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
우리가 전에 ‘성경’은 많은 서로 다른 책들이 합하여 된 것이라고 논했습니다. ‘성경’은 두 가지 면에서 평형을 취할 필요가 있는데, 그 중 한 면은 다양성이며, 그리고 한 면은 일치성입니다. 다양성이 있게 된 것은 ‘성경’이 40명 저자로 되어 있기 때문이며, 1400년 시간이 걸렸으며, 세 가지 언어로 기록했고, 그리고 이 저자들 서로 사이에 상대방이 ‘성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양성이 있는 것은 성령이 사람을 문서 만드는 기계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성령은 서로 다른 저자를 이용하여 서로 다른 성격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치성이 있는데, 이는 한 분만이 편집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40명의 저자가 있고, 그리고 한 하나님이 편집했습니다. 그래서 다양성과 일치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크리스찬 단체에서는 각각 무서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자유파 크리스찬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성경’의 일치성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구절 고르기를 원했습니다. 마치 가위를 들고 ‘성경’을 읽는 것처럼 타당하지 않는 곳은 바로 잘라 버립니다. 복음파 크리스찬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성경’의 다양성인데, 그들은 모순이나 혹은 연관이 되지 않는 곳을 무서워 합니다. ‘성경’에는 확실히 앞뒤가 서로 다른 곳이 있는데, 자시히 읽고 연구해서 원인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성경’ 각 권의 책을 읽고 연구하면 매 권마다 사실 확실히 남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남다른 특색이 오히려 ‘성경’을 더욱 풍부하게 합니다. 골라서 읽는 것은 ‘성경’을 제식화하는 식이 되는데, 마치 한 책, 한 메시지, 한 가지 성격과 한 가지 내용과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지 않고, ‘성경’은 서로 다른 책들로 구성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을 보겠습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하나님 자신을 반응했으며, 하나님 자신의 다양성과 동시에 일치성을 반응했으며, 하나님은 성자와 구별되었고, 성령도 하나님과 성자와 구별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믿고, 그에게는 일치성이 있고, 심지어 다양성도 갖추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반응된 것이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해서 각자의 견해가 있고, 그리고 각자의 성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편집한 성령님은 오히려 각 권마다 그의 일치성이 있게 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의 첫 세 장을 읽고, 그리고 마지막 두 장을 읽는다고 하면, 즉 창세기 제1장부터 3장까지 읽고, 그리고 계시록 21장부터 22장까지 읽으면, 매우 놀랍게도 이 두 개 사이에 일치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한 저자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지가 처음부터 끝가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을 볼 때 우리는 우선 먼저 이 책이 공관복음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주의하게 될 것인데, ‘공관’은 바로 관점이 같다는 것입니다. 첫 세 권 모두는 동일한 각도에서 예수를 보았고, 마태, 마가와 누가의 각도는 같았는데, 하지만 요한은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첫 세 권을 공관 복음이라 하는데, 모두 동일한 각도에서 보았으며, ‘요한복음’은 오히려 다른 각도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좀 더 설명해 드리겠는데, 첫 세 권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외적을 보았는데, 하지만 ‘요한복음’은 오히려 예수님의 내적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마태복음’을 논할 때 무엇을 말씀 드렸는지 기억하십니까? 일반 사람들이 위인에 대한 흥미를 세가지 단계로 나누는데, 첫 번째 단계는 그의 사역에 대해 흥미가 있어하고, 두 번째 단계는 그의 언론에 대해 흥미가 있어하고, 세 번째 단계는 그의 신분에 대해 흥미가 있어합니다. 요한은 세 번째 단계에 속하는데, 그는 안에서 예수님에게 무슨 특질이 있는지를 보았고, 그의 진정한 신분은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를 서로 다르게 다섯 가지로 귀납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첫 세 권의 복음서에서 언급한 많은 내용들이 ‘요한복음’에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이 내용들을 생략하였는데, 왜냐하면 첫 세 권 복음서에서 이미 명확하게 얘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충분히 많잖습니까? 아니면 그가 이렇게 하는데에는 다른 원인이 있을까요? 