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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잡힌 영성

LNCK 2019. 12. 28. 16:06

균형 잡힌 영성                     7:18              출처

 

'한 쪽을 붙잡았다고 다른 쪽을 버리는 것은 좋지 않다.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아야 치우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7:18   

 

많은 신자들이 새벽기도, 전도, 봉사, 제자양성 등 무엇인가를

외적으로 했다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것들은 마땅히 신자들이 이렇게 해야 할 일이다.

 

영성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내면적인 것이며,

신앙은 이 내면적 영성이 겉으로 드러나 열매를 맺는 삶이다.

 

E. 글렌 힌슨은 건강한 영성을 위해 네 가지가 균형이 잡혀야 한다고 했다.

 

*경험적 차원의 영성.

*지적 차원의 영성.

*사회적 차원의 영성.

*제도적 차원의 영성이다.

 

이는 마치 네 개의 책상다리와 같아서 하나가 없으면 책상은 흔들리고,

두 개가 없어지면 쓰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하나의 다리로 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편견 가운데 빠져 말씀파, 성령파, 사회운동파 등

다양한 극단이 나오게 된다.

 

첫째, 경험적 차원의 영성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론이나 관념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삶 속에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만나고, 알고,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인격적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 하고,

말씀을 순종하고 약속을 체험해야 한다.

또 성경에 기록된 대로 치유와 다양한 은사들도 체험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불확실한 믿음을 굳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을 중시한 나머지 방언, 은사, 병고침 등 외적이며 경험적인 것

만강조하게 되면 신비주의로 흐를 수 있다.

마치 자신들의 신앙이 최고인 것처럼 주장하는 은사 중심의 일부 극단적

오순절 파들의 문제가 이런 문제다.

이들은 경험은 뜨겁지만 삶의 인격이 부족해서 덕이 안 되고,

또한 영적 교만 때문에 다른 사람의 배척을 받게 된다.

 

둘째, 지적 차원의 영성

 

우리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깊은 신앙으로 이끌려면

경험적인 것만으로는 안 되고 지적인 영성이 필요하다.

즉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가는 지식의 추구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을 꾸준히 공부하고, 묵상하는 삶은 영성에 필수적인 것이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6:3).

어느 정도 안다고 해서 더 이상 배우지 않는다면,

신앙도 더 이상 깊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물론이고, 생각하고 사고하는 지적 폭을 넓히기 위해서

계속 배움의 길을 가야한다.

영성 깊은 선배들의 책을 꾸준히 읽는 것도 필요하고,

삶 속에서 다양하게 배울 수 있는 채널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보고 깨닫는 것도 깊어지고 신앙도 깊어질 수 있다.

 

-교회에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지적 차원으로 가치관 정립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데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러나 지적인 것이 중요하지만 자칫 머리로 아는 데만 머물러버리기 쉽다.

그렇게 되면 머리만 커지고 가슴이 냉랭한 지적 신앙인이 되기 쉽다.

 

처음에는 누구나 새로운 지식에 은혜를 받지만

어느 정도까지 가면 그 이상은 말씀을 파는 것도 한계에 이르게 되고,

더 이상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못한다.

사람을 섬기면서 내면문제를 돕는 것도 한계를 느끼게 된다.

말씀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감동이 되지 않고, 삶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어느새 말만 하는 지식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차원의 영성

 

그러므로 배우고 깨달은 진리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핵심은 위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옆으로 이웃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은 삶 속에서 다른 사람과, 사회로 연결되어지고 나누어져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갖고 돕고,

나그네를 환대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는 지식을 실천한다.

이렇게 이웃에게 사랑이 실천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나 우리의 신앙이 굳어지지 않고 온전해질 수 있다.

 

사람들은 예배에서, 수양회나 세미나를 통해 은혜 받는 것에 너무 의존한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설령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가정에 돌아가서 부부관계나 자녀 관계에 사랑이 실천되지 않고,

캠퍼스나 직장에 나가서 받은 말씀의 은혜가 실천되지 않고 차단된다면

진리는 단지 지식으로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될 때는 성경 공부하는 것도, QT(경건의 시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고, 신앙생활에 대한 열정을 접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정체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알수록, 받은 말씀 하나라도 실천하고 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그 지식은 산지식이 되고, 은혜는 계속 유지되고,

우리의 신앙은 살아있고 약동하는 신앙이 될 수 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느니라"

(13:2)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난한자, 헐벗은 자, 갇힌 자를

대접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신다.(10:37)

 

이는 단지 봉사차원이 아니다. 사랑을 베풀고 섬기는 과정 속에서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영성이다.

 

우리가 나부터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길가에 쓰러진 강도 만난 자

(불행한 자, 어려운 성도들)를 심방하여 돕고 나면

오히려 힘이 나고 은혜스런 이유도 여기 있다.

