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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1 마태복음 P1 / 교정 및 자막 예정

LNCK 2018. 12. 27. 20:53

마태복음(1)                                                                                     이 기디언 번역 



저는 오늘 성경을 강의하려고 합니다. 이 책은 사람으로 지혜를 얻게하는 책이지 총명을 얻는 책은 아닙니다. 많은 책들이 사람더러 총명을 얻게 하는데, 하지만 이 책만이 당신더러 지혜를 얻도록 가르쳐줍니다.
저는 지혜를 얻을지언정 총명을 구하지 않겟습니다. 총명이 있으면 많은 돈을 벌수는 있겠지만 지혜가 있으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각 사람마다 이 책을 서로 다르게 대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약으로 여기고 매일 10절씩 읽으면 마귀가 가까이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연구 자료로 많이 사용하는데, 그들은 성경을 많이 보지 못하고 연구 자료는 오히려 많이 읽습니다. 항상 빠른 속도로 성경을 대충 읽고 연구 자료의 해석에 많이 치우칩니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이 말씀을 어떻게 읽기를 원하는가 하면, 우선 먼저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성경 단어 원어는 복수형이지 단수형이 아니고, 원어 헬라어의 biblia이며, ‘서적 전집’ 또는 세트, 총서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많은 전집들이 묶여져 있는데, 시가, 잠언, 역사서와 선지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반드시 한권 한권씩 연구하고 읽어야 합니다. 현재 성경은 많은 파괴를 입었습니다. 성경의 장절에 좋은대로 표시하여 현재 많은 크리스찬들이 표시한대로 경문을 읽듯이 읽습니다. 만약 제가 요한복음 3:16절을 말하려고 하면 제가 절반 이상 히스기야 3:16절이라고 하거나 혹은 아무렇게나 책 이름을 취하거나 장절이라 하고, 그리고 보면 회중들이 성경르 번지며 찾지요. 히스기야 3:16절을 사람들이 찾느라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히스기야서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의 녹음 테프를 한동안 듣고난 후 저한테 와서 이런 질문을 해요, ‘데이빗, 당신은 성경학 교수인데, 성경을 강의할 때 왜서 전혀 성경 구절을 얘기하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하나님이 성경의 구절에 번호 표시룰 전혀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은 하나님 말씀을 짜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어떤 책이 이 책처럼 매 구절마다 번호가 있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방법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많은 권으로 포괄되었고, 우리는 반드시 각권의 형태와 쓴 목적을 이해해야 하며, 그리고 그 안에 내용도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책 한 권을 썼는데, ‘정상적인 크리스찬의 탄생’이라는 책입니다. 책이 출간된 후 제가 너무나 놀랐습니다. 책의 내용은 분명이 중생을 얘기했고, 또 어떻게 다른 사람의 중생을 도울지였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 후, 대영 도서관에서 이것을 ‘출산’의 책 라인에 수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만약 도서관에 가서 이 책을 찾으려면 부산과 책 쪽으로 가셔야 찾을 수 있습니다.
주방 요리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 도서관에 가서 예술에 관한 책을 빌리지 않을 것이고, 컴퓨터 배우고 싶은 사람은 소설책을 빌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임의대로 끊어서 해석하려 하고, 앞뒤 상관없이 성경의 출처와 배경도 묻지 않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어떤 한 구절이 전형적인데,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입니다. 모든 것은 무엇을 가르키는 것입니까? 제가 회중들에게 자주 ‘당신은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간증, 치유, 기도’라고 합니다. 제가 사실 이 말씀은 전혀 그런 뜻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반드시 자기의 수입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현재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저는 요즘 어떤 교회의 삼분의 이 회중 모두 빚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수입을 잘 관리하고, 자신의 수입을 합당하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퇴직금으로 매일의 삶을 보내는데 아주 적실합니다. 하지만 만약 말씀을 끊어서 해석한다면, 그의 모든 문맥을 잡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속한 본문은 그의 중요한 배경이고, 성경의 완전한 뜻을 설명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먼저 사복음서를 나누겠는데, 복음서는 홀로 서 있는 한그루의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역사서, 서신, 그리고 선지서도 있고, 그리고 또 네 개 아주 특별한 책이 있지요. 이 네 개의 책들이 다른 책보도 아주 다른데, 우리는 이 책을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복음서란 무엇입니까? 그는 전기가 아니고 더욱이 자전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전혀 책을 쓰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순수한 전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복음서의 삼분의 일 이상 편폭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일반 전기들은 주인공이 얼마나 대단하고 장렬해도 주인공의 죽음에 대해 삼분의 일 이상 쓰지 않습니다.