우리는 요한이 확실히 그의 특별한 용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동정녀가 잉태하여 예수를 낳는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이 세례 받는 것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이 시험 받는 것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이 귀신을 쫓은 사역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산이 올라가 거기서 변화한 것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겟세마네 동산과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몸부림치는 것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이 승천한 것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무엇이 적어졌는지를 아예 주의해 보시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적어졌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가 이 일들을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말하려는 메시지가 첫 세 권의 복음서와 달랐으며, 그래서 어떤 일은 기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가지 기적만 기록했고, 다른 복음서에는 오히려 수십건 기적을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천국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 점은 사람을 매우 놀라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 권 복음서에는 항상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천국’을 두 번만 언급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알려주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한번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외 천국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요한복음’에서의 첫 번째 다른 점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다른 점을 보겠는데, ‘요한복음’에서 어떤 기록을 생략한 외에 어떤 기록은 증가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가지 기적인데, 다섯가지는 다른 세 복음서에 언급하지 않은 것이며, 두 가지 기적만이 중복된 것입니다. 다섯가지 신 기적인 첫 번째는 물로 포도주를 변한 것이고, 마지막 한가지는 나사로를 살린 것인데, 요한은 왜서 다른 기적들을 선택하여 기록했을까요? 한 가지 단서는 그가 신적으로 불리지 않고 징조로 불리는데, 징조의 용의 모두는 다른 한 가지 일을 가리키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은 기적의 의미가 매우 중요하고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만 보기를 원하는데, 하지만 요한은 이 기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요한의 눈빛은 기적 자체를 초월하여 그에 포함된 뜻을 알고 싶어 했고, 그래서 기적을 징조로 불렀습니다. 요한이 징조를 고른 가장 명백한 것은 기적이었고, 독자들에게 어떤 일을 지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내용들이 증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발을 씻긴 일 같은 것은 ‘요한복음’에만 나타나 있는데, 왜냐하면 요한은 이 사건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부분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대부분은 예수님이 사람과 한 대화를 기록했는데, 일대일 대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사마리아 여인, 니고데모와 다른 사람 등입니다. 다른 복음서 모두에서는 예수님이 회중들 향해 말씀을 했고, 그리고 회장들에게 설교를 한 것인데,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일대일 대화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외에 ‘요한복음’의 일곱 곳에서 예수님이 ‘나는….’이라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니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좋은 목자다. 나는 문이다. 나는 부활과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나는 참포도나무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를 왜서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이 일이 이렇게도 중요한데, 정말 믿기 어렵네요. 다른 세 권 복음서는 이를 잊고 기록하지 못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다른 세 저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모두는 징조이며, 그의 진정한 신분을 가리키려는 것입니다. 요한이 관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다른 하나가 다른 것은 중점이 다른 것입니다. 다른 세 복음서는 ‘마가복음’의 구조를 채용해서 기록했는데, 중점을 북방 갈리리에서의 30개월 기간에 놓았고, 그리고 남방의 6개월 기간에 놓았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매우 다르게 거의 남방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였으며, 그리고 비교적 초기의 일을 기록했는데,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태, 마가와 누가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첫 30개월은 북방에서 사역을 했는데, 하지만 ‘요한복음’은 당시 예수님이 남방에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자유파 학자들은 이 점에 근거하여 모순을 지적하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래서 두 개 모두가 정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을 때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전도를 시작할 때 축일에 참가하러 확실히 남방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경건한 유대인과 같이 매년 세 번 예루살렘으로 갔었습니다.
요한은 중점을 예수님이 북방에서 사역한 것에 놓지 않고 초기에 남방에 간 것에 놓았습니다. 그래서 모순이 없었으며, 조금도 없었습니다. 요한의 중점은 예수님이 매년 세 번 남방으로 간 것에 놓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가 초막절 참석하러 갔었으며, 거기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들을 했었는데, 이는 다른 세 복음서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다른 점을 느꼈습니까?
