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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안수하시매

LNCK 2019. 3. 19. 20:07

◈다시 안수하시매                 막8:22~26            06.08.06. 인터넷 설교 발췌 편집



◑1. 두 번 안수하신 이유


▲색다른 치유 방식

예수님이 벳세다 마을에서 소경을 고치신 사건은 (막 8:22~26)

다른 치유 사건과는 좀 색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막 8:23


왜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한적한 마을 밖으로 나가셨는가?

왜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하셨을까?


옛날 김익두 목사는 장터의 앉은뱅이를 안수기도해서 일으켜 세울 때,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그를 들쳐 엎고 데려가서 안수했다고 한다.

장터 한 가운데서 안수했는데, 만약에 그가 일어나지 않으면

거기 모인 사람들 앞에서 큰 망신당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예수님이 그런 이유로

인적이 드문 마을 밖으로 데려가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왜 예수님은 한 번 만에 못 고치시고, 두 번에 걸쳐 안수하셨는가?

대부분 예수님은 단 번에 안수하셔서 고치셨다.

그런데 여기서 두 단계에 걸쳐 소경을 고치신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막 8:24-25


왜 예수님은, 소경을 고쳐주신 후 그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나?

왜 소경에게 마을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고 하셨을까? 8:26


여기에는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본문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우리는 그 단서를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본문을 둘러싸고 있는 문맥과 정황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사건 직전 정황 : 떡 걱정

앞서 떡 7개와 물고기 2마리로 4천명을 먹이시고 7광주리 남았다. 8:8

이 기적 후에 배를 타고 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8:15 라고 하셨다.


이것은 당시 ‘종교, 정치지도자들의 위선을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누룩’이라는 말에 착안해서

자기들이 7광주나 남은 떡을 챙겨오지 않았음을 책망하시는 줄 알았다. 8:16


이런 한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8:17-18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깨달음의 문제라는 뜻이다.

속사포 같은 예수님의 책망에서, 그 답답하신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소경을 고치신 오늘 본문의 직전 정황은,

아직 제자들의 영적 상태가 떡이나 염려할 정도로 매우 미숙했다.


▲사건 직후 정황 : 십자가 이해 못함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들어가셨다.  8:27~

거기서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가 나온다.


이 장면은 예수님 공생애의 분기점(터닝 포인트)으로 불린다.

이 고백이후, 예수님은 비로소 십자가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8:31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개역에 ‘붙들고’로 번역했는데, 한 쪽 구석에 모시고 가서 took him aside

개역에 ‘간했다’라고 했는데, 원문으로는 심하게 비난했다. rebuke

‘예수님, 지금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는 식이었다. 8:32


그러자 예수님의 반응은, 한참 흥분한 베드로보다 한 술 더 떠 엄중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8:33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세주, 왕)로 고백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이 보기에 패배자, 실패자들이나 당하는

십자가를 지신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사탄을 패배시키고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이율배반적인, 정반대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건 전후 문맥과 정황을 볼 때,

마가가 ‘두 번 안수해서 소경을 고치는 사건’을 기록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인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잘 몰랐다.

아직도 이나 걱정하는, 완전한 제자가 아직 아니었다. 


베드로는 눈을 떴지만, 절반만 떠서 희미하게 보는 상태인 것이다.

하나는 알았지만, 둘은 몰랐다.


예수님의 첫 번 안수 때, 소경은 희미하게 반쯤만 눈을 떴다.

두 번째 안수 때, 소경은 비로소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다.


당시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공통적 문제는 영적인 미숙함이었다.

그 핵심은, 열심의 부족이 아니라, 영적 이해력의 부족이었다.


쉽게 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인줄 알았지만

예수의 십자가의 도는, 가르쳐주어도, 쉽게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누룩 조심해라!’ 하시면, ‘아차, 우리가 떡을 안 가져왔구나!’ 이해했다.

‘내가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겠다.’ 하시니까, 예수님을 꾸짖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줄 답을 알았지만, 그 내용의 이해는 부족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많은 성도들이 수년간 교회를 오래 다니지만, 영적 이해력이 부족하다.


예수님은 따르긴 한다. 그 분이 그리스도인줄 안다. 방향은 바로 잡았다.

