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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 기독교 사회참여

LNCK 2019. 12. 28. 16:31

◈18~19세기 기독교 사회참여           갈2:10           인터넷 글 스크랩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갈2:10


사회참여는 복음주의적 유산이다. 18~19세기 유럽과 미국에는
두 대륙 모두를 뒤흔들어 놓은 복음주의 신앙부흥운동이 있었다.
이것은 단지 복음을 전파하고 성도가 되게 했다는 관점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회참여 운동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을 재조명해 보자.

영국의 산업혁명과 당시 공장 소년 근로자들...


◑1. 요한 웨슬리(1703~1791)의 사회참여


요한 웨슬리는 일반적으로 복음전도자로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전파한 복음은 사람들을 고무시켜 사회운동이 일어나게 했다.
역사가들은, 영국이 프랑스처럼 유혈혁명(1789)의 공포를 겪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웨슬리의 영향이라고 말하고 있다.


▲웨슬리 당시 18세기 영국의 사회적 참상
18세기 당시 영국은, 모직물 공업의 발전으로 양모에 대한 수요가 늘자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몰아내고 그 땅에 양을 풀어놓았다.
물론 지주들은 그 이전에 비해 몇 배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소작농들은 졸지에 삶터와 일터를 빼앗겼다. 엔클린저(청소) 운동
수공업자들 역시 새로 발명된 기계 때문에 마찬가지로 생업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이들은 공업도시로 몰려들었고, 도시는 빈민과 실업자로 넘쳐났다.
이들은 하루 6팬스(패니의 복수형)짜리 일자리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산업화가 시작된 공장은 말 잘 듣는 아이들과 여자들을 싼값에 고용했다.
어린 직공들은 터무니없는 저임금에 하루 12시간씩 공장에서 혹사당했다. 
그들이 잠자는 숙소는 사람 체온으로 보존된다고 할 만큼 춥고 비좁았다.

도시의 하늘은 시커먼 매연으로 뒤덮여 있었고, 길에는 쓰레기가 넘쳐났다.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주기적으로 밀어닥쳤고, 사람들은 합숙소라는 좁은
곳에서 마루바닥위에 침대도 없이 남녀가 뒤엉켜 빽빽이 누워 있었다.
이런 사람들의 주된 수입원은 도둑질과 매춘이었다. 

산업혁명의 동력원인 석탄 탄광에서는 덥고 옷도 없어서 반나체의 남녀가
뒤섞여 일했고, 10살 미만의 어린아이도 막장에서 부모를 도와 일했다.


임산부가 석탄차를 끄는 모습이나, 막장에서 해산하는 광경은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절망에 빠진 노동자들은 이 모든 가난과 고통을 기계의 탓으로 돌리고
도처에서 궐기했다. 공장과 기계를 때려 부수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흥 자본가들은 신세계의 도래를 예찬했고
시골의 지주 역시 흥청망청 사치를 즐겼다.
이 과정에서 맬더스 목사는 이 혼란의 원인이 인구과잉에 있다고 보고,
「인구론」(1798)을 출판, 말도 안 되는 인구 억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1776)을 주장했는데
산업화로 경제가 혼란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자유시장원리(방임론)였다.


▲웨슬리의 사회참여
브레디(J. Wesley Bready)가 쓴
『웨슬리 이전과 이후의 영국』England Before and After Wesley
<부제: 복음주의 신앙부흥운동과 사회개혁>에는
요한 웨슬리의 사회참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론적으로 그는, 앵글로 색슨족의 역사에 있어서 진정한 도덕적 분수령은,
“무시될 뿐 아니라 종종 조롱당하기까지 하는 신앙부흥운동이었다”
라고 결론 내렸다.


그 결과,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사태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①노예제도와 노예매매가 금지되었고,
②감옥의 규칙은 개선되었으며,
③공장과 광산의 조건들은 나아졌고,
④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착취가 개선되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박애정신, 즉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열정과
인간의 죄악에 대한 예민함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새로워진사회적 양심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곧 웨슬리의 신앙부흥 운동의 결실이었다.


웨슬리는 사회정의를 외치는 선지자였다.
웨슬리의 신앙부흥운동은 영국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다른 어떤 운동보다도
영국 대중의 도덕성을 더욱 많이 변화시켜 놓았다. 그 이유는
웨슬리가 복음전도자인 동시에 사회정의를 외치는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한 국가의 정신을 회복시켜 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


◑2. 윌리엄 윌버포스 (1759~1833) 와 클라팜 당의 사회참여


웨슬리 다음 세대의 복음주의 지도자는 윌리엄 윌버포스였다.
윌버포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성자들"(the Saints)이라 불리며 조롱당했다.
또는 그들 중 몇 명이 런던에서 3마일 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인
클라팜에 살면서 클라팜 교회에 속했기 때문에
클라팜 당 Clapham Sect 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들은 아프리카 노예들의 비참한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모이게 된다.
1791년 요한 웨슬리는 그가 죽기 사흘 전 윌버포스에게 편지를 띄워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스런 사업"을 위하여 그를 세우신 것을 확신시키고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이들이 이룬 최대 성과는 영국과 식민지에서 노예 해방을 이룬 것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동안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쳤다.