이어서 우리가 네 번째 다른 점인 성격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짧은 비유가 없습니다. 그의 기록 중에서 예수님이 사람들과 늘 끊임없이 논쟁하는 것처럼인데, 간단하고 짧은 이야기와 비유가 아니라 항상 장관설을 늘어놓으며 표달했으며, 이로 독자들더러 예수님이 남방에 가서 모든 가르침 성격이 변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주요로 예수님이 남방에 있을 때 반드시 그의 신분을 위해 자주 유대인과 변론을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이 바로 아주 좋은 하나의 예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매우 듣기 어려운 말을 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니라’고 하였고, 그들이 또 말하기를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고,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은 듣기 매우 어렵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나는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니라, 너희들은 그를 모르지만 나는 그를 알고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독자들은 이 전체가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오고 가는 격렬한 변론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중점 하나를 가지고 왔는데,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주 유대인들과 변론을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곧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은 이스라엘 전체에 적용하는 줄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지난 2000년 동안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끊임없이 반대했습니다. 매우 아쉬운 것은 많은 크리스찬들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비난했는데, 하지만 ‘요한복음’ 말하고 있는 유대인, 그는 사실 남방인들을 가리켰습니다. 유대 땅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가 갈릴리 사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닙니다. 제 뜻을 아시겠습니까? 이 점이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 자신이 유대인이며, 예수님과 제자들 모두 유대인입니다. 요한은 ‘우리 유대인 모두는 예수를 반대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유대 땅의 사람들이 예수를 반대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매번 남방에 가면 항상 유대인들과 부딛히는데, 이는 유대 땅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면 아실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요한복음’이 유대인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요한복음’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 점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예수님을 죽였느니라’고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를 따랐고, 우리를 위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판단은 객관적으로 공정해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유대인은 남방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성격은 도덕을 지키며 무엇은 믿어야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토론한 것이 아니고 바로 장광설로 하나님의 일을 논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합당한 언행을 자주 토론했는데, 하지만 요한이 논한 대부분은 신앙의 내용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크게 다른 점은 관점인데, 이는 아마도 해석하기가 비교적 어려울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헬라인들의 사고 방식이 다른데, 우리가 다른 책을 논할 때 이 점을 다시 한번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서방 교육이 헬라인의 사고 방식을 위주로 했고, 그래서 서방인들은 자주 헬라인들의 각도에서 일들을 보곤 하는데, 하지만 히브리인들의 사고 방식은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두 가지 모두 있는 셈입니다. 요한은 헬라 문화의 영향을 깊게 받은 곳에서 이 책을 기록했는데, 바로 에베소 성입니다. 오늘날 터키 서쪽이며, 당시에는 아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와 히브리 문화가 혼합되어 있고, 요한은 두 가지 사고 방식을 종합하였습니다. 그 중 히브리인들은 직선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과거, 현재와 미래, 어제도 계셨고,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고 하며 모든 생각을 시간대로 앞뒤 직선적으로 발전하는데, 시간에는 목적과 진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인의 사고 방식은 다릅니다. 그들은 수직 공간으로 사고를 하는데, 상과 하이며, 하늘과 땅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인의 사고 방식은 역사의 진전을 중시하는데, 그래서 시간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한 방향으로 전진하고, 어떤 목적지로 가는데, 이 목적지는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완성되고, 모두는 과거이고, 현재와 미래의 사고 방식이며, 마태, 마가와 누가복음인 이 첫 세 권의 복음서 모두는 이런 시간의 직선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요한은 이란 사고 방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주요로 수직선의 사고 방식으로서 하늘과 땅, 상하와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수직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고, 그가 땅에 내려오셨다는데, 이것은 상하를 중시하는 복음이며, 다른 복음서는 오히려 시간의 선후를 중시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점을 보셨습니까? ‘요한복음’은 두 개 겸하였는데, 하지만 ‘나는 하늘에서 왔느니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전형적인 헬라 사고 방식인 이 세계와 다른 세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관점이 다른 것과 다른 것입니다.
