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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로 공의를 세우리라

LNCK 2019. 12. 27. 08:08

진리로 공의를 세우리라             42:1~4

    

06.06.25. 곽선희 목사님 설교


도입 : 침묵하지만 동참하시는 하나님

 

일본의 크리스천 작가 중에 엔도 슈샤쿠라는 대표적인 유명한 작가가 있다.

그는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하여 쓴,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준

유명한 소설 침묵을 썼다.

이 소설은 일본 선교초기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하였을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생생하게 기록하였기에 더더욱 큰 감동을 준다.

 

관리들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부인하게 하려고 잔인하게 교인들을 처형했다.

화산의 불이 펄펄 붙는 그 활화산 위에 기독교인들을 매달아서

불에 태워 죽이기도 했고,

바닷가에서 썰물 때에 뭍이 드러났을 때

그곳에 십자가의 형틀을 만들어 놓고서는 거기에 기독교인들을 매 놓고

밀물 때에 점점 물이 들어오면서 서서히 바다 물에 잠겨 죽도록 했다.

 

어느 날 두 교인이 체포되어서, 밀물 때 바다의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있다.

물이 점점 아래에서부터 차 올라온다.

물이 목 위로 머리위로 올라오면 이제 곧 질식하는데

바로 그 순간에 멀리서 지켜보던 포르투갈 신부는, 그 비참한 장면을 보면서

구원의 기적을 위해 목이 터져 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기적을 보여 주시옵소서, 기적을 보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이 신부는 큰 소리로 외친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나이까?

이 비참한 장면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은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그렇게 외칠 때, 신부의 마음속으로 고요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다.

나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난에 동참 하고 있느니라..!”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침묵을 느끼시는가?

 

 

1. 북한 - 침묵 속에서 조용히 일하시는 하나님

 

왜 우리는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서 50년간 이대로 지내온 것인가?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한 마디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 곳은 큰 수용소와 같다.”

 

평양은 조용하다. 시골에 가면 더더욱 조용하다.

다니면서 느끼는 건 도대체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조용하다. 그리고 교회는 폐허가 되었다.

 

제 고향에 찾아가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교회,

우리 할아버지가 세운 교회를 찾아갔다.

그러나 교회는 없고, 터마저 다 갈아엎어서 지금은 밭이 되어버렸다.

 

그 밭 한가운데 서서, 옛날 교회가 있던 그 자리에 서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그 마을의 공산당원과 이장, 두 사람이 -젊은 사람인데- 찾아와서

선생님, 어른들이 그러는데 이 근방에 옛날에 교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동무, 용케 교회라는 말을 아누만,

내가 바로 그 때문에 여기 서 있는 거요.

바로 이 자리에 옛날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렇다. 이제 교회는 없고, 그렇게도 요란하게 들리던 새벽종소리도 없다.

굶주림으로 인해서 1년에 수백만 명이 굶어 죽기도하고

어린이들은 영양실조로 인해서 키가 크지 못하고 있고

젊은이들도 애처로울 정도로 키가 작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한다.

강제노동수용소에는 별 수 없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갇혀있다.

지하교회에서 울부짖는 절절한 소리가 들려온다.

고요한 침묵이 흐른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평양의 과학기술대학이 지금 세워지고 있지 않는가?

금년 9월까지 완공하고, 내년 4월에 개학하려고 지금 준비하고 있다.

이것 하나를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여러 해 동안 애를 썼는지 모른다.

 

또 그 외에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소를 5백 마리 보내준 것이라든가,

또 약품을 보낸다든가, 치과 병원을 돕는다든가 이것저것 많이 도왔다.

그저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교회 전체가 돕는 것보다

저희 교회가 훨씬 더 많이 도왔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애를 많이 썼다.

 

제가 어떤 때 고관들하고 얘기를 하는 중에 그들이 이렇게 물어온다.

목사님, 목사님의 아버지가 우리 공산당에게 처형당했다면서요?

그걸 직접 보았다면서요?

그런데 왜 이 조국을 위해서 이렇게 애를 쓰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도우려고 그 20년 동안 그렇게 애를 씁니까?

목사님, 바라는 게 뭡니까?

목사님의 소원이 뭐길래 이렇게 돕는 것입니까?”

 

그 때 , 알면서 뭘 물어보냐고...?”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 내가 목사인 걸 일잖아요. 목사가 무엇이 소원이라는 거 몰라?”

, 그저 구체적으로 목사님 뭘 원하십니까?”

내가 말할 테니 들어주겠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기독교인들 더 이상 죽이지 말아다오!”

 

여러분, 우리 북한에서는 이렇게 침묵이 흐르고 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시원하게 응답 안 하시는 것처럼 여겨진다.

언제까진가?

이 고요한 하나님의 침묵, 이 무서운 침묵은 언제까지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보다 더 큰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한다.

 

 

2. 이스라엘 - 침묵 속에 진리로 공의를 세우심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말씀 이사야 42:1~4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예루살렘은 망했고 성전은 불타 없어져 버렸고,

쓸만한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노예로 사는

바로 그런 절망의 때에 주어진 메시지이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사 42:1

역사적으로 이것은 고레스 왕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고레스 왕은 메시야의 예표가 되기도 한다.

 

이제 신비로운 말씀이 전해진다.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

그 어딘가에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을 보라.

이걸 볼 줄 아는 영적 지각, 영적 시각이 있어야한다.

 

조용하게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하나님은 역사하셨고,

요셉이라는 사람을 선택해서 애굽으로 보내어 큰 역사를 이루시기도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한 명을 광야로 보내서 80년 동안을 준비하셨다.

