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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질문’ 하기

LNCK 2019. 12. 27. 07:30

좋은 질문하기                 21:15-17

   

06.07.02. *원제목 : 주께서 아시나이다   곽선희 목사

 

1. 좋은 질문

 

상담 전문가를 훈련하는 과정 중에 <좋은 질문 하기>라는 과정이 있다.

좋은 질문좋은 생각을 하게하고, 좋은 발상을 하게하고,

좋은 대답을 하게하고, 좋은 행동으로 사람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질문하기를 훈련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대화 중에 질문할 때가 많다.

그런데 그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가급적 좋은 질문을 하도록 우리 생각과 습관을 고쳐야 할 것이다.

 

좋은 질문은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인격의 발로이고

어떤 때는 신앙적 관점에서 오는 대단히 중요한 인간 행위이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엄마는 길에서 만났다.

참 장난꾸러기 아들이니까 엄마는 대뜸 , 오늘 또 싸웠냐?”

 

그러면 애는 이 말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가만있자, 내가 오늘 싸웠나? , 싸울만한 일이 있었어.

그럼 내가 조금 싸우기는 싸웠지...’ 이런 쪽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는 안 싸웠단 말이야!”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답해 버리고 만다.

 

가령 아이들에게 오늘 학교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니?”라고 물으면

아이는 가만있자.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

오늘 내가 착한 일을 해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일이 있지!’

하면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아이의 발상, 생각, 판단, 행동도

점점 좋은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말이다.

 

또 직장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보고 대체로 쉽게 실수하는 것은

자기 어디 아파? 피곤해 보이네!” - 이렇게 부정적으로 질문한다.

물론 직장에서 돌아오면 배도 고프고, 피곤하고, 안색도 안 좋아 보인다.

딴에는 부인이 그런 남편이 안쓰러워 남편을 사랑한다고

그런 맹추 같은 말을 한다.

 

자기 어디 아파?” 그러면 남편은 생각하게 된다.

가만있자. 내가 정말 어디 아픈가? 아무래도 어디가 좀 안 좋은 것 같네...’

 

그렇게 된다. 질문이 부정적이라서 좋은 대답이 나올 수 없다.

자녀에게, 남편에게 나도 모르게 쏟아내는 부정적 질문은 오늘로 끝내자!

 

내게 제일 곤란한 질문이 뭐냐 하면, 오랜만에 만났는데

목사님, 팍삭 늙었네요! 목사님은 안 늙을 줄 알았는데요...”

그래서 제가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저는 아예 갔더라고요. (웃음)

 

서로 걱정해 주는 마음으로 안부를 묻지만,

그 묻는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

 

좋은 쪽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해야 되겠는데,

오래 만에 보니 아파보이는 군요, 늙었군요!” 그러고,

직장에서 무슨 어려운 일 있어?, 근심거리가 있나보지?”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그때 생각한다.

가만있자... 내 근심거리가 무엇이지?’ 하며 괜한 걱정거리를 만든다.

이래서 망조가 드는 것이다.

 

가령 보자마자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오늘 얼굴에 빛이 나고 몹시 좋아 보이는데?”

그러면 남편은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 하며 좋은 것을 생각한다.

 

그것이 쌓이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질문을 해야 한다.

그러면 좋은 생각 좋은 대답 좋은 행동으로 사람을 저절로 인도한다.

 

 

2. 릭오버 제독의 좋은 질문 - 최선을 이끌어내다

 

전직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는 특별히 신앙이 좋기로도 유명하다.

그는 살아있는 신앙을 썼는데, 그 책에 이런 회고담이 나온다.

 

그가 사관학교를 마치고 임지에 배치될 때 그 유명한 릭오버 제독을

만났다. 그 중요한 순간에 제독은 웃으면서 그래 공부는 잘 했나?

성적이 괜찮았나? 힘들지 않았나? 사관학교 생활이 어땠어?”

이런 평범한 질문을 했다.

 

그런 후에, “자네, 그 성적이 말이야(매우 상위권의 성적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얻은 성적인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나?”라고 물었다.

 

그때 신임장교 카터는 잠간 생각한다. ‘최선?...’

그런 진실하게 말했다. “최선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죠!”