좋아요. 이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겠습니다. 수평적 타임라인은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이며 과거, 현재와 미래로 되어있습니다. 이런 수평적 사고 방식의 관건적 단어는 세대인데, 현재가 가장 악한 세대이며, 미래의 세대이며, 이것은 ‘마태복음’의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관건적 단어는 하늘과 이 세상이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를 하늘에서 땅으로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였는데, 이것이 수직 사고방식이며, 성경의 중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몇 권이 있는데, 특히 ‘히브리서’입니다. 우리가 이 책을 논할 때 발견할 수 있겠는데, 이 수직선을 매우 강조합니다. 위와 아래의 관계이며,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저자를 보겠는데, 우리가 저자의 각도에서 이를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매우 특별하며, 그는 어부일 뿐만 아니라 고기도 팔았습니다. 우리가 알기에 그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하지만 그가 예루살렘과 장사로 오고 간 것 같습니다. 그는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은 후 예루살렘으로 싣고 가서 팔았습니다. 그는 사실 두 곳인 북방과 남방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대다수 제자들은 북방인들이었습니다. 사실 12제자 중에서 가룟 유다만이 진정한 남방인인데, 하지만 그는 어차피 반역자이니 우리가 그를 상관하지 맙시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지지한 곳은 북방인데, 하지만 요한은 남북 두 사이의 다리였으며, 그가 남방에서 분명히 꽤 잘 나갔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발견했는지 모르겠는데, 이 12제자 중에서 적어도 다섯 명, 심지어 일곱 명이 예수님과 친척 관계가 있는데, 이렇게 많은 친척들이 그를 따르게 한 것을 보아 예수님이 대단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가까운 친척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부활 전에 가까운 친척들이 그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고, 그의 형제 자매 네 명 모두 믿지 않았으며, 그가 부활 후까지 그들이 그제서야 불붙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중 두 명은 신약성경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이 전에 믿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의 사촌 형제는 믿었습니다. 그의 12제자 중 적어도 다섯 명, 아마다 일곱 명이 사촌 형제였습니다. 그리고 12제자 중 세 명이 그와 가장 가까웠는데, 바로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이 세 명 중에서 또 한 명이 가장 특별했는데, 예수님이 편파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확실히 특별히 가까운 제자 몇 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식사를 할 때 지금처럼 의자에 앉아서 먹지 않았고, 발을 상 밑에 숨기고, 그리고 가로 누워서 먹었습니다. 이러면 그들의 발이 마침 옆 사람의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밥 먹기 전에 반드시 발을 씻습니다. 우리의 발은 상 밑에 숨어서 손만 씻으면 되는데, 하지만 그들은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이런 앉은 자세로 밥을 먹을 때 머리는 옆 사람 가슴에 기대는데, 머리를 주인의 가슴에 기대인 그 사람은 반드시 주인과 가장 가까운 친구일 것입니다. 매번 제자들과 함께 식사할 때 요한은 항상 이 자리에 앉았고, 요한은 매우 겸손한데 누구라고 직접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항상 말하기를 ‘그는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제자이며, 그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가장 마지막에 죽은 사도입니다. 요한이 이 책을 완성했을 때 다른 사도 모두가 이미 순교 당했습니다. 요한은 반드시 속히 완성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그 한 사람만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다른 제자들보다 더욱 잘 이해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앉아있어서 귀속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설령 모두가 함께 있어도 그는 여전히 예수님과 귀속말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특별히 잘 이해했습니다. 지금 그가 나이가 많게 되었고, ‘요한복음’ 마지막에서 논하게 되었습니다. 개성이 궁금한 베드로는 쓸데없이 집적거리는데, 그는 참지 못하여 예수님에게 묻기를 ‘요한은 무슨 끝장이 있을까요?’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베드로 마음에 30년 숨어있었고, 베드로가 듣고 나서 예수님에게 묻기를 ‘그럼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너 자신의 일만 잘 관리하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고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든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날부터 이런 말이 전해졌습니다. 즉 예수님이 요한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신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서도 말하기를 예수님은 이 뜻이 아니라고 하였고, 그는 단지 베드로더러 자신의 일만 잘 처리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확실히 가장 오래 사셨고, 이는 아마도 예수님이 자신의 어미니를 그에게 맡겨 보살펴라는 원인일 것입니다.
