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자의 스태미나 이사야50:4~11 06.08.13.
권성수 목사
◑1. 사명자의 말씀 준비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사 50:4
▲1. 학자
배우는 자가 되어야... 곤핍한 자를 도운다.
여기서 ‘학자’의 뜻은 히브리어로 ‘리무딤’인데
대학교수 같은 학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 가르침을 받는 자’를 뜻한다.
물론 ‘학자’도 배우는 자이지만, 그 보다는 ‘제자’가 더 가깝다.
영어성경은 instructed(가르쳐진 자), learned(배운 자)로 번역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할 사명자이다.
사명자는 먼저 학자(배우는 자)로서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곤핍한 자녀, 구역식구, 성도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곤핍한 사람, 삶이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이 많다.
말씀이 기근이 있을 때, 누구든지 그렇다.
우리가 학자(배우는 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에 곤핍한 많은 사람들을 말씀으로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그런 사명감을 모든 성도들은 굳게 가져야 할 것이다.
▲2. 깨우치사..
배우는 자로서 말씀을 배울 때.. 깨우침(각성)된다.
사람은 쉽게 기계적인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말씀을 가르치지만, 기계적인 매너리즘으로 가르치면, 아무 열매가 없다.
그런 타성을 깨야 한다.
그런 타성 또는 매너리즘을 깨려면... 날마다 배워야, 깨우쳐야 한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도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배우고, 묵상하는 일을
계속해자. 그래서 매너리즘과 타성을 깨고, 새롭게 깨우치고 각성되자.
▲3. 매일
지난번에 오신 초청강사 박세록 장로님(북한의료선교)으로 인해
우리 성도들은 은혜를 받고 새롭게 신앙을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일년에 한 두 번 정도만 그런 각성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현실이다)
매일(본문에 아침마다) 그런 각성과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침에 새로운 각오(각성)로 시작해야 하고
밤에 자기 전에 만족감 가운데 누울 수 있어야 한다.
▲4. 말씀의 실천, 행함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사 50:5
깨우침을 받은 사람(귀가 열려진 사람)은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된다.
거역지도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는 삶을 살려고 애쓰게 된다.
사명자는 말씀을 깨닫고 행해야... 행한 것을 전달할 때 더 힘이 있다.
◑2. 사명자의 난관 극복
▲사명에 발동이 걸리면.. 스태미나가 넘친다.
기독교 리더쉽 지도자로 유명한 존 맥스웰은 말했다.
조직을 인위적으로 키우면 부작용이 생기는데,
조직원들에게 사명감(동기)을 고취시켜주면, 그 조직이 저절로 성장한다.
사명에 발동이 걸리면 스태미나가 넘친다.
스태미나란 - 견디는 힘을 말한다.
사명이 불분명한 사람은...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만족이 없이 공허하다.
*관련글:
부흥사 빌리 썬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재능이 없어서 실패하는 사람보다
목적이 없어서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했다.
성공하는 사람은 뭔가에 미쳐있다.
자기 나름대로 어떤 사명에 발동이 걸려 있다.
우리가 매일 말씀으로 학자처럼 깨우치면
→자기 사명감을 날마다 새롭게 각성하게 되고,
→그러면 스태미나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
▲사명자는 욕먹는다.(타인과의 싸움)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50:6
이렇게 사명감으로 말씀을 전하면 환영만 받는 것은 아니다.
때리는 자들이 나타나고,
수염을 뽑는다는 것은, 유대 문화적으로 가장 큰 모욕을 뜻한다.
수욕과 침 뱉음도 당한다.
교회에도 ‘나서서 일하면 욕먹는다.’는 말이 떠돌아다니는데, 맞다.
많이 일할수록 많이 욕먹는다.
크게 일하면 크게 욕먹는다.
올라가면 욕먹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그런 각오 없이는 올라가면 안 된다.
중요한 일을 맡으시면, 반드시 그 난관을 각오하셔야 한다.
