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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신앙고백

LNCK 2019. 12. 28. 16:22


◈윤리적 신앙고백             미가6:6~8            06.02.19. 홍정길 목사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하나님을 잘못 믿은 경건한 크리스천들

①한 경건한 선장이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개인적으로 한 시간 이상씩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했다.
저녁에는 선원들 중에 신자를 모아서 선상에서 같이 예배를 드렸다.

어떤 선원들은, 기항지에 이르면, 거리낌 없이 어울려 사창가로 가곤 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의례 습관처럼 해오던 관례였다.


이 경건한 선장은, 그런 선원들과 어울리지 않고, 선장실에서 지냈다.

어느 날 장난 끼 있는 선원이, 아주 요염한 매춘부를 선장실에 들여보냈다.
선장은 “하나님의 사람인 나를 네가 모욕했다”고 그 선원에게 호통 쳤다.
이렇게 신앙의 지조를 지킬 줄 아는 참으로 귀한 선장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배는 아프리카의 노예를 잡아서 미국에 파는 배였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이 선장처럼 믿을 수 있다.


②2차 대전 중 나치에 관한 실화이다.
루터교 교인 중 경건한 신자들이 성 금요일 날, 3시간이 넘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마태 수난곡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월요일에는 수용소에 가서, 유태인들을 가스실에서 죽이는 일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슴없이 행했다.  


③남의 나라 일 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크리스천 사이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언젠가 큰 돈을 횡령하는 금융 사고를 저지른 은행 간부가 체포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자기 월급뿐만 아니라, 횡령해서 얻은 돈까지도


그는 철저하게 계산해서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렸다.
그 분은 그렇게 버는 돈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우리 삶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 진실로 아름답게 고백되며 사는지 아닌지
우리는 늘 살펴야 한다.


▲신앙은 “고백”으로 드러난다.
종은 쳐서 소리가 나야 종이고, 쳐서 울리지 않는 것은 그냥 쇠붙이다.
장작은 활활 타야 장작이지, 타지 않으면 그냥 나무개비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신앙도 고백되어져야 진짜 신앙이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되어 구원에 이른다. 롬 10:10


①첫 번째 우리 신앙고백은 구원 고백이다.
주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되심으로 말미암아 내 죄가 사함 받았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고,

하나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는 감격이... 내 평생 내내 고백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신앙간증으로, 개인전도로, 해외선교 동참으로 고백되어진다.


②두 번째 신앙고백 :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한 가족이라는 사실이
고백되어져야 한다. 공동체로서의 고백이다. 이것은 예배로 드려진다.

오늘 우리는 옆에 앉은 사람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 있다.
두 세 사람 모인 곳에 함께 하시는 주의 영광을 다같이 바라본다.
구원고백과 공동체의 예배고백과 또 한 가지 고백이 더 남아 있는데...


③세 번째 신앙고백은 : 윤리고백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겠다는 결심이다. 주님이 나를 샅샅이
살펴주셔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는지 드러내 주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라는 고백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윤리고백을 하면서도, 자칫 잘못하면 한 쪽(정의)만
붙잡고 자기가 옳다고 치우치는 극단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데... 살펴보면...


◑올바른 신앙의 윤리적 고백이란?


▲지미 카터의 취임식 신앙고백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이 말씀은 지미 카터가 대통령 취임사에서 가장 먼저 인용한 구절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삶이 어떤 것일까?


▲그것은 미가의 고민이었다.
미가 선지자는, 일년 된 수송아지 번제를 드리면 나를 만나주실까?
천천의 수양을 잡아서 일천 번제를 드리고
만만의 수양 기름으로 하나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 동안 내가 지었던 죄를 속하려고 내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바쳐볼까?
혹은 나 자신을 불살라 바치면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실까?
이런 고민에 깊이 빠졌다.(미가서 6:6~7)


예수 믿는 것의 최대 특권은 내가 부자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형통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선하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서는가?>
→ 이것이 전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요구이다.

그 하나님 앞에 서려고 보니까 문제는 죄이다.
그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다른데서 찾을 수가 없다.


