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역사를! 고전2:1~5
2006.09.10. 인터넷설교 류영모 목사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7-29
◑I. 잘난 사람만 쓰시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은 처음부터 못난 사람이기 때문에
못난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도, 잘난 사람만 쓰실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지혜 있고 영향력 있고 높은 신분의 사람만 쓰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사람들,
세상적 가치로 볼 때 잘나지 못한 사람들을 택하셨다.
▶세상의 위인들과 성경의 위인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세상의 위인들은 모두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성경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낸 사람들이었다.
기독교 역사는, 못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은 저런 사람을 통해서도 엄청난 일을 하시는구나!’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였다.
하나님은 못난 사람을 불러 쓰시며,
당신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가를 증명해 주신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여 쓰실 때,
능력 순이 아니라, 못난 순서대로 부르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잘나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워낙 못나서 사도가 되었다고 말한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엡3:8
저도, 한 번도 제가 잘나서 목사가 되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저 같은 사람은 ‘목사라도 시켜 놓아야 믿음생활 제대로 할 것 같으니까
목사를 시켰다’고 생각한다.
▶약한 자를 부르시는 시청각 자료들
창세기 12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12장 이전에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그만큼 뭔가 드러낼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고작 우상 장사하던 사람이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가치 없는 일들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신다.
야곱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 같은 인간을 선택하셨는지 모르겠다고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하나님은 야곱 같은 인간도 부르셨다. 왜? 너를 부르기 위해서.”
야곱 같은 인간을 부르셨다면, 나 같은 인간도 하나님은 부르실 수 있다는
‘시청각 자료’로 야곱을 쓰신 것이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을 보시라. 그 미련한 제자들을 불러, 당대에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힘과 헬라철학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지 않는가!
사도바울은 묶인 죄수의 몸으로, 로마의 네로 황제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세상에서는 많이 배워 지혜로운 사람을 쓴다.
튼튼하고 건강한 사람을 쓴다. 훌륭하고 잘생긴 사람을 쓴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죄인과 병든 자를 부르러 오셨다고 친히 말씀하셨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6
성경의 위인들을 보면 대단한 것 같지만 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다.
약하여 넘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근심하고,
때로는 공포에 떠는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대단한 사람에게만 신경 쓰는 분이 아니시다.
바로 우리 같은 사람, 약하여 넘어지는 사람,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런 우리들을 불러 쓰시기를 기뻐하신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인간은 그가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들 역시 구원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II.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
그런데 문제는 똑같이 기도하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고 복을 받는데
왜 어떤 사람은 실패를 하는가?
똑같이 예배드리고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능력 있는 삶, 영향력 있는 삶을 사는데,
왜 어떤 사람은 늘 넘어지고 무력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똑같이 목회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고 행복한 목회를 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불행한 목회를 하는 것일까?
▶우리의 실패의 변명들
①어떤 이는 지식이 모자라서 실패한다고 생각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것이 많으면 능력 있는 사람이 되리라 생각한다.
②또 어떤 이는 경험이 부족해서 실패한다고 생각한다.
③건강이나 가정환경 때문에 자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가정이 너무 어려워서, 가족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돈이 힘인데, 돈이 없어서 아무 일도 못한다고 미리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우리의 실패의 진짜 이유
아니다. 지식, 돈, 경험, 넉넉한 환경 따위는
신앙생활의 승리, 능력 있는 삶, 성공적인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물론 없으면 불편할 수는 있다. 불편의 문제와 불행의 문제는 다르다.
불편하다고 불행하지는 않다.
더구나 행복한 신앙생활, 능력 있는 크리스천의 삶과 환경은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자신의 신학이나 환경을 의지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오히려 자기 강함(↔약함) 때문인 것이다.
더구나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좋은 조건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이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파워로 하는 것이지,
‘세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두려워한 이유
오늘 본문 고전2:3절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나온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무엇이 大사도 바울을 이토록 두렵게 하고 약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늘 바울을 괴롭히던 육신의 질병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
·외모적 콤플렉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이 어눌해서 미리 겁을 먹은 것이라고도 한다...
·핍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 고린도 도시의 위용에 주눅이 들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모두 쓸데없는 추측이다.
