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메시야가 당신입니까? 마11:1~6 스크랩 성탄설교모음
대강절은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의미의 교회 절기로 지금 이 시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기다리던 메시야가 정말 당신입니까?”
라는 메시야 기다림의 질문이 나왔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모두 어떤 소식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KBS에서 “TV 프로그램 가운데 어떤 프로가 제일 시청률이 높은가?”
여론조사를 했는데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결과가 뉴스 시간이라고 합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제일 관심 있어 하는 민중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자기 주변의 어떤 소식을 늘 기다립니다.
주식을 구입한 사람들은 주식 값의 상승 소식을 기다립니다.
선거에 참가한 입후보는 당선소식을 기다립니다.
요즘 스키장은 눈이 많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입학소식, 출산소식을 기다립니다. 군인들은 제대날짜를 기다립니다.
학생들은 졸업을 기다리고, 우리가 배고프면 식사시간을 기다리고,
버스를 기다리고, 기차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모두 기다리며 삽니다.
교인들에게 설문 조사한 것이 있습니다.
예배 순서 가운데 가장 기다리는 순서가 뭐냐고 조사했더니
축도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배 마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미국 감리교단에서 목사들에게 조사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은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했더니
95퍼센트가 은퇴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목회가 힘들다는 반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미래 지향적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보다 미래 계획에 더 관심을 많이 보입니다.
사실 기다릴 것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할머니 댁에 들어가 보니까 달력에다 동그라미를 쳐놓은 것이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날만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고 여쭤보니 1월 3일에 딸 가족이 오기로 되어 있답니다.
4월 부활절 휴가 때는 아들 가족이 오도록 되어 있답니다.
11월 추수감사절에는 손자들이 모두 오도록 되어 있고,
크리스마스 때는 온 가족이 다 오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 년에 그 4일을 꼬박꼬박 기다리십니다.
▲기다림에는 두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성취가 이루어져야 행복합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속은 것입니다.
그때 실망감이란 말할 수 없이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마을 시골산골에 별안간 경제 활성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기 율동공원에 저수지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별안간 인부들이 많이 필요하니까 동네 사람들 할머니부터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다 일하러 나갔습니다.
자갈 줍는 것부터 등불 밝히는 야간작업까지 별의별 것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이 동네가 저수지 공사 때문에 경제 활성화가 이루어지니까 모두 흥분되었습니다.
이 기다림에는 성취가 따라와야 행복입니다.
'성취 없는 기다림'이 우리에게 많이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2) 두 번째 진리는 <기다리던 것이 왔는데 모르면 불행>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지 않습니까? 적어도 이사야 예언 이후 700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그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그런데 모릅니다. 이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췄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5
참 빛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인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도다.” 요1:9~11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는데 그가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는 불행이
유대인에게 생겼습니다.
▲전에 뉴욕에 살고 있는 유대인 랍비 ‘메나킴 슈니어슨’이라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600만 유대인에게 최고로 존경받는 랍비로 92세로 죽었는데 그가 누구인가?
미국에 살고 있는 5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그가 메시야라고 믿었습니다.
그 추종자들은 그는 절대로 죽지 않고 승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죽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는 부활할 것이다.” 기다렸습니다.
그 사람 장례식에는 알폰세드 아마토 뉴욕 상원 의원도 참석했고,
루돌프 쥴리아 뉴욕 시장도 참석했습니다.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일평생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언어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는 메시야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를 메시야로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슬퍼하던 모습이
전 세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뉴욕 타임스지에 전면 기사로 났습니다.
“그는 분명히 부활할 것이다.” 그런데 부활을 안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예수도 슈니어슨도 메시야는 아니었다.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린다.”
그리고 종결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에 대한 갈등이
오늘 성경말씀의 세례요한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라고 말한 최초의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여러분! 유대인 역사 가운데 중간기 역사라는 것이 있는데
구약과 신약의 그 중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시대가 끝나고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예언의 소리가 끝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언자가 나오면 핍박하면서도, 그가 없으면 못사는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250~300년 동안 중간기 역사가 계속되니까 예언자가 안 나타나니까
“메시야도 안 오시고 예언자도 없고 우리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 답답해서 지치고 지친 그 때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별안간 광야에서 소리가 들려오는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사람들이 “이게 무슨 소리야? 예언자의 소리잖아?”
그래서 온 나라 백성이 그 소리 나는 곳으로 다 달려갔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정말 믿을만한 예언자가 나타났습니다.
우선 그의 모습이 야인으로 나타난 것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회개하라는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다음 지금까지 그들이 전혀 보지도 못한 새로운 영적 의식을 하나 행하는데
물로 세례를 준단 말입니다. “이건 메시야가 하는 일이로구나!”
그래서 그에게 오는 사람들은 다 요단강으로 달려가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조상 적부터 기다리는 메시야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는데 별안간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그러면 당신 누구요?”
