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2) *기디언 LCY 번역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는데, 우리가 두 가지 측면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하나는 사람의 각도에서 저자의 목적을 보아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편집한 각도에서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서 이 책을 주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그 책의 원뜻을 보아야 하는데, 즉 역사에 포함된 뜻입니다. 그리고 그 책에 존재한 뜻을 보아야 하고, 그가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본말을 뒤바꾸어 먼저 두 번째 측면의 뜻 나누려고 하는데, 이것을 잘못된 것입니다. 응당 먼저 그 책이 당시에 기록된 목적이 무엇이며, 그리고 ‘이 책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종 이상한 해석이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편지로 물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가 버밍엄에 있는 슈퍼마켓을 사서 그를 커피숍으로 인테리어해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제가 계속해서 하나님이 저를 인도해 달라고 구하였고, 후에 제가 성경에서 한 구절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말하기를 내가 거거에 너를 위해 많은 복을 예비하였느니라고 하였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 구절로 저를 감동했는데, 당신 보기에 이런 인도로 되겠습니까?’라고 하여 제가 회신하기를 ‘만약 이 구절만 본다면 아마도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그 구절에서 본 뜻은 근본상 성경의 원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조심하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첫 번째는 원본에 포함된 뜻을 찾아야 하고, 그리고 나서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뜻이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을 때 이 기본적인 문제에 부딛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더러 오늘날 교회와 초대 교회를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렇다는 것을 바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자세히 관찰하면, 초대 교회가 그다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쟁론, 당 짓기를 했고, 그들도 죄를 범했는데, 하지만 그들의 교회는 생명력과 능력이 충만했으며, 전도자의 인도가 마치 성령님의 인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반드시 장점 단점을 분별해야 하는데, 초대 교회에도 단점이 있었습니다. 절대로 이상주의를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상주의 사람들은 감탄하기를 ‘만약 초대 교회처럼이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사실 초대 교회에도 단점이 있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전도인 세미나에서 어떤 전도인이 저에게 묻기를 ‘당신은 사람이 성령에 의해 쓰러질 것이라고 믿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약 직접 체험해보고 싶으면 십일조의 숫자를 가짜로 해 보세요. 만약 베드로가 당신의 목사라면 당신도 성령에 의해 쓰러질 것입니다. 그 전도인이 듣고 더는 흥미가 없어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에 일어났던 나쁜 일이었습니다. 만약 베드로더러 오늘날 교회의 십일조 상황을 알게 한다면 교회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네 돈과 함께 지옥에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직접적인 번역이고, 원어에서는 말하기를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 돈으로 하나님을 사는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는 장점 단점이 있는데, 우리는 그 단점을 배우면 안됩니다.
어떤 한 사람은 현대 죵교외교가가 본 영웅이었는데, 그의 이름은 가말리엘이었고, 그는 절대적인 벽타기파였고,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마찬가지입니다. 가말리엘이 말하기를 ‘우리 기다려 보자, 만약 하나님으로서 나온 것이면 막을 수 없을 것이고, 만약 아니면 반드시 흐지부지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매우 지혜롭게 들리는데, 이 가말리엘은 이로써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가 하나님 앞에서의 뜻이 바르지 않았으며, 벽타기파들이 하나님 눈에는 하나도 옳은 데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 바로 다소에서 온 바울이 전에 가말리엘의 학생이었으며, 가말리엘은 교사였고, 다소의 바울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를 파괴할 것이고, 나는 모든 크리스찬들을 갇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마지막에는 오히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적의 때문에 회심하지 말아야 하고,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보다 희망이 있으며, 그래서 가말리엘의 벽타기파를 배우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는 경쟁, 다툼, 허위, 음란 그리고 이단 등 단점들이 있었으며, 단점이 이렇게 많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를 무턱대고 숭배할 필요 없습니다. 