모세라는 사람을 .... 그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42:1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절망적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조용히 일하는 하나님의 사람

성경은 증거한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이사야 42:2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함성도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 소리... 그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영적 지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신비롭게 역사한다.

 

예수님도 말씀하신다. 복음의 역사는 겨자씨와 같이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고!

요즈음은 너무 떠든다. 교회는 성명서 내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데모해서, 혁명해서 이루는 곳도 아니다.

교회는 조용하게 썩어지는 밀알처럼 썩어가면서

그 속에서 생명의 역사는 이루어진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신비롭게 역사한다.

소금처럼 녹아 없어진다. 소금의 흔적은 사라지지만,

녹아서 그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

 

역사학자 찰스 베아드 Charles A. Beard 는 한평생 역사를 연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다.

아주 세밀한 하나님의 심판은 나타나고 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있다.

그리고 가만히 보면,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마다

나라건, 민족이건, 개인이건,

교만하게 만들었다가(방치하셨다가) 심판하신다.

교만해지기 시작하거든...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시작된 줄로 알라.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너무나 천천히 돌아서

마치 맷돌이 돌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정확하게 돌면서 완전히 부드럽게 갈아버린다.

 

역사의 신비는 벌과 꽃의 관계처럼 나타나는데,

벌이 꽃에 들어가서 꿀을 빨아내는 것이 강도질 하는 것 같아도

벌은 꽃가루를 옮겨놓으면서 꽃을 돕고 있다.

벌과 꽃은 묘하게 서로 상조하고 있다.

 

아무리 어두운 가운데도 빛은 있다.

아니 역사는 빛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이 베아드의 유명한 역사관이다.

여러분, 아무 것도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큰 역사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있다.

 

 

3. 중국 - 침묵 속에 조용히 부흥하다

 

저는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일본 선교역사가 2백년을 넘었지만, 아직도 기독교인이 1%가 안 된다.

일본 선교는 참 힘들며 잘 안 된다.

그런데 중국 대륙은 얼마나 큰가? 그런데 벌써 기독교인이 10%가 넘었다.

13억 인구 중에 12천이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국이 교회 문을 닫을 때, 모든 교회를 아주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

출입을 전혀 못 하게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다.

30년이 지난 후에 이제 교회는 없어진 줄 알았다.

교회 문을 닫을 때, 정부 통계로 기독교인이 3백만 명이었다.

3백만 명 정도는, 교회 문 닫고 얼마 안 가면 다 없어질 것으로 여겼다.

 

30년이 흐른 다음 1982년에 교회가 없을 줄 알고, 기독교인이 없을 줄 알고

세계가 하도 몰아치니까 어쩔 수 없이 교회 문 열어 보자면서 열었는데

보니까 놀랍다. 6천만 명!

교회는 없는데, 건물도 없고, 종소리도 없으나 조용하게 그 핍박 속에

그 많은 순교자들 속에서 6천만 명의 교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열심히 사역하는 중에 지금은 12,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알아야 한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있다.

상한 갈대는 심판받은 갈대다. 그러나 꺾지 않으신다.

꺼져가는 등불은 꺼지지 않는다. 다 없어진 것 같으나 있다. 없어지지 않는다.

 

간혹 제게 이런 질문하는 분들 있다. 아주 애매한 질문이다.

목사님, 북한에 지하교인이 얼마나 됩니까?”

아니 지하교인 숫자를 어떻게 세겠는가? 그것은 하나님만 아신다.

 

여러분, 탈북자들을 만나보시면, 그들 가운데 신앙 있는 분들을 보면 놀랍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는지, 그럴 것이 성경만 읽었으니까

많이 알고 많이 외울 수밖에 없다. 여러분, 그걸 잊지 마셔야 한다.

 

꺼져가는 등불, 끄지 않으신다.

상한 갈대, 꺾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그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그 다음 순서는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2:3

-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살아나고, 그 공의가 반드시 세워질 것이다.

 

모순 속에서 공의를 나타내고, 불합리한 속에서 진리를 나타내시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를 이루어가고 계신다.

이제 우리는 신앙고백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침묵 속에서, 조용한 가운데서 - 반드시 이루어진다.

여기든지 저기든지 역사의 어느 구석에서든지

하나님의 공의는 진리로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 기억해야 한다.

 

 

마치는 말 : 진리로 공의를 세우리라

 

예일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도널드 케이건 교수는전쟁과 인간에서

3,421년간 역사를 연구해보면, 전쟁 없는 해는 268년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인류역사에서 전쟁이 없는 해는 거의 없었다. 왜 전쟁은 있느냐?

 

그는 잠재적 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권력을 얻은 사람들이 지금 이 권력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잠재적 적에 대한 공포심으로,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정복욕으로 인해, 자기 영광을 위해 전쟁이 생기고

 

때로는 명예와 체면 때문에 엄청난 전쟁은 일어난다고 역사가는 말한다.

 

여러분, 오늘도 자존심 대결이다.

이 긴장관계가 알고 보면 자존심 대결로 인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믿고 기다리시라.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요, 지금도 이루고 계신다.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는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나,

하나님의 공의는 진리와 함께 실현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이다.

신비한 역사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영의 눈을 들어 바라보면서,

영광의 아침을 바라보며

오늘도 그 분께 영광을 돌리고, 그 분께 감사하며

그 의를 이루기 위하여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하나님께 헌신하는 귀중한 6.25 기념예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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