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아내들 삼인의 일화
◑ “여보!, 감옥으로 돌아가시오!”
오정모 사모(주기철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수감당하시던 중
늙으신 어머니가 병약하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안타까운 날을 보내시는데
하루는 일본 고등계 형사가 와서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은 아프신 어머니를 뵈러 가라. 지금 감옥을 나가라.
당신이 나가서 신사참배를 하든, 안 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단, 신사참배를 죄로 정죄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 안 된다.”
이렇게 말하고는 주기철 목사님을 석방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주 목사님은 그런 요구에 “그렇게 하겠다/안 하겠다”는 아무 대답도 없이
거저 어머니를 뵙겠다는 일념으로 그 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서 자초지종을 들은 사모님(아내)은
“여보,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시오!”
그래서 주 목사님은 발걸음을 돌려서 감옥으로 자기발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후에 거기서 순교하셨다.
인간인지라, 여생이 얼마 안 남은 노모를 곁에서 지키려는 애틋한 정이 끓어올랐지만
아내의 단호한 충고를, 당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의 음성에 즉각 순종했다.
결국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 “목사님이 아직 가정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주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한다고 네 차례나 검거되었다.
그러나 그는 박해 가운데서도 결코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주 목사가 1차 검거에서 석방되어 나왔을 때 그는 산정현교회 신자들에게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둘째, 지루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이 설교를 들은 산정현교회의 2천여 신자들은 모두 울 수밖에 없었다.
주 목사는 1940년 6월 네 번째 투옥되어서 1944년 4월21일에 순교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그는 유서를 써서 집에 보냈다;
“여드레 후에는 아무래도 죽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부어올랐습니다.
.... 어머님을 잘 봉양하십시오. 어머님께는 죄송합니다.”
이 유서를 받아든 오정모 사모는
“목사님이 아직까지 가정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런 것을 보낸 것이냐?”
고 반문했다.
이런 믿음의 아내가 있기 때문에 순교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주 목사가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십자가 신앙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의 순교를 각오한 훌륭한 사모가 없었다면.....
◑ “만약 우상에게 절하면 당신은 내 남편 아니야”
정양순 사모(손양원 목사님)
일제 시대 때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순천 형무소에서 1년 7개월 형을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사모님 정양순은 애양원을 지키면서, 금식기도와 철야기도를 늘
드리셨는데, 그 기도내용이 정말 인상적이다.
보통 아내들은 “우리 남편 건강하게 해 주세요, 빨리 출옥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손 목사님의 사모님은 “우리 손 목사님, 신앙이 꺾이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날마다 기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기도한지 1년 7개월이 지났다.
만기 출옥을 해야 되는데, 개정의 뜻이 보이지 않는다 해서 다시 종신형을 받았다.
그래서 순천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던 도중, 잠시 길에서 사모님을 만났다.
보통 부인 같으면, 정말 슬퍼서 울고, 기뻐서 울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모님은 성경책을 펴고 요한계시록 2장 10절을 목사님께 보여주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만약 우상에게 절하면, 당신은 내 남편 아니야!”
매정한 사모님인가? 아니면 대단한 사모님인가?
훌륭한 순교자 목사님 뒤에는, 이런 훌륭한 사모님이 건재해 있었다.
◑홀 여사
“하나님, 한국에서 남은 아들과 (빨리 죽지 않고)
오래 사역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한국에서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끝까지 한국에 남아서
남편의 뜻을 이어 받아 의료선교에 평생을 바쳤던 순교자의 아내.
한국에서 낳은 아들까지 의사로 키워서, 한국의 결핵퇴치 사업에 대대로 헌신했다.
그녀는 한국에 남편 보다 1년 먼저 와(1890), 43년간을 한국을 위해 봉사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여러 '최초'를 기록해 놓은 인물이다.
평양에 최초의 병원 설립, 맹인 농아학교 설립, 점자도입과 한글용 점자개발,
어린이 병동설립, 여자의학교 설립(현재 고려대 의대의 전신),
동대문병원(현 이대부속병원), 인천 기독교병원, 인천간호보건대학 등 설립,
또는 시작하였다.
또 한국의 최초여의사(서양의학), 김점동(에스더 K.박)을 키웠고,
한국여성의 인권을 위해서도 일하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미국여성 200인중 한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에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실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암홀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윌리암 선교사는 로제타의 성품과 성실성에 반해,
한평생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여 프로포즈를 했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윌리암은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도 윌리암 홀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오기 위하여 윌리암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1890년, 한국에 처녀의 몸으로 혼자 들어온다.
윌리암은 로제타가 조선을 향해 떠난 후, 결국 선교부에 찾아가 선교지 변경을
요청했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윌리암은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891년 12월 한국 땅에 오게 된다.
그들은 1892년 6월 21일 서울에서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되었다.
