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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기적 밖에는...

LNCK 2019. 12. 26. 20:05

요나의 기적 밖에는...                 눅11:29                   여러 자료 수집

 

요나의 기적에 대한 처음 들어보는 해석,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불확실하면 기적을 찾는다.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어제 오늘의 상황은 아니지만 그것은 현실이다.

 

이런 시기에 누구나 한번쯤 겪는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적을 베푸시어

나의 미래와 현실에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어 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더구나 미래가 불확실하고 나의 신앙이 미지근할 때

더욱더 강하게 다가오는 유혹이다.

 

기적으로 만족 못 한다

닐 기유메트신부님께서 쓰신 나와 함께 낙원에라는 책에

기적병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메나헴은 항상 기적에 굶주려 있었다.

 

그가 어느 날부터 집을 떠나서 세례 요한을 따라다니는 제자가 되었는데

직접적인 이유는 놀라운 기적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설교와 세례를 베푸는 것 외에

별다른 기적을 일으키지 않자,

메나헴은 그를 떠나 당시 한참 인기가 높아져 가고 있던

나사렛 출신인 예수의 문하로 들어간다.

 

예수의 추종자가 된 메나헴의 첫 주간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일련의 기적들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나병환자가 단번에 깨끗하여지고,

중풍병자가 일어나 누워있던 요를 걷어 통째로 메고 가며,

절름발이가 걷게 되고, 벙어리가 다시 말을 하며,

 

수천의 군중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을 만큼 먹는 기적 들을

자기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했고 예수께 박수를 보냈다.

메나헴도 신이 나서 우쭐거리고 있었다.

 

그 다음에 예수는 더 놀랄 기적들을 보여주었다.

배를 삼키려드는 거센 풍랑을 호통 쳐 가라앉히는가 하면,

급기야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는 것이었다.

 

메나헴의 하루하루는 너무 행복했다.

기적들 가운데 간간히 섞여 들려오는 예수의 가르침에는 아랑곳없이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기적들이 한편의 영화가 되어 맴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메나헴은 예수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대거 몰려와

예수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자신을 증명하라고 청했다.

그 때 메나헴은 이제야 기적의 최고절정을 보게 되겠다고 기대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구약의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 달리 보여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메나헴은 예수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제는 예수의 기적이 그의 눈에 시시하게 여겨졌고,

더 이상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따리를 싸들고

더욱 더 짜릿하고 스펙터클한 기적이 어디 없나 찾아서 떠나갔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친구는 자초지종을 듣고, 그에게 이런 충고를 해 주었다.

세상의 어떤 기적도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일세.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자네의 마음일세.

자네 마음을 한번 변화시켜보게나!”

 

그 친구는, 메나헴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떠나보내고 말았다.

 

요나의 기적

요나의 기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요나의 설교를 듣고

죄악에 빠져있던 니느웨 사람들 모두가 회개하였다는 것이다.

기적이 아니라, 오직 설교만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고

사람들을 내적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나처럼 사흘 동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최고의 표적이라고 제시하셨다.

 

이것은 외적인 기적을 뜻하지 않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사람들이 변화될 것을 뜻한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변화되었던 것처럼...

(그들이 요나의 기적을 보고 변화된 것은 아니다.)

 

은사중지론의 단상

이것은 성경의 기적이 정경 완성 이후 초대교회시절에 단절되었다는 신학이다.

그래서 19세기까지, 기성교회에서는 '초자연적 기적'을 거의 믿지 않았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방언 운동(일종의 기적)의 등장과 함께 은사중지론은

지금은 거의 사장되었다.

그러니까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은 기적을 믿는다. 저도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예수님의 기적과 오늘날 신자들의 기적본질이 다르다 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은 능력이나 병고침의 은사를 받아서 기적을 행할 수 있지만

그것을 예수님의 기적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오늘날의 기적은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다.

예수님의 기적은 신성에서 나오는 기적인데, 우리는 인성뿐이다.

