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6

몸에 밴 사랑의 실천

LNCK 2019. 12. 25. 07:42

몸에 밴 사랑의 실천                    6:1-4              여러 글 조합

 

 

몸에 밴 습관적 선행

말씀 전파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 쫓아내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과부를 찾아가시고, 고아를 불쌍히 여기시는 등...

 

복음서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예수님의 선행은 몸에 배셨다.

그러니까 습관적이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쩌다가 한 번 구제하고, 어쩌다가 한 번 선행을 베풀지만

예수님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거의 삶에 습관적으로 선행이 몸에 배셨다.

 

우리가 운전할 때, 거의 무의식중에 습관적으로 한다.

클러치 밟고, 기어 넣고, 깜박이 넣고, 백미러 보는 모든 것이 동시에 행해진다.

몸에 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르치시고, 병 고쳐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먹을 것 주시고, 귀신 쫓아주시고...

평소 습관으로 몸에 배신 주님!

우리는 조금 선행 한다고 하소연이나 엄살 부리지 말아야겠다!

 

예수님은 머리시고, 교회는 ''이다. 머리가 하는 일을 몸이 따라가야 한다.

곧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돌보는 일을 당연히 따라 해야 한다. 정말 몸이라면!

 

헨리 나우웬이 말했다; 교회도 조직이라서 부패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패하지 않을 수 있는가? 가난한 자를 구제할 때이다!”

 

가난한 자들로 인해서, 그들을 도움으로써, 교회는 교회답게 세워진다.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을 남겨두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경건의 세 가지 국면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경건은 '기도'(6:5-15)

자기 자신과 관계에 있어서 경건은 '금식'(6:16-18)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경건은 바로 '구제'(6:1-4).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위 3가지 경건에 힘썼지만,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구제가 빠진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 아니다. 1:27

 

공산화, 이슬람 국가 발생한 이유

7세기 이슬람의 발흥, 20세기 공산주의의 출현 - 그 엄청난 재앙은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을 제시하는데 실패했다는데 있다.

교회는 대지주들의 편을 들었다.

정치가, 성직자, 신학자들은 추상적인 문제에 대해 논했고,

실제적인 문제는 주도면밀하게 회피했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 토지가 없는 다수민중들이 봉기해

이슬람, 혹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오늘날도 교회가 구제에 힘쓰지 않으면, 사회 불안이 가중된다.

 

교회가 구제에 힘쓰는 것이 혹시 그 규모가 미약할지라도

선구자적 모범이 되어서

모든 사회와 기업들이 교회의 을 따라하게 만드는

선구자(또는 촉매) 역할을 하는 것도 -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신 이유

왜 하필 약속하신 성령은 승천 후 50일째 되던 날(오순절)에 임하셨나?

신학자들은, 이것은 구약의 50년째 해방을 주는 희년과 관련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오순절 성령=희년 정신의 성령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성령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를 유무상통하면서

진정한 희년 정신을 회복했다.

성령충만한 교회는 구제에 힘쓰며 희년 정신을 회복한다.

그러나 성령이 떠나가신 교회는 구제가 없거나 형식적이다.

 

욕심쟁이 부자는 이름마저 지워진다.

16장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천국에 간 나사로는 엘 아자르’(하나님은 나의 구원)라는 히브리 이름을

헬라어식으로 고친 나사로라는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나오지만

 

부자는 그가 누구인지 이름조차 안 나온다. 단지 어떤 부자일 뿐이다.

천국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도 당연하다.

확대 해석하면 교회 이름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나를 복되게 하는 자

사람은 스스로 복되게는 잘 할 수 없다.

보통은 주변 사람이 나를 위해 복을 빌어 주어야 복을 받고, 행복을 느낀다.

 

사울 왕에게 다윗 같은 훌륭한 장수 역시 나를 복되게 하는 자였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그 복을 오래 누리지는 못 했다)

에게는, 자기를 잘 이끌어주는 시모 나오미가 나를 복되게 하는 자였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나를 축복해 주고, 나를 존경해 주고,

내가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바라는 나를 복되게 하는 자가 반드시 필요한데

나를 통해 하나님의 구제의 손길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나를 축복해주고, 내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이런 나를 복되게 하는 자가 없는 사람은(구제 없는 사람은) 정말 불행하다.

구제나 무료급식은 배고픈 저들을 도우기 이전에

딱딱하게 굳어진 우리들 마음이 부드럽도록 도우는 시간이며

인색한 우리들 마음이 넉넉하도록... 우리를 스스로 돕는 시간이다.

 

 

전철역 성만찬

 

얼마 전의 일이다. (어느 가톨릭 신부님)는 회의 차 지방에 갔다가

밤늦은 시간에 집 가까이 있는 국철 역에 도착했다.

