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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6 요한복음 P2 / 데이빗 파슨 교정 및 자막 예정

LNCK 2018. 12. 27. 20:50

요한복음(2)

 

누군가가 저에게 지난 회 때를 겨냥해 한 마디를 했는데, 조그만한 교정을 하겠습니다. 제가 앞에서 신경진리를 받음만 표시한다고 했습니다. 비록 신경에 내가 진정으로 믿사오니라는 단어가 있지만 사실 그는 받아들인다는 뜻으로만 표달되며, 믿고 의지하는 것과 순종의 함의를 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진정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받아들인다로만 표시됩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개의 차이를 응당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는 동정녀가 예수님을 낳으셨다고 믿으며, 본디오 빌라도 손에서 죽었다는 등을 믿습니다. 신경에는 진정으로 믿고 의지한다는 태도를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경을 낭독할 수 있지만 그들이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제가 앞에서 말했던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계속해서 보겠는데, 에베소 이 곳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는 그들이 세례 요한을 너무 중시했는데, 복음서를 쓴 요한이 아니고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자라는 이 명사는 사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붙혀준 하나의 별명입니다. 이 별명에 포함된 뜻은 잃어버린 것, 침수 또는 침입 등 같은 뜻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당시 에베소의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따랐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교정하며 말하기를 세례 요한이 너희들더러 그의 후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을 따랐는데, 이 사람들은 아마도 요한파 등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어떤 명칭을 생각하는데, 루터회, 웨슬리회 같은 것인데 이런 명칭을 절대로 사용하지 마세요. 우리는 크리스찬이며, 우리에게는 크리스찬이라는 명칭만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따랐고, 그래서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여 세례 요한을 중시하는 이런 잘못된 관념을 교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매번 세례 요한을 언급할 때 그의 위치를 낮게 끌어내렸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세례요한은 빛이 아니고, 그는 단지 빛을 가리킬 뿐이며, 세례요한이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세례요한의 위치를 끊임없이 낮게 끌어내렸습니다. 세례요한 자신도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고 말했으며, 그는 신랑이고 나는 신랑 들러리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사실 당시 세례요한을 중시한 잘못된 관념을 교정하는데 있었고, ‘요한복음이 이 세례요한을 따랐던 단체를 와해하기를 바랬던 것이었습니다.

