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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NCK 2019. 12. 26. 13:10

대칭                          7:24-27

   

장경동 목사 설교   06.09.03.

 

 

내가 믿는 진리가 정말 확실한지 알아보려면,

거기에 대한 반대주장, 반대적 측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한식이 맛있다가 진리가 되려면

한식만 먹고 나서 그렇다고 주장하면 설득력이 없다.

양식, 일식, 중국식, 프랑스식을 다 먹어보고 난 다음에

(반대적 측면을 고려해 보고난 다음에) 비로소 한식이 최고다!’ 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진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구원에 관한 교리와 지식은, 너무 중요한 문제이므로,

내가 믿는 바의 확실성을 위해, 그 반대쪽 측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이 설교제목이 대칭’(반대쪽 측면)인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만히 보면, 항상 대칭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모든 것을 일변도로 말하지 말고, 균형을 이뤄서 보고, 말해야 한다.

 

교회 다닌다고 무조건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한쪽 면으로만 보고, 한쪽 면만 너무 강조해서 가르치면

어쩌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지만, 인간도 대충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래서 예부터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도 구원받아야 될 사람이 많다고 설교해 왔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13:47-48

 

그물 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교회 울타리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로 따로 따로 추려진다.

 

다른 표현으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은 거기서 쫓겨났다.

역시, 교회를 다녀도 마지막 심판 때 쫓겨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이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 속에 약화되는 경향이 많다.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신학이 당연히 맞지만, 거기에 너무 치우쳐서

성경의 다른 가르침과 균형을 잃어버릴 때 그렇게 되기 쉽다.)

 

 

1. 지혜로운 자 와 어리석은 자의 대칭

 

지혜로운 자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요, 집을 반석위에 지은자요,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집이 무너지지 않는 자다.

 

어리석은 자는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요.

집을 모래위에 지은자요,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집이 무너진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지혜로운 자어리석은 자를 구분하여 가르치셨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교회 오래 다닌 모든 사람이

위에서 말한 지혜로운 자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혜로운 자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순종하는) 신앙인가, 아닌가의 차이다.

 

은혜로 순종하며 산다.

그런데 대부분은, 사람은 말씀대로 완벽하게 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말씀대로 완벽하게 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은 다 받는다고 생각하며 믿고 살아간다.

 

이런 개념의 실수의 함정을 제가 찾아냈다.

은혜로 구원받듯, ‘말씀에 순종하는 힘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다.

마찬가지로,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혜로 구원 받는다.’ 말하면서,

은혜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산다.’ 라고는 생각지 못하는가?

 

은혜로 구원은 받고, 순종의 삶은 자기 노력(은혜)으로 살려는가?

은혜로 구원받듯, 은혜로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

 

제 말 뜻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포기하는 이유는,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인데,

그러나 은혜로 구원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은혜로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용서하는 것, 왜 자기 노력과 자기 의지로 용서하려는가?

은혜로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다.

 

은혜로 순종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사람은 말씀대로 완벽하게 살 수 없다.’고 단정 지어 놓고

(그래서 거의 제멋대로 살면서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옳은가?

 

4:2-3에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로워 졌다고 증거 하지만

2:21에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로워 졌다고 증거 한다.

우리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2:21

 

성경은 이와 같이 한 주제에 대한 상반된 가르침을 대칭적으로 설명한다.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서로 대칭이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 대칭된다. 믿음이 곧 행함이요, 행함이 곧 믿음이다.

은혜로 구원받듯, 은혜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여러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포기하지 마시라!

구원은 은혜로 받고, 순종은 자기 노력으로 하려니까 포기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은혜로 말씀에 순종대신에,

자기 의지의 노력으로 순종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인간은 로봇이 아니고, 자기 행동에 책임지는 존재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은혜로 순종이라고 말하면, 내가 불순종한 책임도 주님께 있게 된다.

자기의 순종, 불순종의 책임이 하나님(은혜)께 있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자기 자신(노력)에게 있다는 뜻으로 자기도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말한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는 늘 결심하고 결단한다. 거기에 주님이 은혜로 도우신다.)

 

사람이 믿기만 하고 말씀대로 못 살아도 된다면,

주님께서 왜 이런 말씀(모레위에 집 짓는 어리석은 자)을 하셨겠는가?

 

그러므로 무조건 내가 믿는다!’에 만족하지 말고,

내가 순종해서 반석위에 짓는지, 불순종해서 모레위에 짓는지... 따져보자!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말씀에 순종해서 살고자 하는 삶이 자연적으로(성령의 도우심으로) 수반된다.