그럼 복음서란 무엇입니까? 현재 사회에서 제일 밀접한 예를 든다면 바로 뉴스와 같습니다. 복음서는 뉴스 보도와 같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한번만 읽으면 알수 있고, 또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흥분되어 사람을 찾아 나누고 싶어 하게 됩니다. 복음서를 큰 소리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혼자서 복을서를 읽는다 하더라도 큰 소리로 읽고 나면 큰 수확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읽어 준다해도 자신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성경 읽어 주는 것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정도가 설교까지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한 글자 한 글자마다 귀를 기울여 들을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매번 설교 모두 멋지고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는 하나의 독특한 문체이며, 복음서의 저자가 한 가지 사건을 간증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을 뉴스로 만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보도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확실히 광의의 뉴스 기사이며, 이것은 처음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루 하루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때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자들의 증거가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거나 혹은 순교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동시에 교회는 갈수록 커져 갔고, 그 범위도 점점 광범위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당시 이 일을 경험했고, 이 뉴스를 전하는 사람이 갈수록 적어졌으며, 그리고 이 뉴스를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갈수록 많아졌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지요? 해답은 바로 이 사실을 글로 쓰는 것이었으며, 끌 수가 없었습니다. 증인들 모두 죽기 전에 반드시 백지흑자로 기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일차 자료를 기록한 것이 있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펴면 먼저 사복음서가 보이는데, 왜서 네개 입니까? 만약 하나라면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읽어 보신 분들이 발견 했으리라고 믿는데, 사복음서에는 반복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 왜서 네 개이고, 하나님이 왜서 이 네 사람을 불러 한 자리에 앉혀 놓고 공동으로 하나만 쓰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각 사람마다 자기만 알고 있는 대로 기록했고, 그리고 하나의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래 전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있었는데 ‘크로브’라고 하고, 여기에 앉으신 분들 중에 그분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제가 길퍼드에 있을 때, 특히 ‘길퍼드 범죄 안건’을 좋아했는데, 내용은 돼지가 산을 등진 살인 사건을 묘사햇습니다. 크로브는 성공회의 기도 담당자였고, 서리의 길퍼드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정탐 소설을 썼고, 그는 저처럼 철도에 대해 흥취가 많은 사람입니다. 크로브는 이 네 개의 복음서를 한 이야를 만들어 쓰려고 결심했는데, 결국 그는 정말로 써 냇습니다. 이것은 크로브의 ‘종합 복음서’인데, 이것은 매우 총명한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부족했고, 지금 제가 그 책을 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많은 시간이 절약된다고 생각하여 너무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네 권의 책을 읽을 필요없이 단 한권만 읽으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제가 발견했는데, 사합일체의 방법이 아주 중요한 측면을 말살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어떤 사건들을 중복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장에 하나님의 창조를 두 번 말씀하였고, 역대기와 열왕기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두 번 말씀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생과 죽음을 네 개에 기록했는데, 무슨 뜻일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어떤 중요한 일들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보라고 한 것인데, 이래야만이 각각 다른 각도에서 전체 진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두가지 측면인데,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네가지 측면에서 그를 알 수 있는데, 네개의 각각 다른 차원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감옥에 간적 없습니다. 하지만 듣기에 감옥에 갈 때 사진을 찍는다고 하는데, 이 각도에서 한장, 저 각도에서 한 장 찍는다고 합니다. 한달 전에 제가 이렇게 다름 사람들에게 알려주니 마침 감옥에 갔다 오신 분이 저의 말을 교정해 주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지금 범인은 얼굴 부분 세 곳을 클로즈업 한다네요. 범인의 얼굴 정면의 완변한 클로즈업해서 이 후에 확실히 알아 볼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비행기 중에 콩코드 배행기라고 있는데, 저는 그 콩코드 비행기의 모양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 비행기는 땅에 착륙할 때도 마치 날아 있는것 같은데, 이는 그의 모형과 연관 있습니다. 어떤 말로 이 비행기 외형을 묘사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쉽지 않네요. 그렇지요? 