저는 항상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은 왜서 어머니를 돌보지 않았을까요? 사실 그들 모두는 예수님 때문에 순교했으며, 예수님이 요한의 생명은 남겼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를 돌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제 생각에 예수님이 요한의 생명을 지킨 것은 그 한 사람만 그의 진리를 전달하려고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요한을 데리고 이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유래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말로 예수님의 뜻을 복창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 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하지만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복창하였고, 전체 뜻을 표달했으며,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뜻을 매우 잘 이해했고, 그래서 예수님의 뜻을 복창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구절을 아실 줄로 생각합니다. 이 말은 누구가 한 말입니까? 만약 예수님이 정말로 이렇게 말했다면 참으로 신기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들으면 마치 제3자가 예수님을 논하고 있는 것처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느니라’는 말은 마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제3장에 기록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온 것이며, 이런 현상이 ‘요한복음’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뜻을 복창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의 뜻을 정말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뜻을 표달했고, 거의 예수님을 도와 대사를 써 준 것처럼입니다. 사실 그는 뜻을 복창한 것이며, 그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의 듯을 해석했고, 그는 성령의 인도하에 이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는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해석한 것인지 가끔은 사람더러 추측하게 합니다. 두 개 모두 가능한데, 하지만 이는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한 말씀입니다.
이제 요한이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을 보겠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관건입니다. 마치 ‘마태복음’ 마지막에서 우리에게 그 책의 목적을 알려준 것처럼인데, 모든 족속이 나의 제자가 되게 하여 그들에게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도 마지막에 기록한 목적을 가리켰는데, 오늘 아침에도 이 구절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기록한 원인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일들을 기록하기에…. 그의 뜻은 ‘내가 이 일 기록하기를 선택한 것의 목적은 너희더러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하려는 것이고,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약성경 원본은 헬라어로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것이고, 헬라어와 영어가 다릅니다. 헬라어에 특수한 동사 단어가 있는데, 아쉽게도 영어로 번역할 수 없습니다. 한가지 동사 단어가 있는데, 저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어는 ‘현재지속식’이라고 하는데,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뜻이며, 번역할 때 반드시 ‘지속’이라는 단어를 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당시 구하면 바로 받을 것이고, 찾으면 반드시 찾게 되고,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열릴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원본은 ‘지속적으로 구하면 반드시 받을 것이고, 지속적으로 찾으면 반드시 찾게 될 것이고, 지속적으로 두드리면 반드시 열릴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저에게 말하기를 ‘제가 성령을 구했는데, 하지만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하여 제가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더러 지속적으로 구하라고 하였어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한가지 물건을 얻고 싶을 때 계속해서 구하지 않습니까? 아이가 자전거를 사고 싶으면 아빠에게 사도 되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아빠가 아직은 안된다고 할 것입니다. 일주일 뒤 아이가 또 간구하기를 다른 사람 모두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또 간구하기를 자전거를 타면 버스 비용이 절약됩니다라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예수님이 끊임없이 성령을 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밤중에 이웃집 문을 두드리는데, 이웃이 일어날 때까지 두드려서 그가 구하는 물건을 얻기까지 두드렸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가 앞에 구절을 어떻게 다시 한번 번역하는지 들어보세요. 이를 기록한 것은 너희들더러 예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게 하려 함이라. 또한 너희들더러 그를 지속적으로 믿게 하려는 것이며,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다시 제가 요한복음 3:16절을 다시 번역한 것을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지속적으로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전체 뜻이 다릅니다. ‘믿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에베소서 5:18절인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단어입니다.