“나는 메시야의 길을 평탄케 하려고 보내심을 받은 자로다. 내 뒤에 메시야가 오도록 되어 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시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모든 백성들에게 메시야 소개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한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입니다.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 위에 머물렀다. 메시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 사람이 나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예수와 자기를 비교 설명했습니다. 뭐라고 했느냐?
“나는 그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 그런 차이다.
영적으로 하는 일은 나는 너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이런 비교를 자신이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의 메시야성을 완벽하게 증거한 세례 요한이
오늘 말씀에는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해 의심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옵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지상에서 예수를 메시야라고 그렇게 철저하게 증거한 요한이
왜 이렇게 의심하였을까?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의 상태를 보면 압니다.
세례 요한은 지금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감옥에 갇혔는가?
그는 마지막 예언자로서 메시야와 동시대 활동자입니다.
지금 자신의 옆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놀라운 메시야 역사가 이 땅에서 시작되는 것을 그는 믿고 메시야를 소개했습니다.
무서울 것이 없는 정의감에 불탔고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두려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요? 메시야의 도움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설교가 그렇게 무서웠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곁에 메시아 계시니까)
그리고 사회 정의에 대해서도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을 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리들에게 “정한 세 이외에는 받지 말라.”
군인들에게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이것은 누구도 못하던 말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3장 15절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정의의 설교는 마침내 그 나라 왕가를 쳐들어갑니다. 유대 나라는 헤롯왕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라고 하는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
어느 날 그의 동생 빌립이 로마로 여행을 떠나는데
그 기간 동안에 이 헤롯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데려다가
마침내 자기 아내를 삼아버립니다.
그러나 누구도 헤롯 왕가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건드렸다가는 장성택 같이 되는 것입니다.
가문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왕가를 상대로 일대일 싸움을 벌입니다 .
“뭐냐? 헤롯왕이!” 그래서 지금 감옥에 갇혀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헤로디아의 요청으로 목이 잘려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러면 요한은 이때 어떻게 그렇게 담대한 용기로 헤롯 왕가까지 맹공할 수 있었는가?
그 용기는 어디서 나왔는가? 메시야 때문입니다.
“지금 메시야가 오셨다. 나는 그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무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요한도 인간이지 않습니까?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해졌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계시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헤롯 같은 불의한 왕은
하나님의 아들(메시아)이 당장 처벌하셔야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런 불의한 자는 왕 노릇을 하고
나 같은 하나님의 정의의 선지자는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린다니
옛날에는 그렇다 하여도 지금은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된 세상이 아닌가?
당장이라도 천재지변을 일으켜서 저 불의한 헤롯을 처벌하시고
이 옥문을 열어 내가 메시아 품으로 나가야 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제일 먼저 증거한 사람이 아닌가?
도대체 이러한 때에 메시야는 무슨 일을 하고 계시단 말인가?'
그는 제자들을 시켜서 “너희들 예수께 가서 질문해라. 정말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그러면 왜 메시야가 하는 일을 안 하고 계십니까? 물으라.
우리가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됩니까 라고도 물어봐라.
메시야가 오셨는데 왜 세상이 이렇게 불의가 많으냐?
메시야라면 이렇게 가만히 계실 리가 없다.” 이런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또한 실망의 선언입니다.
바로 이 문제가, 지금도 우리 믿음에 똑같은 갈등 부분이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찌 저렇게 악한 사람이
저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온갖 것을 누리며 버젓이 잘 살아가고
정말 피나는 눈물의 의로운 길을 걷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토록 고난스럽고 억울한 삶을 참아야 된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의 갈등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정말 의로운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다른 하나님을 찾아야 내 인생의 갈 길이 생기겠는가?
당신이 정말 메시야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합니까? 대답하시오.”
예수님의 대답이 5절에 나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납니다. “메시야는 메시야의 일을 잘하고 있다고 말해라.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고 있으며 고난의 백성들을 관심가져
그들이 필요한 구원의 역사를 지금 계속하고 있다. 이런 일은 메시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되는 일이나 걷지 못하는 자가 걷게 되는 일이나
듣지 못하던 자가 의학적 치료 없이 현장 구원을 받는 일은 기적 창출 사건으로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이요 하나님의 메시야 사역이다.”
▲그러면 요한에게는 그것이 더욱 큰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기적 창출 사건은 내가 갇혀있는 이 감옥 안에서도 이루어져야지
어찌 그들에게만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까?
오히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숫자에 달하는 환자들 가운데 몇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일보다
마귀 헤롯왕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정의의 나라를 건설해야
메시야 사역의 효과가 더욱 훌륭하게 나타날 것 아닙니까?