그를 ‘delta’라고 직접 말할 수 있으며, 다른 살마들은 그가 삼각형 모양이라고 알고 있으며, 그것은 헬라어 d 문자나 혹은 삼각형 형태인데, 명실상부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렇게 보면 또한 무슨 형태일까요? 사실상 만약에 콩코드 비행기를 찍어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면, 적어도 4-5장은 찍어야 합니다. 그렇게 찍지 못하면 이 비행기의 형태를 완전히 볼 수 없고, 그를 어느 각도에서 보나 모두 그렇게도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예수님은 역사이래로 사람들을 가장 놀랄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네 사람에게 게시를 주셔서 세상 사람들 대신하여 옆에서 그를 관찰하게 했고, 그리고 그들이 보고 들은 바를 쓰게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 네 사람이 본 예수님은 모두 달랐으며, 즉 그들이 다른 표현과 특질의 한 분인 예수님을 보았단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구분하는 습관이 있는데, 마가가 본 예수님은 인자이고, 그래서 그가 쓴 첫 부분은 가장 간단하고 짧은 복음서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가 두 번째 부분을 썻는데, 마태가 본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세 번째 부분은 ‘누가복음’인데, 그가 본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구세주였습니다. 네 번째 부분은 ‘요한복음’인데, 요한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총괄적으로 네 개의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을 본 것이었는데, 하지만 여기에 대해 우리가 더욱 깊이 탐구해야 합니다.
우리 역기서 두가지 방면에 대해 탐구하려고 합니다. 우선 먼저 저자를 보겠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빠르게 뛰어넘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먼저 중간 이 부분을 보겠는데, 일반적으로 고인을 위한 생애 쓰기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먼저 그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지를 쓰고, 부고는 고인이 한 일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고인이 생전에 했던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사람들이 그가 생전에 했떤 말들을 생각하고, 이로써 그의 서신을 출판하기 시작하고, 또한 그의 언론도 출판하게 됩니다. 마지막 세번째 단계에서 사람들은 그가 어떠한 분이었는지를 이해하고 싶어하며, 그 분의 인격, 성격, 무슨 일들 했는가의 동기, 그분의 싫어했던 것과 좋아했던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복음서가 바로 이런 세가지 단계에 부합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하셨던 일에만 관심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행위, 기적, 예수님의 죽음과 불활이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이 기록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마가보다 더욱 많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편폭이 더욱 길었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을 기초하여 더욱 많은 새로운 소재들을 기록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오히려 예수님의 생애에 하신 말씀과 행위를 비교적 적게 기록하였는데, 그가 가장 중요시한 것은 우리가 다음에 나누어 보겟지만 한마디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기록하였습니다. 이로써 우리더러 예수님의 성격, 그의 내주하심과 그분이 누구인가를 기록했습니다.
좋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 번째 부분을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복음서를 연구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저자의 관점에 보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보았는가? 그는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는 다른 세 사람보다 다르게 보았는데, 그럼 그는 예수님을 어떻게 보았고, 내면으로 본 것이 육신의 눈으로 본 것보다 더욱 투명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중의 하나의 각도일 뿐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고 연구하자면 다른 한가지 각도에서 보아야 하는데, 바로 독자의 각도에서 보는 것입니다. 독자는 이 복음서를 집필한 배후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누구를 위해 기록한 것일까? 왜서 기록하였는가? 왜냐하면 저자는 속심 말만 할 뿐만 아니라 그가 무엇을 보았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어떤 특별한 목적을 겨냥했고, 그리고 어떤 특별한 독자들을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두 개의 각도인 저자의 각도와 독자의 각도에서 보아야 하며, 저자가 본 각도와 기록한 목적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는 누구 보라고 기록했을까요? 무엇을 가르쳐주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우리는 앞으로의 성경 모두가 이 기초 위에 다져지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두 가지 각도에서 마태복음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앞 세 개의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리라고 하는데, 여러분 모두는 이런 말을 응당 들었으리라고 봅니다. ‘공관’을 영어로는 synoptic 인데, 두 개의 헬라어로 구성되었고, Syn는 ‘함께’를 대표하고, optic는 ‘견해, 관점’을 대표하는데, 다시 말하면 이 세 부분 복음서가 취한 관점이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견해가 매우 비슷했는데, 요한복음만 오히려 자연히 하나의 격식을 갖추었습니다. 어떤 부분에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은 반드시 주의했을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복음서는 요한복음과 다릅니다.
