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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배

LNCK 2019. 11. 5. 09:57

참된 예배              시132:7                출처         
1997 OMC 주제강의 3 

하용조 목사 목회자 세미나 총10강 중 3강

www.youtube.com/watch?v=ZW1rwiB7C8I&feature=youtu.be

www.youtube.com/watch?v=0Z6DOvikQtA

우리는 예배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목사님들의 설교가 다 믿는 자들을 위한 설교입니다.

우리들의 언어가 얼마나 굳어져 있고 얼마나 전통적이고 얼마나 형식적인가를 

우리는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즉각 그런 것들을 느끼게 되지요.

 

전혀 모르는 소리,모르는 설교, 자장가처럼 들리는 설교, 결국 졸 수 밖에 없는 설교,

가 언제 일어나야 되는지, 언제 앉아야 되는지를 모르는 예배... 우리는 익숙합니다.

 

그러나 처음 온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불안한 겁니다.

주기도문을 외우고 사도신경을 외우면 바라밀다심경을 외우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겁니다.

이게 주문인지, 이걸 해야 되는지 안 해야 되는지.

안하기 때문에 생기는 어색함, 두려움, 부끄러움... 이런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또 대부분의 예수 잘 믿는 많은 사람들이 주기도문을 하거나 사도신경을 외울 때,

정말 그 뜻을 깊이 생각하고 하느냐는 거지요.

대개의 경우 다 그냥 습관처럼 암송하게 되는데,

거기에 무슨 깊은 눈물이 있거나 감동이 있느냐 하는 것이죠.

 

여러분 성가대의 특징은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이 없이 부르는 찬양, 그것이 어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저 목소리로, 화음으로 드리는 찬양이 어찌 하나님께 광이 되겠습니까?

 

성가대가 찬양을 하다가 너무 감격해서 찬양을 못 부릅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종종 교회에서 경험합니다.

 

챔버, 첼로를 하다가 너무 그 찬양에 빠져서 연주하는 것을 포기하고 활을 들고(경배) 손을 듭니다.

첼로 안하면 어때요? 화음이 조금 틀리면 어때요? 호흡이 조금 안 맞으면 어때요?

성령이 임하면, 기름 부으심. 통곡을 하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흘리다가 찬송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진짜 찬양입니까? 우리들은 너무나 장식품이 많습니다.

가운을 입는다든지, 치장을 한다든지, 그래서 정말 예배를 드린다고 하긴 하는데

진정한 예배가 과연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심장이 잘 뛰면 그 피가 모세 혈관까지 쭉쭉 들어갑니다.

 

세포들이 아무리 죽었다 하더라도 피가 잘 공급되면

그 세포는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장거리를 뛴다 할지라도 심장이 튼튼하면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움직일수록,뛸수록 생기가 돌고 숨차고 힘들지만 더 기쁘더 좋고 더 신나는 법이죠.

 

그것이 예배입니다. 정말 예배가 드려지면 교회는 비 맞은 잎사귀들처럼 파릇하게,

생기 있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살아나는 것이지요. 이것이 예배입니다.

 

교회 본질은 거룩과 순결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높으신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려 그 분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죠.

 

예배를 제일 드리기 어려운 분 중 한 분이 바로 목사님 들입니다.

목사님들은 설교자로 있기가 쉽습니다. 사회자로 있기가 쉬운 것이지요.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께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고 예배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목사님들은 예배를 인도하는 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순서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찬송가를 부르는데, 진짜 예배 안에 들어가신 분은 찬송가가 몇 절 부르는지 잘 몰라야 합니다.

그런데 5절짜리 찬송가를 부르면 누가 이런 찬송가를 골랐냐고 야단을 합니다.

 

예배는, 설교는 30분 해야 된다고 누가 정했습니까? 25분 해야 한다고 누가 말을 했습니까?  

예배는 한 시간 안에 드려야 된다고 누가 말을 했습니까?  사람들은 예배를 해치우는 겁니다.

 

예배를 정말 ‘드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변화가 나타납니다.

모세가 산에 가서 하나님을 보고 내려왔을 때, 그 얼굴에 광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변화도, 빛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예배의 현실입니다.

예배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개혁되어야합니다.