 

단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이 풍성해지려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삶의 영성, 즉 사회적 차원의 영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 켈리라는 사람은 지나치게 사회적 관심에 매일 때

영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질 것을 우려하였다.

잘못하면 봉사활동에 그치게 되고,

그 사랑도 자기 의를 쌓는 결과가 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들인 후에는 '자기 사람들'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래 복음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동이 따르는 사회적 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하며, 주님 앞에서 "할 일을 한 것뿐이라"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하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고,

더욱더 주님께 영광 돌리며 영성의 내면화에 힘써야 한다.

 

넷째, 제도적 차원의 영성

 

위에서 세 가지 영성이 살이 찌려면 제도적 영성이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제도적 영성이란 교회 전통과 규범, 예배의식 등을 말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교회 제도들의 심각한 결점과 약점을 인식해왔다.

그래서 교회 제도를 형식적인 것으로 무시하고 부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런 교회제도 안에서

우리의 기본적 신앙이 보호받았고, 성장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메조리 J. 톰슨은 공중 예배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도 없다고 하였다.

예배에 행해지는 기도, 성례전, 그리고 말씀 선포를 통해서 교회는 계속해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으며, 예배는 모든 영성훈련의 기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 영성이 풍성해지려면 교회제도를 사랑해야 한다.

전통과 제도가 형식화되지 않도록 하며

동시에 정체성을 영적으로 잘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영성이 없는 성전 개혁을 하셨지만,

기본 안식일을 준수하시면서 회당에서 생명이 말씀을 선포하셨다.

 

가끔 교회를 다니지만 예배에 가치를 두지 않고

형식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옳지 않은 일이다.

예배가 어떻게 진행되고 말씀이 선포되는가,

기도생활이 어떻게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가,

교회 교육이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따라서

그 교회 성도의 기본 신앙의 골격이 갖추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교회 제도에 따라서 (내가 소속한 교회에 따라서 나의 영성이)

에베소 교회가 될 수 있고, 서머나 교회도 될 수 있고,

빌라델비아 교회도 될 수 있고, 라오디게아 교회도 형성 될 수 있다.

이를 생각할 때 교회 제도의 영성처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 성수, 십일조도 기본적으로 잘해야 하고,

예배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도록

경배 찬양과 말씀 선포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한다.

 

또 건강한 영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 깨어 기도해야 하고,

교회에 맞는 영성 프로그램을 계발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교회 제도가 바르게 세워지지 않고는 개개인 성도들의 영성도

바르게 될 수 없다. 제도는 좋은 내용을 담기 위한 그릇인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 지적, 사회적인 영성을 무시하고

제도의 영성만 강조하다 보면 또 모든 것이 형식으로 흐르고

겉만 뜨거운 교회가 될 수 있다.

 

이런 교회의 교인들은 교회에서만 뜨겁게 소리 지르는 위선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영성을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만 강조해서는 안 되고,

다양하게 포괄적으로 경험적 차원, 지적 차원, 사회적 차원, 제도적 차원의

영성이 골고루 균형 잡혀야 한다.

 

*신앙은 어느 한 가지만 전문적으로 한다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깊어지려면 기도를 해야 하고,

기도가 깊어지려면 말씀을 기초해야하는 것과 같다.

하나만 깊은 것은 깊은 것이 아니라 편협한 것이다.

(물론 전문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상호 균형을 이룰 때 진짜로 깊어지는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

 

열심 내다가 원망하는 청년

간혹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고 교회 봉사에 너무 헌신적이어서

결혼도 미루고, 직장도 마다하고,

결혼해도 자녀를 고의적으로 갖지 않고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부모 형제 전토도 다 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영성의 균형이 안 잡히면

그 희생과 열심도 나중에 세월이 지나서는 원망으로 바뀌게 되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중심의 신앙이 흔들리게 됨을 본다.

그러므로 평소에 영성의 균형을 잘 이뤄나가는 것에 주의를 요한다.

 

아무리 높은 수준의 영성이라고.... 교만하다가는 망한다.

4, 5, 10년이 지나면서 그 말씀들도 더 이상 우리의 신앙을

진보시키지 못하며, 신앙의 인격이나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아왔다.

 

점점 머리 신앙에 머물러 판단력만 늘어가는 사람들,

보이는 열매가 없으면 신앙에 기쁨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 모임을 떠나면 인격적인 신앙이 약화되고

다른 교회에서는 적응이 안 되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자기 것이 최고라는 자기 생각과 독단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을 본 것이다.

과연 나와 우리 성도들의 영성 지수는 높은 것인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 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전 9:27).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우리 신앙의 경각심을 주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열심히 최고라는 자가당착 속에 빠져있어서는 안되고

주님 앞에서 나의 영적 수준을 늘 체크 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언제나, 과감하게 바깥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안으로,

인격적 깊은 영성으로 들어가고자 노력해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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