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려야 할 천국 마5:43-48 출처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날 신자의 목표가 다소 낮은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과 거듭남이 중요하지만, 여기에 머물러있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늘 죄와 싸우며 고군분투합니다. 늘 죄의 문제로 끙끙거립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거기에 모든 에너지를 쏟습니다.
‘이 죄에 빠지면 안 되는데, 이 죄를 지으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며 죄와 힘겨루기 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습니다.
물론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무지하게 애쓰다가 왔어요.”라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건 알겠는데, 뭐하다가 왔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을 압도할 만한 삶을 살지 못하면,
아직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제라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과 견줄 수 없는, 세상을 압도할 만한 것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한순간 이 세상의 유혹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화려합니까?
매력적인 것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매력에 함몰되어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세상의 것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어떻게 다릅니까?
확연한 차이점을 우리는 확보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대감을 높여야 합니다. 우
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목표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정도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 중 5장 끝 부분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옆집에 사는 아저씨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목사님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제투성이이고 제 앞가림도 못하는,
연약하고 실수투성이인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목표를 낮추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 대해 높은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대를 향해 나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적당하게 구분되지 않고 비스무리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완전히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두드러지고 눈에 띄고 확실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대감이 매우 낮습니다.
인생이 죄 짓지 않고 살아가는 정도로 끝나면 안 됩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찬송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입니다. 우리는 이 찬송을 좋아합니다.
이 찬송은 은혜롭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찬송을 항상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찬송을 부를 때,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고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다른 찬송은 없냐?”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은혜가 놀라운 것은 알겠는데, 너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 하지 않겠냐?”
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놀랍다면,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삶에 임했을 때,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삶을 바꿔놓아서 놀라운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날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고 찬송만 부르고 있으니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는 어느 시점에만 가면, 정지 상태에 빠져버립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품게 된 질문 중에 하나가 ‘신자가 어느 지점에만 도달하면 멈춰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는 끝없는데, 무궁무진한 세계인데, 은혜의 세계, 은혜의 바다는 넓고 넓은데,
실제로는 깊은 곳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멈춰버립니다.
은혜를 어느 정도 받으면, 거기서 멈춰버립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10년 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지 20년 된 사람을 보며
‘내가 10년 후에 저 정도까지 갈 수 있을까?’라고 기대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20년 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지 30년 된 사람을 보며
‘나는 언제쯤 저 세계로 갈 수 있을까? 저 경지로 빨리 가고 싶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갈증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30년 동안 믿어도 저 정도밖에 되지 않나?’라고 오랫동안 믿은 사람 때문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교회 다니기만 하고, 가끔 은혜 받고, 봉사 조금 하다가
‘예수 믿는 것이 이런 거지. 특별한 게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환경은 바쁘고, 직분도 가졌지만, 삶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변화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으로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세계에서도 이런 증세가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과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 취미수준에서 끝납니다.
피아노를 배우든 운동을 하든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탁구의 경우, 처음에는 신나게 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실력이 늡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치고 있습니다.
거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나아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거기까지 가면, 전문영역에 이르게 됩니다. 더 많은 훈련, 고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거기로 들어가려면,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니까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느 범주까지는 도달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은 희귀해지기 시작합니다. 소수의 사람만 다음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신앙세계에서 멈춤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모두 비슷비슷해져버립니다.
얼굴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목표감과 기대감을 가지고 달려가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신앙을 활동이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프로그램이 매우 많습니다. 세미나도 많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계속 도전받고 배우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남만큼 배울 수 있을 동안 배우고 참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외적인 활동에 기준을 맞춘 사람들은
그것을 다 끝내고 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훈련프로그램을 다 마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훈련받을 것이 없습니다.
신앙의 기준과 목표가 교회 안에 정해져있는 카테고리 안에 갇혀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하신 분은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바라볼 목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변화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을 보면서도 도전을 받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을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자신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머리로는 다 알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영적인 사건과 세계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제한(limit)을 두고 받아들입니다.
앞서간 믿음의 위인들을 바라보면서 끝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끝없이 성화(聖化)를 갈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끝없이 갈망했던 모습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믿음의 사람들, 귀한 믿음의 족적을 만들었던 위인들을 보면,
그들은 한순간도 멈춰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목마름을 가지고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쳤습니다.
영적 목마름은 멈추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신앙의 목표는 끝이 없습니다.
일평생 달려가도 도달할 수 없는 영적 세계에 대한 갈망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기록했습니다(빌 3:12).
바울은 자신의 수많은 것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얻었다, 온전히 이루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일평생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기록했습니다(빌 3:14). 그는 잠시도 멈춰있지 않고, 목표를 향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달음질쳤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단순한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으로 인해 벌어진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기대가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결론을 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정도에 머물러있겠다고 결론내리고, 멈추어있는 분이 한 분도 없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우리에게 천국의 삶을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은 천국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맛보아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세상의 기준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천국에 가기 전에 지금 이 순간 이미 임한 천국을 맛볼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팔복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팔복은 천국 백성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복 있는 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천국 생활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전혀 알 수 없는 독특하고 새로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천국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39~40).
이것이 천국의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마 5:44; 6:31).