현대에도 이런 단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 단체 등 같은 것인데, 또한 도덕 재정비 협회(MRA)라고도 부릅니다. 이 단체가 세례요한의 회개 사역과 매우 비슷하게 도덕을 중히 여기는데, 하지만 거기에 기독교 진리가 부족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사람의 도덕을 바로잡는 것이며,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강조하지 않고, 그리고 초기처럼 주 예수의 구속을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이 단체들의 목적은 인간은 숭고한 도덕을 갖출 수 있다면서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세례요한을 따랐던 사람들이 이 단체와 조금 비슷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을 너무 중시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것은 이 에베소 사람들이 예수님을 너무 가볍게 보았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전에 예수님에 관한 두 가지 사건을 말했는데, 첫 번째는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이고 세상 사람들의 죄를 없애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가 사람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메시지를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없애는 것이라고만 말하면 사람은 여전히 허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느느 매우 위험한 것이며 그리고 매우 불쌍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죄가 이미 없어졌는데, 그러나 그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죄 중에서의 낙을 누리지 못하고, 천국의 기쁨도 누리지 못합니다. 어쩐지 매주 교회에 와서 아주 불쌍하다고 자칭하네요. 왜냐하면 그런 처지는 참으로 매우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당신의 죄 모두가 없어졌고, 지금은 그 죄를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안에는 비었고, 겉으로만 도덕 규범을 지키는데, 이는 예수님의 본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생명을 거꾸러뜨리는 것이 아니고 충만하게 하는데, 하지만 그가 반드시 먼저 나쁜 것을 없애야 좋은 것을 넣을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이는 그가 할 수 있는데, 하지만 나는 할 수 없느니라.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고, 너희 과거 죄를 씻기는데, 하지만 너희 미래는 바꿀 수 없고, 예수님만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너무 가볍게 보았습니다. 헬라 철학이 크리스찬의 생각에 대한 영향이 너무나도 컸습니다. 헬라인들은 실현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으며, 그리고 두 개가 병존할 수 없는데, 이 두 부분이 바로 물질과 영입니다. 교회는 여전히 이러한 영향으로 고통 받고 있는데, 사실 물질적인 것이 영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잠시와 영원을 나누었으며, 또한 거룩과 세속을 나누었는데, 이 점이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저는 크리스찬이 저에게 그가 세속적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제가 말하기를 당신이 틀렸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당신은 모든 시간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룩과 세속을 나누는데, 왜냐하면 헬라인들이 물질과 영적인 것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개가 병존할 수 없습니다. 플라톤이 말하기를 영적인 측면이 비교적 진실되다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물질적인 측면이 비교적 진실되다라고 하였는데, 그도 첫 번째로 진화론을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 두 개가 병존할 수 없다고 했고, 그래서 예수님에게도 병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 뜻을 이해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헬라인들의 생각에 이 두 개는 병존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이 병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병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인간이 동시에 한 몸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로써 몇 가지 생각으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이 도대체 하나님인지 사람인지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신성이 인성을 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말하기를 그가 아예 사람이 아니었으며, 사람의 형태로만 나타났을 뿐이었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이런 이단을 환상설이라 합니다. 환상은 바로 유령인데,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환상적 형상으로 나타났으며, 그에게 이형이 있을 뿐 사실 인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화장실 가지 않는다는 것인데, 하지만 예수님이 화장실 가는 이 사건을 논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게 화장실을 갔었고, 진짜로 화장실을 갔었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한 이 말을 들으면 아마도 놀라실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기도문에 화장실에서 사용되는 기도문이 있는데, 유대인들은 배설 기능이 정상적이라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변을 보고 나니 편해서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제가 전에 가 보았던 어떤 화장실 벽에 글씨가 쓰여져 있는데, 하지만 모든 내용이 제가 당시 본 일과 상관이 없어서 제가 진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당신이 나이가 많아졌고, 몸의 배설 기능이 없어졌을 때 당시 건강할 때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건강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다고 후회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영적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헬라 생각이고 히브리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고, 왜냐하면 이는 물질과 영적인 것을 함께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며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을 넘었다고 하며, 인형으로만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인성이 신성을 초과하였으며, 그는 일반인인데, 하지만 그가 하나님과 완벽한 교통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잠재력은 모든 사람에게 있으며, 이런 말은 현대 식학원에서 보편적으로 가르치는 이단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버밍엄 대학의 존 시크 교수가 하나님이 육신이 된 신화라는 책을 썼는데, 이런 사상이 많은 젊은이들의 믿음을 파괴하였습니다. 신학원에 공부하러 올 때는 믿음이 충만했는데, 졸업하고 나니 믿음이 오히려 가물가물하여졌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말하기를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한 일반인이라고 하는데, 이런 말씀을 들어보셨습니까? 영국 국립 방송국에서 아마도 이런 말을 자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신성을 초월하였고,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과 더욱 잘 교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입양론의 주장은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이 입양한 아들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그가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에게 입양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근본상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우리야말로 하나님께서 입양한 아들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단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견해는 예수님에게 인성과 신성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증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견해인데, 예수님에게 신성 절반과 인성 절반이 있다고 하면서, 그가 두 사이에 개입되었으며, 두 개를 겸할 가능성은 없다고 하며, 두 사이에만 개입되었다고 합니다. 여호와 증인들의 교의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들은 요한복음의 처음 세 구절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성경을 수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금후에 우리가 다시 논하겠는데, 그것은 오늘날에 매우 보편적인 견해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 견해야말로 진짜인데, 제 생각에 물음표가 아니고 응당 느낌표를 붙여야 맞을 것 같습니다. 응당 느낌표를 붙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또한 100%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이시며, 예수님이 만약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의 필요를 만족해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두 가지 일을 하셨는데, 즉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이라는 것을 현명했고, 이로써 우리더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반드시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사람이어야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잘 지켜야 하는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 진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고, 또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말하기를 나는 그를 알고 있다. 내가 전에 밥을 먹을 때 머리를 그의 가슴에 의지했고, 나는 누구보다 그를 가까이 하였으며, 나는 그를 63년 동안 알고 지냈으며, 그가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책을 쓸 수 있었고,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교정해 주었고, 또한 그러므로 네 번째 복음서가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다른 세 복음서를 초월하여 강조하였으며, 예수님이 인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 하나가 요한복음에 있는데, 여러분 아십니까?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입니다. 이 구절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들으면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깊은 인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그가 친구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는데, 이는 그의 인성을 충분히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또 예수님이 배고셨고, 목 말라서 물을 마셔야 했고, 피곤했고, 놀랐고 등 같은 것을 강조하면서 인성을 표현했습니다. 어쩐지 요한복음에 빌라도가 말한 너희들은 이 사람을 보라고 기록했다 했어요. 이 사람이라는 이 말의 의미가 큽니다. 인성을 이해하고 싶으면 바로 이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빌라도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이 사람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기도 생활도 명확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기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서 그가 인성을 깊이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반드시 기도해야 했고, 그가 한 말과 모든 것은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했으며, 그는 인성을 깊이 갖추고 있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하신 감동적인 기도사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 17장 같은 하나가 되게 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주요 중점은 예수님의 신성에 있으며, 그도 예수님이 완전한 인성을 갖추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점점 말살되었는데, 먼저는 에수님이 완전한 신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였고, 그리고 예수님이 신성만 조금 갖추었고, 게다가 매번 하물며 결국은 예수님을 피조물, 그리고 창조주가 아니라는 견해였는데, 이것은 여호와 증인들이 믿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가장 먼저 창조한 생물이 믿는데, 하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피조물이며 창조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진리를 왜곡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조금후에 다시 논하겠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을 어떻게 증명했을까요? 