그들에게 장점이 있으며, 또한 단점도 있었기에 그들의 단점은 배우지 마시고, 오히려 그들의 잘못에서 배우시고, 한 번 잘못하고 두 번 다시 실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쉽게도 역사는 되풀이될 것인데, 그것은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 사람들이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듣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프리 사제 문생의 시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과거의 장점과 단점에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바로 우리가 정상태와 비상태를 구별할 수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어떤 일은 정상태가 아니며, 우리는 매번 모두 이렇다고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주를 믿게 된 것은 하나의 독특한 양식이고, 그것은 하나의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맨 나중에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그가 전에 다메섹으로 갈 때의 경험 말하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아쉽게도 많은 사람이 이를 주를 믿는 양식으로 보았는데, 사실 근본상 이런 것이 아니며, 이것은 하나의 독특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바울더러 ‘성경’을 쓰게하는 자격을 갖추게 하였습니다. 그 후로 더는 이렇게 주를 믿는 경험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바울이 주를 믿은 경험은 남달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서 우리가 기도할 때 집이 흔들리지 않지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혹시 그럴 수 있고, 혹시 그렇지 않을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번은 제가 모임에 참석했는데, 모인 사람 수가 여기와 비슷했고, 장소도 여기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그날 제가 기도할 때 정말로 눈을 감지 말았어야 했어요. 후에 어떤 사람이 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었으며, 그 후에 어떤 사람이 여성 잡지에서 오려낸 난로 광고를 저에게 부쳐서 보았는데, 위에 난로에 불을 붙이는 사진이 있었고, 그가 말하기를 이것은 그가 찾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기도할 때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불혀가 나타났었는데, 제가 처음으로 이런 상황을 보았고, 전혀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우리는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불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성령의 세례가 없었다는 표시입니다.
베드로가 헤롯의 손에서 목숨을 건졌는데, 하지만 야고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응당 어느 상황을 기대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응당 심중해야 하고, 어떤 교회나 혹은 초대 교회에서 발생했던 사건만 정상태라 하지 말아야 하고, 전부를 봐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비상태라고 분별해야 하고, 그리고 무엇이 정상태이며, 여전히 다시 발생할 수 있을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세 가지 준칙을 드리겠는데, 첫째는 만약 한 번만 언급했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럼 그것은 아마다 상상할 수 없는 비상태 사건일 것입니다. 만약 한 번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정상태 현상일 것인데, 예를 들어 방언 같은 것입니다. 오순절 그날의 큰 바람과 불이 혀 같은 것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지만 방언은 확실히 계속해서 여러 번 나타났습니다. 정상태 현상으로 보이는데, 하지만 마지막 관건적 요소는 응당 ‘성경’ 다른 곳의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복음서나 서신에서 반드시 성겨의 인치심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크리스찬의 정상태 현상입니다. 여러분 이 준칙을 이해했습니까? ‘사도행전’의 모든 사건이 오늘날도 모두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결론은 아마도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한 가지 양식이 존재하는데, 어떤 일은 한 번만 언급한 것이 아니고 중복해서 언급했습니다. 예를 들어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인데, 우리가 성경 다른 곳에서 알 수 있으며, 이것은 크리스찬의 정상태 방법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응당 경험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사도행전’을 본받아야 할 하나의 양식으로 여기는데, 먼저 한 가지 중점을 보겠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서신을 이어받았습니다. 만약 ‘사도행전’이 없다면 우리는 많은 사건들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와 서신에서 어떤 일들은 정의나 혹은 명확하게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사도행전’이 있어서 우리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들인지 보겠습니다. 우선 먼저 신약성경의 서신처럼 대다수는 바울이 기록했는데, 하지만 바울이 누구입니까? 만약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바울이 누구인지를 모를 것이고, 그에 대한 이해도 매우 유한적일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인지를 반드시 알아야 그의 서신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바울에 대해 매우 중요한 소개를 했는데,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만약 신약성경에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매우 놀라워하며 발견할 수 있을까요? 많은 일들을 모르실 것입니다. 