 

 

2. 좋은 열매 와 나쁜 열매의 대칭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마3:10

 

좋은 열매는 곡간에 들이고, 나쁜 열매는 찍어 버리신다는 것이다.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라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이해하는 신자들이 꽤 있다.

성경은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과 대칭,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한쪽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지만

동시에 지옥으로도 보내신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이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기는 무조건 구원받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면...

 

물론 현재 교회 생활에 충실한 성도들은 많이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는 아니므로,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도 성도들에게 늘 지옥 간다!’라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서도

안 되지만, 어쨌든 역사적으로 옛날에는 심판 쪽으로 치우친 때가 있었는데,

21세기는 너무 사랑 쪽으로 치우친 것은 아닌지...

 

 

3. 알곡 과 쭉정이의 대칭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3:12

 

다 알곡이면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시겠는가?

안타까운 것은 자기들이 모두 다 알곡인줄로 착각하고 있다.

알곡이 아닌 것이, 알곡인줄 알고 착각할까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4:1,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온다.

예배에 나왔다고 무조건 하나님께서 다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회개한 세리와 창기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회개하지 않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자.

여러분은 알곡인가? 쭉정인가? 심각하게 고민해 보자!

 

 

4. 슬기 있는 다섯 처녀 와 미련한 다섯 처녀

두 종류의 사람들이 다 예수 믿는 교인들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라면 신랑을 기다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예수 믿고 교회당만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에게 은 다 있는데, 다만 기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모든 사람이 교회는 다 다니는데, 성령의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바울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베드로회개하여 ... 성령을 선물로 받아라고 설교했고

그래서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 성령 받은 사람이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 성령을 받는 것이다.

 

집사님, 예수 믿으면서 성령 받으셨죠?” 이렇게 목회적 접근을 해야 한다.

집사님, 예수 믿고 애들 잘 키우고 사업 잘 되세요!” (X)

 

교회 다니면서 성령도 못 받았는데,

애들 공부 잘하고 신랑 돈 잘 버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목표가 먼저 바로 되어야 한다.

 

 

5.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자와 1달란트 받은 자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자 - 착하고 충성된 종, 주인의 잔치에 참여한다.

1달란트 받은 자 - 악하고 게으름,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

 

나는 주님이 주신 달란트(물질, 재능)를 잘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묻어두고 사용하지 않는가?

 

달란트를 잘 사용하면, 구원과 칭찬이 있을 것인데

그것을 잘 사용 못하니까, 도 어렵고 구원도 위태하게 된다.

 

노래방 가서는 잡은 마이크를 도무지 놓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면서

그 달란트로 왜 성가대는 하지 않는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 모든 사람은 달란트가 각각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가 아무 것도 사용하는 것이 없다면... 1달란트 받은 자이고

그런 자는 바깥 어두운 데로 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비유를 통해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거늘,

왜 자신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가?

 

요즘 교인들은 워낙 마음이 딴딴하므로

칫솔로 닦아도 안 되고, 스케일링을 해야 한다.

망치로 안 되고, 아스팔트 깨는 굴착기로 뚫어야 할 판이다.

 

회개하는 자는 자꾸 더 회개하는데, 회개해야 할 자는 자꾸 더 회개하지 않는다.

충성하는 자는 자꾸 더 충성하는데, 충성해야 할 자는 자꾸 더 충성하지 않는다.

있는 자는 더 많아지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여러분, 자신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라고 왜 가정 안 해 보시는가?

자기 생각만 올바르면, 5달란트 받은 사람인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가진 좋은 생각들이 일장춘몽인 것이 얼마나 많은가?

행동이 없는 생각이 무슨 힘이 있는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처럼

꿈은 모두 다 크지만,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노력과 헌신이 있는가?

 

공부 잘 하는 학생은, 한 개 틀린 것 가지고도 괴로워서 밥을 못 먹는다.

그런데 공부 못 하는 학생은, 자기가 몇 개 틀렸는지도 모르고,

밥도 잘 먹는다. 부모가 보면 속 터지는 일이다.

 

성가대 봉사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또 봉사한다.

그에 반해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은, 더 안 한다.

 

내가 1달란트 받은 사람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 보자.

죽고 난 후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6. 양 과 염소의 대칭

25:31이하에, 양은 오른편, 염소는 왼편으로 나뉘어 졌다.