지금 같은 형태에 드리예배 가지고서는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교회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배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특징은 주일 예배가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위기는 예배가 형식적이고 굳어져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사람이 그 형식을 만들었을 뿐이지 결코 예배가 형식 안에 갇혀질 수가 없습니다.

 

이 예배는 단순한 것입니다.솔직한 것입니다. 그 분에게 드리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

형식이 필요할 때 형식이 있을 뿐입니다. 형식이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어느 도시에 설교하러 간 일이 있었는데

꽤 오래되고 사람들이 적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저는 제가 설교를 했지만 그 예배를 드리고 나서 마음이 평안치가 않았습니다.

왜냐면 예배가 죽어있었기 때문에. 성가대원들도 교인들도 모든 분들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설교하기가 참 힘이 들었습니다.

 

어떤 교회를 가면 설교가 참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를 가면 설교가 잘 안 되고 긴장이 됩니다.

그 교회가 그런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 날 설교를 마치고 오후에 어떤 분에게 초대를 받았는데

제가 잘 아는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나이가 60이 넘으신 부인이신데,

그 분은 주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정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렇게 선교지에 물건을 보내고 돈을 보내고 기도를 해주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분에게서 초대를 받은 겁니다. 오늘 저녁에 자신의 집에서 모임이 있으니까

와서 말씀 좀 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힘들고 피곤했지만 그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갔더니 그 집 주변에 차가 많이 있었습니다.

같은 의사들 중심으로 모이는 그런 모임인데 가서 보니

삼, 사십명이 카페트에 형식 없이 깔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찬양을 하고 있었고 그 날은 OMF 선교사님이 오셔서 간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 마음에 소리 지르는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예배다! 이게 예배다!’

 

거긴 목사도 없고 교회도 없고 오직 주님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러 교파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아! 이게 바로 교회다!’

 

그들에게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날 밤 즉시 헌금을 해서 기도요청 한 사람들에게 이 헌금을 보내자고 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에 건물이 있고

성가대가 있고 목사가 있고 예배 순서가 있는 곳에서 저는 예배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제가 설교했지만 교회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몇 사람들이, 교회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 믿는 게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헌금해서

가난한 자 돕고 선교사를 도우며 이루는 공동체 내에는 예수가 있더라구요.

 

목사인 제가 갈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래도 전통적인 교단에 있는 목사고 목회자인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되나?’

 

여러분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정말 살아있습니까? 주님이 거기 계십니까?

예배드릴 때마다 한 시간, 어떤 때는 두 시간, 세 시간 그런 예배를 드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배를 드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찬양하고 고백하고 회개하는,

그런 경험을 해 본 일이 있습니까?

 

저는 온누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키는 예배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의 온 애정, 생각, 관심,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것이 이 예배입니다.

 

우리 예배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저입니다. 담임 목사가 이런 말해서 미안합니다만

제가 드리는 우리 예배를 참 인조이합니다. 사실인 걸 어떡합니까?

 

여러분의 예배가 여러분을 미치게 해야 합니다.

예배 가운데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배 드리다가 귀신이 나가고

예배 드리다가 기적이 일어나고 회개가 일어나고

용기를 얻고 사람이 회복이 되고 거듭나고 소리를 지르고...

이러한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특별히 예배는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목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주일에 드리는 소위 대예배가 아주 심각합니다.

이 예배가 살면 다 삽니다.

 

은사가 교회에 많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병 고치는 은사,예언하는 은사...

은사가 나타나면 교회가 시끄럽기 시작합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배우게 된 것이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있으면, 예배가 정말 드려지면

은사가 아무리 나타나도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 훈련이 아무리 좋아도 예배가 살아있지 않으면 오래 못 갑니다.

구제, 선교가 아무리 좋아도 주일 날 드리는 예배에서부터 흘러넘치는 것이 아니면

오래 못 가는 것을 제가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 부흥의 길은 예배에 있더라구요.

성도들이 일주일동안 각자 자신의 처소에서 자신의 상황에서 살다가

주일에 다 교회에 모이게 됩니다.
모여서 마당을 밟을 때부터 눈물을 흘리고

교회에 뛰어오면서 찬송을 부르고 이렇게 해서 모여진 성도들이

손을 들고 찬양을 하고 설교 듣기 전에 은혜는 이미 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설교를 듣기 전에 교회 왔다는 사실, 하나님 앞에 왔다는 사실,

그렇게 세상에서 피투성이 나도록 투쟁하고 싸우고 고생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이 교회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런 것들이 주일 예배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나는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목회자로서 주일 예배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갖게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교회의 예배가 죽어 있다면 분명히 장애물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를 죽게 하는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저희 교회의 경우에는 주일에 대예배 대표기도를 장로님만 하시지 않습니다.