갈보리 언덕에서 내 죄를 대신 처형당하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외에는
내 죄가 해결되지 않는다.

죄가 해결된 그 다음에 우리는 영광의 주님 앞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며
나아가는 특권과 축복을 얻는다.

그런데 계속해서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내게 선한 것을 보이셨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선은 이것이다.
이것을 붙잡고 살아라. 네가 참으로 내 백성이고,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 세 가지 신앙의 (윤리적) 고백을 꼭 짚어 보아라;


▲1. 공의를 행하며
누구 앞에든지 구김살이 없고 감출 것이 없는 투명하고 부끄럼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세상 사람의 법에도, 세상 사람의 간섭에도, 하나님의 말씀에도
그 어느 것에도 저촉되지 않는 의로운 삶을 하나님은 요구하신다.


▲30년 전에, 기독교 실업인 모임(CBMC)에 제가 강사로 갔던 적이 있다.
한국 재계의 유명 인사들,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대거 모인 자리였다.
당시 경험 없던 제가 실수를 했다; 성경 본문을 잘 못 택했다.
그들의 바램은, 내가 하나님의 축복받은 실업인 장로가 되었는데
그것을 추켜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본문으로 택하니까 


‘네가 떼먹은 임금이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고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한 것은 죄이고...’

그 때 장로님들이 강의 후에 식사할 때 제게 이렇게 말했다;
“홍 목사,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렇지 정직해서 사업이 되는 줄 알아?”


매 번 강의를 마치고 나서 식사시간에 나는 똑같은 질책을 들었다.
실업인들은 제 연속 강의가 빨리 끝나기를 총무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놀랍게도, 젊은 기독교 실업인들이 말씀중심으로 성장했다.
이를 악물고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노력들을 곁에서 많이 보게 된다.
어떤 분들은 말씀 순종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망해 버리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교인도 아니지만,
저는 그 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조용히 중보기도 한다.

경제정의가 이 땅에 아름답게 구현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공의를 행하며...” 대로 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고(故) 김인수 교수를 추모하 는 50人의 글을 모은 책이다.

1주기를 기념해 지인들과 동료, 후배들이 글을 엮었다


▲과기처 장관도 하셨고 청와대 경제 수석도 역임하신 구본영 씨가
우리 교회에 나오시길레, “어떻게 교회 나오시게 되었습니까?” 물었더니
“저는 목사님의 교회에 다니는 김인수 장로와 사무실을 같이 씁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답답하고 딱딱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반듯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지 정말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하는 것을 모두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결국 교회까지 이렇게 따라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가정에서, 동네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공의를 행하며...”의 길이다. 이런 고백을 주님은 요구하신다.


▲2. 인자를 사랑하며
인자란 → ‘친절’, ‘긍휼’,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내가 정의롭고 바로 살 때 가장 큰 함정은 → 남을 멸시하는 것이다.
내가 의롭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을 우리는 쉽게 정죄한다.
즉, 인자가 결핍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공산혁명이었다.
소련이나 다른 공산국가도 마찬가지로 혁명 세력은 처음에 매우 정직했다.
과거 부정부패로 얼룩졌던 정권들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그런 정의 구현으로, 역사에 없었던 단시일 만에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의로운 목표는,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 위한 정의였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서 더욱 경쟁적으로 의로워졌다.


그러나 본질적 죄인인 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공산 제국을 만들고 말았다.

지금도 러시아를 방문해서 답답한 점은,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 15년이나
지났지만, 그 계급주의 의식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소련 공산화의 총 두목인 스탈린을 향해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스탈린에게 더 정확하게 복종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인자하셔서 용서가 있지만
스탈린은 인자가 없어서 용서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날, 나는 두 아들에게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다.
당시에 반포의 모든 아이들은 모두 나이키 신발을 신고 다녔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월드컵 상표의 신발만 두 아들에게 신겼다.

그런 절제를 가르친 행동에 대해 저는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태도가 틀렸다는데 있다.
내 아이들이 그것을 이해 못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강요만 했다.
그래서 우리 아들들은 ‘목사 아들’이라는 말보다 더 고통스런 말은 없다.
‘인자가 없었다’는 것이 과거의 내 실패요, 지금의 내 고통이다.
상대방의 연약함에 대해 배려가 없었던 것이었다.