둘째는 물에서 세례 받는 것을 ‘사도행전’에서만 명확하게 세례 받는 정의를 묘사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항상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세례 받는 것이 물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바우리 물에서 세례 받는 것을 가르친 적이 없었으며, 바울은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을 논했는데, 순수히 영적인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데, 바울 자신이 물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도 물로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서신에서 말한 세례는 물에서 받는 세례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령 세례 받음’이라는 단어를 보면, 이 단어가 사복음서에서 모두 나타났는데, 하지만 사복음서 모두에서 뜻을 해석하지 않았고, 또한 성령 세례 받을 때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서 성령 세례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하기를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줄 모르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 말의 뜻을 해석하지 않아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만 성령의 세례 받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은파들이 ‘사도행전’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만약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연결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모세 율법처럼인데, 크리스찬들이 모세 율법의 속박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전에 ‘마태복음’을 강의 할 때 말씀드렸었는데, 제가 이 옷을 입은 것은 모세 율법에 어긋난 것인데, 하지만 제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것은 저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총 613개 규정이 있는데, 하지만 저는 이 율법들의 속박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이 율법들의 속박을 받을 필요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만약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할레를 격렬히 변론하듯이 사도행전 15장이 하나의 고조인데, 모두가 한결같이 크리스찬은 모세의 율법에 속박될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같은 단어도 우리가 ‘교회’는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데, 각 곳의 교회는 어떻게 세워졌고, 교회는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사도들이 각 도시로 가서 장로를 세우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교회에는 장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교회가 무엇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제가 매우 명확하게 강의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맹인처럼 코끼를 만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복음서와 서신서를 연결하였고,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연결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책은 사람이 땅에서 쓴 것 같다고 하는데, 저는 묘사가 매우 좋다고 느낍니다. 저자는 교회가 지중해 연안 각 곳에 세우진 것을 직접 목격했고, 그도 직접 목격했고, 전체 과정을 보았습니다. 제가 이 책에 근거하여 ‘크리스찬의 중생’이라는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저는 ‘사도행전’에서 크리스찬은 어떻게 중생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 책이 없었다면 저는 이 책을 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책에 대해 비평했는데, 아마도 이 원으로 말미암아 그랬을 것입니다. 제가 ‘사도행전’으로 어떤 교의를 귀납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됩니다. 왜서 안될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사도행전’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도회의 문제에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요?
복음서는 매우 일찍이 기록했는데, 어떻게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을 논하지 않았고, 예수님이 죽임 당하고 부활하기 전에 기록했습니다. 서신과 ‘계시록’은 비교적 늦게 기록되었는데 거기에서도 어떻게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을 논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상은 이미 주를 믿은 크리스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오술절 지난 후 사람들이 주를 믿은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오순절 이후 주를 믿은 사람마다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임 당하고 부활 전에는 세례 받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도독, 그리고 가이사입니다. 하지만 오순절 이후 중생한 모든 사람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으며, 그들 모두는 주 예수를 믿었으며, 모두 물 세례를 받았고, 또한 모두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의 기본 가르침이었으며, ‘사도행전’에 이 네 개의 영적인 문을 명확하게 논하였습니다. 이것을 알고 다시 복음서를 읽으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 모두가 이 네 가지 사건을 언급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하지만 동시에 언급한 것은 아닙니다. 서신에서도 이 네 가지 사건을 언급했는데, 하지만 거기에서도 동시에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만 동시에 이 네 가지 사건을 언급했으며, 저자는 거기에서 크리스찬 신앙의 핵심 진리를 논했는데, 바로 죽음에서 회개하여 믿음, 세례, 그리고 안수 기도, 성령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에서 이것을 알게 되었는데, 만약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중생하여 구원 받는 네 가지 필연적인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 많은 크리스찬들의 중생 과정이 정확하지 않은 것은 이 네 가지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쩐지 후에 문제가 생기게 되네요. 후에 나타난 많은 문제들은 잘못된 중생 과정 때문인데, 제가 이 책에 광고를 하겠습니다.