안수 집사님까지 다 하십니다.

장로님만 대표기도하는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교인들이 장로님의 기도를 다 외우고 있다는 겁니다.

 

그 장로님 나타나면, 한 마디 하면 그 다음 말을 교인들이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냐하면 똑같은 기도를 똑같은 톤으로 계속하기 때문에. 그래서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거기서부터 예배는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동감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우리 집사님들이 예배 시간에 기도를 합니다.

3부 예배 가장 중요한 때, 젊은 집사가 나와서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럼 그 집사는 어떻게 할까요? 자기 기도 순서 되면 한 달동안 새벽 기도 나옵니다.

너무 급해서. 우리는 기도를 손으로 꼭 쓰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외우지 왜 쓰냐고 합니다. 하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기도를 쓰라고 하면, 한 번에 쓰지 않습니다.

쓰고 찢고, 쓰고 찢고, 또 써보고 또 찢고 그러면서

회개가 되고 그러면서 기도원으로 들어가더라구요.

 

그리고 그분들이 그렇게 해서 기도할 때마다 성도들이 감동하기 시작합니다.

간증이 있고 고백이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작은 예를 드렸지만 그렇게 기도를 모든 안수 집사님이 돌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저희 교회 특징 중에 하나는 기도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살리게 하는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찬양도 그렇습니다. 온누리 교회가 손들고 찬양하는데 칠 년 걸렸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손 들라고 하면, 특별히 장로교는 손을 쭉쭉 뻗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자유롭게 손드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엎드려

그 분께 나아가는 이런 예배하는 이런 영적 태도를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배는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드는 예배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살아있는 주일 예배를 회복하기 위하여 5가지 정도를 제안하고 싶은 것입니다.

 

1) 첫째는, 주일 예배가 살아 있으려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합니다.

따라서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를 위하여 기도하셔야합니다.

 

대개 교회가 성가대 예배를 위해서 얼마나 지휘자를 모시고 성가대원을 훈련시키고

예산을 드려 주일에 찬양을 합니까? 저희는 묵도송부터 모든 성도가 함께 찬양을 합니다.

기도송도 같이 합니다. 그리고 헌금송 뿐만 아니라 축도송도 같이 합니다.

온 성도가 같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 의자는 저 밑으로 내려가야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큰 강대상에 포도송이가 달린 의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거기에 있어야 합니까? 여러분! 목사도 예배자입니다. 사회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설교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목사가 사회 드리고 있으면 교인은 예배 안 드리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데요.

목사님이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교인들이 예배를 드립니다.

눈을 감고 손을 들고 예배 속에 순식 간에 빠지면 교인들이 다같이 빠지는 겁니다.

 

제가 왜 저 자리에 앉아 있느냐? 간단합니다.

나도 예배자이니까. 설교할 때만 올라 옵니다. 사회자도 저기 앉아 있습니다.

사회자가 아니라 우리는 예배자라는 것입니다.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사람이 여기 무대에 나타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예배의 키는 성령님의 임재입니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순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순서가 하나면 어떻습니까?

 

저는 우리교회 예배 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중보 기도를 잘하시는 분이 한 번 저희 교회에 오셨습니다.

예배 5분전에 제 방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보고 얘기를 해보니까 그 분이 기도하시는 분이더라구요.

 

예배가 시작 되었습니다.

제가 그 분을 소개했습니다.

그 때 성령님께서 제 마음에 그런 동기를 주셨습니다.

‘이 분에게 기도하게 하라.’ 그래서 그랬죠.

 

기도 받고 싶은 사람은 나오라고.

주일 날 대 예배 때입니다.

교인들이 기도 받으라고 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줄 쫙 서잖아요.

 

그 날 설교 포기했습니다. 그렇다고 예배가 안 됐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예배 끝날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너무 예배를 형식과 고정 관념 속에

가둬두고 있어서 하나님을 내 예배 안에 제한을 시키는 겁니다.

 

제가 예배에 대한 쇼크를 먹은 것은 영국에 가서였습니다.