먼저 마가복음을 나누려는데, 마가복음은 고조가 잇달아 출현되는 뉴스 작품이며, 뉴스를 취하고 기록하는 방식이 마치 뉴스를 보도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아주 빠르게 예수님의 일을 시작하기 몇 개월 전의 섬김을 기록하였고, 그리고 예수님의 전 이년 반과 후 반년인 이 기간을 심중하게 나누었는데, 이것이 마가의 시간 구조입니다. 후에 마태와 누가도 이런 시간 구조를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30개월 북방과 갈릴리에서 전도하였고, 그 곳 사람들 모두는 한 가족이었고, 각 나라 사람들 모두가 거기에 모였으며, 나라가 깨어 있고, 민풍이 개방되었는데, 하지만 남쪽의 유대 지방은 모두가 민주주의 였고, 사람들이 마음이 좁고, 신랄하고 괴팍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북방에서 대 환영을 받았는데, 그러나 남방에 가서는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북방이 아닌 남방에서 죽으셨습니다. 북방에서 예수님을 죽이고 했던 사람은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그를 낭떠러지에 던져 버리려고 했는데, 하지만 총적으로는 예수님이 북방에서 사람들에게 많을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 수천이었는데, 남방에 오신 이후로 예수님의 어려움이 잇달아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시간 구조이며, 마가가 이야기를 점점 고조로 이끌었는데, 바로 남방에서 고조를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이 북방에 있던 날들은 편안하였는데, 하지만 남방에 오시니 긴장한 분위기에 오르고 정세가 위급하였습니다. 마가는 이야기를 점점 고조로 이끌어 들인 외에 또한 속도를 늦추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몇 페이지 되는 편폭으로 몇 개월의 시간을 기록하였는데, 사실 꼭 전 2년반이었는데, 몇 페이지 편폭이었을 뿐이었습니다. 후에 예수님이 배를 타고 속히 바다 건너편으로 갔는데, 그는 아마도 보트 같은것 타신 같습니다.
사건마다 모두 즉시 발생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주의하셨습니까? 뉴스 기사가 바로 독자들로 하여금 흥분에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년의 기사가 몇 개월의 기사로 변하였습니다. 다음 몇 개월의 기사가 몇 페이지 되는 편폭을 차지했으며, 그리고 몇 개월의 기사가 몇 주의 기사로 되었고, 몇 주의 기사가 매일의 기사로 변하였고, 매일 발생한 일을 명확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루를 더욱 매 시간 발생한 일로 묘사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발견하였는지 모르겠는데, 마치 직행 기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면서 역으로 들어선 후 십자가 앞에 머물어 선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의 모든 구조는 십자가를 종점으로 하였습니다. 발걸음을 늦추어 십자로 데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한편으로 고조를 이루고, 한편으로는 발걸음을 늦추는데, 이것은 뉴스 집필의 걸작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읽기에 매우 합당한 책이며,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얼마나 기묘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우리 지금 먼저 마가복음보다 마태복음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이 사용한 시간 구조가 마가복음과 같은데, 하지만 내용은 대폭으로 개변하였습니다. 우선 먼저는 편폭인데, 마태복음의 편폭이 훨씬 깁니다. 그는 예수님의 출생, 성령으로 잉태, 박사들의 아기 경배, 바로 성탄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가입시켰는데, 마가복음에는 이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30세부터 기록하였고, 마태는 그 전으로 쫓아 가서 더욱 많은 내용을 넣어서 시간이 더욱 일찍했습니다. 그는 많은 곳을 수정하였는데, 조금 후에 우리 하나 하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는 마가복음을 다른 측면으로 수정하였는데, 그가 길 잃은 어린양의 이야기를 앞뒤 문장이 완전히 다른 곳에 넣었습니다. 길 잃은 어린양이 더는 죄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타락한 크리스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태가 많은 사건을 생략했고, 그가 중요시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첫 번째인 산상보훈이고, 그리고 또한 네 편의 설교가 있는데, 이것은 마태복음의 특색이며, 누가복음의 기록과 완전히 다릅니다. 누가는 이야기 과정에 예수님의 언론을 끼워 넣었고, 마태는 오히려 예수님의 언론을 모아서 다섯개의 주제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조금 후에 다시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듣기에 당시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다른 지점에서 말씀하였는데, 마태는 이 말씀들을 모아서 다섯개의 부분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태는 유대인이었고, 모세 율법을 다섯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바로 성경의 앞 다섯권이며, 우리는 이를 모세오경이라고 합니다. 다섯권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오경, 예수님의 5대 교훈으로 마태는 무엇을 표달하고 싶은 것일가요?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새로운 율법이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율법이라는 것인데, 이 점은 조금 후에 다시 나누겠습니다.