당신더러 구원을 받게 하는 이 믿음이 바로 당신더러 지속적으로 믿어라는 믿음입니다. 어제 당신더러 구원 받게 하는 믿음이 오늘은 당신더러 구원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20년 전에 있었던 믿음이 내일은 구원 받지 못하게 할 수 있는데, 믿음은 바로 지속적인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목적은 당신더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당신더러 지속적으로 믿어라는 것이며, 당신더러 성숙한 크리스찬이 되어 지속적인 믿음을 지키게 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진정한 신분을 영원히 잊지 말고, 지속적으로 믿어서 지속적으로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시간의 길고 짧음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품질에도 관한 것이며, 영원한 것이며, 풍성한 생명입니다. 길고 짧음과 품질 모두는 영원한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지속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문안 인사가 있는데 제가 매우 좋아합니다. ‘인생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 인생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도와주고, 풍성한 생명으로 살게 하는데, 하지만 전제는 지속적으로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20년 전에 한 번 믿은 것이라면 불가능 한 것입니다. 당신이 오늘날 예수님을 믿었다면 오늘에 영생을 누릴 수 있고, 당신이 내일도 만일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내일이 영생을 누릴 수 있으며, 당신이 만일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단 구원 받으면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은 진부하고 상투적인 말이며, 신약성경에서 이런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할 때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을 말하는데,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오늘날 구원 받는 것은 근본적으로 오늘날 믿음으로 말미암았고, 내일의 믿음은 내일의 나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믿으면 지속적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입니다.
다시 믿음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한 믿음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는데, 요한의 서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만 보겠습니다.
‘믿음’이라는 이 동사가 ‘요한복음’에서 98번 이상 나타났고, 이는 다른 세 복음서를 합한 것보다 더욱 많으며, ‘마태복음’에도 이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 드렸는데, 믿음은 ‘마태복음’에서의 큰 특점이며, ‘믿음’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백 번 가까이 논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명사가 아니고 동사입니다. 그는 ‘믿음’을 적게 논했고, 모두 ‘믿는다’라고 논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행동이고, 행동력이 있어야 했고, 명사가 아니고 동사이며, 뿐만 아니라 당신의 행동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동사를 사용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세 가지 측면의 믿음이 있는데, 아쉽게도 모든 크리스찬들이 이 세 가지 측면을 이해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똑 같은 자모로 시작하기 위해 세 가지 복잡한 명칭을 취했는데, 사실 이 명칭들을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두운을 맞출 수 있는지 없는지이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 가지 단어를 보겠습니다.
첫 번째 단어는 믿음인데, 어떤 것을 진짜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중점은 믿는 일에 놓였는데, 즉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믿고,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어떤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인데, 바로 복음을 받아 들여 믿는 다는 것이며,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사람더러 구원을 받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어떤 사건을 믿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찬양을 부를 줄 아는 앵무새를 보았는데, 이 앵무새가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찬송의 1절 가사를 모두 할 수 있었습니다. 매번 손님이 올 때면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라고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찾습니다. 앵무새 한 마리가 새초롱에 갇혀 있는 것을 보면서 왜서인지 모릅니다. 돈을 새초롱에 넣으면 이 앵무새 주인인 노부인이 돈을 아프리카 선교사에게 보냅니다. 이 앵무새가 하는 것이 대부분 교회 성도들이 하는 것보다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일 하나님을 끊임없이 찬양하고, 그리고 아프리카의 선교사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노부인은 지금까지 이미 175파운드를 헌금했는데, 그러나 그는 한 마리의 앵무새이고 성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에 많은 앵무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입으로 계속해서 신경을 복창하며, 읽기만 합니다. 나는 믿노라 나는 믿노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의 시작점일 뿐이며, 바로 진리를 믿는다는 것인데, 마귀도 진리를 믿고, 진리가 그를 떨게 합니다. 적어도 그는 반응을 하는데, 하지만 그는 성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을 믿으면, 그것이 믿음의 시작점이며, 진리를 믿고, 성경을 믿고, 예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음은 반드시 진정한 믿음으로 들어가야 하며,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분들 중에 몇 명이 저를 진정으로 신뢰합니까? 별로 무슨 반응이 없는 것 같은데, 여기에 앉아 계신 분들 중 몇 명이 제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습니까? 이것 보세요. 대화를 하니 비교적 반응이 있네요. 저의 존재를 믿는 것은 별 것 아니고, 하지만 저를 진정으로 신뢰하는 하는가인데, 손들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저를 진정으로 신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만약 모든 돈을 저에게 맡겨 보관하게 한다면 당신이 저를 진정으로 신뢰한다고 믿겠습니다. 당신이 행동으로 한 사람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여러분, 제 뜻을 이해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는 것이며, 진리를 믿는 첫 걸음입니다.