전통적인 한국 교회에 아주 익숙하던 제가 영국에 가서 언어를 배우고 교회에 참여하고

또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보고서

‘와! 우리하고 참 다르다! 참 다르다!’라고 느꼈습니다.

 

그 당시가 1980년대이니까 워십송을 그 때 처음 듣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손을 들고 눈을 감고 찬양하며 ‘all day church!', 마이클 그리닉이 하는 교회에 가서 보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100년이 넘은 교회인데 파이프 올겐이 있지만 한가운데 드럼 세트가 있고

백발이 있는 노인이 드럼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파이프 오르간은 포기를 하고 쓰지 않더라구요.

드럼이 있고 신디사이저가 있고. 그리고 사람들이 너무나 자유로웠습니다.

그냥 예배 도중에도 마음대로 일어나 손을 들고 찬양하는데 저는 어디 천국에 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그런 경험을 한번도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요.

우리는 “다같이 묵도합시다”가 아니면 예배가 아닌데,

 

제가 또 영국 가서 놀란 것은 우리는 목사만 축도하지 않습니까?

전도사도 못하잖아요.

그런데 교인들끼리 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축도를 딱 두 사람이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그대에게 있을지어다.”하고 하는 것이어었습니다. 이단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보았지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목사만 해라’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든지 읽을 수 있는 성경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문화 속에서는 목회자만 축도권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역시 익숙했던 저에게는 그 모든 예배들이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존 스토트 목사님의 교회에 가서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워십댄스를 보았습니다.

 

아니 여자들이 말이죠, 옷을 이상하게 입고 나와서 춤을 추는데 우리 눈에는 익숙하지 않으니까

‘저래도 되나? 춤이라는 것은 저 밖에서 춰야지 교회에서 춤을 추면 되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것이 워십댄스더라구요. 80년대에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정말 자유 안에서 아름답게 예배 드리는 그 자유함, 그 거룩함,

 

그런 것들을 번도 접해보지 못하고  “다같이 묵도합시다”부터 시작하는 예배를 드렸왔던 저에게는

그 모든 것이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또 저에게 굉장히 충격을 주었던 사건 중에 하나는 성만찬이었습니다.

제가 남쪽으로 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교회에 한 곳 들렀는데,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먼저 성만찬을 나누고 교인들은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한 대 여섯명, 열 명 정도의 기도자들이 서로 포옹을 하고 축복을 하고

목사와 함께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며 그렇게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 나서

그 다음에 그 지도자들이 떡을 가지고 나가더라구요. 찬송을 부르며

 

그것을 보다가 갑자기 성령이 제게 강하게 임하셔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어떻게 눈물을 참습니까?

저는 성만찬을 하면서 그렇게 울어본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속에 보혈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떡을 묵상하는데

그렇게 회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제 마음에 영감이 흐를 수 가 없었습니다.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리고 ‘아! 내가 한국에 돌아가서 교회를 하면 이런 교회를 해야지!

이런 성만찬을 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짐 그래함 목사님이 계신 교회에서는

그냥 머리가 하얗게 된 50대, 60대가 되는 할머니들이 제일 앞에서 탬버린을 치고 박수를 치면서

천장이 떠나가도록 찬송을 하고 기쁨이 충만하고 예배 도중에 막 귀신들이 나가고...

‘아! 이게 예배구나! 이게 예배구나!’

 

저는 WEC 앞에 있으면서 1년동안 그 교회를 계속 다녔습니다.

그런 그 예배들이 지금 우리가 드리는 경배와 찬양을 하게 된 하나의 영적 베이스라고 할까요?

그라운드가 된 것이지요.

 

우리 하용인 선교사님 부부는 영국에 처음 가셔서

둘이 테임즈 강에서 그냥 찬양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를 들고서 워십송을 쭉 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참 노래가 좋다는 것이죠. 그 노래 좀 가르쳐달라고. 그리고 전도를 합니다.

 

여러분 그게 예배더라구요. 저는 여기서 예배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예배가 무언인가?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왜 제한되고 있는가? 

예배드리는 방법은 무한하고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다양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모았습니다.영국에서는 부흥하는 것은 하우스 처치 뿐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건물을 거부합니다.

집에서 촛불 켜놓고 십자가를 놓고.. 그런 하우스 처치들이 번식합니다.

