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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받은 사람만

LNCK 2019. 6. 29. 20:34

◈소명 받은 사람만                 2011.10.27.출처                        <부르심, 소명> 관련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얼마 있다가 신학교를 가는 것이 정석입니다.

왜냐하면 전도사 혹은 목사라는 신분을 갖지 않으면 목회를 맡겨주지 않기 때문에

사역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 최영기 목사는 예전부터 신학교 가겠다는 사람을 말리는 목회자로 알려졌습니다.

이유는 그의 소명이 분명치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신학교 입학을 위한 추천서를 써달라는 사람에게

저는 왜 목회자가 되려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흔히 듣는 대답이,

“저는 더 이상 직장 생활에 재미를 못 느끼겠습니다.”

“저는 주의 일을 할 때가 가장 기쁩니다.”

 

이런 대답을 들으면 저는 보통 추천서 써주는 것을 거절합니다.

신학교에 가는 것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되는 것이지

자신의 보람과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자기에게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교회 사역에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진정한 소명은 자신에게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명은 신비한 방법으로도 올 수도 있겠지만

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서 '목회자의 소명'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하나님의 필요가 자기 눈앞에 보이는가?

     예를 들면, 영혼 구원의 필요성, 구령의 열정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두운 세상에 복음의 빛, 말씀의 빛을 꼭 비추어야 되겠다는.. 강력한 비통함입니다.

(2) 그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있는가?

     그냥 그 필요를 채우겠다..가 아니라, 그것이 아주 절실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3) 그 하나님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은사를 자기가 갖고 있는가?

     소명 받은 자에게, 거기에 필요한 은사를 주시니까요!

 

소명의 시작은 나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에서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사역이 눈에 뜨이고,

이 가고 싶어 하지 않은 곳이 가고 싶어진다면

소명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곳에서,

남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을 할 계획이라면,

진정으로 소명을 받았는지

좀 더 자신과 씨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명은 삶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선교사로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단기 선교도 가보고,

중장기로 선교지에 머물며 소명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로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목자가 되어서 목장을 섬기면서

자신이 영혼 구원과 제자를 만드는 데

자질과 은사가 있는지를 검증해 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평신도의 자리(소명)도 귀중한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그 자리를 지키기를 원하는데

그 자리를 버리고 소명 없이 목회자가 된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중으로 손해입니다.


귀중한 평신도 사역자 하나 잃으니 손해이고,

소명 없는 목회자 하나 생기니 손해입니다.

 

목회자의 소명을 받은 사람만이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의 소명을 받은 사람만이 선교사가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더 힘차게 뻗어나가리라 생각합니다.


...........................


◑소명   (위와 다른 측면의 글)


처음에는 소명이 비록 불확실하더라도, 그것은 정화과정을 거친 후에 견고해 진다.

그러므로 소명이 처음부터 너무 뜨겁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니

길고 긴 연단의 과정을 기다리며 인내하라는 주제의 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요15:16


돌아보니 제 소명 역시 갑작스런 부르심이었고,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따라나선 전형적인 케이스였습니다.

깊이 있는 심사숙고와 고뇌 끝에 내려진 결정이기보다

분위기에 이끌려, 공연한 객기에 시작하게 된,

동기가 너무나도 어색하고 결핍이 많았던 소명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소명의 동기가 정화되기 까지 죽을 고생을 해왔고,

지금도 고생이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이 문제는 저뿐만 봉헌된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직자께서도

자신의 소명이 순전히 어머니의 의도에 따라 시작된 길이었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훌륭한 성직자는 소명의 동기가

다분히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였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다행히 살아가면서 그분들은 자기중심적인 소명의 동기,

결핍된 선택의 동기들이 나름대로의 ‘정화과정’을 겪으면서,

고통스러운 자기 극복의 기나긴 과정을 체험하면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자신에게 부여하면서

참된 주님의 제자로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하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