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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초청

LNCK 2019. 12. 25. 06:39

예수님의 초청           11:28~29           2006.12.08. *원제목 : 주님과 함께 살라

 

 

오늘날 신앙생활 하면서 사는 중에도 지치고 피곤한 인생이 많다.

이런 분들은, 오늘 예수님의 초청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28~29

 

이 유명한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초청을 받는다.

그것은 오는 것, 쉬는 것, 메는 것인데...

 

 

첫 번째 초청 -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남보다 더 바쁘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 같은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초청 -와서 쉬라는 것- 은 매우 역설적이다.

 

가는세대

오늘 우리는 오는세대가 아니다. ‘가는, 떠나는세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부터(날 때부터) ‘떠나는존재다.

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다.’

그만큼 우리는 떠나는데익숙해진 존재들이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자녀들은 보통 집나가기를 좋아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탕자인 것이다.

아버지 품을 떠나고, 집을 나가고 떠나는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돌아오는것은 잘 모른다.

 

현대인들은 차를 타고 어딘가 나가는것을 좋아한다.

마음껏 자유로운 것을 좋아한다.

어디든 떠나는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아오라고 하신다. 와서 내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우리 현대인은 이런 것에 익숙지 않다. 우리는 너무 분주하기 때문이다.

요즘 바쁘시죠?’라는 것이 우리의 인사말이 되었다.

 

분주하면서 비본질적인 목회자가 되는 위험

저도 목회자이지만, 목사님들도 매우 바쁘게 사신다.

분주함이 목회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유진 피터슨이 쓴 주일과 주일사이Between Sundays 라는 책에는

왜 목회자나 지도자에게 분주함이 생기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자만심이 강하기 때문에 분주하다.

사람들은 자기가 중요한 사람으로 부각되고 싶어 한다.

꽉 찬 일정들, 그 시간들의 무거운 압박감... 등을 괴로워하면서도 자랑한다.

바쁨은, 내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가장 큰 증거다.

 

어느 개인 병원에 갔는데, 대기하는 사람 하나도 없고

의사는 한가하게 책을 읽고 있다면

우리는 그가 뛰어난 의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의사가 있는 병원은, 사람이 줄지어 기다리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진찰실 앞에서 비록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고 불평하더라도

나는 그의 바쁜 유명세에 깊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바쁘고 초조한 일정표가 우대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바쁘고 초조한 상태를 스스로 추구함으로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한다.

 

비본질적인 일들 때문에 분주하다.

목회자는 단호하게 자기 스스로 일과를 결정하기 보다는,

우유부단하게

다른 사람들이 자기 목회 일정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기 때문에 분주해진다.

 

나의 일정, 목회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의사결정과 감독하는 일,

이런 일들을 내 스스로 주도권을 포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며,

정말 비본질적인일들에 진력하느라 목회자의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그러나 성도들을 실망시키는 재난을 피하기 위해

목회자는 그런 비본질적인 일에 미친 듯이 매달린다.

 

오로지 (본질에) 게으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C. S. 루이스가 가장 (비판하기, 가르치기) 좋아하던 주제였다.

(예수님이 가르친 삶의 본질은 쉬는 삶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바쁘게 사느라(그런 바쁨이 위로가 되긴 하겠지만)

목회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우며, 여유 있게 살 시간이 없게 된다.

 

예수님의 주된 가르침은

그런 바쁜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께 와서 쉬라고 초청하신다. - ’, 이것이 원래 본질적 인생이다.

그런데 그런 느슨하게 보이는 삶이 우리 현대인에게는 너무 낮 설다.

 

오늘날 교회에, 장자들이 많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집에서 쉬라고 초대하신다.

세상처럼 안 살아도 된다. 너무 쫓기면서 사는 부담 안 가져도 된다.

 

2005년에 저희 아버지 목사님이 은퇴하실 때 우리 ‘3부자 집회를 했는데

첫째 날은 동생 김요한 목사가 탕자의 마음(실제로 차남)

둘째 다음 날에 제가 장자의 마음(실제로 저는 집에서 장남)

마지막 날 아버지 김장환 목사님은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주제로 설교하셨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가 바로 장자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실제로 자랄 때, 우리 집안 장자로서 완벽하고 훌륭하게 보이고자 했다.

집을 나가지도 않았고, 공부도 열심히 했고, 교회일도 잘했고

무엇이든지 열심히 바쁘게 일했다.

 

그런데 동생 김요한 목사는, 정말 탕자처럼, 자라면서 속을 좀 썩이었다.

그래서 아버님은 동생만 보면 나무라셨다.

 

그런데 장자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은 집을 나가지 않았는데, 마음은 집나간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는 탕자 이야기보다는 장자의 이야기.

그 시대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장자를 비유로 교훈하셨다.

그러므로 탕자 이야기라는 제목보다는 장자 이야기로 해야 한다.

 

탕자는 집을 나가서 온갖 죄를 짓고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겼다.(쉬었다)

그러나 장자는 한 발 짝도 집을 나가지 않았지만

장자는 집에 있으면서도 집나간 사람이다.(쉼이 없었다.)