 

영국 교회성장의 이유는 바로 이 하우스 처치 때문입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고 사모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일에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라! 아까 얘기하다가 말았습니다만

성가대가 성가대원도 있고 예산도 있습니다.

예배하나 드리기 위해서.그런데 예배를 위해서 준비하는 준비기도팀은 없구나...

 

그래서 요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가대원이 우리 같은 경우에는 한 성가대에 80명정도 오는데

80명 정도가 주일 날 일부 예배 드릴 때 저 밑에서 80명이 중보 기도해야겠다’

 

여기 와서 성가대 하는 사람은 있는데

그 예배를 위해서 중보기도 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예배가 아니겠느냐?

 

래서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 1부 예배를 위하여 중보 기도할 사람 모이십시오!’

성가대같이 80명이 1시간동안 예배드리는 동안 저 밑에서는

한 시간 동안 예배 순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찬송을 위해 기도하고

설교를 위해 기도하고 짚어 가면서 밑에서 중보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배가 살아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차라리 성가대는 없어도 예배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사람이

한 시간 똑같이 그 예배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겠느냐...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면, 이 복음주의 학생 단체에서 하고 있는 <선교한국>.

제가 한번은 강사로 갔는데 가기 전에 저를 어디로 데리고 가더라구요.

중보기도팀이 따로 있습니다. 제가 설교하기 전에 저를 거기다 세워놓고

젊은 학생들이 다 제 몸에 손을 대고 중보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시간, 시간마다 그 진행되는 순간순간마다

이 중보기도 팀들은 계속해서 그 예배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더라구요.

설교자를 위해서 똑같이 기도를 하고 기도자를 위해서 똑같이 기도를 하고 찬양할 때

기도하고 간증할 때 기도하고 계속해서 한 쪽에서 기도가 일어나고 있더라구요.

 

저는 여러분의 교회도 한 번 시도를 해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교회가 변할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사모하라. 그것이 예배다.

설교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찬양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기도하는 자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는,

성령이 운행하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만져주는 그런 예배....

 

여러분, 이런 예배는 목회자 자신이 먼저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 비전과 환상을 가지고 계속해서 예배드리고 설교하면서 ‘성령님 임하여 주십시오.

기름부어 주십시오. 인쳐 주십시오.’

 

그리고 누군가 예배를 위하여 중보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오늘 상처받은 사람들, 병든 영혼들, 좌절한 영혼들에게

오늘 임재하여 주셔서 저들을 말씀으로 찬양으로 기도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설교가 아주 중요합니다. 요즘은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모든 설교가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고 살아있는,

생동감 있는 그런 설교가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장가처럼 들리는 설교, 현실과 아무 상관없는 설교, 뜬구름 잡는 설교,

 

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제가 여러 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받은 인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개 교회 하는 설교들이 대부분 “이 교회 떠나지 말고 예수 잘 믿으라”는 이야기 입니다.

 

결론은 가만 들어보면 두 가지더라구요.

헌금 많이 하고 이 교회 떠나지 말라는 것.

좋은 소리 많이 하고 결론이 그것입니다.

 

“당신은 세상에 나가시오. 세상을 변화시키십시오.”,

“그리스도인답게 사십시오. 손해 보고 희생하고 병들고 고통을 겪더라도 그렇게 사십시오. 나가십시오.”

이렇게 설교를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살아있는 예배를 위해서는 제물이 있어야합니다.

향기 나는 제물이 있어야합니다. 제물이 있을 때 향기가 넙칩니다.

옥합은, 옥합의 기름은 옥합 속에 있을 때에는 향기가 나가지 않는 법입니다.

 

옥합이 열려지고 뚜껑이 열려지고 깨어지고 그 옥합이 부어질 때에 향기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배란, 진정한 예배란, 자기가 깨어질 때, 헌신 될 때, 제물이 드려질 때 진정 드려지는 것입니다.

제물이 없는 제사 없죠.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제물, 번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이 말이죠,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그렇게 말하시고 다 끝났다면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공허할까요?

 

그러나 하나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실 때, “I forgive you! 내가 너를 용서한다”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들을 죽여서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셨어요.

 

여러분, 우리의 예배에 향기가 나지 않는 것은 헌신과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치고 고민하고

상처받고 고난당한 영혼만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자격이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형제를 이를 악물고 “하나님!내가 저 사람을 용서하게 해 주십시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 온 사람,이런 사람이 드리는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가 되는 것이죠.