답은 바로 ‘7’이라는 이 신기한 숫자인데, 7은 히브리 사상에서 완전한 숫자이며, 7은 히브리의 완전한 숫자인데, 우리는 7일 완전한 숫자로 생각하지 않지만 히브리 생각에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보다 작으면 완전하지 않는데, 666같은 것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하지만 777은 매우 완전한데, 우리에게 777이 있습니다. 여기에 세 개의 완전하 증거가 있는데, 예수님이 확실히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증인 일곱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일곱명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세례요한, 나다나엘,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들이라 했고, 베드로, 마대, 여러분 마대가 첫번째로 예수님을 당신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라고 말한 여자라는 것을 아십니까? 베드로는 첫번째로 이 말을 한 남자인데, 하지만 마대는 첫번째 여자이며, 그는 요리를 잘 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영적인 분별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마, 마지막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 요한입니다. 증인 일곱명이 있는데, 유대 율법에는 203명 증인만 요구하는데, 하지만 여기에 증인 일곱명이 있습니다. 완전한 숫자인 증인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증거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증거라는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50번 넘게 사용되었으며, 증거, 증거, 증거……, 그 뜻은 이 진리는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이 일곱가지 기적을 신중하게 골라서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했는데, 하지만 그는 그 중의 일곱가지만 택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왜서 이 몇 가지만 택했는지 물으실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행한 이 몇 가지 기적이 가장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몇 가지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은 하나님의 특유한 능력입니다. 사실 귀신을 쫓는 일이 고대에서 매우 흔했는데, 바리새인들까지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유한 능력이 아니며,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귀신 쫓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로 포도주를 변하게 한 기적을 기록했는데, 이런 기적을 어느 강호술사가 행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특유한 기적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습니다. 치유 기적에 대해서는 요한이 신하 아들만 언급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몇 마일 떨어져 있는 환자를 치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환자 몸에 손을 얹지 않았고, 전류를 손끝에서 통과시켰거나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고, 예수님이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신하의 아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는 환자를 볼 필요없이 단 치유라는 두 글자만 말해도 되었습니다. 신하가 집으로 가보니 아들이 치유된 것을 발견했고, 그래서 어느때 치유되었는지를 물으니 바로 예수님이 입을 열어 치유라고 할 때였습니다. 이 기적은 하나님의 특유한 능력이며, 먼거리의 기적입니다. 다음 기적은 38년 다리 전 사람을 치유한 기적인데, 이는 아주 긴 시간동안의 환자였습니다. 다음 기적은 오천명을 배불리 먹게 한 기적인데, 사복음서 모두에 이 기적을 기록했습니다. 이 기적은 정말로 사람을 아주 놀라게 했고, 뜻밖이었습니다.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놓으니 많게 변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특유한 기적이며, 이것은 결코 강호 술사의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기적은 물위로 걷는 기적이고, 그 다음 기적은 태어나서부터 눈먼 자를 고치는 기적인데, 이 눈먼 자는 후천적이 아니고 타고났으며, 그의 눈은 태어나서부터 이미 보지 못하였습니다. 마지막 기적은 나사로가 부활하는 기적인데, 그는 나인성 과부 아들처럼 당일에 죽은 것이거나 야이로의 딸처럼 방금 숨이 끊어진지 얼마되지 않은 것처럼 아니고 나사로는 무덤에 묻힌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요한이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만약 이 사건에 포함된 뜻을 보았다면, 이 사건이 무엇을 보여주었습니까?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만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당신이 행한 기적을 행할 자가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메시지입니다. 이 일곱가지 기적만으로도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족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나눌 것은 일곱마디 말인데, 예수님이 자신에 관해 일곱마디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자신을 말했고, 입을 열었다 하면 나, , 나 내가 방금 이 일을 했고, 내가 방금 여행 다녀왔고, 내가 방금 새 차를 샀느니라. 예수님이 자주 자신을 말했는데, 하지만 그가 자신에 관한 일곱가지를 말씀했고, 모두 유일무이합니다. 나는 하늘의 양식이고, 나는 세상의 빛이고, 나는 좋은 목자니라. 심지어 우리까지도 모두 나는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을 누구라고 하였습니까? 예수님이 한번은 심지어 나는 겸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회사에서 이 말을 해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인지 보십시오. 하지만 예수님은 겸손하니라는 이 말씀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예수님에게 250개 명칭과 직함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명칭과 직함은 역사상 어느 누구에게와 다른 어느 신에게 없었습니다. 아랍 명칭에서 가장 많다고 볼 수 있으며, 99개가 있는데, 하지만 아버지사랑이라는 두 명칭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250개 명칭이 있었으며, 그 중 많은 것은 스스로 자칭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의 한 점이 매우 중요한데, ‘나는이란 두 글자가 히브리어 발음에서 야웨가깝습니다. 나는(야웨) 세상의 빛이니라. 다른 사람들은 의론이 분분하기 시작했고, 그 자신이 신이인줄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왜서 항상 이 단어로 자칭했을까요? 하루는 그들이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너는 모른다. 당신의 아버지가 사마리아인이에요? 이것은 그 중 하나의 헛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니라. 너희들이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알고 있느니라. 우리의 아버지가 바로 아브라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너희 아버지는 마귀니라. 그래서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 하고, 나에 관한 사실이 아닌 헛소문을 퍼뜨리느니라. 왜냐하면 너희 아버지는 영락없는 살인자이고 사기꾼이고, 헛소문은 그의 모어니라. 너희들이 만일 아브라함의 아들이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나에게 하였으면 너희들도 어떻게 나에게 할 것이고, 너희들은 나를 사랑할 것이며, 나의 말을 들을 것이며, 아브라함이 나를 보면 대단히 놀랄 것인데 너희들은 그렇지 않느니라. 그래서 너희들은 그의 후손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아브라함은 죽은지 이미 2000년이 되었고, 당신은 보기에 50세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를 알 수 있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야웨) 있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결국에는 이 호칭 때문에 정죄되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증거할 증인 2-3명 찾지 못했는데, 하지만 대제상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죄를 확정하였는데, 이것은 법을 어긴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말하기를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는데, 당신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요?’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야웨)’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상은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이 자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었습니까? 그 자리의 70명 모두가 들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로써 정죄되었고, ‘요한복음에 이 일곱마디를 기록하였는데, 바로 예수님이 정죄당하는 관건입니다. 하지만 초기의 세 복음서에는 이것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알고 싶어했던 것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거나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가 아니고 예수님의 신분이었습니다. 요한이 듣고난 후 명심하였으며, 그리고 그가 우리를 위해 기록해 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어서 그가 아주 멋진 일 한 가지를 했습니다.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수님의 30세부터 기록하려고 결심했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때부터 사역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는 응당 더욱 앞에서부터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이 모태에 있을때부터 기록하였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응당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그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누가가 세 번째 복음서를 기록하였는데, 예수님은 사람이며, 전 인류에 속한다고 그는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부터 기록하였으며,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 너희 세 명 모두 틀렸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태초부터 기록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 1:1절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였는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그가 태초에 이미 존재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아주 재미있는 문제 하나가 있는데, 예수님이 사람으로 재림하시기 전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매우 습관이 되어 새로운 이름은 오히려 잊었습니다. 그가 사람으로 재림할 때 지어진 이름인데, 그가 사람으로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그를 예수라고 부른적이 없습니다. 그럼 그의 전에 이름은 무엇일까요?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는 태초부터였는데, 사람의 각도로는 이만큼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바로 우주 기원 때이며, 우리는 더욱 앞으로는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한이 역사의 시작점에서부터 기록했고, 예수님이 태초에 이미 존재하였다고 그가 말하였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요한복음에서 독특한 이름으로 호칭했는데, 즉 말씀(logos)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호칭은 매우 특별한데, 성경 전체에서도 이 책만이 하나님 아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명칭을 특별하게 선용하였는데, 왜서일까요? 이 명칭에는 무슨 뜻이 담겨있을까요? 아쉽게도 대다수 영어 번역본에 이 글자를 , 언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정관사를 사용하여 묘사했는데, 사실 그 뜻에 이것만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 ‘, 언어가 무엇입니까? 만약 여러분 중에 누구 저에게 당신이 저에게 말씀을 줄 수 있냐고 묻는다고 합시다. 여러분의 의미는 바로 저와 얘기를 나누려고 한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그러면 저는 말씀이라는 글자만 말하면 됩니다.

