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2) 교정 및 자막 예정
우리가 ‘사도행전’ 이 책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에서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점점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은 스데반인데, 그는 이 일을 위해 첫번째로 순교한 사람입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는 한층 더 유대교와 선을 긋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바로 베드로와 고넬료의 사건인데, 얼마되자 않아서 예루살렘의 유대 크리스찬들이 아주 의심하기 시작하기를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해야 하는가였으며, 이방인과 유대인이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마지막에 바울에 예루살렘에 와서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에게 도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파견한 선교사들이 뜻밖에도 믿기만 하면 안되고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할례에 있지 않고, 진짜 문제는 이방인이 먼저 유대인으로 변해야 주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배후에는 더욱 큰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진정한 문제는 구원 자체에 있고, 문제가 유대교나 혹은 할례에 있지 않고 구원에 있으며, 진정한 문제는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음이거나 혹은 믿음이겠어요 아니면 두개 모두 필요할까요?
세상 대다수 종교 모두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데 반드시 기도, 금식, 돈을 헌금하는 것 등입니다. 이러면 결국에는 하나님과 화목해지고,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의지하여 구원 받는 종교는 사람을 끌 수 있는데, 이는 사람더러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냈다고 생각드는 것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을 미워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죄인보다 더욱 엉망이며, 예수님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는 죄인의 친구인데,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을 미워하였습니다.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입니까? 구원은 반드시 행위의 노력으로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행위에서 믿음을 더해서 받는 것입니까? 이런 생각은 매우 보편적입니다.
전에 제가 로얄 공운에서 군목 담임으로 있었는데, 저는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책임졌습니다. 어떤 군목이 카톨릭 성도들을 책임졌고, 다른 한 사람은 성경공회 성도들을 책임졌습니다. 매번 신병이 들어오면 그 중 한 군목이 묻기를 성공회 성도 몇 명 됩니까? 그리고 70%의 사람이 그를 따라갔습니다. 다른 한 군목은 아일랜드 말투인 군인을 데리고 가고, 나머지 모두는 저의 것입니다. 침례교, 감리교, 구세군, 불교신자, 인도교 성도, 회교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 무신론자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신론자의 군목은 참으로 재미있어요. 이것은 주제 밖의 말인데, 그러나 그들에 제 앞에 앉았을 때 제가 ‘감리교 성도 얼마나 됩니까? 침례교 성도가 얼마나 됩니까? 구세군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이 손을 듭니다. 이어서 제가 다시 동일한 말투로 ‘크리스찬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으면 쥐 죽은 듯이 조용하고, 가끔 어떤 청년이 빙그레 웃으면 손을 들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일반적으로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손을 들지 않는 것을 봅니다. 제가 말하기를 ‘당신들은 이미 감리회거나 혹은 침례회 성도라고 밝혔는데, 크리스찬은 도대체 얼마나 됩니까?’라고 하니 이때 그들이 묻기를 ‘목사님, 당신이 말씀하시는 크리스찬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여 제가 ‘당신들은 뭐라고 생각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결국 천편일률적인 대답으로 ‘바로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마도 어릴적에 교회 벽에서 십계명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때 제가 말하기를 ‘좋아요. 크리스찬은 바로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앉아 계신 여러분에서 몇 명이 크리스찬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들은 아직도 확신이 없었고, 이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나 목사님, 전부를 지킬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제가 ‘그럼 몇 개를 지켜야 크리스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매번마다 대답은 모두 육계명이어서 제가 ‘좋아요. 십계 중에서 여섯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찬입니다. 여기에 크리스찬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크리스찬의 정의를 열렬하게 토론할 수 있게 합니다. 제가 그더러 명확하게 토론하도록 하였고, 이것이 바로 문제의 소재입니다.
