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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진정한 승리인가?

LNCK 2019. 12. 26. 19:47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가?             고후2:14, 골2:15                   06.07.23.

 

 

한국인들은 세계 유래를 찾기 힘든 초고속 경제 성장 과정을 지내오면서,

빠른 시간 내 경제적으로, 물량적으로 성공에 이르러야 인정을 받는다는

어떤 승리주의라는 정신적 강박관념에 자기도 모르게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주변 모든 사람들을 경쟁 대상자요, 싸워 이겨야 하는 전쟁 상대로

인식하기 때문에... 사회는 점점 살벌해지고, 각박해지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성도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어쩌면 자기 이기적 승리에 도움을 달라고, 하나님을 믿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승리해야 하고 이미 승리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기독교적 승리를 나의 개인적 풍요와 성공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 이유는, 기독교적 승리세속적 승리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1세기에 살았던 로마 장군 디도와

예수님의 생애를 한 번 비교해 보자.

 

 

1. 로마 장군 디도의 승리 방식

 

디도 장군의 화려한 개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40년 후, AD 70년경에

로마 제국 베스파시안 황제의 아들인 디도 장군은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불태운다.

그리고 로마에 돌아와서 승리의 개선행진(퍼레이드)을 벌였다.

 

지금도 로마에 디도의 문이라는 유적이 있는데,

그 개선문의 안쪽에 보면, 유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개선행진을 벌이는

디도 장군의 모습이 부조(돋움 새김)로 조각되어 있다.

 

역사로서 이 장면은,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75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3내지 4층으로 이루어진 수레였다.

이 수레 위에는 전쟁의 장면들이 다양하고 세밀하게 연출되어 있어서

마치 진짜 전쟁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전쟁의 장면 가운데는, 풍요로운 땅이 폐허로 바뀌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적군 전체가 몰살당하는 장면도 있었다.

한편 이 같은 장면이 실린 각각의 수레의 맨 위층에는

로마군에 의해 정복당한 도시들의 적장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전리품이 뒤를 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이채를 띠는 것은 예루살렘 성에서 탈취한 전리품이었다.

 

베스파시안 황제가 그 행렬의 뒤를 잇고, 그의 아들 디도 장군이 그 뒤를 따랐다.

행진 대열이 주피터 신전 앞에 이르자, 유대인 포로 장군 시므온이

광장 가운데 끌려온 후에 처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이 당도하자 로마 시민들은 멈추어서 큰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그 후에는 주피터 신에게 제사 드리는 장면이 계속해서 기록되어 있다.

 

다른 로마 역사책에 보면, 이 시점에 사람들은 개선장군에게 환성을 지른다.

황제 만세!, 장군 만세!”

로마 장군들이 개선할 때, 수많은 시민들이 길에 나와 이렇게 환성을 지르면

개선장군은 마치 자기가 신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한다고 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개선장군의 병거 뒤에 노예를 한 명 대기시켜서

장군님은 신이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라는 말을 계속 외치게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로마시대에 황제들과 장군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로마에서 거대한 개선행진을 벌였다.

이를 통해 로마 제국의 힘과 승리를 과시한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그 개선이 화려하고 장엄한 것을 약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로마의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니었다.

계시록에 로마는, ‘그리스도인의 피에 취해 짐승을 탄 음녀로 묘사된다. 17:6

로마의 승리는 자기 영광의 표시, 인간의 교만의 과시였다.

이것이 바로 세속적 승리주의.

 

예수님의 우주적 승리 선언

물론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도 성경에 나온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무장해제) 밝히 드러내시고(공공연한 구경거리로 삼으신 후)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5

 

기독교 역시, 로마 장군의 승리처럼,

그리스도의 승리를 매주일 찬송으로 자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승리를 개선행진처럼 자축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6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과, 온 우주를 정복하시고 승리하셨으니까

, 그리스도께서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을 소유하고 계신다면

이제 우리의 사명은 그 분의 이름으로 (보병처럼) 온 세상에 나가서

정복을 마무리 짓는 일만 남았다.

 

현대 칼빈주의가 주의할 점

따라서 현대 칼빈주의의 대가인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렇게 주장했다.