역 광장으로 내려오니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국철 역을 배경으로 숙식을 해결하고 계시는 노숙자분들을 위해

인근 한 교회신자들의 무료급식 봉사가 한창이었다.

 

저희 수도회에서도 노숙 청소년들을 위해 뭔가 해야 되지 않겠냐는 논의가 있어

저는 한참동안 바짝 다가가서 유심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봤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봉사자들의 일사 분란함이었다. 손발이 척척 맞았다.

배식봉사를 하시는 분들, 뒷정리를 하시는 분들, 질서를 잡는 분들...

아마도 많은 연구과 시행착오, 기도 끝에 얻어진 결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봉사자들이 환한 얼굴과 기쁜 마음으로

봉사에 전념하고 있음에 보기가 좋았다.

      

줄은 모두 세 줄이었다.

첫째 줄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쇠고기 국밥을 나눠드리고 있었다.

저도 한 그릇 받아먹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냄새가 구수했다.

국밥을 받아든 분들의 얼굴이 일순간 환해졌다.

잠시나마 행복함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그분들에게 그 순간은 아마도 천국을 맛보는 순간이었으리라!

 

둘째 줄에서는 긴 밤을 꼬박 새우잠을 자야할 노숙자 형제들의

새벽녘 출출함을 달래주기 위해

먹음직스럽고 커다란 빵이 한 덩이씩 나눠지고 있었다.

보너스로 빵까지 받아든 분들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깃들었다.

 

세 번째 줄에서는 후식으로 커피를 원하는 분들에게 일일이 타드리고 있었다.

노상이었지만, 소박했지만 정성이 담긴 풀코스 서비스를 받은 분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20분 이상 배식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저를 흘끔흘끔 바라보시던

봉사자 아주머니께서 참다 참다 못해 제게 한 소리 크게 외쳤다.

 

아저씨, 백날 여기 서 있어봐야 소용없어요. 아저씨도 저 뒤로 가서 줄 서세요!”

‘%*@^~*?’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제가 받은 충격이 컸지만

당시 역 앞에서 저는 느낀 바가 많았다.

 

밤늦은 시간 잠깐이었지만, 역전에서 있었던 그 소박한 행사(무료급식)

진정 감동 깊은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소박하지만 정성을 다해 준비한 따뜻한 음식들이

세파에 지친 이웃들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사랑과 나눔의 축제,

다름 아닌 최후의 만찬, 즉 미사였다. (후략, 천주교 신부의 글)

 

 

성배를 찾아서

 

중세 어떤 귀족이, 신실한 제자로서 교회에 기여하기 위해

성배(최후의 만찬 당시 포도주를 담았던 잔)를 찾아 대 장정을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다 팔고 정리해서 여비로 쓸 돈으로 모두 바꾸었다.

 

그리고 말의 힘찬 포효와 함께 막 성을 출발하던 터였다.

마침 성밖에서 구걸하던 거지가 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며 손 내밀었다.

 

귀족은, 성스러운 장정을 떠나는 길에 웬 거지가 재수 없게 달라붙느냐며

부정 탄다는 식으로 거지를 말굽으로 밀치며 힘차게 장정을 떠났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아무리 세상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성배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흰머리가 덮이며, 허리도 구부러지고, 여비도 다 떨어졌다.

 

이제 그 귀족은 축 늘어진 어깨로,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 성 앞에 도달했을 때, 옛날 그 거지는 아직 거기에 살아있었다.

거지는 똑같이 자비를 베푸소서!’라며 구걸의 손을 내밀었다.

 

귀족은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이전에 없던 동정심이 발휘되었다.

자기 주머니를 뒤져보니, 이제 남은 것이라곤 오직 달랑 빵 한 조각뿐이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그 빵의 반을 떼서 거지에게 주었다.

갖고 다니던 컵으로 근처에 흐르는 시냇물을 떠서 목을 축이라고 건네주었다.

 

바로 그 순간,

귀족이 건네주는 그 컵이 환하게 빛을 발하면서 성배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성배

가난한 사람과 나누는 구제의 자리에서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교회당에서 받는 성만찬도 필요하다.

그러나 거리에서, 배고픈 사람들과 나누는 식사도...

다름 아닌 주님의 손으로 떼어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나누어주시는

거룩한 떡과 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구제를 습관화 합시다!

 



'분류 없음 > 200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는 나의 방패  (0) 2019.12.25
가난이 내게 준 선물  (0) 2019.12.25
성찬식의 또 다른 의미   (0) 2019.12.25
나라가 임하옵소서!  (0) 2019.12.25
뜨거운 교회, 뜨거운 성도   (0) 2019.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