행위에서 믿음을 더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가능한 한 지키고, 할 수 없을 때 믿음으로 보충하라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십계명을 지키고,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 사하여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국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이해인데, 바로 선을 행하는 것이며, 바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 견해는 믿음에서 행위를 더하는 것인데,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 이 후에 다시 율법을 지키는 것인데, 하지만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하고, 이것은 유대교의 관념입니다.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하고, 다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육체에 속하기 때문이며, 자신의 노력으로 하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견지한 신념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항상 말하기를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믿음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보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끝났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았고, 모두 믿음으로 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믿음에서 타협하지 말아야 하고, 반드시 지속적으로 믿어야 하는데, 이것이 중점입니다. 먼저 믿고 다음 행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속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믿으라는 것이지 사람더러 율법을 지키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개는 매우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하여 쟁취하려고 노력했는데, 바로 크리스찬의 자유입니다. 어떤 단계어서든 율법을 들여오면, 바로 사람을 저주 아래 놓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관점에서는 만약 율법으로 난관을 넘기려고 한다면 반드시 백점이어야 합니다. 전부를 지키지 못하면 바로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 됩니다. 교통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제가 속도 위반해서 경찰에 잡히면 제가 경찰한테 ‘제가 신호등을 위반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럼 그가 ‘그래서 어쨌단 말이에요? 어차피 당신은 법령을 위반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율법은 일련의 진주가 아니고, 하나의 진주 목걸이입니다. 거룩에는 흑백이 분명하고, 단 조금이라도 하지 못하였다면 진주는 온 땅에 떨어질 것이고, 단 율법을 위반하면 바로 법을 위반한 것이고, 한가지거나 아홉가지거나 혹은 열가지를 위반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사람이 암초 한 덩이에 갇힌 것처럼입니다. 파도가 쳐 오면 암초와 모래장 사이의 물이 깊이가 3미터에 달하고, 첫번째 사람이 모래장으로 뛰어내렸는데, 그가 삼분의 일만 뛰었는데 결국 빠져 죽었어요. 두번째 사람이 비교적 멀리 뛰었으며, 삼분의 이 정도를 뛰었는데 결국 그도 빠져 죽었어요. 세번째 사람이 모래장을 향해 뛰었으며, 겨우 6인치 차이였는데 그러나 결국 빠져 죽었어요.
율법은 얼마를 지켰든간에 상관없으며, 몇 개를 지켰든 전부를 지키지 못했다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데,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성경도 이렇게 말하였어요. ‘전부 율법을 지속적으로 지키지 않은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십계명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여 천국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완전히 다른 공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왜서 십계를 주셨는지를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왜서 모세 율법을 주셨을까요? 답은 바로 ‘갈라디아서’ 안에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더러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지를 알게 하는 것이고, 율법만이 우리에게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나면 자신이 도대체 얼마나 잘못된가를 알게 됩니다. 율법을 반포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예비이며,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십계의 메시지를 전하고, 사람더러 죄를 알게 하고, 사람더러 자신이 근본상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 자신을 의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로 율법을 해석했는데, 지키기 더욱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젠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그림을 보세요. 여러분, 시각 보조 도구가 왔네요. 이 그림에는 ‘갈라디아서’의 전부 중점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은 매우 간단한 그림인데, 하지만 제가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할까요?
