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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답형 인간 vs 원망성 인간

LNCK 2018. 11. 7. 14:26

 

◈보답형 인간 vs 원망성 인간              살전 3:9                 06.11.19 스크랩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살전 3:9

 


 

모든 사람은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보답형 인간’이 되든지

아니면 늘 불평하며 사는 ‘원망성 인간’이 된다. 둘 중 하나이다.

 

◑1. 바뀐 기도 제목

 

▲원래 기도 제목을 성도들과 나누다

교회에 오다 나오지 않는 성도들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립니다..

목장이 성장하여 배가 되고, 분가가 활발히 일어나도록 역사하여 주소서..

성가대, 30명 이상 세워 주시고, 오케스트라를 세워 주셔서

성가대와 함께 찬양을 올려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일 예배, 1부 2부로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더 좋은 예배당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벽에 20명 이상이 함께 모여 항상 기도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소서..

저희 교회가 생명력이 넘치는 선교하는 따뜻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귀한 분이, 위의 제 기도 제목에 대한 의견을 보내 주셨다.

 

목사님, 너무 쫓기지 마십시오..

성가대가 20명 안 되면 어떻습니까?

오케스트라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새벽기도회에 2~3명 있으면 어떻습니까?

 

주일 예배를 1부만 드리면 어떻습니까?

아니 한 5부까지 드리면 더 좋겠습니까?

더 크고 좋은 예배당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목사님은 여느 목사님들과 다르다고 생각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라겠습니다...

 

▲5일 후 바뀐 기도

그 분의 충고를 듣고, 회개하며 다시 드린 기도;

부족한 종.. 이 충고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회개합니다..

다시 한번 신앙의 바른 자리에 견고히 서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2. 행복의 비결...만족

 

컨글튼이라는 영국의 명망 높은 크리스천이 있었다.

하루는 집에 있다가,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으면서 한숨을 내쉬며

뭔가 중얼거리며 불평하는 소리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주인은 하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하녀를 부르자 하녀는 깜짝 놀랐다. 

“듣자하니 5파운드만 있었으면 더 소원이 없겠다,

그러면 더 바랄 것이 없이 행복하겠다고 푸념을 하던데 사실인가?”

 

그리고 주인은 하녀에게 5파운드를 거저 주었다.

물론 하녀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발하며 받아가지고 나갔다.

 

좀 있다가 주인이 산책하면서 보니 이 하녀가 마당을 쓸면서 또 불평을 한다.

“아이고 아까워라. 10파운드라고 할 걸 왜 5파운드라고 해가지고

5파운드밖에 못 받았나? 10파운드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또 불평을 하더란다.

 

만족이란 어디서 얻는 것인가?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만족함에 있는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만이 만족하고 행복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행복은 만족해하는 자의 것이다!

 

앤드류 매튜스 라는 사람은 좀 더 발전된 말을 한다.

‘행복의 비결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註1)

 

▲명언 만들기 대회의 당선작

D. L. 무디는, 노스필드 신학생들에게 재미있는 게임을 한번 했다.

5백 불을 현상금으로 내걸고, 격언 곧 명언 만들기 대회를 했다.

거기서 1등을 하고 5백 불을 탄 명언이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 장미를 가시에 넣었다고 불평하지 말고,

가시에 장미를 넣었다고 감사해야 한다.”

 

장미(축복)에는 가시가 있다. 장미에 가시가 있어서 불평할 것인가?

아니면 가시(고난) 속에 장미꽃을 주셔서 감사할 것인가?

 

 

◑3. 보답형 인간..

 

원망성 인간이 있다.

원망과 불평.. 그것이 자기 행동과 생활의 동기로 삼고 살아간다.

시기와 질투와 경쟁심.. 반드시 이기겠다, 누구를 이겨야겠다,

누구보다 앞서야 하겠다는 무서운 경쟁심, 이거 참 비참한 것이다.

 

딤후3:2절에 보면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말할 때

말세에 사람들은 감사치 아니하고 원망한다고 하였다.

말세의 징조가 이것이다. 사람 망가질 때 보면 꼭 그렇다.

원망과 한에 맺혀서 하는 일은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거기엔 창의력도 없고, 건강도 없고, 형통함도 있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남편 바람 핀다고 원망하고 그에게 저주를 퍼붓다가

부인이 홧병으로 먼저 죽는다. 그런 비슷한 사례가 많다.

 

보답형 인간이 있다

감사, 보답 지향적 삶을 산다.