다음은 믿고 의지하는 것과 순종으로 당신이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당신이 만약 그의 명령을 지키면 그를 진정으로 신뢰하는 것인데,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리고 세 번째 측면이 있어야 하는데, 제가 이미 언급한 지속적인 믿음입니다. ‘요한복음’에서의 믿음이라는 단어는 바로 현재 지속식이며, 지속적으로 믿는다는 표시입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 믿음과 충성은 똑 같은 단어입니다. 가끔은 어느것을 가리키는 뜻인지 모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당신이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신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났든지 지속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제 뜻을 이해했습니까? 당신이 만약 믿음이 충만하면 충성하게 되고, 당신이 어떤 사람을 지속적으로 신뢰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났든지 혹은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하든지 모두 똑 같게 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진리만 믿는 것이 아니라 진리대로 행해야 하며, 그리고 진리를 지속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지킨다는 것은 믿음에서의 매우 중요한 하나의 측면인데, 왜냐하면 당신의 믿음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바로 이렇게 지키지 못해서 무너졌습니다. 잘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이고, 진리대로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을 계속해서 지키면 믿음이 충만해질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충성하게 됩니다. 제가 앞에서 믿음과 충성은 원어에서 동일한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진리를 논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오늘날 상대 이론이 팽배한 이 세대에도 이 문제를 자주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견해가 있고, 나는 나의 견해가 있는데, 진리가 무엇입니까? 이 대답은 놀랍게도 빌라도 앞에서 여섯 자 되는 곳에 서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한 마디가 아니고 한 사람이며, 그것은 ‘요한복음’의 대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는 한 가지 사건인줄 생각하는데, 사실 아닙니다. 진리는 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만약 진리를 알고 싶다면, 직접 이 사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혹은 8장인 여기처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처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전에 예수님을 접촉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후 헛소문과 전설이 슬며시 들어왔고, 예수님에 대한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특히 에베소성 이 곳에서였습니다. 년로한 요한이 여기에서 이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성경에서의 복음서 외에 다른 거짓 복음서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예를 들면 ‘도마복음’ 같은 것인데, 그 거짓 복음서의 이야기가 매우 기이합니다. 어느 거짓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어릴적에 한 번은 나사렛 거리에서 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진흙 속으로 밀어 넣어서 예수님이 일어서서 그를 저주하니 그를 밀어 넣은 남자아이가 문등병에 걸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이야기는 한 번은 예수님이 흙으로 작은 새를 만들어 축복의 말을 해주니 그 새가 날아갔다는 것입니다. 전부 예수님 어린시절에 관한 기록인데, 사실 예수님이 30세 전에는 아무런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이 없어서 기적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신분이 아니고 인자의 신분으로 오셨고, 그래서 성령 충만 후에야 기적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는 것을 너희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의 이야기가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에 관한 전설과 헛소문이 바로 이렇게 온 천하에 퍼졌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그때 예수님에 관한 두 가지 실제에 맞지 않는 진술이 있었는데, 요한이 반드시 이 복음서에 기록하여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제가 지금 먼저 이 두 가지를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먼저 여기에서 멈추고 다음 회에 시작부터 먼저 이 두 가지 사건을 논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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