로제타는 홀과 결혼함으로 그때로부터 홀 부인으로 칭함 받게 된다.
윌리엄 홀 선교사는 평양선교를 위해 책임자로 임명되어 평양선교를 시작했다.
첫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나는 그 다음해 메켄지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 해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1894~1895)으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월리엄 홀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병에 감염되었다.
1894년, 병든 몸을 이끌고 겨우 평양에서 서울에 도착한 윌리엄 홀 선교사는,
부인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기도와 유언을 하고 끝내 숨을 거두게 된다. 이국땅에서 순교한 것이다.
한국에 온지 2년 만에 그는 한국 땅(지금의 양화진)에 묻히게 되었다.
미국에 있던 닥터 윌리엄 홀 선교사의 시댁 가족들은,
순교자의 아들 셔우드 홀과 며느리 로제타를 애타게 보기 원해서
그들의 미국 귀국을 종용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래서 로제타는 어린 아들 셔우드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남편 제임스 홀의 모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남편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아들 셔우드를 본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암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그래서 1897년, 로제타는 아들과 딸(미국서 출산)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에 오자 몇 해 후에 딸이 또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
로제타는 딸을 남편의 묘 옆에 묻으면서 다시 한번 결심을 하게 된다.
"하나님, 남은 내 아들 셔우드와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
결국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들은 한국에서 그 후 오랫동안 사역했다.
이렇게 1897년 남편의 의료선교사역을 완성하기 위하여 다시 한국에 온 로제타 홀은
맹인교육(한국 최초로 점자교육을 실시), 병원사업등을 활발히 펼치다가
후에, 43년간의 한국 선교사역을 마감하고 1935년 귀국하였다.
그 후 로제타 홀은 1951년 미국 뉴저지에서 소천했다.
그녀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그 재를 서울의 남편과 딸 곁에 묻었다.
아들 셔우드 홀도 자기가 죽으면 서울의 가족과 함께 묻어달라고 벌써부터 유언했다.
셔우드 홀(홀 여사의 아들)은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에서 성장하였고 미국에 건너가서 터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재학 중 의사가 된 메리안(Marian Bottomly)과 결혼하여
1926년 부부가 함께 내한 해주구세주병원 원장으로 부임한 후
1940년 일제가 간첩의 누명을 씌우고 강제 추방할 때까지 의료사업을 계속했다.
한국에 있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인도로 가서 역시 결핵퇴치 의료선교에 힘쓰다가
1963년 은퇴하여 카나다 리치몬드에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복지향상에 이바지한 바가 인정되어
모란장 훈장(520호)을 받았다.
http://cafe.naver.com/82911.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02
★홀 여사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 에스더도 키워냈다
그리고 간호대를 설립하고 여성간호사 양성에도 힘썼다.
당시 조선 부인들은 남자 의사에게 진찰을 거부했기 때문에 여의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메타 하워드 여자 의료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되고
한국 최초 부인병원인 보구여관(Caring for and Saving Woman's Hospital)은
메타 하워드 의사에 의해 1887.10.20.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세워졌으나
그녀는 2년 만인 1889년, 건강상 이유로 미국으로 귀국한다.
후임으로 1890년 10월 로제타 셔우드(Miss. Rosetta Sherwood, M.D.)가 부임한다.
그녀는 오자마자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으로"라는 표어를 내어걸고
의료사업과 함께 여성들을 모아놓고 의료강습을 시작하였다.
홀 부인은 한국인 조력자 박 에스더(박점동)와 함께 평양 일대에서
진료소를 차리고 의료 선교활동에 주력했다.
이 후, 남은 홀 부인은 자녀와 조력자였던 박 에스더를 데리고 미국에 돌아간다.
거기서 박 에스더는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의사가 된다.
1897년, 홀 부인은 남편의 순교지인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의료선교를 재개했다.
후에 미국에서 의사가 된 박 에스더도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들은 또 다시 평양에서 힘을 합치게 된다.
과거에 박 에스더는 미숙한 조수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동역자였다.
그래서 이들은 광혜여원의 건물을 신축해서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를 열었다.
그의 이러한 수고가 인정이 되어,1908년 4월 28일에는 신사숙녀 7,8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고종황제로부터 치하를 받기도 하였다.
박 에스더는 1910년 폐침윤에 걸려 34세를 일기로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가장 가깝게 가족처럼 지냈던 홀부인의 가족은 더욱 슬펐다.
이로 인해서 닥터 홀의 아들인 셔우드는 (당시 16세) 장차 결핵 전문의가 되어
한국에서 꼭 결핵요양소를 설립하여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고,
1928년, 그의 결심대로 해주에 최초의 요양소 및 결핵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32년에는 최초로 결핵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도입하였다.
*출처: http://blog.naver.com/bilnom/6000338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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