창조 세계의 어디를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것이다, 이는 나에게 속해있다라고

외치지 않으신 영역은 단 한 치도 없다.”

- 그래서 성도가 온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신학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크리스천들은 모두 흥분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모든 세계를 소유하고 계신 이상,

제자인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 직장에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복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라고 굳게 다짐하게 된다. - 이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제국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주권과 최후 승리에 대한 주장을

어떤 의도, 어떤 태도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을 내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창조세계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어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너무 커서

이 세계와 우리를 죄에서 구해 내기 위해서라면

고난과 심지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심정에서

세상 만물이 모두 내 것이다라고 외치신 것이다. 1:16

 

두 살배기 어린아이의 집착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친구랑 한참 같이 잘 놀다가 갑자기 상대의 장난감을 가로채면서

이것은 내꺼야!’라고 소리치듯 두 살배기 어린아이 같은 유치함을 보인다.

 

내가 그것을 원하면, 그것은 내 것이다.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었다가 마음이 변하면, 그것도 내 것이다.

잠시 그것을 네게서 빼앗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내 것이다.

내가 잠시 전에 그것을 가졌었다면, 그것도 내 것이다.

라는 두 살배기 집착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런데 오늘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언하면서

그 승리의 전리품들을 지금 여기서 다 (빼앗아서라도) 취하는 것이

마치 진정한 승리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두 살배기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의 승리 방식

 

예수님의 십자가 행진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승리의 태도와 어조

지금 우리 생각과 많이 다르다.

 

디도 장군의 입성 40년 전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나귀새끼를 타시고서...

거기에 한 술 더 떠 결국에는 십자가로 행진 퍼레이드를 벌이신다.

 

종교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하시고, 성전을 청결케 하자

체포당하셔서 고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다.

이렇게 반역자나 종처럼 고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과연 승리자이신가?

 

인간적 관점에서 그것을 승리라고 볼 가능성은 제로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승리로 규정하고 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5

 

승리하셨느니라

이 단어의 헬라어는 트리암뷰오이다. 영어로 트라이움프’(승리)이다.

그 원래 뜻은 개선행진에서 포로를 끌고 가다이다.

 

앞서 로마 장군의 개선행진 때, 포로들을 이끌고 행진했다고 했다.

그래서 골 2:15절을 그리스도께서 정사와 권세(공중권세)를 무장해제시키고

그들을 공공연한 구경거리로 삼은 후에

그들을 포로로 끌고 행진하셨습니다. 라고 번역할 수 있다.

(천주교 새번역 성경에 이런 식으로 번역했다.)

 

같은 점과 다른 점

디도 장군과 그리스도의 행진은, 포로를 대동해서 승리를 자축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그 둘은 완전히 다르다.

로마 장군 디도는 멋진 갑옷을 입고, 네 마리 말이 이끄는 병거에 타고,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들을 자랑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했지만,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심으로써 마귀를 포로로 잡으셨다.

 

마귀라는 전리품을 앞세우고 행진하시지만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5 말씀처럼 십자가를 지시고 행진하신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행진

어떻게 보더라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은

승리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패배자의 모습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드림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에 진정한 승리자인 것이다.

 

많은 사람을 위해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부활을 얻었기에

그리스도는 진정한 승리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진정한 승리,

자기의 주장이나 과기 과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헌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예수님은 직접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셨다.

 

그러기에 교회가 복음이라고 전하는 그리스도 승리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원래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은, 성경에 쓰이기 이전에

로마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령들이 달려와서 전하던

승리했다는 기쁜 소식으로 쓰였던 말이었다.

초대교회는 그 말을 빌어서 그리스도가 승리했다는 뜻으로 썼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승리하셨다면

크리스천들도 승리를 누리려면,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날, 그의 백성, 그의 교회를 승리케 하시는 방식은

자기주장과 자기 과시가 아니라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우리가 승리를 원하지만, 승리를 취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3. 바울의 승리 방식

 

바울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승리를 자기에게 적용 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4

 

이기게 하시고

이 단어가 골 2:15에서 쓰였던 똑같은 트리암뷰오이다.

