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본질 십자가 히12:2, 갈3:1
*출처 : 06.05.05. 옥한흠 목사님 파리 집회 설교 중 일부 녹취
이 메시지의 핵심은
<신앙생활의 능력은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있다> 이다.
십자가 신학을 잘 설명하고 있다.
마귀가 언제 제일 강하게 역사하는가 하면, 십자가 설교를 할 때이다.
십자가 설교 -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
그 너무나 잘 알려진 진리를 다시 강조하고 다시 전할 때,
마귀가 가장 악랄하게 훼방한다.
그래서 왠만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 닫아버리고 듣지 못하게 만드는데...
▲너무 신비해서 아직 잘 모르겠다.
제가 35년 사역을 하고 은퇴를 했다.
사랑의교회는 개척해서 25년 사역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점점 더 모르겠다.
잘 아는 것 같아서 과거에는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하고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한 적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그 때 모르는 이야기를 한 것 같기도 하다.
알 것 같으면서도 (너무 신비해서) 점점 더 모르는 느낌이 드는 것이
‘십자가의 신비요 십자가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고 비천한 세상에 오셔서
의인의 몸으로 죄인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다.
... 여러분, 어떻게 이해가 쉽게 되겠는가?
무슨 말로 그 사실을 다 설명할 수 있으며,
무슨 설명을 통해서 우리 가슴이 뜨거워 질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상상과 지각을 초월하기 때문에
마음에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설령 마음에 와 닿는다고 해도
그 깊이에 백만분의 일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늘 배워가야 한다.
‘다 안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렇게 자만하다가는 다음에 천국가면 더 당황하게 될 것이다.
높은 하늘나라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가 보좌에 앉아 계시고
수천수만의 천사가 찬양하고 수천수만의 흰옷 입은 성도들이 화답하는
그 엄청나고 황홀한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시라.
그 어마어마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저기 보이는 저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세상에 오셔서 내대신 죽으신 분이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장엄하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한다...
◑1.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 했다
성도들은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 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 때문에는 망하지 않는다는 주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to the law)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갈 2:19
▲우리는 율법 앞에 설 때마다 항상 정죄를 당한다.
신자들은 자기가 십계명을 다 지키고 산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엄격히’ 적용하면 우리 모두는 그것을 어기고 산다.
예를 들면, 우리 모두 우상숭배자이다.
마음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 모두 간음자들이다.
비록 성폭행은 안 해도, 마음에 더러운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 살인자들이다.
사람을 칼로 죽이지 않았지만, 미워하고 증오하고 복수하고 용서 못 한다.
율법을 엄격히 적용하면, 우리 모두는 꼼짝할 수 없는 죄인이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형벌에 처할 운명이었다.
여기에 아무도 예외가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 앞에 세상 사람 모두는 다 죄인으로 죽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율법에 대해 to the law 죽었다’고 증거 한다.
이 무서운 율법 앞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죽어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아무리 중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어버리고 나면
그에게 시비 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체를 앞에 두고서
‘이 놈아, 돈 갚아라! 교도소 가야 된다.’ 말하지 않는다. 이미 죽었으니까.
우리가 율법 앞에서 죽어버리면
율법이 아무리 우리를 정죄하려고 해도, 정죄할 수 없다.
그래서 죽는 길만이 율법의 정죄를 벗어나는 길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율법에 대해’(to the law) 죽었는가?
죄를 짓지 아니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셨다.
예수님이 율법에 의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으셨다.
그래서 내가 죽은 셈이다.
과거(믿기 이전)의 내가 죽고 나니까, 율법의 정죄가 내게 힘을 쓰지 못한다.
이제 아무리 나를 죄인이라고 정죄하려고 해도, 정죄하지 못한다.
내가 (십자가의 대신 죽음을 통해) 이미 죽었으니까!
그래서 성경은 ‘죽은 자로 여겨라’ 고 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to the law)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갈 2:19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롬 6:11
▲이제 예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을 때
나는 예수 안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율법을 범할 때가 자주 있지만,
옛날처럼 율법의 종으로서 살면서 범하는 죄가 아니라,
이제는 율법에서 자유한 사람으로서 범하는 죄가 되었다.