무엇입니까? 말은 사상의 표달이면, 나의 입에서 나와 당신의 귀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입에서만 나와 우리 귀에 들어가는 일 뿐이잖습니까? 아니에요. 이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 이 말씀은 역사가 있습니다. 요한이 전에 에베소에 있었고, 마지막 에베소에서 죽었는데, 에베소는 오늘날 터키 서쪽에 위치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이 곳, 일찍이 요한이 이 책을 기록하기 600년 전, 기원전 568년에 한 사람이 에베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름은 헤라클레스이고, 헤라클레스입니다. 헤라클레스는 과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매우 예민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평생 적자의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떤 것을 묻기를 좋아할까요? 가끔은 어른들이 매우 귀찮다고 생각하고, 어린들이 계속해서 왜서이냐라고 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호기심을 영원히 가지고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왜서왜서 이 책을 기록했을까를 묻습니다. 왜서 이렇게 말할까요? 왜서일까요, 왜서일까요, 왜서일까요? 헤라클레스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가 감관을 훈련해야 하고, 시각을 훈련해야 하고, 청각과 촉각을 훈련해야 한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을 잘 관찰해 보고, 그리고 왜서 이런 현상이 발생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기상, 구름, 동물, 그리고 사람 등에 대하여 묻기를 왜서 그런 현상이 발생할까요? 그는 한 글자로 원인을 해석했는데, 그가 사용한 이 글은 바로 방금 말했던 말씀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현상의 원인이 말씀에 있다고 하였고, 범사는 말씀으로부터 꼬치꼬치 캐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생물을 연구할 때 생물의 말씀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의 뜻은 바로 생물학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기상을 연구할 때 기상학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린 리프먼이 영국 전신 회사를 위해 광고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조카에게 말하기를 너는 학문이 있는 사람으로 변했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분야의 증서를 입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과학 분야가 말씀을 찾고 있으며, 말씀은 바로 모든 현상의 원인입니다. 제 뜻을 이해했습니까? 그래서 인류 심리의 학문을 심리를 연구하는 말씀이라고 하며, 또한 심리학이라기도 합니다. 사회 운영의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사회 운영의 말씀이며, 사회학이라고 합니다. 모든 과학 분야는 헤라클레스의 말씀과 사건의 원인에 근거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과학은 현실을 볼 수 있는 하나의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생물학, 동물학, 심리학 그리고 사회학 등인데, 그 중에서 찾은 원인은 사실 현실 세상의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현재 과학을 매우 자세하게 분리했는데, 모든 과학자들은 매우 적게 변했다고 알고 있으며, 갈수록 좁아지는 분야에 모두 각자의 다른 술어들이 있고, 그래서 한 줄 건너 산 같습니다.