이러한 모습은 천국에 들어갈 백성들이 천국의 예비과정으로 누려야 할 실제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풍성한 천국의 삶은 미래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완전히 이루어질 구원은 분명히 있지만, 신자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미 시작된 천국을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누가 천국을 기대합니까?
지금 이미 시작된 천국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미래에 완성될 천국을 기대하게 되어있습니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삶이 이렇게 좋다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얼마나 기막힐까.’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시장이나 마트에 장보러 가면, ‘맛보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맛을 본 사람이 사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국을 경험한 사람이 천국을 기대합니다.
천국을 모르는 사람은 기대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맛을 보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맛을 보고 나면 견딜 수 없이 그 날을 사모하게 되어있습니다.
신앙의 세계 안에서 우리가 경험한 것이 많습니다.
신앙의 세계에 처음부터 제대로 들어온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에 들어왔을 때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얼마나 강력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매우 강렬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과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이것을 제대로 경험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고난 속에 있었기 때문에 더 확실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도 하지 않고 미친 듯이 돌아다녔습니다.
예전에는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 전봇대에 부흥회 포스터가 붙었는데,
그것을 보고 부흥회 하는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제일 앞에 앉아서 보혈 찬송을 열심히 불렀습니다.
무척산기도원에 가서 1주일 동안 금식기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안다고, 거적때기를 뒤집어쓰고 산 위에 올라가서 밤새 기도했습니다.
아침이 되니 거적때기가 이슬에 젖어있었습니다. 무릎을 펼 수 없었습니다.
뒤집어쓰고 있던 거적때기를 젖히고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환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는 속세에 살고 싶지 않아. 여기서 살다가 죽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교적 빨리 은혜를 받으니 세상에 대한 맛을 잃었습니다.
그 후로 여학생들이 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사춘기를 겪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좋은 것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을 것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보다 더 높은 단계의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제 큰 아들이 요즘 그렇습니다. 이 아이가 대학 2학년 때까지는 헤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에 빠져버렸습니다.
거부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아이를 사로잡아버렸습니다.
요즘은 이 아이가 세상에 대한 맛을 잃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목말랐습니다.
잠시만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아는 사람이 갈망하게 됩니다.
경험한 사람이 더 찾게 됩니다. 조금 더(more and more) 찾게 됩니다.
그런 갈망이 여러분들 안에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세계에 입문한 이후 경험한 것들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여기저기에서 껄떡거리며 자신을 채워줄 것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 들어온 이후에는 세상에서 더 이상 껄떡거리지 않습니다.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전에는 별 것 아닌 것에도 우르르 몰려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세계에서 맛보는 기쁨과 즐거움에 견줄 만한 것이 없어져야 합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나를 당기는 것이 있다면, 참맛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세계가 깊어져감에 따라 강도(强度)도 점점 높아져가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서 누리는 것과 세상에서 누렸던 것이 확연히 다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쾌락과 진정한 기쁨은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을 ‘쾌락’이라고 합니다. 쾌락은 아주 짧습니다. 진정한 사랑과 불륜이 게임이 되겠습니까?
신자의 가정 중에도 깨어지는 가정이 많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지 않으면 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쾌락을 추구합니다.
왜 쾌락을 추구합니까? 그들은 진정한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쾌락과 기쁨은 차이가 있습니다.
진정한 기쁨이 무엇입니까? 즐거움이 계속되는 것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갈수록 지속력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잠깐 동안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러면 속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할 영적 세계의 즐거움은 세상의 것과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영의 즐거움을 느끼면, 영의 즐거움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의 삶의 모든 영역에 진정한 만족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영적인 만족도가 높으면, 영적인 세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 감사와 만족과 기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적극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신약의 서신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그의 삶은 천국의 삶이었습니다.
천국의 삶이었다고 해서 그에게 고난이 없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에게 고난이 있었지만, 그가 삶 속에 가지고 있는 내적인 부요함과 기쁨을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삶입니다.
환난과 핍박 속에 있었지만, 그는 기쁨으로 늘 충만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일들로 인해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감사가 넘쳤고, 자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족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였습니다.
그것이 천국의 삶입니다.
영적 세계에 대한 계속적인 기대와 함께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할 때, 무슨 문제가 생길까요?
이전의 유혹들이 우리를 다시 잡아당길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상당한 세월 동안 쌓은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별 것 아닌 문제로 인해 무너집니다.
겉으로는 쌓아갔지만, 안으로는 쌓아가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들을 통해 즐거움이나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만족과 풍성한 삶을 경험하지 못하면,
반드시 다른 것을 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가만히 중립지대에 있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만족을 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적 세계에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외적인 것에 치우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애쓰거나, 외형적인 자리를 탐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 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욕구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외적으로 기울어져있는 신앙의 형태를 지적하시지 않으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주님께서 계속해서 지적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내적인 충만이 없을 때, 외적인 조건들로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시대의 종교인들을
주님을 질책하십니다. 내적인 것이 충만하게 채워지지 않고,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할 때,
헛된 것들에 의해 자신의 삶이 기울어져서 거기서 만족을 얻고자 할 때,
헛된 것들에 의해 삶이 기울어질수록 삶은 더 공허해집니다.
