하고, 심장을 막아 주어야 하고, 머리를 들고 가슴을 펴야 하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그리고 좋은 검을 차고, 복음을 길을 걷는 신발로 예비하여 발에 신어야 합니다. 그래서 싸울 때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보호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큰 예리한 병기입니다. 당신은 보호 받을 필요가 있지만 기도가 더욱 필요하고, 성령의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4-6장의 대강입니다.
여러분, 우리 아직 시간이 조금 있는데, 다음 이 시간으로 여러분과 예정론을 논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단도직업적으로 예정론을 논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정론을 오해하면 아마도 매우 나쁜 후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정론에 대한 해석을 로봇이나 나무 인형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항거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과 동업자 같습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사람은 살아있는 관계입니다.
어떤 찬양 가사인데, ‘당신은 토기장이요 나는 흙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나에게는 전혀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없듯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조종하든지 나는 모두 괜찮는데, 마치 토기장이가 흙을 빚듯 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18장을 보면, 하나님이 선지자를 토기장이 집에 보냈는데, 토기장이와 흙에서 관계를 배울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는 한결같이 흙을 빚어 아름다운 꽃병을 만드는데, 하지만 흙이 토기장이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토기장이는 흙을 흙 전체에 넣어 버리고 다시 회전 바퀴에 놓고 돌립니다. 그리고 굵직한 솥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와 흙의 관계에서 무엇을 배웠냐고 물었습니다. 토기장이는 원래 흙을 빚어 아름다운 꽃병을 만들려고 했는데, 하지만 흙이 그의 뜻에 순종하지 않아서 토기장이가 그를 하나의 굵직한 솥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정론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운명을 정했는데, 하지만 강제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받게 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의 정하심에 응답하기를 원하면 그가 창세 때 당신을 위해 정하신 운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정하셨다는 것이 아닌데, 만야 그렇다면 뺄 수가 없겠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강제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 흙은 원래의 운명을 지나쳤습니다. 토기장이는 원래 그를 빚어 아름다운 꽃병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본래 이스라엘을 아름다운 꽃병으로 만들고, 나의 긍휼을 가득 넣으려고 했는데, 그들을 흉악한 꽃병으로밖에 만들 수 없게 되었느니라. 나의 심판을 가득 채웠는데, 하지만 그들이 만약 회개하면 내가 그들을 다시 아름다운 꽃병으로 만들려고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한 운명은 굵직한 솥이 아니고, 그가 우리의 운명을 아름다운 꽃병으로 만들어 거기에 그의 긍휼을 가득 채우려고 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커서 농장에서 일을 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방학만 하면 농장으로 갔습니다. 16살에 졸업하고 바로 농장으로 가서 일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서 90마리 소의 젖을 짲는데, 저는 농장 일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아버지가 이미 정해 놓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더러 21세 때 스코틀랜드의 한 농장을 받게 했는데, 그것은 우리 가문의 한 농장이었고, 아버지는 그를 임대하여 저에게 사용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제가 그 농장을 지나갈 때마다 생각나는데, 제가 본래는 아직 그 농장에서 젖을 짜고 있었을 것인데, 그러나 주 예수가 먼저 손을 썼습니다. 저에게 그의 계획을 알려주었고, 후에 저의 아버지가 저에게 제가 21세 때 그 농장을 받게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 걸음 늦었습니다. 만약 당시 제가 그 농장을 받았다면, 저의 아버지가 저더러 이 농장을 받게 예비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는 제가 아직 모르고 있을 때 먼저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제가 여러분한테 알려드리겠는데, ‘예정’은 먼저 결말을 결정하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나 움직이는 인형으로 삼아 우리를 강제로 그의 정함을 받게 한다고 합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장래에 영광을 받으라고 먼저 정하셨는데,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것을 거절할 수 있고, 또한 이 정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만약 받으면 훗날에 그가 창세때 이미 나를 위해 이를 정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정론의 두가지 견해를 보겠는데, 일반 사람들이 예정론에 대한 견해는 하나님의 선택은 어떤 사람더러 구원 받게 하고, 어떤 사람더러는 구원 받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찍부터 한 사람이 구원 받게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결정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항거하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일단 당신이 구원 받게 결정하면 당신은 반드시 구원 받게 될 것이며, 이 일을 절대로 바꾸지 못하며, 그의 은혜에 절대로 항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생명의 귀속, 즉 사람이 궁극적으로 천국이냐 아니면 지옥이냐를 하나님이 선택하여 결정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결정했고, 의논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실상한 사람은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중생하고 나서 다시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중생하지 못했으면 회개하고 주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중생하고 나서야 회개와 믿음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신앙을 반드시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항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마지막 반드시 천국 간다고 100%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정론에서 흔히 보는 관점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는 칼빈의 견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것은 칼빈의 가르침이 아니고 그를 계승받은 뒷 사람인데, 그의 이름은 필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황을 잘 모르고 이를 칼빈주의라고 합니다.