요한의 뜻은 반드시 우주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인데, 왜서 이런 현상이 있게 된 것일까요? 왜서 이런 현상이 있게 된 것일까요? 답은 예수님이십니다. 매우 흥분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조용히 할렐루야, 할렐루야라고 웨쳐보세요. 하나님이 만물을 지은신 것은 그의 아들에게 선물로 주시려는 것이었고, 예수님을 위해 창조하셨는데,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살고있는 원인입니다. 원인이 바로 예수님에게 있으며, 그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를 생각하면 매우 흥분됩니다. 혹시 여러분이 컴퓨터학이나 동물학, 혹은 다른 어떤 학물을 알고 있다면 다윗 에든버러가 자연계에 대해 매우 깊이 알 수 있는데, 그러나 그가 오히려 자연계의 유래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원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매우 흥분되지 않습니까? 그가 바로 그 말씀(logos)입니다.

하지만 이 글의 발전은 또 다른 하나의 단계입니다. 지중해를 건너 알렉산드리아 성에까지 왔으며, 이것은 핵심 도시이고, 대학 도시입니다. 여기에는 헬라와 히브리 사상들이 혼합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각 곳에 흩어져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 대도시에 거주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에서 교수로 계시는데, 그 중에 파이로라는 대학 교수가 계시는데, 여러분이 파이로를 아십니까? 그 대학에서 학자들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는데, 70명 학자들이 합하여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70인역이라 불렀으며, 또한 로마 숫자의 70으로 표시했는데(LXX),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70명 학자들이 번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히브리 사상을 반드시 헬라 사상으로 번역해야 했습니다. 파이로 교수는 말씀이라는 단어에 다른 견해가 있었으며, 그는 말씀을 생명이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생명이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말씀을 한 사람으로 말하지 않았고, 단지 그것을 의인화 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말씀은 한 가지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원인은 한가지 뿐만 아니라 의인화 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약 당신의 자동차를 여성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의인화이고, 당신의 자동차가 오늘 아주 순리롭게 달렸다고 하면, 그것은 당신의 차를 여성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렇지요? 아마도 당신이 운전한 자동차가 매우 남성적인 자동차 잖습니까?