우리가 율법주의, 자유, 그리고 방종 세가지를 논했습니다. 율법주의는 자유의 적인데,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방종도 자유의 적이라는 것을 생각못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과 2장 두 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논했고,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 아래에서, 그의 자비하심 아래에서,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을 논했습니다. 전체 기초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 아들 안에서의 믿음인데,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님이 우리더러 여기에서 자유스럽게 서 있게 하십니다. 하지만 두가지 방법이 우리더러 이런 자유를 잃게 하는데, 한가지는 이미 지나온 길로 가는 것이며, 돌아가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감옥이며, 우리를 그 안에 갇히게 하고, 기어 나오고 싶어도 나오지 못합니다. 일단 돌아가서 율법을 지키면 묶이고 노예가 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분노 아래 떨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더러 자유를 잃게 하는 두번째 방법은 정욕을 지나치게 방종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매임인데, 당신 자신이 묶은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당신더러 다른 사람의 매임에 되고 하는데, 왜냐하면 각종 규정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방종은 당신더러 자신의 욕망에 매이게 하고, 이로써 당신이 다시 하나님의 분노 아래 떨어지게 되고 자유를 잃게 됩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중에 호수지역 헬베린 산의 ‘활보봉’에 가보신 분 계십니까? 그 지형이 가장 좋은 예입니다. 호수지역 헬베린 산 활보봉에 가보신 분을 아실 것인데, 그 길이 너무 가파롭기 때문에 산등성이를 따라 가야 하며, 양쪽 모두는 아무것도 없고, 당초에 두 개의 아이스하키가 왔다 갔다 해서 가파로운 산등성이를 남겼습니다. 스위스의 마테혼봉이 바로 세개의 큰 아이스하키가 돌아가며 만든 것이며, 세개의 뾰족한 것을 남겼고, 활보봉은 두개의 큰 아이스하키가 돌아가며 만들었는데, 위에서 걸으면 정말로 너무 재미있어요. 그러나 만약 거친 바람이 불면 유일하게 안전한 방법은 바로 꿇는 것인데, 여기에는 도덕적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가 또 강의를 하네요.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마치 헬베린 산의 활보봉을 걸어가는 것처럼 양옆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한 크리스찬이 자유를 대면할 때 가장 큰 위험은 율법주의인데, 정말로 뜻밖이지요. 방종의 행위가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일단 여분의 규칙을 제정하기 시작하면, 쉽게 율법주의로 변하고, 율법주의는 성령의 운행을 없앨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만약 율법주의 교회를 가면 바로 즉시 모든 사람이 입을 오므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보셨습니까? 차가운 표정에서 그들은 율법주의에 빠져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율법 지키는 것을 중요시하면, 마음이 굳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성령 안에서의 자유가 아닙니다. 율법주의 자들은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중요시하는데, 이것이 아마 관건적인 것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규직만 지키는 바로 크리스찬일 줄 생각하지요. 흡연을 하지 않고, 도박을 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고, 이것 하지 않고 저것 하지 않고, 그들은 규칙을 지키는데,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를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우리 버킹엄 주의 교회에 왔어요. 그는 성격이 매우 강했는데, 하지만 주를 믿었습니다. 몇 주 후 그가 저에게 와서 크리스찬이 주일 저녁에 영화관을 가도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아주 농담적으로 ‘히스기야서 3장 16절’을 인용하여 크리스찬은 주일 저녁에 영화관을 가시면 안 된다고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자제했어요. 제가 그에게 답을 주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왜서요?’라고 물어서 제가 ‘당신이 반드시 스스로가 예수님께 물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명백하게 얘기했다면 제가 그에게 알려주었어요. 만약 성령님이 하신 말씀이라면 제가 권세를 가지고 말을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제가 알기엔 성경에서 이 문제를 논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제가 그더러 스스로 예수님께 물으시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셔서 제가 ‘그냥 예수님을 떼리고 함께 영화를 보세요. 그래서 당신이 좋은지를 보면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음 주 주일 저녁에 그가 영화관으로 가서 매표하는 아가씨에게 말하기를 ‘티켓 두 장 주세요’라고 했어요. 당시 그 한 사람 뿐이었고,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매표하는 아가씨가 그에게 ‘당신 여자 친구가 오셔서 함께 보시나요?’라고 물으니 그가 ‘아니에요, 돈 여기 있어요. 저에게 티켓 두개를 주시면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 한 사람뿐인데요’라고 하니 그가 ‘그건 당신 상관 마세요. 돈 여기 있으니 티켓 두 장을 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아가씨는 참지 못하고 더욱 호기심이 있어서 묻기를 ‘다른 티켓 한 장은 누구에게 주시려나요?’