이는 모두 그리스도인의 능력과 당당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추측일 뿐이다. 그럼 진짜 두려워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아덴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두려워했다.
사도바울은 2차전도여행 중 고린도를 방문(행18:1) 하기 직전에
헬라의 수도 아덴의 전도경험이 있다.(17:16~34)
아덴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의 거장들이 활동하던
헬라 철학의 본거지다.
바울이 이곳에 도착하고 보니 바울의 철학적 끼가 발동한 것이다.
바울은 유대 종교뿐만 아니라,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헬라 철학에도 능통했다.
그래서 전도를 하더라도 이들에겐 철학적 방법으로 전도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울은 아덴 사람들과 철학적 논쟁을 하고 변론을 하기도 했다.
말싸움에서 보기 좋게 승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제대로 전도를 할 수 없었고, 아덴에서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실패했다.
다른 곳에서처럼 모진 핍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전도에 실패를 한 것이다.
철학적 말싸움을 하는 사이에 십자가 초점을 잃은 것이다.
자신의 지식, 철학, 경험을 의지하는 사이에 성령을 의지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실패의 원인이었다.(자기의 강함을 의지한 것)
오늘 우리의 실패 원인은 이제 분명해졌고
우리가 능력 있는 삶,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도 분명해졌다.
◑III. 먼저 버려야 할 것들
사도 바울은 아덴의 실패를 통하여 크게 깨닫고 큰 결단을 하게 된다.
신앙의 신비, 전도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는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 2:1
사도 바울은 아덴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고린도에서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아름다운 것"이란 단어다.
말의 아름다움, 지혜의 아름다움이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이 불신자를 전도할 수 없더라는 것이다.
논쟁에서 이겼다고 그들이 승복하는 것은 아니다.
달변이나 웅변이 영혼을 구하지는 못한다.
삶이 없는 말은 아무런 능력이 없다.
불신자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2:1절에 이어, 4절에서도 똑같은 결심을 한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4절)
▶전도에서는 물론, 모든 신앙생활에서 내 것 들어내고 나를 자랑하면 실패한다.
은혜가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내 의는 무익하다. 내 재주, 내 경험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오히려 이웃에게 해가 될 때가 더 많다.
결단하자. 사도 바울처럼 포기하기로!
배설물로 여기기로! 버리기로! 그래야 새로운 능력으로 나아 갈 수 있다.
◑IV. 그리고 붙들어야 할 것 - 오직 십자가
사도 바울의 결단, 그리스도인의 능력, 복음전도의 가장 탁월한,
아니 유일한 무기가 무엇인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여기 "작정하다"는 말이 헬라어 원문으로 "크리네인"이다.
이 말은 대법원에서 내리는 최종적인 결정을 의미한다.
·복음전도에서 달변이나 설득이 아무소용이 없었다.
그것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최종결단을 했다.
·예수님 통해 복 받겠다고 처음엔 예수님께 왔다.
그러나 이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겠다는 것이다.
·병 낫겠다고 예수님께 왔다.
그러나 이젠 그것이 아니더라도 십자가의 예수님만 붙들겠다는 것이다.
·평안을 얻겠다고 예수님께 왔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고민을 하고
거룩한 수고를 하더라도 예수님만 의지하겠다는 것이다.
·십자가 없는 신앙, 십자가 없는 신학은 깨끗이 그만두겠다는 것이다.
고린도에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했더니 거기서 역사가 일어났다.
굳은 심령이 부서지고 기적이 일어났다. 교회가 세워졌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다. 도시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능력이다. 오직 십자가만 전하리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편지를 쓰면서 다시 한번 결단하는 것이다.
(참고로, 고린도전서는 행19장의 2차전도여행 고린도방문 후
2~3년 뒤 3차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쓰여 졌다. 고전16:8)
▶자랑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뿐!
바울은 기독교를 파는 외판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사"였다.
외판원은 어떻게 하든지 상대방이 그 물건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사도록
여러 가지 달콤한 말로, 멋있는 말로, 그럴듯한 표현을 해가며 물건 선전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외판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사였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전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갈6:14
모든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바울 사도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가 배워야 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우리가 닮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다.
(후략)
꼭 기억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평범한 당신을 통해 비범한 신앙 역사를 이루고 싶어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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