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야 시8:1~3 스크랩, 출처 분실
▲도입 : 칸트의 통찰력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엉뚱한, 그렇지만 대단히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꽃을 아름답다고 하는가?
아니면 꽃을 보는 마음이....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꽃의 아름다움이 객관적인가, 아니면 주관적인가 라는 질문이다.
물론 꽃은 객관적으로도 아름답다.
그러나 꽃을 보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한다.
아무리 꽃이 아름다워도, 어떤 사람은 꽃을 그렇게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꽃을 보고도 그냥 무덤덤하다.
▲그렇다. 문제는 사물을 보는 우리 마음의 눈이다.
내 눈이 병들고 멀게 되면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봐도 아름답게 느끼지 못한다.
게다가 아름답지 못한 것을 아름답게 보기까지 한다. 소위 뭣에 덮여 씌웠다고 한다.
반대로 이 눈이 건강하면 → 정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
아름답지 못한 것을.... 아름답지 못하게 볼 수 있다.
◐1. 눈이 먼 사람들
▲창세에, 사람들이 눈이 멀다
창 6:1-2절에, 홍수 심판이 왜 일어났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준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문제의 발단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경건한 여인들의 아름다움, 그 내면적 속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그 대신 이 세상의 여인들의 외적인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찾게 되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은 멀어 버렸고,
거짓된 아름다움에 속아서 죄를 짓게 되었고,
결국 그것은 뒤이은 홍수 심판(창 7장)으로 일단락되고 말았다.
*이것은 꼭 남자들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딸들이, 사람의 아들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쫓아가고 있다.
또는 하나님의 딸들이, 사람의 딸들처럼 오직 외모의 아름다움만 추구하고 있다.
자기 육체에다 심는(투자하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갈 6:8)
▲말세에, 사람들의 눈이 썩다.
슥 14:12절에, 말세의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데, 한 구절이 눈에 뜨인다.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문자적으로는 질병이지만, 영적으로는 시각/관점이 부패하게 된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볼 줄 모르고, 아름답지 못한 것을 아름답게 보는
미학적 가치 전도의 상황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인류 최초의 심판도 눈이 멀어서 생겼고,
그리고 인류 최후의 심판도 눈이 멀어서 생길 것이다.
◐2. 눈이 열린 다윗
▲1. 자연 세계를 보는 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시 8:1)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시 8:3)
다윗은 저 대지를 바라보았다.(8:1) 한 밤에 저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았다.(8:3)
그리고 외쳤다.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how majestic!, how excellent!
너무 아름다워서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저는 군 생활할 때 매일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해금강이 보이고, 보일 듯 말듯한 거리에 비로봉이 있었고,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옥녀봉과 집선봉이 있었다.
비온 다음 날 아침 동해에 해가 떠올라서 햇살이 사각으로 금강산 계곡 사이를 비칠 때면
그 아름다움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저는 아직 그런 경치를 본 일이 없다.
그래서 그저 '악!'하고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다. 눈물까지 났다.
그래서 말 대신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찬송을 부르고 말았다.
▲2. 자연 너머로 주님의 영광을 보는 눈
여러분!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다윗의 감탄은 이 정도 차원이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그 너머의 무엇인가를 더 본 것이다.
"주의 영광"을 본 것이다.(8:1)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8:1)
그 찬란한 아름다움 속에 하나님의 솜씨, 하나님의 흔적을 본 것이다.
거기에서 보다 깊은 아름다움, 한 차원 더 높은 아름다움, 진정한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싸인을 남기지 않은 사연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는 작품이
천장 전체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위대한 작품에 미켈란젤로가 자기 싸인을 남기지 않았다.
보통 화가들은 작품을 마무리할 때 그림 구석에 자기 싸인을 남기는 것이 관례인데....
미켈란젤로가 열과 성을 다해서 작품에 임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몇 년 동안 작품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를 완성했다.