라고 하여 그가 ‘이 티켓은 예수님께 주시려는 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가씨는 너무 놀랐고, 그는 바로 전화로 사무실 사장님한테 전화를 하여 그더러 한 번 와 보셔야겠다고 하여 사장님이 오셔서 무슨 문제이냐고 물으니 그가 ‘이 사람이 티켓 두 장을 사렵니다’라고 하니 사장님이 ‘그럼 두 장 주시면 되지 왜서 나를 불렀어요’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다른 한 장은 예수님께 주시는 것이라고 해서’라고 하니 사장님이 듣고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는 침을 넘기기 시작하면서 말하기를 ‘두 장을 사진다면 두 장을 드리세요. 어차피 우리는 돈을 벌 수 있잖아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가 티켓 두 장을 사서 영화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당신 여기에 앉으시고, 제가 여기에 앉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0분 보고 난 후 예수님이 그에게 묻기를 ‘재미있어 보이냐?’라고 하여 2분 후 그가 영화관에서 나왔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항상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 나쁜 것 같아. 나는 응당 그를 대신해서 결정을 해야 하는데, 나의 생각엔 이렇게 하는 것이 매우 좋은 것 같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서 자유가 있기 때문에 내가 쉽게 새로운 규정을 설립할 수 있습니다. 저는 크리스찬은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에게 ‘영화보는 것은 너에게 좋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이런 자유는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당신더러 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성령더러 당신을 인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에서 진정한 자유를 말했습니다. 자유스럽게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범하지 않는 자유가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유입니다. 비크리스찬들은 이런 자유가 없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규칙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정욕적 방종하는 행동을 저지합니다. 어떤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그의 성도들더러 정욕을 방종해서는 안된다고만 하는데, 사실 율법 지키는 것과 방종은 똑깥이 나쁜 것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율법 지키는 것과 방종은 모두 똑같이 자유와 적이 됩니다. 저의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은 ‘갈라디아서’의 전체 논점입니다. 1-2장에서 이런 자유를 논했고, 3-4장에서는 율법주의가 이런 자유를 파괴한다고 논했고, 5-6장에서는 다른 한가지 극단적인 것은 바로 방종이라고 논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실 두 적과 싸우는 것인데,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대다수 상황에서 당신은 반드시 두 적과 싸워야 하며, 이래야 진리를 보호할 수 있고, 자유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활보봉’ 위에서 걸을 때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좋아요 여러분, 다음 시간으로 우리가 이 세가지 점을 보겠는데, 먼저 율법주의를 자세히 논해보겠습니다. 할례 행하는 것은 갈라디아 인들이고, 그들이 행하는 첫번째 율법은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첫 걸음입니다. 하지만 이는 복음 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한가지를 지켰다면 전부를 지켜야 하는데, 그러나 만약 율법 지킬 필요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무법천지로 변하지 않겠습니까? 한가지 상반된 그릇된 관념이 있는데, 반율법주의입니다. 이 단어를 들어보셨어요? 사실 이 단어를 아실 필요가 그다지 없는 것 같은데, ‘반율법주의’는 바로 당신이 만약 다른 사람더러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그들은 임의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야가 좁은데, 그들은 이 두갈래 길만 보일 뿐입니다. 만약 사람에게 규칙을 주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을 방종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뜻밖에도 이로써 규칙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제가 감리회에서 전도자로 있을 때 그들에게 반인치 두께의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은 ‘감리회의 규범과 규율’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삼사분의 일인치가 증가했고, 매년마다 40장씩 증가합니다. 만약 규칙이 부흥을 가져온다면 감리회는 지금 대부흥이 되었을 것인데,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쉽게 또 하나의 규정을 정하며, 반드시 이렇게 하여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지 않고, 자유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석방한 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를 절대로 조심하십시오. 만약 조심하지 않고 빠지게 되면 굳어지고 거짓으로 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율법을 위반하면 다른 사람이 당신을 업신여는 것을 무서워 근본상 감히 인정하지를 못합니다. 이 단어를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율법주의.
