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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붙드셔서

LNCK 2019. 12. 26. 19:57

주님이 붙드셔서                  22:24~34                06.07.09.

   

박완철 목사

 

*내용요약: 하나님은 우리의 못나고 배반하는 모습을 뻔히 보시면서도

또한 우리가 넘어질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때로는 내버려 두신다.

우리가 그런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 신뢰를 완전히 잃게 하신다.

그래서 온전히 주님만 간절히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 실패에 담긴 주님의 섭리다.

 

그런데 내가 실패하면서도 완전히 망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믿음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님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인데...

이렇게 돌이킨 후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는 종이 된다는 내용.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2

 

 

1. 도무지 가능성 없는 제자들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어떤 성도님이 이렇게 겸손히 고백했다.

목사님,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제 자신은 도무지 잘 변화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말 나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면 그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오늘 본문에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다투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직접 곁에서 따라다녔건만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모습을 본다.

 

1. 3년 동안 전혀 변화가 없음

지금 이 본문의 시점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막 끝내신 때다.

그야말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실 일만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22:24-34

 

그런 마지막 상황에서도 제자들이 서로 자리다툼이나 연련한 것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3년이나 줄곧 따라다녔지만,

전혀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인다.

 

스승의 죽음을 코앞에 둔 순간,

서로 마음을 합하고 뭉쳐도 모자랄 판에,

 

최후의 성만찬을 바로 끝낸 이런 엄숙한 순간에,

서로 시기, 경쟁, 비교의식이 그치지 않고

우리 중에 누가 큰 사람이냐?’

서로 다투었다는 것은 참으로 실망스런 일이다.

 

예수님을 따라 다닌다고 했고, 그것도 가장 훌륭한 제자들 12명인데

그들의 최고 관심은 자기 존재를 높이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기를 높이고 과시하고 싶은 이 욕망, 이것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스승의 죽음을 목전에 뻔히 바라보면서도

전혀 거기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안중에도 없었다...

 

2. 하나님나라를 이런 제자들에게 맡기시겠다니...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22:29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이런 형편없는 자들에게 중요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시겠다는 예수님의 계획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예수님께 맡기신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나도 너희에게 맡겨..’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제자들이 어떤 상황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일보직전까지 싸움질이나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소중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런 제자들에게 맡기시겠다니...

만약 그렇게 맡기신다면, 장차 하나님나라의 존립 자체가 위태하지 않겠는가?

 

그런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믿을 만 하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자질이 뛰어난 사람들이 맡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자격이 안 되어 보이는

시골 갈릴리 출신 어부 몇 명에게 이 나라를 위탁하겠다고 하신다.

정말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 시점에,

지금 본문 눅 22:24~34, 제자들이 서로 자리싸움으로 다투는

최고로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최고로 실망스런 시점에,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22:29

그 중대한 나라를 맡기시겠다는 것은... 정말 시의적절하지 않다.

 

3. 같이 있었지만 도움이 안 되었던 제자들

그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시겠다는

이렇게 이상스러워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딱 한 가지 있다.

 

같이 있었다는 점이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눅 22:28

 

그들은 지난 3년간 예수님의 공생애동안 함께 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그들에게 맡기시겠단다.

 

그런데, 그렇게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중요한 직책을 제자들에게 맡기신다면...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왜냐면, 그들은 함께는 있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극심한 시험 당하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도움이 되었는가? 아직 제자를 뽑기도 전이었다.

 

예수님이 3번 정도 십자가에 대해 심각하게 예고하셨을 때,

제자들이 보인 반응이 어땠는가? 예수님께 도움이 되었는가? - 전혀 아니다.

 

i)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했을 때

비교적 우수한 제자그룹에 속했던 야고보와 요한

거기서 서로 좌우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었다.

 

ii)예수님이 내가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셨을 때

빌립이라는 제자는 하나님을 한번만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족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지만,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14:8

 

iii)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시면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하셨을 때 요 14:4

즉시 도마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14:5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사투를 벌이실 때에도

그렇게 여러 번 깨어서 기도하라고 부탁하셨건만

제자들은 곤히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심각하게 십자가를 예고하시는 예수님께

제자들은 오히려 방해가 되었을망정,

전혀 도움이나 위로가 되지 못했다.