 

골프장 갔다 온 예배, 잘 잡수시고 잘 놀고 모든 것이 다 완벽한 상태에서 와서 드리는 예배,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하겠습니까?

예배란 하나의 사치품이죠. 교회 안가면 교통사고 날 것 같으니까,

교회 안가면 뭔가 씁쓸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부부 싸움하기 싫어서 교회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드리는 예배에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여러분 진짜 드려지는 예배는 향기가 납니다. 옥합이 깨뜨려져야 합니다.
드려져야, 희생해야 합니다. 손해 볼 일이 있어야 합니다.

고통의 눈물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영광이 있습니다.

고통을 겪은 자만이 하늘로부터 위로가 있는 겁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은 왜 위로를 못 받느냐? 애통이 없기 때문에, 왜 참된 예배가 안 이루어지느냐?

재물이 없기 때문에,산 제물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는 찬양으로 가득 찬 예배입니다. 교회는 찬양 공동체입니다.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꿇고, 그 분을 향하여 찬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예배자입니다.

왜 예배가 없느냐?그것은 예배자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배 프로그램은 있는데 예배자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가대원들이 예배자입니까? 여러분! 목사님들이 예배자이십니까?

기도하는 분이 정말 예배자이십니까? 예배자가 있으면 예배가 있습니다. Worshiper!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목사를 찾으신다 그런 말고 없구요, 장로를 찾느냐 그런 말도 없습니다.

집사를 찾는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건 직분일 뿐이지요, 펑션 fuction일 뿐입니다.

 

여러분, 목사로 나오지 마십시오. 장로로 오지 마시고 집사로도 오지 마십시오.

예배자로 오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우리는 모두 ‘Worshiper’입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진정한 사역자입니다. 왜 우리의 사역이 힘들고 피곤한가?

사역이 나빠서가 아니라 예배가 없어서 입니다.

 

예배가 있으면 사역은 하면 할수록 힘이 나고 신이 나는 것입니다.사역은 밥과 같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더라.” 예배자였습니다.

 

예배자가 있는 곳은 예배가 있습니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 예배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말씀이 있는 곳에 진정한 예배가 있습니다.

향기나는 제물이 있는 곳에 예배가 있습니다.

 

찬양으로 가득한 곳에 예배가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만 교회에 분명히 확인하고 수고하고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의 예배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50년된 교회는 주보 하나 못 바꿉니다. 그걸 바꾸려면  난리가 납니다.

주보 색깔 하나 못 바꾼다는 것이죠. 예배형식 하나 못 바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예배 안에 형식 안에 들어가 앉아 계시지 않으면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예배입니다.

 

여러분, 전통적인 예배는 90년대 이전에는 그게 통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하고 맞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가 왜 어려운 줄 아십니까? 우리 목회 스타일이5공, 6공 스타일입니다.

목회자의 목에 힘을 주는 권위 있는 그런 목회들. 그것이 민주화되기 전에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한 목사님들은 계속 고생할 것입니다. 목에다 힘주고 holy voice하시고...

아니 이상한 것 중에  하나가 여기서 말할 때하고 여기서 말할 때하고 사람이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나 거기서 말하나 똑같이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제가 연예인 교회를 할 때 연예인들이 제일 시험 받는 것이 바로 그 holy voice 였습니다.

갑자기 강단만 오면 ‘에~~’ 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그 연예인들이 왜 시험받는 줄 아십니까?

연예인들은 목소리 위장하는 것이 자기 전공, 직업입니다.

그러면서 “저것은 가짜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쓰십시오. 그것이 거룩하게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거기서 목쉬었으면 여기서도 목쉬십시오. 있는 그대로를 주십시오.

내가, 내 목소리가 위대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여주면 됩니다.

내가 높아지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낮아져야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가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대신하지 마십시오. 낮아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위대해지십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위대하게 보게 하십니다.

그 분을 찬양하게 하십시오.

 

지금까지 전통적인 교회 모델에서 보여 주었던 상징적인 마크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십자가, 종탑, 장의자, 성가대, 까운, 목사 까운, 스테인 글라스, 대리석, 파이프 오르겐...

 

영국을 보십시오.다 박물관에 가 있습니다. 그 시대에 좋았다는 것이지요.