다시 방종주의를 보겠는데, 이것도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정욕에 관한 일을 논하였습니다. 그가 정욕에 관한 일을 조심하라고 했고, 정욕은 마치 늪 같고, 또 다른 하나의 노예이며, 쉽게 물들고, 사람을 추잡하게 하고, 쉽게 빠지는데 하지만 스스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서의 ‘일’은 복수입니다. 어떤 일은 매우 뚜렷한데, 음란, 우상숭배, 마약, 점치는 것 같은 것인데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에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은 비교적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하지만 모두 정욕에 속한 일들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할례에 관한 일을 열렬하게 반박했는데, 하지만 그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어떤 일이든 모두 반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문제를 토론하든 분열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뜻을 모두가 응당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위를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의 성격에는 모가 나 있는데, 이런 사람은 가까이 하기가 정말로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은 산을 옮길 믿음이 있는데, 그러나 그들은 산을 옮겨 다른 사람 가는 길을 막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을 아십니까? 교회마다 이런 사람이 한 두 명 있는데, 이는 정욕에 관한 일입니다. 비록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그래도 정욕에 속합니다.
바울이 묻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정욕에 빠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아마도 자주 발생했을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스캔들이 일어났고, 만약 어떤 티비 부흥가가 스캔이 터졌으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여기에서 바울이 매우 심각하게 말하기를 ‘만약 한 사람이 조심하지 않아서 실족하였으면 그를 즉시 부축하여 일으켜 세울 것이라. 왜냐하면 네 자신도 실족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크리스찬이 가는 이 길에는 바나나 껍질이 많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만약 누군가 조심하지 않아서 실족하면 다른 사람은 가서 그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울 것이며, 하지만 태도는 겸손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너희 자신도 실족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기를 ‘만일 범죄가 성행하면 상황은 다를 것이라. 만약 한 사람이 가끔은 실족하여 범죄하면 즉시 그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울 것이고, 그를 용납하고, 그가 고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뻔히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범하면, 이때 바울이 말하기를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심각한 말 한 마디를 했는데, 사람이 만일 계속해서 범죄가 성행하면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것은 현대 크리스찬들의 하나의 큰 오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단 구원 받으면 영원한 구원인 줄 알고 있는데, 하지만 바울이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보세요. 그가 정욕에 관한 일들을 열거한 후에 말하기를 ‘내가 전에 너희들에게 경고했는데, 지금 또 너희들에게 경고하겠는데,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절대로 받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크리스찬들을 겨냥하여 하신 말인데, 하지만 가끔 죄를 범했든간에 누군가 즉시 그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울 크리스찬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그러나 뻔히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범하고, 범죄가 성행한 크리스찬들은 자신들은 이미 천국의 티켓을 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하지만 바울이 말하기를 ‘어림도없다. 너는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하나의 경고일 뿐이며, 매우 심각한 경고입니다.
당신은 율법주의나 혹은 방종주의에 빠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것에든지 당신은 즉시 나와야 하는데, 하지만 당신이 만약 일부로 거기에 있기를 선택하면, 초롱이든 혹은 늪이든 당신은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매우 심각한 경고인데,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이젠 자유를 보겠습니다. 이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죄를 범하지 않는 자유를 가져야 합니다. 아무 멋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이미 죄를 범하지 않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죄에게 불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이 ‘디도서’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우리더러 죄를 거절하게 도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독신 남녀에게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피임 방식은 경계를 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우리를 도와 죄를 거절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위엣 이것을 보겠습니다. 비록 제가 그를 그릴 방법이 없지만 여러분이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위에 길 하나가 있는데, 우리는 끊임없이 앞으로 전진해야 하고, 마치 제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성령안에서 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안에서 행하면 아름다운 일 한가지가 발생할 수 있고, 우리의 생명에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우리 스스로는 정욕의 악과는 맺을 수 있는데, 하지만 스스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지속적으로 성령안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의 생명에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한가지 뿐인데, 그러나 아홉가지 맛이 나고, 정욕의 일은 매우 많은데, 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한가지 뿐이고 아홉가지 맛이 납니다.