 

4. 졸속인사행정 아닌가?

이들이 장차 달라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3년을 따라다닌 공생애의 마지막 시점에 와서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면

앞으로 미래도 무슨 가망이 있겠는가!

 

이렇게 현재가 엉망진창인데, 자기를 좀 따라다녔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를 그들에게 맡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1)

 

우리는 흔히 졸속인사행정이라고 비난하는데,

그것은 원래 자질이 전혀 안 되는 사람인데,

나랑 좀 가까우니까 그를 요직에 발령 내는 것을 뜻한다.

지금 이 본문은 전형적인 졸속인사행정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려할 모든 내용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적당하게 결정하신 졸속처럼 보인다.

 

혹시 예수님이 그 동안 너무 친구가 없고 외로우시다 보니까

마음이 약해지셔서 이런 동정인사 결정을 하신 것일까?

 

아니면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 종교지도자들의 계속적인 반대와 음모에

시달리시다 보니까, 그래서 3년 동안이나 자신을 떠나지 않고 곁에 있어준

제자들이 고마워서 내린 일종의 보은인사인가?

 

아니면 죽음을 앞두시고 시간이 촉박한 가운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냥 급하게 결정하신 촉박인사인가?

 

제자훈련이란 말을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데, 이 시점에서 보면

제자훈련의 관점에서 봐도 예수님의 제자 사역은 완전 실패 그 자체였다.

 

12명을 뽑아서 3년 동안 공을 들이고, 3년 동안 애를 썼는데

지금 그 결과, 한 사람 유다는 스승을 팔아먹으려고 이탈해서 사라졌다.

나머지는 곧 자기 스승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 가버릴 사람들이었다.

 

도대체 뭘 믿고 하나님나라를 이들에게 맡기시겠다는 것인가?

잘 쓰는 말로 기본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완전하고도 공의로운 하나님나라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되는 사람들이다.

 

 

2. 예수님의 본래 의도

 

예수님은 이런 모든 상황들을 몰라서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를 맡기는 것이 아니다.

 

왜 이들의 수준을 뻔히 보면서도, 눈으로 확인하시면서도, 맡기시는가?

 

예수님은 나아가 수제자 베드로의 배반까지도 이미 감지하고 계셨다.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그런 호언장담에 예수님은 네가 닭 울기 전에 3번 나를 부인하리라22:34

 

예수님은, 전혀 정신을 못 차리고 좌충우돌 하는 제자에게

사단까지 가세해서 그를 어지럽힐 것을 예언하신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우리 중에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탄이 거세게 일제히 덤벼들면, 크고 작게 다 실패한다.

여러분은 결심하면 결심하는 대로 모두 실천이 가능한가?

 

넘어짐의 달인

TV생활의 달인이 방영되는데, 어떤 분야에 통달한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들도 달인의 경지에 이른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넘어짐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너무 쉽게 넘어지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넘어지기도 한다.

스스로 자신을 과신할수록, 더 잘 꽈당 넘어지는 것을 본다.

 

결심 과 정 반대

옥에도 죽는데도 동행하겠다고 베드로가 결심한 것처럼

우리도 마음으로 결심하지만,

현실의 내 삶은 내 결심대로 되지 않는다.

결심하고 이빨을 악 문다고 순종이 더 잘 되시던가?

 

베드로의 장렬한 결심은, 그것과 너무나 대조적으로 극악한 배신에 이른다.

그래서 그는 통곡했다고 했다.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은 이런 통곡의 시간이 필요한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수 없이, 진심을 다 바쳐 결심한다.

그리고 수 없이 그것을 깨고 배반한다. (결심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님)

 

1.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종으로 세우신다.

그런 베드로에게, 실패할 것을 뻔히 아시고도, 무엇을 부탁하신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2

 

베드로야, 네가 다시 일어나면 다른 사람 믿음을 강하게 해 다오.

너처럼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붙들어 다오.

 

지금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베드로,

앞으로도 곧 무너질 모습을 예상하시면서도

그런 형편없는 제자에게 주님은 사명을 맡기신다.

 

지금 주님이 곁에 계셔도 이 모양 이 꼴인데

앞으로 주님이 곁에 안 계시면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패할 것을 아셨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것도 아셨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회복할 것도 아셨다.