만약 신자의 기적이 예수님의 기적과 동일시하려면

우리는 바다 위로도 걷고, 5천명도 먹이고, 풍랑도 잠잠케 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한 사람은 아직 없다.

예수님의 기적과 오늘날 신자들의 기적본질이 다르다 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적,

, 성령의 은사로서의 능력, 병고침, 예언, 영분별 등은(고전 12:9~10)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은사와 능력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기적과 신자의 기적의 차이점이다.

 

(물론 개인의 능력 차이는 있다.

그러므로 특정 은사를 강하게 받으신 분들께는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

 

굳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방종교에서 특별한 마술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은

자기만 특별히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선전해서 미혹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기적은, 보편적으로 주신 것이다.

 

초자연적 기적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날 초자연적인 기적은 매우 드물지만 가끔은 일어난다.(가능성은 열어둔다)

 

저는 개인적으로 초자연적인 기적도, 불치병 고침도 확실히 오늘에 존재함을 믿는다.

더 나아가 타종교의 신비적 능력, 기적도 가끔 믿는 편이다.(진짜 무당도 간혹 있다)

 

다만, 그런 것은 우연히, 간혹, 어쩌다가,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항상 일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초자연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종 나타나는 것은 - 병고침, 능력, 예언 등 성령의 은사들이다.(초자연)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성령이 충만할 때, 은사가 종종 나타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다른 사람도 가질 수 있는 은사이며(특별하지 않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특별한) 기적과는 본질이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시대마다 자기가 '남다른, 특별한' 영을 받은 예언자, 선지자로 자처하는

사람이 간혹 나타나는데

정말 그렇다면 성령의 은사로서의 (보편적인)예언을 받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뭔가 좀 남달리 특별하다고 생각하게 될 때,

그는 '거짓선지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정말 특별한 능력이 있어도, 본인 스스로는 '보통사람'으로 생각해야 옳다.

우리는 인성만 가지고 있지, 신성과 인성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며

성령충만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으나, 우리 본질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베드로로 자기를 사람이라고했고 행10:26,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다고 했다. 5:17

 

(주의, 이런 글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 능력, 병고침 등을 제한하는

부정적 파급 효과를 가져와서는 안 될 것임)

 

반론

표적이 복음전파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막 16:20

 

표적이 복음전파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데

따르는 표적이다. 저절로 나타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이것도 '성령의 은사'를 뜻한다.

무엇보다 위 말씀의 포인트는 전파에 있다. “표적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성경말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 14:12

 

전후 문맥상, 이것은 예수를 믿게 하는 일이지, 더 큰 기적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더 큰 기적을 보인다고 믿는 사람은 물 위를 매일 걸어야 할 것이다.

 

이방인보다도 못한 그리스도인

심판 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만 듣고도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심판 날이 오면 남쪽 나라의 여왕도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솔로몬보다 더 큰 사람이 있다.”

 

, 하나님 앞에서 악행을 일삼던 그들,

그래서 심판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던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는 무슨 기적을 행하고, 불을 던지면서 설교하지 않았다.

또 하늘에서 유황불을 쏟으면서 회개하라고 하지 않았고,

메뚜기 떼나, 재앙을 내리면서 회개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단지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그대로

삼일길이나 되는 니느웨를 단지 하루 동안만

너희 성읍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외치고만 다닌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기적을 보여주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모두 열렸다.

그들의 교만이 무너졌고, 그들의 거짓과 죄악을 깨달았다.

그리고 엎드려서 회개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두 가지 예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니느웨도, 시바 여왕도 결국은 이방인들이라는 것이다.

이방인은 유대인들이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이방인들이 도리어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시바여왕보다도 못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믿음이 있어 금식하고, 기도한다 하나

니느웨 백성보다 못한 신앙생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율법사나 바리새인들처럼 화끈한 것을 찾고 돌아다닌다.

만약 그렇다면 '이방인보다 못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이방인은 욕)

 

소중한 성경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광의 표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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