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강의했는데 여러분 모두가 졸고 있는 것 아니지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바로 의인화이고, 여러분 의인화를 알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저의 집을 말하자면, 첫 번째 자동차가 이름이 있는데, 그는 1928년에 출고된 오스틴 7이고, 마력은 제초기 엔진과 비슷하여 우리는 이 자동차에 매우 여성적인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가 많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의인화입니다. 우리는 자동자를 사람으로 볼 정도로 미련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에게 조그만한 인성을 부여했을 뿐이고, 그가 더는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파이로의 뜻입니다. 그가 말씀에는 생명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 사상이 지혜를 의인화 하여 여성으로 비유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녀를 찾으려면 지혜가 필요하며, 거리에서 지혜 등을 찾아야 하는데, ‘잠언이라는 이 책이 바로 이런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의인화의 말씀은 남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여성으로 대표한 것이 아니라 남성으로 대표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헤라클레서의 연유를 사용하였고, 그리고 파이로 의인화의 남성을 대표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말씀(logos)이 사실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자에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결합되었는데, 정말로 매우 기묘합니다.

좋아요 여러분, 마지막으로 제가 요한복음의 구절 하나를 읽어 드리겠는데, ‘요한복음의 첫 페이지에 말씀의 4대 요소를 논하였습니다.