저의 중점은 만약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저는 이것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저는 세 가지만 갖추면 되는 줄로 알았고, 심지어 두 개나 혹은 한 가지 조건이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네 가지 조건 전부를 논했습니다. 그는 에베소에 가서 요한의 제자를 찾아서 그들이 주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받지 못했고, 들어 보지도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오! 그럼 너희들은 어떤 세례를 받았느냐? 요한의 세례입니다. 오! 그럼 너희들은 아직 진정으로 예수를 믿지 않았고, 너희들은 회개만 했을 뿐이고, 너희들은 이미 회개하여서 참으로 좋구나. 이어서 바울이 그들과 예수님을 강해했고, 그들이 믿었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리고 그들더러 성령을 받도록 안수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바울이 모도우를 대면할 때 항상 먼저 그들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었는지를 알려고 했고, 그리고 속히 그들을 도와 부족한 조건들을 갖추게 하였는데, 저는 이것들을 ‘사도행전’에서 배웠습니다. 만약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저는 이 이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난 후 복음서와 서신에서 동일한 가르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저에게 큰 문을 열어주었고, 저더러 신약성경을 이해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만이 복음 전하는 것을 상세하게 논했고,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양식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선교사 수첩입니다. 제가 순서를 헝클어서 미안합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조리가 매우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서신서를 연결했고, 또한 오늘날 우리가 섬길 때 응당 지켜야 할 양식입니다. 하지만 단점은 배우시지 마시고, 장점을 배우십시오. 그들의 잘못에서 배우면 됩니다. 비상태의 일을 지켜야 할 양식으로 하지 마시고, 무엇이 정상태인지를 알아야 하며, 무엇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이 되는지, 우리는 여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1961년, 제가 어느 한 침례교에 가서 목회를 했는데, 버킹엄 주에 있는 작은 곳이었고, 샤팡 성베드로었습니다. 제가 거기에 간 후 현지에 목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그는 유아 세례하기를 원치 않았고, 목사님이 유아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하는데,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었어요. 제가 ‘이 목사님 아직 계십니까?’라고 물으니 안 계시고, 50년 전에 떠나 가셨는데, 그는 1910년에 떠나셨고, 그의 이름은 로렌 앨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전에 샤팡 성베드로에서 목회를 했는데, 사실 그는 선지자였고, 저 여기에 그의 사진이 있는데, 이 사람은 저에 대한 깨우침이 매우 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새로운 각도에서 진리를 알아가게 도와 주는데, 우리는 그들이 하는 방법이 영원히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잘못을 하지 않는데, 하지만 그들은 사람을 특별히 도와주고, 새로운 각도에서 진리를 알아가게 하여 줍니다. 로렌 앨런은 일찍이 1910년 때 그는 교구 유아를 위해 세례를 베풀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유아 세례를 거절했으며, 결국에는 해고되고, 이로부터 다시는 목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퇴직하여 케냐로 이사를 가서 책을 쓰며 살았습니다. 오늘날 그의 저자가 모든 선교사들이 반드시 읽는 책이 되었습니다. 저는 로렌 앨런을 모른다는 선교사님들을 보지 못하였는데, 하지만 그는 아무도 모르게 죽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말하기를 ‘저의 책은 반세기를 더 기다려야 비로서 지음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책은 1910년에 씌여졌고, 모든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저 여기에 그의 주요 저작인 세 권이 있는데, 모두 1960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선지자였고, 그의 한 권 책 이름이 ‘선교 방법: 성바울인가? 아니면 우리인가?’입니다. 여기에 계시는 분들 중 이 책을 들어보신 분이 계십니까? 들어본 사람이 없네요. 그럼 정말로 아쉽네요. 사실 그는 중국에서 가서 몇 년 선교를 했고, 돌아와서 이 책을 썼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왜서 바울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까요? 그의 방법이 많이 쌉니다. 세워서 자립 관리하여 교회를 확장하고 지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당시에 선교 단체도 없었고, 교회당 기금을 모금하지도 못하였는데, 그는 어떻게 하면된다라고 말하였을까요? 로렌 앨런은 생각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왜서 그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까요? 후에 그가 발견했는데, 바울은 교회를 건립한 후 그 교회더러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두 번째 책인 ‘교회의 자연적 확장’을 썼는데,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중의 관건적인 것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알게 되었는데, 그래서 세 번째 책인 ‘성령의 사역’을 썼고, 또한 교회가 곧 영적인 부흥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매우 재미있지 않습니까? 1910년에 이런 선견이 있었으며, 그는 시대의 선두에 멀찍이 나아갔고, 그는 진정한 선지자였으며, 그리고 대다수 선지자와 똑같이 아무도 모르게 죽었고, 또한 오해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출판사가 그의 종합 작품집을 발간했고, 이 종합 작품집의 책 이름은 ‘성령님의 독촉’이었습니다. 로렌 앨런의 저서들을 수집하였으며, 그가 세례를 위한 의제도 수집하였고, 샤팡 성베드로에 쓴 한 통의 사람을 움직이게 한 사직서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저에 대해 매우 큰 영향이 있었는데, 하지만 그의 몇 권의 저서는 거의 ‘사도행전’에서 취했으며, 그가 ‘사도행전’의 비밀을 새롭게 발굴하였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성공회 성도였고, 그의 용어는 구식이며, 빅토리아 미사여구였는데, 하지만 이 외적인 형식을 펼치면, 그가 ‘사도행전’을 견고히 믿는 것은 오늘날 교회가 지켜야 하는 양식입니다. 그는 대다수 선교사들의 생각을 철저하게 바꾸었는데, 여러분은 그에 대해 응당 들어보았어야 했습니다. 좋아요. 괜찮아요. 제가 말하려는 것은 그는 완전히 ‘사도행전’을 취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겠는데, 초대 교회 크리스찬들은 왜서 복음을 빠르고 또한 효율적으로 각곳에 전하였는지를 보겠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장 속도가 정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우리 같은 현대 기술이 없었고, 그들에게는 라디오가 없었고, 티비가 없었고, 많은 선교 기금도 모금하지 못했고, 선교 단체도 없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내었을까요?