스페인과 지중해 지역에 이런 열매가 있는데, 신비한 진장과라고 합니다. 앉아 계신 분 중에 드셔보신 분 계십니까? 오, 당신 드셔보셨네요. 그럼 당신이 제가 한 말을 믿겠네요. 한 입 먹으면 오렌지 같은 맛이고, 다시 또 한 입을 먹으면 레몬 같은 맛이며, 각종 다른 맛이 납니다. 신비한 진장과라는 이 이름은 정말로 잘 지었어요. 드셔 보신 분 계셔서 다행이네요. 아니면 전도인이 아무렇게나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믿지를 않았을 것이에요. 어떤 전도인의 아이가 아버지에게 묻기를 ‘아빠, 금방 설교에서 한 이야기가 도대체 진자에요 가짜에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웃기지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에는 아홉가지 맛이 있고, 아홉가지 맛이 동시에 존재하고, 그는 성령의 열매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 중의 어떤 맛은 비크리스찬에게서 나는 것이고, 어떤 크리스찬들은 매우 즐거워 하고, 어떤 이들은 평안스러워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아홉가지를 구비한 자는 크리스찬 뿐이고,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비크리스찬들은 아마도 그 중의 3-4가지 특질이 있을 것인데, 하지만 동시에 아홉가지 특질을 구비하여야 생명에 성령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삶에서 성령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이 아홉가지 특질이 여러분이 하나님과 사람과 자신과의 관계를 전달합니다. 첫 세가지 특질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여러분더러 하나님과 아름답고 화목한 관계가 있게 하고, 다음 세가지 특질인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당신더러 사람과 아름답고 화목한 관계가 있게 하고, 마지막 세가지 특질인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당신더러 자신과 아름답고 화목한 관계가 있게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정말로 너무 멋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성령의 은사가 없다면 그럼 열매의 효과는 유한적인데, 즉 성령의 열매가 없고 성령의 은사만 있어도 안됩니다.
만약 제가 병원에 병문안을 가면, 제가 성령의 열매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방문으로 사랑을 표달하고, 그의 아이를 돌보아 주는 것은 양선의 표현이며, 매일 방문하는 것은 충성한 표현이며, 방문 시간이 끝나면 저는 따나는데 이는 절제의 표현이고, 미안해요. 제가 한 개를 빼놓았네요. 방문 시간이 끝나면 제가 바로 떠나는데 이것은 온유의 표현이고, 다른 사람의 과일을 먹지 않는 것이 절제의 표현입니다. 여러분, 제가 방문하는 시간에 성령의 모든 열매를 표현했는데, 하지만 제가 그를 치료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치유는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사도 필요하고 열매도 필요한데, 이것은 상부상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성령대로 행하면 바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 곳에서 두개의 서로 다른 ‘행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아쉽게도 모두 걷는다는 ‘행’으로 번역했습니다. 제5장의 마지막에서 말하기를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제6장에서도 말하기를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제5장에서의 ‘행’은 헬라 원어에서 산책이라는 뜻이고, 한 사람이 홀로 걷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6장에서 ‘행’의 뜻은 성령안에서 행진을 가리키며, 다른 사람과 일제히 나간다는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성령대로 행한다는 것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한가지는 홀로 걷는다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다른 형제 자매와 일제히 행한다는 것인데, 우리 모두는 이 두가지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형제 자매와 일제히 나가는 것이고, 모두가 함게 앞으로 나아가고, 함께 성령안에서 행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전한 메시지인데, 우리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읽으면 마음이 찔리게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 서신이 마치 크리스찬 자유의 감옥 장 같다고 하는데, 저는 이 말을 정말로 잘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우리가 어떠한 자유를 믿고 있는지를 알고 싶으면, 바로 이런 자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종 다른 자유를 믿고 있는데, 좋고 나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자유는 죄를 범하지 않는 자유이고, 성령의 자유는 우리를 율법주의 감옥과 방종주의 늪에 빠지지 않게 지켜줍니다. 우리더러 높은 곳에 있게 도와주고, 하나님의 빛 같은 은총을 누리게 합니다.