요한이 여기에서 말씀의 4대요소를 말했는데, 첫째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이 말씀은 처음부터 존재했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그는 가까이(위격이 있음)있는데, 이 두 번째 말씀은 하나님과 마주했으며, 즉 직접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마주하다의 원뜻은 두 사람이 서로 보는 것이며, 그리고 서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마주하다의 뜻은 하나의 관계를 가리키는데, 크리스찬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크리스찬만이 하나님은 삼위일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은 한 분이라면, 유대인이나 회교도들 같은 신앙이 되고, 그러면 우리가 그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으로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한 분만이 아니고, 부자 서로 사랑한다면 그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사랑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씀은 영원하고, 또한 가까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며 생명이 있습니다. 셋째 그는(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며, 이 말씀이 처음부터 존재했으며, 하나님과 마주한 친밀한 관계이며, 그리고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증인의 교의가 이 구절을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의 하나님이라고 부꾸었습니다. 이 두 개의 차이는 아주 큽니다.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신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말씀이 가장 사람을 놀라게 하는데, 즉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가 우리 중에 거하고,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이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서론은 실로 놀랍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반적으로 비크리스찬들에게 요한복음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 뜻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들은 듣고나서 더욱 이해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새 생명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며, 그리고 계속해서 그를 믿어야 생명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이 약간의 비교로 그의 의사를 밝혔는데, 여러분이 이로써 사망이 아닌 생명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당신은 근본상 죽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생명이 연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망이 당신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죽은 생명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사망으로 더듬더듬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흑암에서 걷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는 자는 결코 흑암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생명에는 광명이 충만합니다. 비록 도덕적인 흑암이 있지만 당신이 만일 예수님과 동행하면 감추어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광명에서 행하기 때문에 비밀이 없고, 모든것이 광명 중에 있습니다.

당신의 생명이 거짓이 아니라 진리에 충만하게 되는데, 이것이 요한복음에서의 또 다른 하나의 대조입니다. 진리, 사실인데, 진리와 사실 두 단어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는 동일한 단어이고, 그래서 진리와 사실은 똑 같은 것입니다. 당신이 사실속에서 살고 있고, 자유속에서 살고 있다면, 당신이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단 뒤로 돌아서면 노예속에서가 아니라 자유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묻기를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았는데, 당신이 어떻게 우리더러 자유를 얻도록 해방한다고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기억은 정말로 형편없습니다. 노예가 되었던 일이 없다고요, 애굽을 잊으셨나요? 매년마다 유월절을 지키지 않습니까? 그들은 스스로가 이미 자유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죄를 범한 자가 바로 죄의 노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아름답고, 활력이 충만하고, 광명, 진리와 자유가 충만합니까.

이 대조 외에 또한 사랑과 분노의 대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분노와 그 후과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가 보낸 아들을 진정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이런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능력이 근본 없습니다. 여러분, 답은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에 대해 가장 많이 묘사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금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이 이 점을 매우 명확하기 말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곧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이며, 또한 성령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2장에서 성령안에서 중생하는 것을 논했고, 물과 영으로부터 중생하는데, 우리는 이 두 가지 세례인 물 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세례에서 중생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4장에는 생수를 논했고, 성령과 진리속에서 경배해야 한다고 합니다.

7장인데, 예수님이 초막절에 참석하였고, 초막절의 마지막 날인 축하에서 모두가 비를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매년마다 6개월 동안은 비가 내리지 않고, 9-10월 좌우에 이른 비가 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절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이 큰 항아리를 가지고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담아 그를 성전에 가져와서 제단에 부어 비를 구하였습니다. 절기 마지막 날 이 의식을 행할 때 예수님이 일어서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에게로 나오라 내가 그에게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도록 주겠노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생수의 강은 바로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4-16장은 새로운 위로자가 곧 오시리라는 것을 논했는데, 그가 바로 진리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Paraclete라는 이 헬라어 글자는 당신과 어깨를 맞대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당신 옆에 서서 당신을 견고하게 하는데, 예수님과 똑 같은 위로자입니다.

20장에는 예수님이 그들더러 오순절을 맞이할 예비를 하라고 그들에게 하나의 징조와 명령을 주었습니다. 그 징조는 바로 모든 사람에게 입김을 불어넣었고,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당시 그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는데, 그것은 오순절의 훈련이었습니다. 만약 당시 성령을 주셨다면, 예수님이 먼저 그들에게 명령하고 다시 입김을 불어넣었을 것인데,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시지 않고, 먼저 입김을 불어넣고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몇 주 후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성전에 앉아있었는데, 입김 소리를 듣고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입김을 불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받자고 하니 그들 모두가 성령 충만하였고, 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되었으며, 예수님이 가져다 준 풍성한 생명을 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