바쁘게 일만 했지, 그 마음에 진정한 안식이나 기쁨이 없었다.

 

아예 집을 나가본 적도 없으니, 돌아온 적도 없는 아들이었다.

늘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아버지 품에 안겨 쉬지 못한 아들이었다.

 

장자들이여, 예수님께 나오시라!

오늘 여기 앉아계신 많은 분들도 탕자라기보다는

(당시 저처럼) 장자로 사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모범생으로 하나님 안에서 신앙생활 늘 하면서도

진정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고, 하나님 품에 안기지 못한 장자는 아닌지..

 

그 속마음이 힘들지 않으신가?, 지치지 않았는가?,

탕자를 비판하는 마음만 가득 차 있는가?

정말 예수님께 나아오시라. 그리고 을 얻으시기 바란다.

 

장자는, 세상이 말하는 큰 죄를 지은 적이 없을 수도 있다.

겉으로 전혀 문제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아직 집에 오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예수님이 집으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밖에 그냥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라.

나는 너와 함께 축하하고 즐기고 싶다.

함께 즐겁게 지내자고, 집에 들어오라고 예수님이 부르고 계신다.

 

예수님께 오시라. 그리고 영혼의 쉼을 누리시라! 결단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두 번째 초청 - 쉬라!

 

나는 여전히 가장 잘 못하는 것이 바로 쉬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배우고 있다.

 

너무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

우리 아버지는 행동하는 사람이다. 하시는 일이 아주 많으셨고

언제나 서둘러서 다니시고, 매우 활동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셨다.

 

어머니 역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청소하시고 식사준비하시고 등등

두 분 다 일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셨다. 그것을 보고 자랐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제가 사역을 시작한 나이는 대학생이었던 22살 여름방학 때,

빌리그레함 선교회에서 그 사역의 첫발을 디뎠다.

 

1983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는 약 1만 명의 목회자들이 모였다.

저는 거기서 한국어 분과위원으로 일했다.

 

1985년에는 애너하임 엔젤스 스타디움에서 열렸던 빌리그레함 집회도 섬겼다.

십 만 명이나 모였고, 한국교인들도 5천 명이나 참석했다.

당시 저는 불과 25세였지만, 너무 바쁘게 많은 일들을 해 나갔다.

 

그때 저는 소위 떴다.’ 나는 전도사였지만 여러 한국교회를 방문하느라

뉴욕, 필라델피아, 캐나다, 호주 등지로 바쁘게 비행기를 타고 다녔다.

얼마나 많이 탔는지, 적립된 마일리지로 한국까지 왕복 3번이나 공짜로 다녔다.

L.A.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저를 알아보는 청년들이 많았다.

그 정도로 유명하고, 얼굴이 널리 알려진, 잘 나가는 전도사였다.

 

29살 때 저는 박사학위 Ph. D.를 끝냈는데,

우리 신학교에서 최연소자에 속한다.

그 후 저는 한국에 돌아왔고, 1994년에는 중앙크리스천학교를 시작했다.

학교는 매우 성황이었고, 젊어서부터 저는 너무 바쁘게 살게 되었다.

 

학교를 세운 이듬해에는 교회를 개척했는데,

10명으로 시작한 교회가 5년이 지나면서 약 1천명으로 성장해갔다.

 

우리 부부는 지금 4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다.

교회를 개척할 당시는 단 2명이었는데,

날마다 교회를 부흥시켜달라고 기도하다보니...

하나님의 응답으로 자녀가 4명이 되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에 나오는 부부는 모두 아기를 잘 가졌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교회부흥 시켜달라는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농담 섞인 진담.

 

안식년을 떠나다

학교도 나날이 더 발전되어 갔고, 교회도 더 성장해 갔고, 자녀도 잘 자라갔다.

한창 그렇게 바쁘게 살던 2001년 경,

아내는 지쳐서 울기 시작했고, 자녀들도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저 역시 내적으로 고갈되어갔다.

 

그러나 바깥일들이 너무 잘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오직 하나님만 그것을 알고 계셨다.

내가 설교하고 있는 시간에도, 아내는 사무실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가정에서부터 균열 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성도들에게 이 일을 알리고,

중보기도그룹에 기도를 부탁하며

우리 가족은 일년 동안 안식년을 훌쩍 떠났다.

 

제 아버님은 결코 안식년을 가지신 일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걱정이 많으셨다.

학교 문제 생기면 어떻게 할 거냐?”

교회 분열되는 어떻게 할 거냐?”

그러나 1년 동안 온 가족이 충분히 쉬었다.

 

내가 없으니까 더 잘 되더라

그런데 1년 쉬고 와서 보니, 교회가 두 배로 부흥해 있었다.

그래서 교회성장의 새로운 비결을 배우게 되었다.

목사님 안식년 보내드리는 일이다.

 

저는, 제가 쉬면, 큰 일 날줄 알았다.