삶이 공허해지니 외적인 것에 더욱 치우쳐서 외적인 것들로 삶의 만족을 얻으려고 몸부림치게 됩니다.
영적 악순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풍성한 삶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갈수록 더 풍성해지고 깊어지고,
신앙에 대한 우리의 기대감이 증폭되어져서 ‘내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면,
얼마나 더 놀라운 세계가 나에게 주어질까’라는 기대감이 나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일을 위해 영적으로 좋은 멘토(mentor)가 필요합니다.
앞서 믿은 믿음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과 영적인 세계에 대한
갈증을 일으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신앙이 지식적인 것에 머물러있으면 안 됩니다. 아는 것이 우리를 바꾸어놓지 않습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간격이 멀어지면, 나중에는 좌절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활동이나 프로그램에만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목표를 이루는 것은 쉽습니다. 열심히 하면 목표에 어느 정도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목표를 가지고 활동이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훈련 받는 것으로 끝난다면,
프로그램이 다 끝난 후에는 갈 곳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교만해집니다.
교만해지는 순간부터 신앙은 멈추어버립니다.
신앙에서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직 한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느 지점에 멈춰서 마치 자신이 다 된 것처럼 교만한 상태에 빠져서
영적인 갈망을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까.
우리는 내적인 충만함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경험은 끝이 없습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것처럼 발목이나 허리에서 찰랑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이 물속에 던져져서 헤엄치게 하는 영적으로 충만한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인 삶은 이론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실제화 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에서는 행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데, 아는 것만 늘어가서는 안 됩니다.
수박을 아무리 끌어안고 묵상해도 그것만으로는 수박을 알 수 없습니다.
수박을 먹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다가 경험하게 되는
주님과 나만이 아는 신비로움은 표현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 많아야 합니다. 간증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나만이 아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경험이 많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삶을 연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은 수준으로 나아가도록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산상수훈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20).
삶에서 열매들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을 마치며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순종을 통한 구체적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말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삶 속에서 천국의 삶을 구체적으로 연습하라는 것입니다.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도록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 욕하는 사람을 축복할 수 있도록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남을 비난하지 않도록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는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염려하지 않고,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법을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화평을 이루는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천국의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의 삶을 애매모호하게, 개념적으로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종교 활동에 참여하는 것보다 선행(先行)되어야 하는 것이
실제 삶에서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3~24).
이것은 종교적 활동과 외적인 수행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배를 빠지지 않고 드리는 것도 좋지만,
실제로 형제와 화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천국의 삶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천국이 이미 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실제로 경험되어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갑자기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조금씩 확장되어져갈 때,
이전에는 묶여있던 것들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고,
관계 속에서 꼬였던 것들이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통해 천국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이상 죄를 지으며 불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연약함으로 인해 어떻게 하다가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의도적으로 마음대로 죄를 짓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대놓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운명적으로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마음대로 불순종할 수 없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편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금전적으로 아무리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편한 삶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우리 안에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8~30).
요한일서 5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볍습니다. 순종하기 쉽습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성령 충만을 이야기하며 여러 가지 관계를 통해 원리들을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모든 관계들을 은혜 생활 속에서 부드럽게 풀어가는 방식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신앙과 일상이 따로 분리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순종을 연습해보세요. 그것이 천국 생활입니다. 사실 불순종보다 순종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불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마음대로 살아보세요.
나중에는 엄청나게 어려워질 것입니다.
현재의 삶에서 우리의 모습은 연약하지만,
점점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되어져 갈 때, 우리에게 기쁨이 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은 우리의 내면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 자신이 가장 큰 혜택을 보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겉치레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자유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아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에게서 위선과 외식하는 것만 사라져도 우리는 매력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적인 만족이 깊으면, 겉을 포장하는 데 애쓰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누가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변화는 우리에게 깊은 만족을 줍니다.
지속적인 변화가 계속될 때, 우리의 만족도가 점점 깊어집니다. 기쁨이 커져갑니다.
그때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게 됩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그 나라가 얼마나 기막히겠습니까.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되면,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밀리지 않습니다.
영적인 만족도를 높여야 합니다. 기대감이 넘쳐야 합니다.
따분하고 지루한 신앙을 걷어치워야 합니다. 죄와 싸우는 데 시간을 다 보내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의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누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려고 애쓸 때, 주의 나라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임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은 흥미진진한(exciting) 일입니다.
영적인 만족도는 나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분을 보니 나도 저렇게 신앙생활하고 싶다.’라는
목마름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의 세계에 나온 만큼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삶으로 인한 충만함이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날 때,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표가 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우리가 비슷하다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해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곧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며, 삶 속에 어떤 어려움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이미 충만하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할 때,
나에게 찾아오는 어떤 고난과 환난도 나를 짓누를 수 없게 됩니다.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이미 충만히 임한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어떤 것에도 기죽지 않고, 어떤 유혹 앞에도 무릎 꿇지 않고,
어떤 환난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당당함이 내 안에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안에서 점점 커져가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이미 임했습니다. 여러분의 안에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분 안에
변화가 충만히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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