▲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갖는 가장 무서운 함정은,
그 속에 인자가 빠지고, 용서함이 빠지고, 친절이 사라지고,
사람들 만날 때 훈훈한 인간미가 빠진다면... 정의가 아니라 저주다.

주님은 그것을 가장 크게 저주하셨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던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자가 없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다.
우리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영원하도다! 시 118:29등
다윗은 노래했다; 내 평생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히 나를 따르리니


오늘 내가 이만큼 된 것은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인자하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의로우면, 그렇지 못한 타인을 멸시, 정죄, 외면한다.
그런 습관이 누구에게나 있다.


▲참여정부가 이 문제를 극복하면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세울 것이다.
이것(인자)이 무너지면, 과거 역사적 실패의 전철을 다시 밟게 될 것이다.
뭐든지 하나님의 법도(정의+인자)대로 하면 다 잘 될 것이다.

개혁은 참 좋은 말이다. 인간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개혁을 외치면서, 다른 사람에게 비수를 들이대는 일들이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개혁을 외치던 사람들이 행했던 잘못이었다.

우리는 참여정부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는 기도로 뒷받침하자.
또한 내 속에 “인자를 사랑하며..”의 윤리적 신앙고백이 늘 되어져야겠다.


▲3.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교만함은 언제나 사탄적이다.
어거스틴은 원죄를 교만이라고 할 만큼, 중대하게 다루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리라’며 덥석 베어 물었기 때문에
그 후손인 우리들은 원죄의 영향으로 호시탐탐 내가 하나님처럼 살기 원한다.

겸손은 비굴이 아니고, 자기 비하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정직한 삶의 자세이다. 이것이 겸손이다.


▲다윗은 용감하기 짝이 없었다. 전 이스라엘이 벌벌 떨어도
어린 소년이 돌맹이 하나 붙들고 거인 골리앗 앞에 당당할 만큼 용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여호와여 내가 누구이고 무엇이길레
베들레헴 들녘 푸른 풀밭에서 목동이던 나를 부르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까? - 그것이 평생의 노래였다. 평생 겸손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나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구원주시고, 나는 구원받고 용서받은 죄인이다.
그 분 앞에 설 때 가장 자연스럽고 정직한 자세는 겸손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하셨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멸망의 앞잡이라고 하셨다.
모든 사람이 교만을 싫어하는데도, 우리는 항상 교만하다.
이 교만을 극복하기가 무척 힘들다. 오직 주의 은혜로만 가능하겠다.


▲겸손의 비결은 - 주님 앞에 서는 것이다.
주의 밝은 빛 앞에 서니까 내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 분 앞에 올바로 서면, 우리는 내 진면목이 드러나면서 겸손해 진다.
우리는 늘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며...”의 윤리고백이 있어야 하겠다.

지미 카터는 재직 중에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낙인 찍혔다.


그런데 지금 뒤돌아보니까 직위와 관계없이 그가 붙잡은 진리는
그 인생을 얼마나 빛나게 만들어 주었는가.
그는 대통령 직위보다 더 복된 존경을 온 세계로부터 받고 있다.

세계 분쟁지역마다 그 분이 방문하면 평화가 시작된다.


우리나라도 그 분의 북한방문 및 중재가 없었더라면,
남북간에 무슨 무력충돌이 있었을지 모르는 지난 역사가 있다.
지금도 북한에 가 보면, 지미 카터는 존경을 받고 있다.

그가 이런 존경을 남북한과 전 세계에서 받는 것은
올바른 윤리적 신앙 고백이 그의 삶에 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가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가장 선한 것,
하나님께서 내 생애에 요구하시는 이 세 가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이 올바른 신앙 윤리 고백이 성도들 생애에 넘치기를 축원드린다.


*내가 만난 김인수 장로 (이태웅 목사)
http://www.gmtc.or.kr/bbs/view.php?id=weboard_lskim&no=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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