흡족한 마음으로 사인을 한 뒤에 성당을 나서려는 순간 자기 앞에 펼쳐진
눈부신 햇살과 푸르른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만 것이다.
그 어떤 화가도 그려낼 수 없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는 동안
한 가지 깨달음이 그에게 생겼다.
"하나님은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그 어디에 사인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그는 다시 성당으로 돌아가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라는 작품에서 사인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는 그 어떤 작품에도 사인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똑 같은 우주를 보았지만, 눈이 서로 다름
1962년은 미국과 소련이 우주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던 때였다.
소련이 미국보다 한 발 앞서서 가가린 소령을 태운 유인 우주선을 발사했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이 우주에 나갔다 온 소감으로 "지구는 푸르다!"라고
한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는 공산당원답게 한 마디 덧 붙였다;
"우주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다!"
그러나 5개월 후 미국의 글렌 중령이 우주여행 뒤에 그 소감을 말한 것은
너무 대조가 되었다. "우주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였다!"
그렇다. 같은 우주를 보고 왔다. 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우주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고 했다.
한 사람은 영적인 눈이 멀었고, 다른 한 사람은 영적인 눈이 건강했다.
▲어린아이들에게 보는 눈이 열려 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8:2)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 인간의 존귀함을 보는 눈은 → 어린아이가 갖고 있다.
어른이 못하는 일을, 어린아이가 해 낼 때가 종종 있다. 다윗이 그랬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모두가 필요하다. 어른도, 어린아이도....
▲3.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 사람을 보는 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8:4)
여기서 “생각하시며”라는 말은 마음에 두신다는 뜻이고,
“권고하신다”는 말은 보살피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그 마음속에 특별히 두고 계시고,
찾아오셔서 보살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특별히 아름답고 존귀하다는 것이다.
▲임금의 성은을 입으니까 신분이 달라진다
TV 사극을 보면 여인들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상궁 나인(평민)이지만 임금이 총애하면 성은을 입었다하여 그 신분이 달라진다.
같은 후궁이라고 해도 임금의 총애를 누가 받느냐에 따라 신분과 지위가 달라진다.
그렇다. 우리의 위대함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본래 우리는 ‘아다마’ 곧 흙이었다. 정말 무가치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존재가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모두 죄인이었다.
정말 천하보다도 쓸모없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어 죄사함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귀한 존재들이 되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대하고 계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이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하겠다. 그 너머 “영광”을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보는 눈이,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하겠다.
천하보다 귀한 존재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눈이 되어야겠다.
▲인간의 존귀함을 보는 눈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8:5)
다윗은 저 대지와 저 하늘의 찬란한 아름다움 가운데서도
인간이 가장 빼어나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만들어 씌워주셨다>는 사실을 본 것이다.
그래서 정말 인간이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정말 아름답다.
아무리 꽃들이 아름답다고 해도 인간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
바로 다윗이 이런 인간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눈을 뜨고 있었다.
육체적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매우 존귀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테러분자들이 못 보는 눈
지구촌 테러 참사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테러분자들은 인간의 고귀함을 보는 눈이 멀어있다는 점이다.
반미 감정이 어떻고, 이슬람 원리주의가 어떻고 하더라도
인간의 아름다움, 인간 생명의 존엄에 눈이 멀었다면 그들은 그 자체로 잘못됐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한 인간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가치 있고, 더 아름답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눈을 본 받아야 하겠다.
한 인간 생명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
◐3. 말씀을 보는 눈이 열려야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 119:37)
Turn my eyes away from worthless things;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허탄한 것”과 “주의 도”(말씀)가 병행되어 있다.(영어를 보세요!)
허탄한 것을 보면, (성경을 읽어도) 말씀에 내가 붙잡히지 않게 된다는 것이요,
허탄한 것에서 내 눈을 멀리하면, 말씀에 내가 붙잡힌다(preserve, 보존된다).
*출처
'분류 없음 > 2006'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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