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의 또 다른 의미 고전11:17-34
*출처: http://blog.daum.net/joesohn/6133511 참고할만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의 일부였던 성찬
주님과 함께 빵을 나누었던 그 의미 깊은 ‘행위’는
‘의식(儀式)’이 아니라 본래 형제간의 식사였다.
하나님께서는 식사와 같은 인간의 일상적인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떡) 안에서 우리들이 상호 교제하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빵과 포도주를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 외에도
예수께서 함께 식사하시며 형제들과 함께 교제하셨던 그 모습에서
우리는 참된 성찬식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다.
즉, 성찬식은 무엇보다 일상적으로 서로 함께 먹는 식사를 통해서 제정되었다.
단순히 ‘먹는 행위’가 아니라, ‘형제적 교제’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찬례는 ①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기념과
②그리스도와 함께 음식을 나누는 (교제의) 2중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트렌트 공의회는 살과 피를 지나치게 강조하여①
“서로 함께 먹고 마시는 행위”②를 잊게 만들었다.
▲1. 친교 의미의 성찬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는 삶과 동떨어진 ‘예식’이 아니었으며
형제간의 친교의 식사였다. (예배 때마다 애찬=성찬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식을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에서 우리에게 가까운 상징들을 사용하여 세우셨다.
따라서 이 성례는 의식으로만 우리에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우리의 삶 자체가 성찬(성례)식의 삶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여러분이 한자리에 모여서 나누는 식사는 (서로 갈라졌기 때문에)
주님의 성찬을 나누는 것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고전11:20
성찬의 빵을 함께 나눠 먹는 행위, 즉 한 자리에서 같이 식사한다는 의미는
필연적으로 서로 용서, 서로 사랑, 서로 하나 됨의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계명은
성찬식에 참여하는 이들이 구체적으로 생활 안에서 실현해야 하는 계명이다.
실제로 자기 몸을 깨어 피를 흘리심으로 원수까지 사랑하신
그 십자가의 사랑에 크게 감동된 사람은
자기 인생에 용서 못할 원수가 없게 된다.
더욱이 자기를 배반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가룟 유다에게까지
성찬의 잔과 떡을 내미신 것은
‘성찬식 앞에서 용서 못할 원수 죄인은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인 것이다.
▲2. 나눔 의미의 성찬
당시 성찬식의 이름도 ‘성찬식’이 아니라. ‘빵을 나눔’이었다.
희생되신 예수와 한 몸을 이룬 우리가 모든 이들과 함께
빵과 포도주로 대표되는 음식물 (그밖에 우리를 있게 하는 모든 것들을
서로 나누도록 하는 대표)을 통해 이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의식적 차원이 아니라 사랑의 차원에서 존재한다.
▲3. 그리스도의 몸(교회)도 깨어져야 한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깨어진 몸의 혜택만 누리려고 하면 안 된다.
진정 그 은혜에 마음이 크게 감동된 자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쪼개서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자기 몸을 스스로 쪼갤 줄 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 이웃과 나눔을 실천하는 일
이런 것은 자기 몸을 스스로 쪼개는 희생(십자가 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찬을 통해서, 그런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것이다.
이런 행위가 없이 ‘의식’ 자체에 머문 다던가
예수님의 피와 살로 누리는 혜택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찬식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참된 성찬식의 정신을 이어받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 주의 만찬에 대한 태도 (고전11:17-34)
당시 헬라 사회에서는 친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식사를 하는 일이 빈번한
관습이었고, 이를 ‘에바노스’라고 불렀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성도의 교제를 위하여 "아가페 밀"이라는 이름의 애찬을
즐겼습니다. 이 애찬은 저마다 가져올 수 있는 만큼의 음식을 교회에 갖고 와서
함께 즐기는 일종의 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의 친교를 도모한다는 애찬의 본래의 의도가 상실되고
오히려 성도가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데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각자가 가지고 온 음식을 자기들만 먹음으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은 굶주리고 부자는 배가 부르게 먹고 마셔 취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부자들은 그 식사시간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자랑함으로써
가난한 형제에게 치욕적인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린도 교회는 가난한 자와 부자로 패가 갈라지게 되었고
갈등과 긴장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의 큰 과오는 본래의 의도를 상실한
그러한 애찬을 성찬이라고 오해하는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를 개탄하고 주의 만찬의 참된 의미를 역설하게 되었습니다.
▲주의 만찬의 중요성
①성만찬의 본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베푸시며
이 의식을 행할 때마다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마26:26-28).
그러므로 성만찬이란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는 의식입니다.
성도들은 이 성만찬을 거행 할 때마다 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기억하고
새롭게 신앙을 결단하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과거의 기억, 기념)
아울러 이것은 장차 미래에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나눌 천국잔치에 대한
상징적 의식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미래적 기대)
㉡ 유월절과 성만찬
바울은 유월절 만찬과 주의 만찬을 긴밀히 연결시키고 있습니다(고전11:25).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을 기념하며
지켜온 축제였습니다(출12:24-27).
예수께서는 인류의 대속을 위하여 오신 유월절 어린양이었으니
유월절 만찬은 예수의 성만찬을 예표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잔은 예수의 피로 세운 새언약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눅22:20)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인치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이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사역과
새언약을 영원히 기리는 의식인 것입니다
▲3. 고린도 교인에게 주는 책망의 메시지
먼저 바울은 주의 거룩한 만찬을 악용하고 공동체라는 성격을 모독하고 있는
무리들을 향하여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세우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니 그러한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하였습니다.
주의 거룩한 만찬은 반드시 공동식사와 구별되어
회개하는 마음으로 엄숙히 진행되어야 하며
공동식사에 있어서는 다같이 골고루 나누어 먹음으로 인하여
성도 간에 뜨거운 교제를 가질 수 있어야지
분쟁을 일으키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명하는 이 일(성만찬)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고전11:17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고전11:20
(1) "너는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2) "이것은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NIV에서도 "너희가 먹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다"라고 해석함으로써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당시 주의 만찬은 '애찬'(love-feast)과
'성만찬'(Eucharist)이 결합된 형태였던 바,
교인들은 집에서 형편에 따라 먹을 것을 싸가지고 교회에 모여서
공동 식사를 하면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행2:46;고후 8:14).
이런 애찬 후에 성만찬이 행해졌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애찬에서부터 교제를 나누지 않고
먼저 먹고 취함으로(:21)애찬과 성만찬을 일반 식사로 전락시켜 버렸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만찬이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이러한 폐단 때문에 주후 412년 칼타고 회의에서
애찬을 폐지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 후부터는 교회에서 애찬을 폐지하고 성찬만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떡을 가지사 (11:23) - '떡'은 성만찬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 아니라,
유월절 식사 과정에서 성만찬을 제정하였기 때문에(마26:17-19; 눅 22:7-20)
아마도 무교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성만찬의 의미는 '떡'이나 '포도주'가 어떤 것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11:24)
‘축사’는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 관습의 일부인 봉헌(奉獻) 의식을 반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의식을 통해서 일반적인 떡을
성만찬의 떡으로 바꾸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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