그러자 제독은 무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어째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

 

카터는 일생동안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단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선이란 뭔가? 최선 앞에서 내가 부끄럽지 않아야 되겠는데, 최선이 뭘까?’

그래서 최선을 다 하는 삶이 일생 그의 좌우명이 되었다.

 

그것은 결과주의로 결국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도 아니요,

결국 출세했다는 얘기도 아니다. 그것은 순간순간, 매일매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선을 이렇게 정의한다.

최선은 집중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위해 집중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려면...

 

집중Concentration의 능력

공부할 땐 공부, 공부하면서 놀 생각하지 말고,

놀 때는 열심히 놀고, 걱정하지 말고,

뭘 하든지 그 하는 순간 그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먼 산 바라보고 쓸데없는 생각할 것 없다.

지금 주어진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자녀들이 공부하느라고 학원이다, 과외다 하지만

사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학원이나 과외에 그리 치중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의 비결은 공부시간에 얼마나 집중하는데 있다.

 

수업시간에 집중하고, 자습시간에도 무섭게 집중하기만 하면

놀면서 공부하는데도 성적은 좋게 나온다.

 

그런데 공부 못하는 학생은, 공부할 때 놀 생각(딴 생각)하고

놀 때는 공부할 생각을 하니까... 집중이 안 되서 둘 다 잘 못 한다.

 

즐기면서 일 한다

억지로 하는 공부, 일이 아니다. 자기가 하고 싶어 해야 한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도 이왕 하는 일, 즐기면서 해야 한다.

공부를 해도 즐기면서 하는 학생이... 최선을 다하게 된다.

 

감사하며 일 한다

좀 죄송하지만 나이 드니까 이런 주책없는 소리도 하게 된다.

제가 신학대학 다닐 때 1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줄곧 1등 했다.

전교생중에 한 명 주는 상을 3년 동안 제 혼자 계속 받았다.

 

그때 왜 그랬을까? 내게는 특별한 게 있었다.

그 기숙사가 내 고향이었다. 지금도 회현동 100번지가 제 고향이다.

그 곳이 제 호적이다. 저는 (이북에서 내려와서) 호적도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와서 공부할 수 있다니...

,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나?

제가 군대생활 3년을 해도 휴가 한 번 못간 사람이었다.(가족이 없어서)

 

방학을 해도 갈 데가 없었다.

그 넓은 기숙사에 나 혼자남아서 겨울을 지냈다. 혼자서...

그래도 나는 감사했다. ? 북한에 어머니가 계시고,

나 혼자 내려와서 지금 목사 되기 위해 공부할 수 있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나! 순간순간 감사가 나왔다.

 

군대 있을 때 입었던 바지 하나 입고서 그걸 염색해서 5년 동안 입었다.

춘하추동도 가리지 않았다. 염색만 세 번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옷장도 필요 없었다. 거기에 넣을 옷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감사했다. 신학 공부가 너무 고마웠다.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할 때, 최선이 나온다.

원망하는 심정으로 일하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최선이 안 나온다.

 

 

3. 예수님의 좋은 질문

 

베드로는 주의 수제자로서 큰 실수를 했다.

아주 부끄러웠다. 그래서 갈릴리로, 다시 어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에겐 세 가지 실수가 있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라 했는데 기도하지 않고 잔 것,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한 것,

그리고 사도의 직분 다 사양하고 갈릴리로 고기 잡으러 간 것이다.

 

밤새껏 수고했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 바로 그런 지경에 있었다.

그 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베드로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예수님은 참 할 말이 많았겠다.

여보게, 왜 여기 있나? 부활한 거룩한 몸을 보여주었는데도

어째서 여기에 와서 고기나 잡고 있느냐?’

또는 그저 목숨이 달렸으니 무서워서 나를 모른다고 했다 하자.

그럼 한 번 부인했으면 되었지, 세 번씩이나 하냐?’

하실 말씀이 많으셨다.

 

그런데 그런 책망을 접으시고, 딱 한 마디 하셨다.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 21:15

 

그 질문 속에 여러 교훈이 담겨 있다.

네가 왜 나를 모른다고 부인한 줄 아니? -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야!’

네가 왜 지금 실의에 빠져 있는 줄 아니? - 사랑이 없기 때문이야!’