최초에 시에라 레온(Sierra Leone)의 자유노예 정착(1787),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노예매매 금지(1807)
노예등록 제도(1820)를 거쳐 
노예들의 해방(1833)을 가져왔다. (그가 죽던 그 해)

이것은 윌버포스와 그의 지도력 아래 있던 클라팜 당의 공로이다.


그 "성자들"은 영국의 부유한 귀족 크리스천들이었으며,
그들의 박애정신은 매우 고결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관심을 보였던 분야 또한 매우 광범위했다.


①노예문제 외에도 그들은
②형법과 의회의 개혁,
③보통교육(주일학교) 소책자 및 "크리스챤 옵저버"誌 발간
④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의무(특히 인도) 강조,
⑤복음전파(성서공회와 교회 선교협의회를 세움)
⑥공장법에 관계, 공장 노동환경 개선.
⑦결투, 도박, 폭음, 풍기문란과 잔인한 동물 경기 반대운동을 전개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투철한 복음주의적 신앙에 의해 움직였다.
그들은 소위 클라팜 맨션(Clapham mansions, 모임 장소)에서 영국의
사회병폐와 비리, 정의를 구현시켜 나가는데 필요한 일들을 논의했다
그리고 난 후에는 그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의회 안팎에서
각 사람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할당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레기날드 쿠푸란드(Reginald Coupland)는 그의 윌버포스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기독교 정치가들의 형제애는 참으로 진귀한 현상이었다.
영국에서 이와 같은 것이 존재했던 일은 결코 없었다.”

웨슬리와 윌버포스에 이르는 영국의 신앙 개혁, 도덕성 개혁을 통해

산업화의 혼란 과정에서 무혈혁명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영국이 세계를 재패하는 일등국가가 되는 정신적 기초를 닦았다.


◑3. 미국, 챨스 피니(1792~1875)의 사회적 책임


지난 세기의 미국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사회참여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자식이자, 복음주의의 쌍둥이 형제였다.
법조인이었다가 복음전도자로 전환한 챨스 피니의 경우를 보자.

그의 복음전파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가 "신앙부흥운동"뿐 아니라 "개혁"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복음은 사회개혁에 대한 강한 충동을 일으키며
교회가 사회개혁을 간과하는 것은 성령을 슬프게 하며
또한 그것은 신앙의 부흥을 저해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교회의 위대한 사업은 세계를 개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래부터 개혁자들의 기구로 조직되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 자체가 실제적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개혁을 위하여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는 맹세와 고백을 포함하고 있다"라고
피니는 말했다. <신앙부흥운동에 관한 23번째 강좌에서.


그러므로 피니의 복음주의 운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개혁운동
의 용사들이 된 젊은 개종자들의 무리를 일으키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노예제도 반대운동의 힘은……대부분 피니의 신앙부흥운동에서
개종한 사람들로부터 온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전 생애를 노예제도
반대운동에 헌신한 데오도르 웰드(Theodore Weld)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피니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개종하였으며 얼마 동안 그의 비서로 일했다.
그러나 웰드는 윌버포스와 견줄 수 있는 미국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국회의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미국에서의 노예제도 반대운동은
개혁의 몇 영웅에 의해서가 아니고, 1830년대의 대신앙 부흥운동을 일으킨
복음주의적 정신에 의해서 자극을 받은 수많은 무명의 사람들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19세기 해외선교의 사회참여
19세기는 기독교의 선교사업이 획기적으로 확장된 세기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위대한 세기 The Great Century 로 불린다.
그렇다고 해서 선교사들이 전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만 전념했다거나,
그들의 사회참여가 구제나 원조에 제한되어,
계발, 또한 사회/정치적 활동을 등한히 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이와 같이 명확한 구분은 있을 수 없다.


미국의 선교학 학자인 피어스 비버 박사(Dr. R. Pierce Beaver)는 말했다;
"선교에 있어서 사회참여는 사도들의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참여는 결코 구제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순회선교사들은 의약품 상자와 새롭거나 보다 나은 종자나 식물,
개량된 가축을 가지고 다녔다.


네빈스(Nevins)는 산동성에 현대식 과수원 산업을 소개하였다.
바젤(Basel)의 선교사들은 그들의 모국에서 재배된 코코아나 커피를
가나(Ghana)에 소개함으로써 그곳 경제에 혁명을 일으켰다.
제임스 맥킨(James McKean)은 그 지방의 세 가지 저주거리인 천연두,
말라리아, 나병을 일소시킴으로써 타일랜드 북부의 생활을 변화시켰다.
우물과 깨끗한 물은 종종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얻어졌다.


19세기를 통하여 실업학교의 필요성이 역설되었고 공업이 정착되었다…
덧붙여서 선교사들은 언제나 정부와 상업회사들의 착취나 비리에 대항한
원주민의 보호자였다. 그들은 콩고에서 강제노동을 폐지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남태평양에서의 노예무역에 항거했다.
그들은 중국에서 아편, 편족 및 유아유기에 대항하여 인간의 권리를 위해
맹렬히 투쟁했다.


그들은 인도에서 미망인 화장(남편이 죽으면 부인 죽임),
영아살해와 사원에서의 매춘행위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으며,
무엇보다도 낮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계급제도의 사회적, 경제적
노예제도를 와해시켰다.


그러므로 최소한 지난 세기에는 영국과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회개혁
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 기정 사실인양 생각될 수 있다


<인터넷에 게시된 논문 및 도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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