소경처럼 눈을 뜨긴 했는데, 그러나 반쯤만 떴다. 완전히 뜨지 못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는...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에 대해서만 관심이 많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말씀에 대한, 십자가의 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없다보니까

교회봉사도 열심히 하지만,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피상적이며 건조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두 번째 안수하셨다. (②번 질문에 대한 답)

그래서 만물을 밝히 보게 만드셨다.

우리도 예수님께 다시 안수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리는 교회 나오면 평안을 얻고 위로를 받는다.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과 중심은 아니다.

그런데 현실은, 많은 분들이 그 수준에 만족하며 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렇게 만족하다 보니... 더 이상 성장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나신 줄 믿는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으시는 줄 믿는다.

진리에 대해 눈을 뜨신 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눈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셔야 한다.


내가 보기는 보아도, 아직 희미하게 본다는 사실이다.

막연하게 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 밝히 보기를 원해야 한다.


해답이 여기 있다.

한번 안수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주님의 안수를 재차 받아서... 진리를 더 밝히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희미하게 보던 것이  밝게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드러내지 않으신 이유 (서두 ①, ③번 질문에 대한 답)

왜 예수님은 마을 바깥에 한적한 곳에 가서 소경을 고치셨는가?

왜 예수님은, 소경을 고치신 후에 그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나?

왜 소경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8:26


예수님이 이 사건을 공개만 하시면,

당장 메시야로서 존경을 받으실 절호의 찬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과대 선전할 필요는 없지만, 과도히 입을 막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영적인 이해에 대해 진정한 갈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무슨 기적을 베풀어도

결국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만다는 것이다.


기적을 베풀면, 기적을 오해한다.

말씀을 전하면, 말씀을 오해한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다 보고도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믿는다.

이것이 일부로 사람들을 피하신 이유이다.


뭐든지 자기 좋을 대로 이해해 버리는 사람들!

(사실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이다.)

그런데 나아가 그들은, 그것이 맞다고 스스로 맹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조용히, 한적한 곳에서’ 기적을 행하셨다.

진정한 영적 갈망이 없는 이들을,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피하셨던 것이다.


(그 외 일반적인 이유를 찾는다면, 예수님의 원래 목적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심 이셨다.

기적 보여줌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기적이 도리어 십자가의 길 이해에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2. 한국교회 약화의 원인 : 눈을 반만 떴음


왜 사람들은 교회에 수 년 동안 오래 다니지만, 신앙적, 인격적 성숙이 더딜까?

그것이 → 개교회의 약화를 초래하고

그 약화가 곧 → 오늘날 한국 교회 침체의 내적 원인이 되고 있다. 


문제의 근본 원인이 더딘 신앙적, 인격적 성숙에 있다고 볼 때

과연 그 원인은 또한 무엇인가?

‘교회가 섣부른 평안과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라고 어떤 분이 지적했다.


교회 나오기만 하면, 너무 일찍, 그리고 반복적으로,

무조건 ‘당신은 평안하고 잘 될 것입니다!’ 라는 덕스러운 격려가

성도에게 지나친 만족을 주어서

그 사람이 더 이상 성숙한 신앙인으로 만들지 못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실 교회를 다니면서

심리적 평안과 물질적 축복을 바란다.(소위 가내안전, 사업번창)


그런데 교회가 이런 필요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다 보면

진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보다는

신자의 주관적 만족이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 결과, 성경적 성숙에 대한 열망이 전반적으로 교회 안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자기는 스스로의 신앙기준(심리적 평안, 물질적 축복)을 정해놓고

거기에 대체로 만족하며 교회에 다니는데,

그것이 객관적, 성경적 기준으로 보면 실격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지난 10년간 교회 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그것이 한국교회의 성장을 약화시키는 내부적 요인이 되었다는 지적이다.


 

 

그런 주관적 내 만족이 아니라

 

성경적, 객관적 만족의 수준(십자가의 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절반쯤 뜬 눈을, 소경처럼 재차 안수를 받아서, 완전히 떠야 한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 ♪  (찬송가 485)


 

♣현세주의, 기복주의가 어느 정도 우리 삶에 필요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항상 그것들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항상 ‘십자가의 도’에 정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에 치우칠 때, 어느새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잃게 된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막 8:17-18


<06.08.06. 인터넷 설교 발췌 편집  *원제목 : 다시 안수하시매 (막 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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