 

그런데, 만약 베드로가 영영 안 돌아오면 어떻게 하실 건가?

만약에 가룟 유다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책임지시려고 이런 사명을 주시는 말씀을 자신 있게 하실까?

 

2. 완전히 넘어지지 않도록 주님이 기도해 주신다.

오늘 제 메시지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눅 22:32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완전히 꺾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주님은 왜 나같이 형편없는 사람에게 하나님나라를 맡기시는가?’

주님은 왜 아직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나는 수 없이 넘어지고 무너지는 사람 아닌가? 그렇게 수없이 배반하고서도

나는 어떻게 수없이 다시 일어서게 되었는가?’

 

내 의지와 내 능력 때문이었는가? - 물론 아니다.

주님의 붙드심 때문이다.

 

기독교는 결심만 하고 몇 가지 지키면 되는 도덕, 윤리, 규범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람이요,

더욱이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3. 실패를 통해 만들어 가신다.

성도 여러분, 처음부터 완제품으로 만들어져서 부름 받은 제자는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넘어지면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만들어져 간다.

 

사람은 언제 바뀌는가?

자신이 잘 하고 있을 때,

적어도 자신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실패가 없는 사람은 필히 교만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섬김을 받으려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큰 소리를 친다.

 

우리는 실패해서 초라해진 자신을 마주 바라보는

불면의 긴긴 밤이 필요하다.

자신의 못난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는 그 눈물 골짜기를 수 없이 지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성장해 가는 것이다.

 

4. 자신을 신뢰하지 못 하도록 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넘어질 것을 아신다.

과거에도 넘어졌고, 지금도 넘어지며, 아무리 이빨을 꽉 깨물고 결심해도

앞으로도 넘어질 것을 주님은 다 아신다.

 

다 아시면서도 베드로에게 그러신 것처럼 내버려 두신다.

믿음을 잠시 떠날 것을 주님은 내다 보시면서도

베드로처럼, 우리를 내버려 두신다.

당장 달려드셔서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신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자기 자녀로 부르신 다음에

제일 먼저 하시는 작업이 이것이다.

자기 신뢰를 버리게 만드신다.

 

아프고 쓰라린 실패를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배운다.

나는 절대로 나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중에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들이 많이 있다.

그 분야에서는 자기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 일에 관한 한

우리는 눈물골짜기를 지나며 이 진리를 몸으로 체득하도록 주님이 만드신다.

나는 절대로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는 고백이다.

신앙생활에는 전문가가 절대로 없다는 뜻이다. 다 초보자이다.

 

우리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은,

우리의 넘치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깊은 좌절의 경험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힘 있고 자질 있는 자들을 원치 않으신다.

예전에 무수히 넘어져 봤기 때문에 자기 파쇄가 형성되어 있는 사람

자신에 대해 깊은 상처, 자신에 대해 상한 마음이 있는 사람을 원하신다.

 

자기 신뢰를 전적으로 상실한 자만이, 주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5.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한다.

여러분, 베드로가 다시 돌이켜서 다른 형제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먼저 넘어졌다가 일어선 였다.

먼저 넘어져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붙잡아 일으킬 수 있다.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사람인가 절감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공을 자랑할 수 없다. 함부로 큰소리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마치는 말

성경의 위대한 역설은 여기에 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진정한 종이 되기 원한다.

정말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능력 없음 때문에 수 없이 넘어져 본 경험이 있을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자신이 한 없이 실망스러울 때, 자신이 초라하고 못나 보일 때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위해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기도해 주신다.

그리고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사명을 주신다.

 

나의 나 됨은 결코 내 결심 때문이 아니다.

나의 나 됨은 결코 내 의지 때문이 아니다.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나의 나 됨은 예수님의 붙으심 때문이다,

 

여러분, 포기하지 마시라.

가장 못나 보이는 자를, 가장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그 분.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이렇게 주님의 붙드심을 의지하시고 다시 일어나 시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

 

1) 이렇게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꾸지람조로 가르치신다.

너희는 이방 왕들과는 달라야 한다. 그들은 섬김을 받음으로 크다고 하지만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것이라 눅 22:25~26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노라고,

그런 본을 보이셨다고 하셨다. 22:27,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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