()편에 있는 자들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했다.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 하였다.

내가 목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는 참 좋은 종교다.

왜냐하면 지극히 작은 자와 주님을 일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지극히 높은 자와 주님()을 일치시킨다.

 

지극히 작은 자 = 주님이니, 얼마나 주님을 섬기기 좋은가!

만약 지극히 높은 자 = 주님이면, 가까이 가기도, 섬기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극히 작은 자가 교회에서 도리어 멸시당하기 쉽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에 불만이 한 가지 있다.

주리고, 헐벗고, 감옥 간 사람들.. 그들의 도덕적 해이를 왜 꾸짖지 않으시는가?

누가 주리라고 했냐? 스스로 열심히 살면 주릴 일도 없을 것이거늘,

왜 자기가 잘못해서 가난하게 살면서,

주님은 있는 자들에게 그들을 안 도와준다고 책망하시는가?

책망 하시려면, 도덕적 해이에 빠진 자들이 먼저 책망 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거기에 대한 답은 아래에 계속 된다.)

 

 

부자와 나사로의 사건의 해석

 

도대체 부자가 뭘 그리 잘못했으며, 나사로가 뭘 그리 잘 했는가?

부자는 그래도 거지를 평생 자기 집 앞에 얻어먹게 배려한 사람이다.

 

요즘 부자들 보라! 자기 집 앞에 거지들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한다.

큰 슈퍼마켓 근처에 리어카 상인, 좌판도 못 놓게 한다.

 

그런 그렇게 관대한 부자를 지옥 보내고,

평생 얻어먹은 거지는 천국가고...

그게 과거의 나의 불만이었다.

 

세상에서 살 때는 부자처럼 유족하게 살다가,

천국엔 갈 때는 나사로처럼 가면 얼마나 좋은가?

 

왜 주님은 (부자에게) 안 도와줬다고 책망하시면서,

(나사로에게) 구걸하는 도덕적 해이를 책망하지 않으실까?

양자를 모두 혼내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깨닫다

그런 갈등 가운데 오래 지내다가, 요즘은 해답을 어느 정도 찾았다.

 

나는 지금까지 너는 네 일 알아서 해라, 나는 내 일 알아서 한다!’

라는 가치관으로 살아왔다.

각자가 자기 일을 성실히 알아서 처리하면, 세상은 질서 있고 평안해진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렇지 못하더라!’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네가 스스로 네 일을 알아서 잘 해 내지 못하니까,

내가 너를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믿고서 구원받고,

조카 롯은 롯대로 믿어서 구원받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게 되는데, 롯은 그게 안 되니까

아브라함이 롯을 챙기고, 도와주고, 위해서 기도해서

결국 구원받도록 도와주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만 구원받는데 만족하지 말고,

구원받지 못하는 이웃 사람을 도와줘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운행하시는 원리라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성가대에 설 수 없기에, 누가 가서 권면해 줘야 되고,

그가 스스로 새벽기도 나올 수 없기에, 누가 가서 깨워줘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다. 사랑의 원리다!

 

동생이 사고 쳐서 구치소에 갔다고 치자.

그 때 어머니와 형은 대처 방식이 각각 다르다.

 

형은 놔 둬, 엄마! 그 자식은 감옥 가서 정신 차려야 돼!” - 율법이다.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빼 내라!” - 사랑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누가 병들고, 헐벗고, 주리고, 감옥에 가면

지가 잘못해서 저렇다!’라고 율법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다.

아무 잘못 없는, 아무 책임 없는 내가 기꺼이 수고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것은... 최후에 염소의 심판을 받는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서 구원받았다.

그런데 우리가 조건을 내세운다면...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멸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갇힌 자, 병든 자, 굶주린 자, 헐벗은 자를 도와줘야 한다.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저절로 되는 면이 있다.

 

왜 부자와 나사로에서, 부자는 구원을 못 받았을까?

돈이 많아서?, 구제를 안 해서? - 아니다.

 

결정적인 해답이 눅16:30절에 나온다.

가로되 그렇지 아니 하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본문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가서 전도하면 저들이 회개하겠다는 것이다.

 

부자의 잘못은, 돈으로 자기만 즐겼기 때문에가 아니라

부자가 구원받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 회개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거지지만 회개하였으므로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할 것이 없더라도, 더 열심히 회개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봉사하지만, 더 열심히 봉사하자.

있는 자는 받아 누리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듯이

은혜로 순종하는 생활이 선순환적으로 더 확대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