제가 쉬지 못했던 이유는, 제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컨트롤해야 마음이 안심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내 없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사실 이 마음은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교만이다.)

 

평소에 이런 생각으로 살다보니, 조금이라도 여유를 갖고 쉴 틈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내 눈과 관심을 떼는 순간, 일이 어떻게 잘못될까 염려했다.

 

하나님은 내적으로 제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사역을 진행할 것이다. 너는 그냥 마음 편하게 지켜보아라!’

 

여러분, 목사가 안식년으로 교회를 비우는데도,

교회가 문제없이 잘 돌아간다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지 아시는가?

내가 없으면 좀 혼란스러워야 되는 것 아닌가!’

나는 내가 없어서는 안 되는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물론 그것은 짧은 생각이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생각이다.

그렇다. 교회에 담임목사가 (안식년으로) 없어도 잘 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힘을 빼야 잘 되는 원리

목회뿐만 아니라, 세상만사가 원리가 비슷했다. 힘을 빼야 잘 된다.

수영을 잘하려고 애쓰고 발버둥칠수록 도리어 가라앉는다.

그러나 몸에 힘을 다 빼고 가만히 있으면 뜬다.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은, 절대 무리한 힘을 줘서 하지 않는다.

물에 몸을 맡긴다고 표현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헤쳐 나간다.

마찬가지로 사역도, 힘 뺄 줄 아는 것이 영적인 경지에 도달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오면

예수님은 우리를 무리하게 일 잘 하는 집사나 장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먼저 힘 빼고 쉴 줄 아는 저희를 만들어 주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쉼으로 우리를 초청하신다.

이 세상에서 쉼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쉼과 안식을 주시기 원하셔서,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신다.

 

올바른 성수주일이란?

제가 한 가지 염려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수주일이란

(‘성수주일이란 말이 성경에 없다. 안식을 거룩히 지킨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주일 날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주일 성수라고 생각한다.

 

그럼 언제 쉬는가?

6일 동안은 직장일 하느라 파김치가 되어서 쉬지 못하고,

7일째 주일날은 교회일 하느라 저녁 늦게까지 파김치가 된다면...

 

제 주장이 radical(급진적)한지 모르겠지만,

쉴 줄 아는 사람이 - 건강한 영성을 가진 사람이다.

 

하루에도 밤에는 자면서 쉬어야, 낮에 건강하게 일하고

주간에는 7째 날에 충분히 쉬어야, 또 다시 6일간 건강하게 일하고

그래야 건강한 영성을 유지할 수 있다.

 

주일날 아빠나 엄마가 하루 종일 교회에서 지낸다면

그 쉬는 날 하루만이라도 아빠와 놀고 싶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엄마와 아빠는 언제 단 둘만의 시간을 같이 보내는가?

그래서 가정이 온전하겠는가?

 

그래도 우리 가정은 아무 문제없이 잘 산다고, 아무 내색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영적인 가식이 될 수도 있다.

 

 

세 번째 초청 - 멍에를 메는 삶

 

예수님의 세 번째 마지막 초청은 나의 멍에를 메라는 것이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반드시 멍에를 메게 되어있다.

세상의 멍에, 아니면 예수님의 멍에.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안 메면

세상의 멍에를 메고, 정욕에, 육신에, 사탄에 종노릇을 하게 되어 있다.

어디든 안 메일 수는 없다.

 

우리는 선택해야한다. 누구랑 같이 멍에를 메겠는가?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면, 그 멍에는 쉽고 가볍다.

세상과 함께 멍에를 메면, 그 멍에는 무겁고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다.

 

외줄타기 곡예사

블란딘이란 사람이 외줄타기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며 믿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외줄타기에 거뜬히 성공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내가 건널 줄 믿느냐?’

그러자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이제는 믿는다고 환호했다.

 

그러면 내 등에 올라타라고 요청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건널 줄 믿었지만, 그의 등에 선뜻 올라타겠다고 하진 않았다.

그 중에 오직 한 사람(블란딘의 매니저)만 올라탔다.

그래서 둘은 함께 외줄타기로 나이아가라 폭로를 건넜다.

 

이 비유에서 블란딘은, 예수님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은, 그 등에 올라타는 것에 비유된다.

많은 사람들이 믿으면서도, 실제로 선뜻 예수님 등에 올라타려고 하지는 않는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시며,

자기 십자가(멍에)지고 나를 따르라는 초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외치지만

정말 예수님께 자기 인생의 전부를 맡길 수 있을 만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블란딘의 등에 엎인 사람이 하는 일은, 힘을 빼는 일이다. 쉬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등에 엎여서 자기 힘을 쓰느라 바동거리면 안 된다.

 

내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주님 안에서 안식하면서 주님이 일하시도록

저는 백기를 들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겠습니다.

 

주여, 나의 삶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겠습니다.

더 이상 바동거리지 않겠습니다.

내 의지와 내 노력으로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방법대로,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

정말 말씀을 믿고 이제는 주님을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새벽제단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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