내가 요단강에서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줄 때 온 나라 백성이 몰려오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메시야인가?' 할 만큼 국민적 분위기가 다 이루어지는 준비를 내가 다 했는데
그러한 내가 이토록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린다고 하면
온 국민의 구원의 문제가 더욱 어려워질 거 아니겠습니까?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정말 당신이라면
지금 이곳에 메시야 왕국 건설을 해야지
어찌 환자 몇 사람을 데리고 구차하게 그렇게 계시나이까?
당신이 정말 메시야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6절에 대답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메시야를 보라. 메시야는 지금 메시야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너희는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원하느냐?”
▲세례 요한 뿐만이 아닙니다.
그로부터 3년이나 예수님과 함께 복음 사역을 전하던 제자들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세례 요한도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과 절대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해야 되는 일은 헤롯 정부를 때려 부수고 요한을 보기 좋게 감옥에서 끌어내서
예수는 저렇게 강력한 헤롯 정부보다 더 강한 힘이 있다고 보여주는 것이 내 사역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세상의 힘 있는 자들이 다 내 곁으로 몰려올 것이다.
헤롯 정부보다 더 강한 정부를 만들어서 또다시 로마 정부를 때려 부수고자 할 것이며
나는 헤롯 대신 왕이 되어야 하고 너희들은 정부 수립의 일등 공신이 되어
영광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이렇게 고난당하는 이 형제들은
메시야를 만나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불쌍한 인생들이 되는 것이다.
요한은 옥에서 나오지 말고 거기서 죽어야, 하나님의 의가 살아날 선지자니라.
이제 때가 오고 있는데 나는 요한보다도 더 창피하고 참혹스럽게
비참한 죽음의 자리로 떨어질 것이다. 요한에게 가서 그렇게 말해라.
그것이 예언자가 갈 길이며 메시야가 갈 길이라고 말해라.”
▲우리는 매일 기다리고 삽니다.
그러면 교회 나와서 이렇게 예배를 늘 드리는데 무엇을 얻으려고 그럽니까?
성경에는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렇게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다 얻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벌써 내 손에 쥐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니까 불행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주시고자 하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얻었습니다.
오늘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 나왔느냐? 내가 줄 것은 이미 너희가 다 소유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 살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자신의 할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도 젊은 나이에 사형당해 죽었습니다.
실패인가? 억울한가?
그런데 왜 온 세상은 대강절을 지키면서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예배를 드립니까?
그분들은 가장 훌륭한 삶을 살다가 가셨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메시야의 일을 하고 예언자는 예언자의 일을 하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가장 잘 산 사람이 누구냐? 자신의 할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묵묵히 조용히 '떠나는' 사람입니다)
“내가 할 일은 이것이다. 누구는 어떻게 되고 누구는 어떻게 된다. 아무 상관없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소록도를 만들어서 나병환자들을 강제 수용시켰습니다.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럽 오스트리아의 20대 처녀 간호사 세 사람이
한국을 찾아와서 그 형제들이 어디 있느냐며 물었습니다. 소록도라고 했습니다.
그 소록도 나병환자 수용소를 찾아가서 20대에서부터 43년이라는 긴 세월을
결혼도 하지 않고 소록도에서 봉사하다가
70세가 넘어서 더 이상 봉사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43년 전 들고 왔던 낡은 가방 하나를 챙겨 편지 한 장을 써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오스트리아 자기 본국으로 돌아간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의 이야기를 우리는 압니다.
저(아마 이필재 목사)는 소록도에 5번 가서 집회를 했는데 그분들을 만났습니다.
본래 세분이었는데 그중에 마리아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볼 때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천사로 보였습니다.
그분들은 평생 결혼도 못하고 돈도 못 벌고
나병환자 고름 나는 상처만 만지다 갔으니 실패자인가? 불행하게 산 사람인가?
아닙니다. 가장 잘 살고 가장 성공한 인생입니다.
왜 그런가? 그들이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내가 무엇을 해야 돼?’
내가 할 일을 찾아서 그 일을 하면 그것이 가장 훌륭합니다.
“메시야는 메시야의 일을 하고 있다고 가서 전해라.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무엇을 얻으려고 내게 왔느냐? 무엇을 얻기 위해서 교회 왔느냐?
나는 이미 주었노라. 너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면서
내가 선물해준 것이 분명하다.
헤롯 정부 때려 부수고 새 왕국을 건설하고 내가 왕이 되고
너희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메시야의 사역이 아니다.”
이 대강절에 ‘나의 할 일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고 주님께로 갈 것인가?’
그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오신 대강절 영적 의미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왜 대강절인가요?
세상에 오셔서 세상 관점으로 보면 아무 성공도 못하고 실패하고
젊은 나이에 사형당한 예수를 왜 기다려야 하는가? 그가 메시야 사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메시야의 길을 가고 있으며 메시야가 할 일을 하고 있다. 너희들도 나같이 하라.”
대강절에 주님을 기억하면서 의미 있는 시간들을 우리가 마련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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