제가 그들이 한 일곱 가지 사건을 나열하겠습니다. 첫째 그들은 사도를 파견하여 내 보냈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사도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사도’라는 이 단어는 파견된 사람을 가리키는데, 교회는 항상 누구를 보내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누구를 보내면 될까? 오늘날 교회는 누구를 남길까를 묻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장 좋은 인재를 남기려고 방법을 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장 좋은 사람을 파견해 내 보내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다른 곳에 그들이 필요하니 사도를 파견해 보내자’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다섯 가지 사도를 논했는데, 첫번째는 예수님이고, 그는 사도 중에서 가장 큰 자인데, 오늘은 이런 사도가 없습니다. 두번째는 12사도인데, 그들이 전에 예수님 부활을 목격했는데, 오늘에는 이런 사도가 없습니다. 세번째는 바울이고, 13번 째 사도이며, 만삭되지 못하여 출생한 것처럼이었는데, 오늘날 그처럼 성경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도 네 번째 사도 신분을 갖추었으며, 바로 앞장섰고, 다른 사람의 기초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가 교회를 건립할 때 다른 교회에서 양을 훔쳐오지 않았고, 자신이 사람을 인도하여 주를 믿게 하였으며, 그들더러 교회 성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다섯번째 사도는 에바브로 같은 사람이며, 그는 로마로 파견되어 바울의 생활기거를 돌보았습니다. 판견되어 임무를 집행하면, 이런 크리스찬이 바로 사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특별한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서 네번째와 다섯번째 사도가 필요하고, 우리는 크리스찬을 파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주동적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이 저를 불러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동이하고 또한 지지하기를 바라는데, 하지만 신약성경의 교회는 오히려 묻기를 ‘우리는 누구를 보낼까?’라고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항상 누구를 보내어 무엇을 하게 할까를 생각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해외 판매에 열중했는데, 하지만 수입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었습니다. 영국이 전에는 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견했던 나라였는데, 오늘날에는 미국이 이미 대신했고, 영국에서 파견한 선교사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영국이 이전에는 선교사를 세계 각지에 항상 파견했는데, 오늘날은 우리가 주님께 감사할 것은 제3세계의 선교사가 영국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와서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게 되었으며, 그들은 우리처럼 그렇게 돈이 많지 않지만 그들은 믿음이 있고,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제3세계의 선교사들이 여기에 파견되어 우리를 원 자리로 돌아가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한 첫 번째 일은 사도를 파견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일은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시골에 간 것이 아니었고, 중점 지역으로 갔습니다. 12년 전 하루는 제가 운전하여 밀턴 케인스를 지나는데, 주님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는 중점 지역이 될 것이니 여기를 장악한 사람은 영국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 마음에 정말로 그런 감동이 있었고, 후에 그 곳에 첫 번째로 종교 건물이 지어졌는데, 그것은 불교 사당이었고, 바로 호수 그쪽에 있습니다. 제가 ‘봄 수확’ 복음 단체에서 저의 환상을 나누었고, 그리고 저의 부담도 나누었는데, 결국 어떤 사람이 이 환상에 응당하기를 밀턴 케인스로 이사와서 교회를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점 지역을 찾아야 하는데, 영국의 중점 지역은 바로 거기였고, 새로운 도시가 바로 고속도로 옆에 건축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양식을 보았고,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가서 관건적 도시를 건축해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 신자들은 각 도시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복음이 이로써 각 도시에 전해졌습니다. 바울은 각 성의 가장 중요한 도시만 갔었고, 일단 교회의 기초를 닦으면 바로 떠났으며, 교회더러 자연적으로 성장하게 하였고, 자신은 다음 목표를 향해 전진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그들은 정말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제가 발견했는데, 그들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성경을 인용했는데, 하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성경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응당 배워야 할 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항상 성경을 인용해도 소용이 없는데, 상대방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외에는 소용이 없고,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성경을 인용해도 근본상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시를 인용했고, 그들의 저자를 인용했거나 혹은 그들의 건축을 논했습니다.