이것이 왜서 우리와 연관이 있을까요? 왜냐하면 율법주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어디에든 모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행위로 천국을 가려고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시작점으로 하였다가 다시 돌아서 행위로 구원을 얻고 싶어 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상스터 박사님이 한번은 병원에 임종 전인 여인을 방문했는데, 박사님이 그에게 묻기를 ‘당신은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시면 무엇이라고 말 할 것입니까?’라고 하니 여인이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손을 내밀며 말하기를 ‘저는 과부이고, 다섯 아이를 키우느라고 교회 갈 시간이 없었고, 성경을 읽거나 교회 활동을 참석할 시간이 없었어요. 하지만 저는 이미 저의 아이들을 힘껏 키웠고, 제가 하나님을 만나면 그에게 저의 이 두 손을 보세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러면 그가 아마 아실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더 말하겠습니까? 상스터 박사님은 훌륭한 기독교 전도인이고, 그의 설교도 매우 훌륭합니다. 그는 단지 말하기를 ‘당신은 이미 늦었어요’라고 하니 여인이 아주 이상하며 묻기를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니 그가 ‘다른 사람이 이미 당신 앞에 줄 서 있는데, 그 사람이 이미 두 손을 하나님께 보였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손은 더 보지 않아요’라고 하니 그가 또 묻기를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여 이로써 그가 말하기를 ‘당신의 두 손을 믿지 마시고, 그 분의 두 손을 믿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율법주의를 지키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영국인 모두는 훌륭한 크리스찬이라면 응당 노인을 존중하고 현인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을 사랑해야 한다며, 그들은 바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에 가는 사람들과 같이 모두 좋은 크리스찬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율법주의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에게 100% 한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알려주어야 합니다. 당신이 만약 이런 모습으로 천국을 가면, 그때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성도에게 쉽게 규칙을 정합니다. 제가 말씀드렸는데, 교회 문으로 들어가기 전 네개 계단이 있는데, 즉 회개, 믿음, 세례, 성령 받음입니다. 교회 문에 들어가기 전 이 네가지 계단만 있는데, 안에는 아직도 많은 계단이 있지요. 우리가 ‘베드로전후서’를 강의할 때 다시 논하겠는데, 하지만 밖에는 네개 계단만 있습니다. 아쉽게도 어떤 교회는 뜻밖에도 반드시 감독에 의해 견진 성사를 행해야 한다고 하면서, 반드시 이것을 해야 하고, 반드시 저것을 해야 하고,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하고, 반드시 저렇게 해야 하고, 반드시 몸을 맡겨야 하고, 반드시 전도 동역자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합니다. 각종 규칙을 교회 문턱 밖에 해놓았는데, 이 계단은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한 크리스찬이 하나님의 집 대문에 들어가기 전에 다른 규칙을 더하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율법주의 자입니다.
오늘날 방종주의 자도 여전히 존재하는데, 어떤 사람은 비크리스찬이 음행을 하면 바로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크리스찬이 음행을 하면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크리스찬이 죄를 범하면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혹시 축복이나 상급이 적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천국 들어가는 티켓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 점에 대해 매우 명확하게 가르치기를 고의로 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여기에 남아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활보봉 위에서 동행하고, 성령의 바람이 당신의 얼굴을 스치고, 하나님의 은혜가 햇빛처럼 당신의 몸을 비추면 당신은 순리롭게 건너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시간이 조금 있는데, 다음은 제가 ‘갈라디아서’의 한 단락 성경을 여러분에게 읽을 테니 들어보세요. 이 책은 정말로 사람더러 흥분하게 하는데, 바울의 간구를 들어봅시다.