마태복음의 구조는 아주 재미 있는데, 그는 언행의 교체 방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다음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묘사했고, 다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다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기록했고, 이러한 교체 방식이 다섯번인데 마치 샌드위치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 마태복음의 구조를 한번 상상해 보겠는데, 매 훈계 뒤에 예수님의 기적이 실려 있고 또 훈계의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으로의 훈계와 행동으로의 훈계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몸도 함께 움직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들을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마가의 방법은 우리더러 예수님의 하신 모든 것을 직접 보게 하였는데, 하지만 마태는 우리더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게 하였고, 또 우리더러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보게 하였습니다. 설교와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겹치면서 다섯층의 생드위치가 형성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앞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가입시켰고, 가장 뒤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입하여 마태복음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의 구조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을 읽을 때 한가지 사건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그에게서 두터운 유대인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어서 독자들이 그를 유대인으로 설정하게 됩니다. 먼저 우리가 관찰해 볼 것은 유대인들은 입으로 하나님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돠어 일컬을까 아주 두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번도 유대인들더러 입으로 ‘야웨’라고 설득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뜻은 히브리어에서의 ‘하나님’입니다. 제가 전에 그들보고 하나님 이름 발음이 어떻게 되는가를 한 번 불러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여’하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어서 그들이 저에게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고 두려워서 절대로 부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늘로 하나님을 대신 할지언정 절대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늘이 당신을 도울것이다’, ‘하늘에 기도하라’, ‘하늘이 너에게 축복하기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씀을 찾아볼수 없는데, 누가복음에는 아주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기록할 때 그는 ‘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천국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 달력’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절대로 찾아볼수 없는데, 하지만 이상한 영어 대문자 G라는 단어는 자주 나타납니다. 그리고 줄표가 잇따르고, 그 뒤에 소문자 d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유대인 달력’을 펼지면 자주 G-d라는 것이 보일 것인데, 이 단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대표합니다 — God. 하지만 그들은 완전하게 쓰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할까 부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하나님 나라를 천국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로 보아서 그는 독자를 유대인으로 고려한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마태가 보기에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전체가 이 큰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단서에도 마태는 유대인 독자들 견주어 기록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그가 인용한 구약성경이 다른 복음서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마태가 기록할 때마다 그는 특별히 ‘선지자가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강조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이 말씀은 예수님 탄생 이야기 안에 13번이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는 미가, 호세아,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이것은 저자의 마음입니다.