칼빈이 전에 그의 책에서 가르치기를 사람이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정론에서 누군가가 표시를 잘못 붙혔습니다. 이는 주제 밖의 말입니다.
성경의 예정론을 연구하면 택함 받은 중점은 구원에 있지 않고 섬김에 있습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은 특권이 받아서가 아니라 반드시 책임을 짊어져야 합니다. 당신이 택함 받았으면 나와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중점은 한 개인이 택함 받은 것이 아니고, 한 민족을 택한 것이고, 택함 받은 민족입니다. 그리고 자세히 연구하면 발견하게 되는데, 은혜는 반드시 거절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당신이 믿느냐이며, 지속적으로 믿느냐입니다.
두번째, 당신이 장래에 하늘로 가느냐 아니면 지옥이냐인데, 하나님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 은혜에 대해 혜응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거절할 것인가입니다. 
세번째, 우리는 회개하고 믿고 난 후 중생되는데, 그 전에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회개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네번째, ‘끝까지 인내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이는 약속이 아니고, 그는 당신더러 끝까지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포도 나무와 연결되어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지켜야 하고,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믿음으로 해야 하는데, 이 점이 매우 중요하고, 매우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견해는 아미앵이 제출했는데, 그의 작품을 한 걸음 더 나아가 연구한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 그에게 감히 반박한 사람이 없었고, 그가 죽은 후에만 그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경건한 사람이었는데, 제가 그의 작품을 읽은 후 그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점은 칼빈의 견해를 받아 들이느냐 혹은 아이맹의 견해를 받아 들으냐가 아니라 중점은 성경ㅇ에서 어떻게 말하느냐입니다.
저는 예정론을 믿으며, 저는 제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하나님이 일찍이 예정해 놓았다고 믿고, 제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전에 제가 장래에 천국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그가 이미 예정했다는 것을 믿습니다. 제가 그를 사랑하기 전에 그가 이미 먼저 저를 사랑했고, 제가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저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제가 그의 은혜에 항거하지 않았고, 제가 그의 은혜를 받아 들이고, 지속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장래에 하늘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제가 이를 논하는 것은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들었을 것입니다. 매우 유행하는 진부한 말 한 마디가 있는데, 즉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너무 엉망입니다. 더욱이 한 번 구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구원의 길을 가고 있는데, 아직도 구원 받아야 할 방면이 많다는 것입니다. 마치 미국 남방 흑인 목사가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저는 하나의 반제품 뿐입니다. 제가 완제품 되기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를 찬양하고, 저는 이전의 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로 가고 있고, 구속의 하나의 과정이며, 순간에 일어나는 기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주의 두번째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 구속하러 곧 오실 것입니다. 그때면 제가 완전히 구원 받으며, 저의 전부가 구원 받게 되고, 이 늙은 몸도 포함되어 구원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견해가 여러분더러 분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로 우리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첫번째 예정론의 견해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예정론의 견해는 근본상 토기장이와 흙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저를 그리스도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려고 결정했고, 그는 나를 이런 모습이 되게 결정했으며, 내가 태어나기 전 일찍이 이미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17세 때 그가 은혜로 저의 생명을 만지셨는데, 제가 그의 은혜를 거절할 선택과 받아 들이는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은혜를 받아 들이는 것은 바로 그가 저에게 대한 예정의 계획을 받아 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살아있는’ 관계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이런 예정론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 구원 받게 선택하였다고 절대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 받게 할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고,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느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을 거절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했고, 성경에서 우리가 성령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고, 성령을 거절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번째 순교하는 크리스찬이 그를 처형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계속하여 성령을 거절하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절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 우리보다 연약하다는 표시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절에 기꺼이 찔렸는데, 정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사람에게나 그의 자녀가 되라고 강박하지 않고, 아무 사람에게나 천국 가라고 강박하지 않고, 또 아무 사람에게나 크리스찬이 되라고 강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가 아름다운 귀속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려고 예정했는데, 이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예비한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예정론을 교회를 보지 않고, 하나의 생명 체험으로 봅니다. 저는 제가 그를 선택하기 전에 그가 이미 저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제가 이 일을 알고 있기 전에 그가 이미 모든 것을 예정했으며, 저는 제가 거절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하나님이 저를 위해 예정한 모습대로 되게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정하심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교의와 신학의 고집에 쉽게 파져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이시라고 찬양합니다. 당신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으며, 우리의 생명에 들어오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더러 당신의 은혜에 진짜로 체험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더러 회개와 믿음으로 당신을 거절하지 않게 하여서 감사합니다. 찬양과 영광을 당신께 돌리고, 장래에 만유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뜻을 완성할 능력이 있으시며, 당신이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뜻에 참석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전심전의로 당신의 은혜와 성령에게 불복합니다. 주여 당신의 우리의 모든 것이고, 당신을 영원히 찬양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