네가 왜 지금 미래에 대해 암담해 하는 줄 아니? - 사랑이 없기 때문이야!’

 

그렇게 그 질문은 베드로의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베드로는 지금 완전히 그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에 포로가 되었다.

 

그렇다면 대답은 제가 당신을 사랑(아가페)합니다.” 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에, “내가 주를 사랑(필레오)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친구의 사랑(필레오)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뜻이다. 21:15

 

그러자 예수님이 세 번째 다시 물으셨다.

그럼 친구의 사랑으로는 나를 사랑하느냐?” 21:17

주는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필레오)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21:16

 

실패한 후 베드로는 매우 겸손해졌다.

이제 자기 자신은 다 없어졌다. 낮아지고 낮아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으로 사랑할 자신은 없고,

친구의 사랑(필레오)으로 사랑하는 것마저도 - ‘주께서 아신다고 고백했다.

 

한 번은 70이 넘은 부부가 서로 이혼하겠다고 상담을 요청했다.

그래서 제가 아 그거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계속 사시죠?” 그랬더니,

그 쪽에서도 나름대로 타당한 이론이 있었다.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남은 시간이라도 제대로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혼하겠다고 나왔다...

 

그래서 제가 물었다. “서로 사랑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 부부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똑 같다.

사랑 -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결혼하고 애 낳고 수 십 년을 같이 살았는데, 사랑이 뭔지 모르겠단다.

내가 그를 사랑했는지, 그가 나를 사랑했는지 - 사랑에 대한 확증이 없다.

 

여러분, 다시 묻는데, 사랑하시는가? 사랑이 있었는가?

아니, 사랑하고 결혼했는가?

 

요즘 젊은 사람들 뭐 서로 사랑한다고 난리를 치지만

평생 살아온 어른들이 볼 때는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더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배우자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너무 자신만만하면...잘못이다.

 

(도대체 진실한 사랑이 뭔가?

그것은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다가 아니다.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정체의식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했다.

내가 주를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주께서 아시고, 나는 잘 모른다.

 

과거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 있고, 패기 있고, 자랑스럽게 고백했다.

예수님은 그건 네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네게 알게 하신 것이니라!”

(겸손 하라며) 해석해 주셨다.

 

그런데 오늘 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스스로 겸손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다.

 

톨스토이는사랑은 희망에 속느니보다 절망에 속는다라는 책에서,

스스로 절망하는 것을 만들어놓고, 자기 지식과 경험의 감옥 속에서

스스로 비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절망할까?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시라.

이미 사랑을 받았고, 사랑 안에 내가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을 아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주께서 아십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 ‘내 마음은 내가 모르겠습니다. 내 의지도 모릅니다. 다 주의 것입니다.’

 

전에는 베드로가 말했다. 이렇게 큰소리쳤다.

나는 주를 사랑하고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을지언정 따라 가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겸손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이 말은 주께서 주신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인정하시는 대로, 나는 바로 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께서 힘과 은사를 주시는 만큼, 주의 사랑에 보답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다.

 

내 몸과 내 판단과 내 의지와 내 마음 전체를 그대로 바칩니다.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나는 주의 것입니다.

내가 사랑한다. 뭘 한다, 이제 그것도 없습니다.

저를 지금 있는 그대로 받아주세요!’

 

진정으로 이것이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내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의 큰 사랑 속에 내가 있으면서도...

 

주께서 아시나이다!” 21:15

주께서 아시나이다!” 21:16

주께서 아시나이다!” 21:17

그 순간에 주님의 귀한 음성이 들린다.

내 양을 먹이라!”

 

(하나님의 일은 혈기왕성하게 자기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기가 깨어지고 부인된 가운데서,

겸손히 그 사랑에 반응해서 수행하는 것임을

- 예수님은 좋은 질문을 통해 베드로에게 되새겨주셨다.

 

사실 우리는 사랑, 헌신, 희생, 주의 일, 양떼를 치는 일 등은

그게 뭔지 정확히 잘 모르지만, 그 낮은 자세로 그저 순종하며 나아간다.)

 

*기도: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 큰 은혜 가운데서 항상 감격하며

그렇게 사랑에 응답하며 사는 우리의 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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