(신약에서 딱 두 번 쓰였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이 번역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고후 2:14

(천주교 새번역)

 

로마 장군이 개선할 때, 일단의 노예들이 앞서가며 향()을 피웠다고 한다.

그 뒤로 적장과 전쟁포로들이 사슬에 결박되어 걸어가고

그 뒤로 로마 장군과 정복부대가 승리를 구가하며 뒤따른다.

 

그럼 고후 2:14에서 바울은, 자기를 포로로 잡혀가는 부류에 비유하는가?

아니면 정복부대의 군사로 비유하고 있는가?

 

천주교 새번역 성경은 각주에

아마 바울은 자신을 포로로 비유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표기했다.

(김지찬 교수)도 이런 해석에 동의한다.

 

New English Bible에도, ‘그리스도 승리의 개선식에서

항상 우리를 포로로 끌고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로 번역했다.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대열에 동참한다는 해석도 있음)

 

전쟁포로 바울 vs 왕 노릇 고린도교인

그리스도가 승리하시는 개선 행진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퍼레이드에

바울 자신이 전쟁포로처럼 끌려간다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인가?

그것을 감사드린다는데 고후 2:14, 도대체 바울은 무슨 의도인가?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고난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바울의 고난을 쉽게 이해하지 못 한다.

 

우리가, 바울처럼, 자기를 전쟁포로로 끌고 가시는 주님께 정말 감사할까?

당시 이 편지를 수신하는 고린도교인들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린도는 당시 번창하던 항구도시로, 권력, , 세상승리에 매혹당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고전 4:8

 

고린도교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기 원했다.

이 세상에서 배부르고 부요하며 왕처럼 살기 원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승리를 의미한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 세속적 승리주의에 빠져 있다보니까, 바울의 고난을 이해 못한 것이다.

 

바울의 고난은, 바울의 무능함의 부산물이다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그렇게 보면, ‘바울은 사도일 수 없다며 그의 사도직까지 회의를 품었다.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세상에서 배부르며 부요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고린도교인들이 갖고 있었다. 고전 4:8

이와 같이 우리들도 더 큰 풍요, 더 큰 배부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말에, 구경거리가 된 바울

이 같은 고린도교인들의 생각에 대해, 바울은 자기를 변호한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고전 4:9~13

 

바울은 이렇게 자기를 변호한다.

나는 사도지만,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하신 자같이 나를 미말에 두셨다.

(미말 : end of procession, 행진의 끝)

 

자기가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구경거리(스팩터클),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는 노예나 검투사를 뜻한다.

 

바울이 주장하는 바는,

고린도 교인들이 야수들과 제대로 싸움도 해 보지 않고

바울이 야수들과 싸우는 구경거리가 된 것을, 편하게 구경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원형경기장의 검투사처럼,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

그들에게 현혹된 세상의 박해자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그래서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하는데

 

왜 고린도 교인들은 황제처럼 이미 부요해서

관중석에 편하게 앉아 우리를 구경하고 있느냐고 질타하고 있다.

 

이 땅에서 부유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니라고

바울은 맹렬히 권면하고 있다.

 

바울이 얼마나 흥분했든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하고 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고전 4:8

 

이것은 바울이 진짜 나도 너희처럼 왕 노릇 하기 원한다!’는 뜻이 아니라

고린도교인들의 왕 노릇 함에 대한 기가 차서 비웃는 어조다.

(일종의 반어법’, 어이가 없어서 본심과 정반대로 말하는 것)

 

진정한 왕 노릇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며

그것을 십자가 정신으로 이길 때 찾아오고 누리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샘플로 들어 말하고 있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10

 

그리스도를 위해서, 복음의 승리를 위한 영적 전투 대열에 뛰어들면

여러 고난으로 인하여 속이는 자 같고, 무명하고, 죽는 자 같이 된다.

그러나 결국은 참되고, 유명하고, 사는 자가 된다.

가난한 자 같은데, 항상 부요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은데,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승리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길에서 죄수로 보여주셨던 이미지였다.

또한 바울이 주님의 개선행진에서 마치 죄수로 끌려가는 이미지였다.

이 모습이 바로 기독교 승리주의의 결정타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전하는 그의 제자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에 의해

영광의 관을 쓰게 될 것을 기대해서는 된다.