▲당당함으로 도우심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50:7
이사야는,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얼굴에 철판 깔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당당함을 주셔서 사명자를 도와주신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찌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 50:8~9
▲결국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했던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말했다.
“우리가 정복한 것은 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등산 도중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정복했다는 뜻.
너무 숨이 차고 힘이 들어서 ‘이제 그만 두자!’는 자신을 이겼다는 뜻이다.
우리가 일을 할 때, 제일 큰 난관을 제공하는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성을 정복하는 사람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사명을 감당하다가 난관 앞에 봉착할 때,
이제 관두고 싶은 마음, 포기하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을 이겨야 한다.
주님이 주신 참된 사명을 가진 사람은, 은혜로 그것을 이긴다.
▲버티는 사람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이기자, 영국군을 지휘했던 웰링턴 공작은
“영국군이 프랑스군보다 더 용감하고 강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영국군이 프랑스군보다 5분 더 버텨냈기 때문에 이겼다!” 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 인생의 승패도 마찬가지다.
실패하는 사람은, 난관 앞에서 버티지 못하고 관두는 사람이고,
성공하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끝까지 5분만 더 버티는 사람이다.
참된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 은혜로 버티는 힘이 세다.
▲한 라운드만 더 버티자!
19세기 말, 헤비급 복서 챔피언 짐 포르벳시(부정확)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시합에 임할 때 ‘한 라운드만 더 버티자!’는 심정으로 싸운다.
어떤 때는 공이 울렸지만, 링 중앙까지 나가는 것조차 힘들어서
발을 질질 끌며 나갈 때, 이를 악물고 한 라운드만 더 버티자고 다짐한다.
힘이 다 빠져서 팔을 올려 내 얼굴을 방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한 라운드만 더 버티자’며 이빨을 꽉 깨문다.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눈에는 피멍이 들고
차라리 상대가 빨리 나를 쳐서 내가 넉아웃(KO)되어 실려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에도 ‘한 라운드만 더 버티자!’고 결심하면
어느 듯 승리가 내게 돌아온다.
▲매가 날아가면 까마귀 떼들이 공격한다고 한다.
그런데 매는 그들을 맞대응하지 않고 써클을 넓게 그리며 날면서
하늘로 높이 올라간다고 한다.
그러면 까마귀 떼들이 따라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비판을 받을 때, 만약 잘못한 것이 있으면 고치면 된다.
그러나 사명에는 흔들리면 안 된다.
▲사명자의 마음 각오
아프리카 로디지아에서는
무조레 주교에게 아프리카 국민회의 의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다.
그 자리는 항상 백인 정권에 의해 투옥, 추방, 살해를 당했다.
주교는 기도하며 고민했다.
그 때 어떤 친구가 그에게 이런 시를 보내 주었다.
주교는 이 시를 읽고 큰 사명감을 회복하고, 그 길을 갔다고 한다.
사람들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이기주의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라!
당신이 좋은 일을 해도 사람들은 당신이 이기적 속셈을 가졌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이 성공하면 가짜 친구들도 얻고, 진짜 적들도 얻을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당신이 오늘 하는 선행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진실하면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진실하라!
가장 큰 아이디어를 가진 가장 큰 사람들은
가장 작은 아이디어를 가진 가장 작은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될 것이다.
그래도 큰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들을 좋아하지만 강자들을 추종할 것이다.
그래도 약자들을 위해서 일을 하라!
여러 해 세워놓은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것이다.
그래도 세워라!
당신이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도 세상은 당신을 차 버릴 것이다.
그래도 최상의 것을 주라!
▲사명자의 스태미나의 원천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사 50:7
하나님께 받은 사명자는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 사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다 이기시고 그 사명을 감당하신 것은,
본문에서 보듯,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한 것은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사 50:7 때문이다.
사명자는 날마다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통해 각성하고,
자기 사명을 계속하기 위한 스태미나를 얻어 나간다.
그래서 어떤 난관이 와도 그것을 돌파하고 사명을 감당해 간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살 때,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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