형제 자매들, 제가 여러분에게 간구하겠는데 저의 입장에 동의하여 주십시오. 필경 내가 전에 여러분의 입장을 동의해 주었고, 여러분은 저에게 미안한 일을 결국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저의 몸에 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저의 병이 여러분에게 귀찮았지만 여러분은 저를 미워하지 않았고, 버리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여러분은 저를 접대했고, 마치 하나님이 천사를 접대했던 것처럼 했고, 그리스도 예수를 접대했던 것처럼 하였습니다. 당시 여러분은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또 어떻습니까?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때는 여러분들이 자신의 눈을 빼어서 저에게 준다고 해도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솔직히 말하면 여러분의 적이 되는 것입니까? 그 사람들이 여러분에 대한 열정에는 호의를 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나를 고립시키려는 것이고, 여러분들더러 그들에게 열정을 표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서의 열심은 좋은 것이나 하지만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만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내가 다시 한번 모친처럼 너희들 위해 생산하는 고통을 참아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특성이 너희 생명에서 형성될 때까지니이다. 나는 지금 너희들과 함께 있기를 얼마나 갈망하는 지 아느냐. 내가 다른 태도로 너희들을 대하고 싶고, 너희들을 위하고 싶고, 나의 마음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불안한지 아느냐.
바울의 마음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는 간곡하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들, 하나님은 여러분을 선택하여 여러분더러 자유인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단지 이 자유로 정욕의 핑계에 방종하지 말아야 하고, 사람으로 서로 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이 명령 안에 종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조심해야 하는데, 만약 여러분들이 짐승처럼 서로 물고 뜯으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함께 죽게 될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려는 것은 여러분들의 언행이 성령의 인도에 순종해야 하고, 자신의 본성의 욕망에 만족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성의 욕망이 성령과 서로 적대되고, 서로 대립되고, 여러분더러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성령이 여러분을 인도하면, 여러분은 율법의 속박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령더러 우리를 인도하게 해야 합니다. 서신의 마지막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을 속이지도 말라. 한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한 사람이 만일 자신의 정욕에 만족하려고 씨를 뿌리면, 그는 정욕으로부터 사망을 얻을 것이고, 그가 만일 성령을 얻기 위해 기쁨으로 씨를 뿌리면 그는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니라. 그래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우리가 만일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어느 때든지 기회만 있다면 회중들 위해 이익이 있는 일을 할 것이며, 신앙에서 한 가족에 속한 사람들은 응당 더욱 그러해야 하느니라. 너희들은 이 큰 글씨를 보라. 내가 친히 너희에게 쓴 것이라. 겉으로 잘난 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로 당신들이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 핍박을 받을까 무서워서이고,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 핍박을 받을까 무서워 하는 자들이니라. 사실 할례를 받은 사람들도 율법을 지키지 않고, 그들은 너희들에게 억지를 할례를 받게 하고, 너희들이 외적인 의식에서 이미 굴복되었음을 자랑하는 것이니라. 나로서는 나는 다른 것을 자랑하지 않고,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할 것이라. 왜냐하면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계는 나와 이미 못박혀 죽었고, 나는 세계와 이미 못박혀 죽었느니라. 할례를 받든지 혹은 받지 않든지 아무것도 아니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이 원칙대로 하는 모든 사람과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는 동일한 평안과 긍휼을 얻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이 서신의 마지막에서 말하기를 ‘오늘부터 이 일로 인하여 자를 괴롭히지 말라. 왜냐하면 나의 몸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라. 이것은 내가 예수님께 봉사함으로 얻은 표시이니라. 형제 자매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것은 ‘가라디아서’의 한 구절이며, 매우 힘이 있는 서신입니다. 제가 방금 읽은 것은 현대 번역본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강의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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