그가 아덴에 갔을 때 항상 먼저 도시에서 걸어다니고 나서야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각양각색의 제단을 통해 ‘신을 모르는’ 제단에 왔고, 그 배경을 문의하니 그들도 알지 못하는 신이었는데, 그 배경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몇 년 전에 지진이 발생하여 아덴 도시의 많은 건축물들이 파괴되었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였는데, 하지만 도대체 어느 신일까?’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신을 경배하는 문제가 바로 도대체 어느 신에게 범죄하였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많은 신에게 경배하는 사람은 삶이 매우 복잡합니다. 어느 신이 화가 났을까? 우리는 어느 신에게 범죄하였는지 모릅니다. 이로써 그들은 양 한 마리를 찾아와 양을 거리에 놓고 그 양이 어느 제단 옆에 눕는지를 보고, 바로 그 신에게 범죄하였다고 하고, 그리고 그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양이 거리에서 이리저리 다니며, 모든 제단을 지나 그리고는 풀밭 중앙에 가는데, 양은 미련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양은 풀밭에 누워있고, 몇 명 위원이 회의하기를 ‘우리가 어느 신에게 범죄했는지 모르겠네’라고 하니 그 중의 한 위원이 말하기를 ‘내가 알고 있다. 우리는 신이 한 분이 더 있다는 것을 잊었어. 그를 위해 아직 제단을 쌓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화를 냈고, 그래서 지진이 일어났느니라. 그렇 어떻게 하지? 속히 제단 하나를 쌓자. 하지만 제단에 무슨 이름을 적을까? 우리는 그를 알지도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이로써 그들은 이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해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울은 이 점으로부터 복음을 전했으며, 바로 그들의 생각으로부터 접근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의 한 시인이 말했는데, 우리는 이 신에게서 멀리하지, 하나님이 우리를 낳았고, 내가 너희 진정한 신분을 알려주겠는데, 하나님은 너희의 창조주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부터 접근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하지만 상대방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전했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번째 그들은 사람을 불러 영접하게 한 것이 아니고 제자를 전문적으로 훈련했습니다. 사람들더러 손을 들게 하거나 앞으로 나오게 한 것이 아니고, 혹은 영접 카드에 싸인을 하게 한 것도 아니었고, 제자 훈련을 했는데, 이에 많은 시간을 사용했고, 보통 시간이 얼마 필요한다면 얼마를 기다렸습니다. 바울이 어떤 때는 3주까지 머물렀고, 어떤 때는 2년을 머물렀습니다. 그가 에베소에 있을 때 매일 오후마다 제자를 가르켰고,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가르켰으며, 2년 연속 매일 가르쳤는데, 바로 이렇게 제자를 훈련시켰습니다. 그의 가르친 모든 주제는 천국이었는데, 제가 ‘마태복음’을 어떻게 말씀드렸던지를 기억하십니까? 바울은 바로 이렇게 힘껏 제자를 가르켰습니다. 모두가 아침에 아직도 잠자리를 떼고 있을 때 바울은 장막을 만들었고, 모두가 점심 잠을 잘 때 바울은 점심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제자 훈련 시켰습니다. 바울은 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있게 가르쳤는데, 그것은 그의 주제였습니다. 우리는 제자 훈련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 그들은 나가서 교회당을 세웠습니다. 저는 영국이 만약 교회당을 세우기 시작한다면 크게 한 걸음 내 딛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새 교회를 많이 세워야 할 필요가 있는데, 하지만 다른 교회에서 양을 도독질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필요한 것은 나가서 새 교회를 세워 자신이 사람더러 주를 믿게 이끌어야 합니다. 영국은 새 교회를 많이 세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새 교회를 세우고 사람더러 주를 믿게 인도하면 진정한 돌파가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10년 전에 말했는데, 하지만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는 말하기를 ‘교회는 이미 많습니다. 어떤 교회는 아직 자리가 다 차지 않았잖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새 교회를 세워 사람더러 주를 믿게 인도하면 바로 진정한 돌파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도에 모든 교회를 표시하고, 그리고서 교회가 많다는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는 평면이고, 사회는 오히려 많은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지도에 표시한 그 교회들은 아마도 한 측면에만 속할 것인데, 하지만 사회에는 많은 측면이 있으며, 한 교회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의 두 친구가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방랑 가동을 위해 교회를 설립했는데, 지금 그들에게는 교회 두 개가 있게 되었고, 75%의 성도는 그 방랑 가동들입니다. 이 새 교회를 반대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성도 모두는 그들 스스로가 주를 믿게 인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회 측면의 사람들이 과거에는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영국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 신자들이 바로 이렇게 했으며, 모두가 단체 생활을 하였습니다.