비록 마태복음은 제일 먼저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신약성경 제일 앞에 배치되었습니다. 이유는 다른 복음서보다 구약성경 말씀을 더욱 많이 인용하였기 때문인데, 구약의 연속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만약 당신이 구약을 아주 익숙하게 읽었다면, 마태복음을 읽을 때 구약의 예언이 마태복음에서 실현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구약성경을 총 29곳 인용하였고, 그리고 간접적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한 곳이 121곳입니다. 여러분이 이 121이라는 숫자를 기억하십시오. 마태는 구약성경에 아주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분량으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한것을 기록하였는데, 왜냐하면 일찍이 선지자의 예언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베들레헴을 특별히 강조하였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설교할 때 무리 중 한사람이 묻기를 ‘이 사람이 메시야인가?’라고 하니 다른 사람이 ‘그가 나사렛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불가능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의아스러운 것은 당시 예수님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침묵할 수 있습니까? 저 같으면 큰 소리로 반박하기를 ‘당신이 틀렸어, 그는 나사렛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어’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침묵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유대인들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탄생을 상세히 묘사하였습니다. 유대인 더러 예수님이 선지자의 예언을 완성시켰다고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인데, 이것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아주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신데 왜서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마태가 명확한 해석을 제출했습니다. 그는 유대인 독자들더러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죄를 범하여 하나님 법을 위반해서 사형 당한 것이 아니라는 이 점을 끊임없이 강조했습니다.
이외 마태복음은 또 다른 하나의 중요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점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고 완성시키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아주 중요한 한 마디가 있는데, 지금까지 크리스찬들의 난제인데,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저더러 죄책감을 가지게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바로 모세율법을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세율법을 자주 어기었습니다. 유태인 어느 한 가정이 저를 도와주었는데, 왜냐하면 모세율법에 자질이 혼합된 옷을 입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미가엘이 저의 수호천사인데, 하지만 어떤 유태인 가정이 저더러 율법을 어기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점일획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또 다른 율법은 만약 집에 어떤 질병이 있으면 이웃을 위해 집을 불태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 찾아와서 소독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을 위해 집을 불태워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집을 확장하려 하고 베란다를 설치해야 한다고 하면 반드시 난간도 설치해야 합니다. 이웃의 아이가 기어 나와서 떨어지지 않게 대책해야 하는데, 이런 규정이 괜찮지요. 그 외 건축의 규정, 옷의 규정, 화장실의 규정까지도 제대로 배치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가 이 점을 기록하여 유대인더러 하여금 부담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율법 폐하러 오신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가 말하기를 ‘아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더러 계속하여 모세의 율법과 분투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마태가 유대인 독자를 아주 중시하였지만 그러나 총체적으로 볼 때 마태가 이방인도 중요시하였습니다. 어떤 유대인의 관점을 위반하는 가르침이 있는데, 마태는 이방인을 아주 중요시하였습니다.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께 경배하였습니다. 비록 우리가 확신하지 못하지만 박사들이 아마 이방인이 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였는데, 유대인 이외 모든 족속으로 나의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유대인들만 겨냥하여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만 목표로 한 복음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이 책은 단지 유대인들게 가장 도움이 되는 복음서입니다.
제가 유대인 한분을 만났는데, 그는 마태복음 1장을 읽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믿습니까? 제1장은 예수님의 족보이고, 모두 족보 내용뿐입니다. 제가 처음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정말로 재미없어 보였습니다. 족보만 엄청나게 길고, 처음부터 끝까지가 누구 누구를 낳은 족보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장에도 이렇게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유대인이 주님을 믿기로 결심한 것은 그가 족보에서 예수님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는데, 이 점이 그를 설득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으로 말하자면 족보가 한사람의 내력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마태복음 1장을 읽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족보가 존재하고 있는 목적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어느 한장 전체에 유대인의 고난을 기록하였습니다. 무엇이 고난입니까? 바로 저주이며, 축복의 반면입니다. 예수님이 언급한 저주가 축복만큼 많습니다. 저는 매번 갈리리 해변에 가면 예수님의 저주 말씀이 생각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에 가는 사람들이 모두 디베리야 해안의 호텔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주에는 가지 마세요. 듣기로 거기 호텔이 전체가 물에 잠기었다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의 수위가 올랐는데, 원인은 헬몬산의 눈이 녹으면서 수위가 높아졌고, 그래서 호텔 전체가 물이 잠기게 되었습니다. 본래 마른 갈릴리 호수가 적어도 4년이 되어야만이 수위가 회복되는데, 현재 오히려 물이 꽉 차서 잠겼습니다. 하지만 디베리야는 그나마 머물 수 있는데, 왜서 그런지 아십니까?