 

바울은 자기 과시와 큰 목소리의 주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적 섬김과 봉사를 통해 진정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2;15와 고후 2:14에서

로마 개선 장군 행렬의 이미지를 딱 두 번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이런 본문은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결론 : 그리스도의 승리 방식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를 주장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이

승리의 전리품들을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챙기는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만약 그 승리의 전리품들을 이 세상에서 챙기기 시작하면

세상 승리주의에 빠지게 된다.

 

앞서 트리암뷰오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2:15, 예수님은 처절한 십자가를 지시고 승리(트리암뷰오)하셨으며

고후 2:14, 바울은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자신이 포로, 노예같은

구경거리로 승리(트리암뷰오) 했다.

 

그러나 세상적 승리주의의 유혹은 결코 적지 않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예외없이 현세에서 세상적 승리를 맛보기 원한다.

 

예를 들면, 우리 부모가 주님께 이렇게 충성하니까

주님이 우리 자녀들을 대학에 척척 합격시켜 주시기를 바란다.

대박은 아니더라도 소박이라도 터뜨리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재수하게 되면 부모는 무지 실망하게 된다.

-승리의 열매를 지금 이 세상에서 따 먹으려 하다가는 실망하게 된다는 뜻.

 

그리스도 승리의 전리품들을 이 땅에서 세상적 방식(축복)으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최후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가장 잘 증명하는 길은

그 분이 우리에게 확보해 주신 열매(전리품)들을 기다리면서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기꺼이 고난에 참예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를 간단명료하게 표현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그리스도의 최후 승리를 믿고,

그리스도께서 최후 승리하실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은

그의 고난에 참예하는 길이다.

이것은 반지의 제왕의 비유로 잘 설명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들을 보면 정말 하찮다. 난장이, 요정, 마술사 등

그들의 무기는 고작 활, 창 등 매우 단순하다.

그들이 말도 안 되는 엄청난 괴물들 앞에서 싸워 이긴다.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은 끝내 선은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고

그 엄청난 세력들을 상대로 싸움을 전개한다. 그래서 결국 이긴다.

 

주님이 최후 승리를 보장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지금 여기서 고난 가운데 참예 하면

그리스도께서 영광가운데 나타나실 때, 함께 그 영광을 나누는 것이고 벧전4:13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승리다! 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승리는 긴 안목의 역사적 시간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삶에서, 바울의 삶에서, 베드로의 삶에서 우리는 그것을 본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5~37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벌거벗은 모습), 위험, ...

우리가이런 것을 당하게 되면, 이런 것은 승리라고 말할 수 없다.

패배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승리한다고 선언한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8:37

 

진정한 승리는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벌거벗은 모습), 위험, ...

이런 것들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복음과 선한 싸움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살 때 다가오는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벌거벗은 모습), 위험, ...

등등 넉넉히 이겨낼 때... 진정한 승리를 누리는 것이다.

 

성경주석가들은 넉넉한 승리의 의미를 잘 파악하기 위해 이렇게 번역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영광스러운 정복을 계속하고 있다.’

아니다, 이 모든 일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자초하는 길을 자신의 방향으로 삼으면

아무리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영광스러운 정복을

압도적인 승리로 거두게 될 것임을 선언하고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승리라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기 원하시는가?

고린도교인처럼 이미 배부르고 이미 부요한 왕처럼 살기 원하시는가?

아니면 바울처럼 살기 원하시는가?

 

오늘 우리 주변에는 이 세상에서

우리 속에 있는 악한 옛 자아와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 악한 세상의 풍습들과 싸우기보다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여기서 왕노릇 하기 원하는 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더욱이 배고프고 헐벗으며 복음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자들을

조롱까지 하는 그런 모습도 종종 보고 있다.

 

비록 우리는 지금,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원형경기장에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지만,

악한 공중권세와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다면

최후승리로 초청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런 고통을 당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2:7

 

우리는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승리, 교회의 승리를 찬송하는 찬양을 부른다.

그 때마다 그 승리의 의미를 잘 되새기시기 바란다.

그래서 주님 부르실 때, 최후승리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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