여섯 번째는 그들이 장로를 설립하였습니다. 이 장로들은 주를 믿은지 12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주를 믿은지 12개월 밖에 되지 않은 초신자가 장로될 자격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장로의 자격은 바로 영적 생명이 다른 사람보다 성숙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12개월을 관찰해서 누구의 영적 생명이 비교적 성숙되었고, 누구가 영적 성장에 진정으로 추구하면 그들을 장로가 되게 하여 다른 사람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장로 배양하는 속도가 너무 느려 새 교회 설립하는데 따라가지 못합니다. 마치 하얀 머리칼이 나와야서만 자격이 있는 것처럼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성숙된 장로를 보내주리라고 바라는데,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장로를 배양해 내야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모범을 배워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제자를 훈련하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은 주제 밖의 얘기입니다.
그래서 중점은 사도를 파견해 내 보내는 것이며, 관건적 도시에 복음을 전하게 하고, 상대방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고, 제자를 잘 훈련시키고, 사람을 영접하게 이끈 후 그들과 동방하고, 그들을 훈련시키고, 홀로 여기저기 다니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한 몸으로 세워야 합니다. 장로를 세워 이 무리를 이끌게 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을 한 후 사도의 사역은 끝났으며, 이어서 편지를 쓰거나 혹은 직접 방문하여 그들을 견고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디도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를 크레데에 남게 한 것은 너의 사역을 완성하게 하기 위함인데, 각 성에 장로를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단 현지 전도인이 받게 되면 사도는 응당 떠나야 하고, 남아서 감독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사역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했고, 교회가 기초를 잘 닦아야 합니다. 현지 전도인이 받을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도는 떠나야 하며, 교회가 없는 곳에서 교회를 세워야 하는데, 그것은 바울의 웅대한 포부였습니다. 새 교회가 일단 기초를 잘 닦으면 그 자리에서 멈추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떠나서 다시 교회를 세워야 하며, 수시로 움직여야 합니다. 당시 교회가 동력이 넘쳤습니다. 당시에는 선교 단체가 없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나가서 선교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더러 자급자족하게 하기 위했기 때문이었고, 혹은 일단 사람더러 주를 믿게 인도하면 이 성도들은 그를 지지했습니다. 그들은 모회의 지지가 없었습니다. 만약 자신들의 두 손으로 돈을 벌지 않으면 바로 성도가 지지했습니다. 저는 이 방면이 현대 선교사들이 깊이 생각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사는 응당 초신자들을 가르켜 그들더러 선교 사역을 위해 헌금하게 해야 하는데, 하지만 선교사들은 항상 다른 교회의 지지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선교사는 반드시 다른 곳의 지지를 찾아야 했는데, 이것은 악성의 순환입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를 보겠는데,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안정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당시 하나님을 위해 돌로 성전을 짓고 싶어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 중의 원인 하나는 그가 방금 자신을 위해 돌로 궁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죄책감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그의 궁전 옆 장막에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당신을 위해 성전을 지으려는데, 마치 나의 궁전처럼 지으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막에 있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일까?’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걸어다니는 하나님이시고,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걸어다니는 소리를 묘사했으며,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에 제가 방콕의 천불사를 관람했는데,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고, 절의 신상은 일어서서 걸어다녀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움직이시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라르면 움직여야 합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면 하루종일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줄로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흰 옷을 입고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좋아요. 우리가 빠르게 아래로 보겠는데,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사도행전’을 읽을 때 삼위일체에 대한 하나님의 인상이 가장 깊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응당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행전’은 실제 행동이며, 이 단어에서 ‘실천’이 파생되었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실천이며,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의 실천일까요? 누구의 행동일까요? 네 가지 가능한 답이 있습니다.