그래서 신앙인이 범하는 죄와, 불신자가 범하는 죄가... 죄질이 틀린다.
하나는 죄인이 범하는 죄이고,
하나는 아들이 범하는 죄이다.
성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율법과 완전히 관계를 잘라버렸다.
예수님 부활을 통해 내가 새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
그 다음에 내가 세상에 살 동안에 범하는 죄가 있어도
그 죄는, 죽을 죄인이 범한 죄가 아니고,
아들로서 범한 죄이다.
같은 죄라도, 아들이 범한 죄와
아들이 아닌 사람이 범한 죄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제 ‘야, 죄 좀 지어도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다.
또한 ‘내가 지은 죄, 고민 많이 했는데, 참 정말 기쁜 소식이다!’
아마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가지실지 모르겠다.
맞다. 정말 기쁜 소식이다. (불신자들이) 오해할 만큼 기쁜 소식이고,
(신자들에게도) 이해 안 될 만큼 기쁜 소식이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진리다.
예수 믿고 내가 범한 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범한 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들의 죄’로 다루는 것이지,
‘율법적 죄’ 또는 ‘죄인의 죄’로 다루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나와서 염치불구하고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달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용서를 많이 빌었는가?
그렇게 염치불구해도 괜찮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잘못한 것인데
아버지가 죽이겠는가? 어떻게 하시겠는가? 아들인데...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고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이 되었다. (갈 2:19)
◑2. 십자가를 늘 바라보라
이제 신앙생활의 본질은 십자가를 매 순간 바라보는 것이라는 주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신앙생활의 본질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이제는 내가 살지 않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약간 설명을 곁길로 나간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지금 내가 세상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앙생활이란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즉, 십자가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는 것이 핵심이라는 뜻이다.
십자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 라는 말이다.
십자가를 모르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본질에서 벗어났다. - 라는 뜻이다.
날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주목하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고 했다. 히 12:2
연이어, 그 예수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으로 소개한다. 히 12:2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대신 죽어 주신 그 분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 분을 바라보며, 그 분을 찬송하며,
그 분 때문에 정말 가슴이 메어지는 은혜를 받으며
그 분 때문에 날마다 새 힘을 얻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깊이 잘 모른다.
십자가의 진리를 잘 깨닫지도 못 할뿐더러
그 진리를 잘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병든 신앙생활이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1
▲기념하라! 십자가를
예수님이 세상 떠나시면서 다른 것을 기념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단 한 가지,
성찬식을 통해 나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십자가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
십자가가 빠진 예배, 메시지, 기도... 듣기에는 좋으나 능력은 없다.
그래서 교회 바깥에 나가면 성도가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3. 십자가가 얼마나 중요한 가 하면
①4복음서는 길게 예수님의 공생애를 3년 동안 다루고 있는데
그 중 마지막 1주간, 즉 십자가를 지시던 고난주간의 사건을
4복음서는 각각 1/3 정도의 분량으로 길고 비중 있게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그 1/3 십자가 기록이 ‘복음서의 결론’이고
나머지 2/3 즉 그 분의 생애, 가르침 등은 ‘복음서의 서론’이라고 말할
정도로, 약간 과장되기는 했지만, 그만큼 십자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가슴속에서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얘기다.
②바울은 복음을 한 마디로 요약했을 때
‘부활의 도’라고 했는가? ‘십자가의 도’라고 했는가?
③요한계시록에 보면, 장차 일어날 영광을 예언하고 있는데
화려한 천국의 무대 중심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으로 등장한다. ‘부활의 예수’가 아니다.
천국 가서도, 나를 위해 몸을 버리신 십자가의 예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 모두는 들어가거나 나올 때마다
우리 모두는 신발을 신을 때마다
우리 모두는 목욕을 할 때마다
우리 모두는 식탁에 앉을 때마다
등잔에 불을 켤 때마다
침상에서, 좌석에서
매일의 모든 일상적인 일을 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이마에 십자가의 표를 그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아직까지 십자가를 긋는 모양이다.
한 순간도 십자가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우리는 그런 성호를 긋지 않지만
그것을 손으로 긋든, 긋지 않든지, 중요한 본질은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를 잠시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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