예수님 그 시대에 25만명이 되는 사람들이 갈리리 호수 주변의 4개 도시에서 살았으며, 25만명인데, 당시 인구로서 사람이 제일 많은 곳이었습니다. 현재 여행객들이 거기를 가면 말하기를 ‘아주 아름답지요’라고 합니다. 저의 눈앞에 광경을 예수님도 전에 보셨습니다. 저 푸르른 언덕이 너무 낭만적입니다. 전에 25만명이나 이 호수 주변에서 살았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도시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답은 바로 예수님이 했던 말씀인데 ‘화있을지어다 가버나움아! 화있을지어다 벳세다야! 화있을지어다 고라신아!’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이 도시 모두는 사라졌고, 디베랴만 저주 받지 않아서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예수님께 저주 받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저주하였습니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화있을찐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자여! 화있을찐저 사람들에게서 랍비 혹은 아버지라고 들으려고 하는 자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3장 전체가 유대인을 저주한 기록입니다. 제가 보기에 마태는 적어도 성실한 뉴스 기자입니다. 비록 유대인들 보라고 기록하였지만 그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보는 관점을 성실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을 읽는 독자를 주요 유대인에게 초첨을 맞추었습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왜서 이렇게도 외치고 싶었을까요? 왜냐하면 마태가 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 많은 이방인들이 갈수록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로써 유대인과 교회 사이에 많은 격차가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AD85년 경, 바로 마태복음이 금방 완성될 때, AD85년 경에 크리스찬들이 유대 회당에서 좇겨 났습니다. 그때 유대 크리스찬들이 회당에서 좇겨 났습니다. 그들을 회당에서 경배 못하게 하였고, 교회는 이로써 분열이 되었습니다.
제가 한 번은 사고를 친 적이 기억나는데,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모세가 만약 오늘에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고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할 뿐입니다. 유대인이 무시론, 알지 못하는 신, 혹은 불교 등을 믿을 수 있는데, 그래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유독 예수님만 믿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모두 예수님을 믿었고, 엘리야도 예수님을 믿었고, 그래서 그들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왜냐하면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시자 사이에 아주 큰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과 기독교 사이에 매우 큰 격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초기에 교회안에는 유대인만 있었고, 제자와 회중 모두 똑같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책을 기록하여 전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때는 마침 교회가 곧 분열할 때였습니다. 그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두가지 원인이 있는데, 먼저는 그가 유대인에게 교회의 문은 영원이 열려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고, 유대인들과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랐습니다. 마태는 유대인이었고, 그들 모두는 자기의 동족들이 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유대인이었고, 그래서 교회의 문은 영원히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마태가 그들에게 알려주기를 교회가 당신들을 영원히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바울과 같이 유대인들이 돌아 서서 메시야 믿기를 갈망했습니다. 두 번째 원인은 마태가 유대인을 위해 기록한 이 복음서는 크리스찬들더러 유대인이 그리스도인의 조상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유대 혈통이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으며, 예수님은 유대 역사의 뿌리라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족보를 쫓아가면 아브라함과 다윗까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또한 한쪽으로는 유대인더러 크리스찬들을 거절하지 말라는 것이며, 다른 한쪽으로는 크리스찬들더러 유대인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과 크리스찬들을 한 길로 인도 했고, 그가 이 특수한 임무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주역을 맡았습니다.
우리 잠시 휴식한 후, 계속 이어서 마태복음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나누어 보겠습니다. 저는 이방인이고, 저 보기에 여기에 모인 대부분이 이방 크리스찬들일 것입니다. 저는 가끔씩 사람들이 저를 유대인 후예의 그리스도인 줄 알고 있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저의 용모 때문입니다. 이 코는 조상이 물려 준 것입니다. 비록 저는 유대인 아니지만 마태복음을 아주 좋아하며, 저는 이 책에서 전한 메시지를 너무 좋아합니다. 좋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계속 다시 나누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