이 책을 ‘사동행전’알고 한 것은 사실 정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다수 사도들이 이 책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10 사도는요? 보이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베드로와 바울만 논하였고,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조금 언급했는데, 하지만 그는 12사도 중 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래서 사실 ‘사도’의 행전이 아닙니다.
이 책의 시작에서 말하기를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고 하였습니다. 이 책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을 계속해서 논한다는 것을 명확히 가르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예수행전 하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 발견하게 되는데, 앞에 13장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인물은 성령님이시며, 40번을 언급했고, 이것은 성령님의 행전입니다. 이 책을 ‘성령행전’이라 부르겠는데, 좋겠습니까? 좋지 않아요. 다른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 있는데, 앞 13장에서 성령님이 40번이나 언급되었는데, 하지만 한 사람이 13장에서 100번이나 언급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우리는 소홀히 했는데, 이것은 매우 신기하지 않습니까? 한 사람과 너무 익숙하면 오히려 쉽게 그를 소홀히 하거나 혹은 어떤 물건이 너무 크면 오히려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며, ‘사도행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었으며, 저는 이 책을 ‘하나님 행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성령님은 40번 언급되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100번 언급되었고, 하나님, 하나님……, 그래서 초대 교회의 초점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초점을 예수님이거나 성령님에게만 놓으면 절대로 안됩니다.
‘일신론’에는 몇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통상적으로 사람은 한 하나님만 믿어야 한다고 묘사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예수님만 믿을 수 있고, 예수님만 믿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예수 운동은 예수님만 초점했고, 만약 조심하지 않으면 성령님만 믿는 것으로 변하게 되고, 성령님만 논하게 되는데, 하지만 궁극적으로 성령님이 우리를 예수님께로 데려 가고, 예수님이 우리를 또한 하나님께로 데려다 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하나님이 사도 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행동으로 통하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제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책명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초점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고,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초대 교회의 비결을 알고 싶으면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무엇을 전하였기에 도시 전체가 위기에 빠졌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는데, 하지만 그가 기적으로 환자가 치유 받는 것을 증명하였고, 그래서 그의 사역에는 이 세 가지 측면이 포함되었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 가지 측면 사용해야 합니다. 말씀, 행위와 기적이며, 그들이 사회에 영향을 가져다 준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인데, 제가 ‘사도행전’에서의 이름에 줄을 그어 표시했습니다. 앞 13장에서 성령님은 40번이나 언급되었고, 예수님의 이름은 40번이나 언급되었는데,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도 언급되었고,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십니까? 우리는 예수님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일어나 걸어가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성전 밖의 구걸하는 발을 쓰지 못하였던 자였는데, 하지만 그에게는 발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졸고 있으니 제가 중복해서 강의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예수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좋은 것을 주겠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구걸하는 자에게 줄 돈이 없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더욱 잘 주었고, 발을 쓰지 못하는 거지더러 일어나서 걸어가게 하였습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하노니 일어서서 걸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세기 때 교황과 한 추기경이 바티칸이 소장하고 있는 금은보화를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추기경이 교황에게 말하기를 ‘교회가 더는 금과 은은 내게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황이 말하기를 ‘교회가 더는 예수님 이름으로 너더러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화는 정말로 감탄하게 합니다.
초대 신자들은 왜서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철저히 알았고, 그들은 ‘그리스도’나 혹은 ‘주’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예수’라는 이 이름을 사용했으며,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두 개를 합하니 위력이 충족하여 사람들이 거역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더러 이 세 가지 사건으로 돌아가도록 끊임없이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만약 초대 교회의 능력을 본받으려면,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필연적인 조건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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