‘이미 다 받았습니다. 받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벌써 다 받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분에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그러니 이제 남는 것이 무엇인가? 보답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을까?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이다.

 

▲거저 주라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권능을 주시고 말씀하시기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하셨다.

 

거저 주는 거 당연하다.

이제는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하지 마시라. 보상도 바라지 마시라.

거저 주는 삶을 사시라. 자녀들에게도 효도하라고 강요하지 마시라.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거 당연하지 않는가!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살전3:9

이것은 ‘수사적 의문문’이라고 하는데, 능히 보답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뜻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사랑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또한 사도 바울을 사모한다. 서로 보고 싶어 한다.

 

사도 바울은 지금 2차전도 여행 중에, 고난 중에 있다. 현실은 어렵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할 때 너무도 감사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보답할까?’ 고백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일 하는 사람만이 가지는 정체의식이 있다.

내게 돌아오는 게 있는 것이 아니다.

저들이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들을 때 내가 감사하다.

‘내가 뭔데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귀한 역사를 이루셨습니까?’

 

다른 욕망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다른 소원은 없다. 이것으로 만족한다.

‘어떻게 보답할까?’ 하는 마음뿐이다.

 

보답 없는 자에 대한 징계..

1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있는데 갚을 길이 없을 때 탕감해 주었다,

이 사람이 가다가 자기한테 1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결국 자기도 감옥에 다시 들어갔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원망성 인간에게 채울 수 있는 은혜는 없다.

그는 항상 원망하다가 원망에서 끝날 것이다.

 

보답형 인간에게 이제 욕망은 없다. 이미 다 채워졌다. 받은 바가 넘친다.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 ‘내가 어떻게 보답할꼬’ 한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남은 생을 살아가시기 바란다.

                <인터넷 설교 발췌, 편집 06.11.19. *원제목: 보답형 인간 (살전3:6-10절)

 

 

 

◑적당한 것이 좋다

 

육적인 꿈(욕심)은 적당해야 한다.

육적인 욕심은 가지면 가질수록 문제도 많고 상처도 많으며 아픔도 많다.

예수 믿는 사람의 육적 관리는 적당하면 된다.

 

잠언 30:8절에 있는 대로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적당하게 물질의 복을 주시고, 명예, 지식, 건강도 적당하면 된다.

 

한두 가지 병은 - 병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 조금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큰 병이 없으면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사는 것도 너무 오래 사는 것, 그런 욕심을 가지면 안 된다.

‘수즉다욕’ (壽則多辱 : 오래 살수록 욕심이 많아진다는 말) 이란 말이 있는데

이래 저래 너무 오래 사는 것도 욕이 된다.

 

적당할 때에 가는(죽는) 것도 축복이다.

하나님 앞에 무한히 살려고 하지 마시라. 곡식도 열매도 딸 때 따야 된다.

수박도 더 오래 두면 썩어버린다. 세상 무엇이든지 오래 두면 안 된다.

딸 때 따야 한다. 그냥 무진장으로 오래 있다고 좋은 게 결코 아니다.

 

이 세상은 이미 우리가 나그네의 길을 거쳐 가기 때문에

적당한 때 와서 적당하게 살다가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축복이다.

좋은 것 일수록 적당한 것이 좋다.

 

우리는 최고 좋은 집에서, 최고 미인하고, 최고로 부자로 살려고 하는데

정말 그게 지옥이다. 너무 최고인 거기엔 기쁨, 행복이 전혀 없기 쉽다.

적당한 사람 만나서, 적당한 집에서, 적당하게 사는 것이 축복인 줄로 믿는다.

남편도 너무 미남은 부인이 애먹는다.

적당한 사람 만나서 적당하게 살다가... 그 대신 예수님은 잘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는 늘 아쉬워하며 욕심을 내야 한다.

심령은 늘 가난해야 한다.

‘내가 기도를 이렇게 해서 되나? 내가 전도 이렇게 해서 되나?

성경을 나는 많이 못 읽는다. 교회를 내가 이렇게 섬겨서 되나? 라는

영적으로 늘 아쉽고 부족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카터 대통령 책에 보면 ‘나는 3달 동안 유세하면서 30만 명의 손을 잡았는데,

나는 10년 동안 전도를 140가정 밖에 못했구나.’라고 회개하는 글을 적었다.

정말 욕심내야 할 것을 욕심내셨다... 

<인터넷 설교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