지금 시대는 또 다른 문화권을 가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문화는 변해야 합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문화를 변하시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복음이 변합니다. 그것이 더 위험한 겁니다.

그 시대, 시대에 맞게 변신을 해야 합니다.

 

신촌 지역에 가면 재밌는 분들이 있습니다. 까만 고무신 신고 까만 옷 입고

머리 쪽 죄고 그런 예수 잘 믿는 그룹이 한 이삼백명 있습니다.

제가 그 교회도 가봤는데 그 사람들이 정말 예수 잘 믿습니다.

이단이 아니라 정말 잘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 일제 시대 때 고난 받았던 그 모습들을

예수 잘 믿는 상징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현대인들은 그 사람들을 보면 ‘뭐할까?’하고 구경을 합니다.

감동하지 않고 구경합니다.

 

오늘 날,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구경꾼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박물관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요즘 이 신세대 문화니,현대 문화니, 세속 문화가 다 나쁘니까,

비디오가 다 나쁘니까, 그저 반대를 합니다. 반문화가 됩니다.

 

그러나 문화를 반대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안 따라가는 것은 좋습니다. 하

지만 대안이 있어야죠. 사람은 문화를, 문화로 호흡하지 않으면 못 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문화를 반대하는 이것이 우리의 역할이 아니라

문화를,그리스도의 문화를 만들고 창조하는데 우리의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맞게, 교회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헨델의 메시야는 교회만 와서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다 교회에 왔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교회 아니고도 헨델의 메시야를 들을 곳이 많다는 것이죠. 그걸 아셔야 합니다.

요즘 부흥회 안됩니다.왜 안되는 줄 아십니까? 테잎이 많이 돌아다니니까.

카세트 테이프 시대가 되었거든요. 지금은 미국, 한국 따로 없습니다.

좋은 설교는 다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그런 것이 없던 시절에는 사람 얼굴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대적 변화에 대해서 여러분이 센스가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내가 드리는 예배가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 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겠는가? 현재 예배 순서는 잘되고 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가지 관점에서 말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가?

-생명력 있는 설교는 설교있는가?

-여러분들에게는 향기가 있는가? 다시 말하면 헌신과 희생과 제물이 있는 예배가 있는가?

-정말 우리의 예배는 찬양이 있는가?

저희 교회는, 주기도문도 사도신경도 없습니다. 저도 사도신경을 다 믿지요.우선 성경에 없습니다.

뭐 그 이유는 아닙니다만, 우리는 사도신경을 장례식 때나 신년에, 일년에 중요한 때 몇 번 합니다.

그리고 진실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것도 반복적으로 계속하다 보면 염불이 되어 버립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모독할 수도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얼마나 좋은 기도입니까? 하나하나 씹으면서 신앙 고백하면서 드려지는

주기도문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의미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많이 안 해도 좋으니까 한 순서, 한 순서, 한 찬양, 한 찬양, 한 기도의 고백이

거기에 눈물이 있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이런 예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의미를 찾고 개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익숙해집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익숙해지면 위기입니다.

기독교가 익숙해서 믿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내가 드리는 예배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렇게 안 드리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지 않아서 불안한 게 아니라 순서가 틀리기 때문에 불안한 겁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예배, 셩령이 기름 붓는 예배, 이걸 항상 생각하십시오.

어떤 형태의 예배, 방법은 여러분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제가 지금 우리 교회는 성가대 가운을 벗기고 있는 중입니다.

성가대는 가운 입는다는 게 공식입니다. 하지만 입을 수도 있고 안 입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가운을 입을 수도 있고 안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보통 입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게 나니까....나는 매일 가운 입고 돌아다니지 않거든요.

그냥 입는 그대로 보여줄 거예요.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말씀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그 속에 나오는 말씀,삶을 통해 나오는 말씀. 예배는 삶이라는 것이죠.

 

화장실 가는 것도 예배고, 주차 안내 하는 것도 예배라는 것이죠.

제가 여기 오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왔거든요, 화장실을 가려고 하니까

우리 집사님이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더라구요.

 

그 분은 이번에 교회를 디자인한 최고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신데,

그분이 화장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삶으로 드리는 예배,그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스물 네시간 예배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죠.

이것이 에녹이 하나님과 삼백년동안 동행했던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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