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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일 형제의 죽음을 승화시켜야 합니다

LNCK 2019. 12. 28. 17:14

김선일 형제의 죽음을 승화시켜야 합니다                            스크랩

  

 

,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 나찌 수용소에서

유대인 노벨 수상작가인 엘리 위젤이 나치수용소에서 한 유대인 십대소년이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와 공개 처형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어린 십대소년이 교수대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엘리 위젤은 소리 없이 터져 나오는 피 묻은 절규를 허공에 던집니다.

",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바로 그때 그는 전혀 그가 기대하지 않았던 나지막한 음성이

자신의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대면합니다.

"나는 저 소년과 함께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

 

엘리 위젤은 이 신비로운 음성을 향해

"당신은 도대체 누구이십니까?"고 묻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소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된 채 엘리 위젤은 그 소리를 물음부호로 자신 안에 파묻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잔혹한 홀로코스트에서 행운의 생존자가 된 그가

불란서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을 때 그는 유명한 작가 프랑소아 모리악을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의 장에서 그가 수용소에서 소년의 처형장에서

그에게 들려온 신비한 목소리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뜻밖에

그리스도인이었던 모리악은 그 음성의 주인공을 알 것 같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냐'고 하자 모리악은 엘리 위젤에게 아마도 그는 당신과

같은 유대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별명은 임마누엘-우리와 같이 계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그 십대소년처럼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 김 선일 사건 때

중동선교의 꿈을 가지고 이라크로 떠났던 김 선일 형제가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해 아까운 생명을 접었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리고 특히 그가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을 알고

그의 무사귀환을 위해 기도해온 이 땅의 성도들은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의 마지막이 참수형이었다는 이 반인륜적인 소식에

우리는 분노를 미쳐 소화해 내지 못한 격한 울분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직하게 주님께 묻고 싶은 물음이 있다면

도대체 주께서는 이 많은 성도들의 기도를 외면하시고

'그를 그렇게 버리셨는가?'고 묻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는가?'고 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 순간에 우리의 뇌리를 스치는 한 선명한 영상을

우리는 떠올리게 됩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몸부림치며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고 외치시는 나사렛 예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좀더 조용히 우리의 내면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어쩌면 우리는 엘리 위젤이 들었던 그 신비한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와 함께 그 참수형장에 있었다고. 그들이 참수한 것은

김 선일 형제뿐 아니라 바로 나를 동시에 참수한 것이었다고."

 

한국에서도 일어났던 참수

그렇지만 왜 하필이면 참수형으로 그는 가야 했느냐고 질문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참수형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낯선 형벌은 아니었습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대교 건너편에는 천주교와 기독교 두개의 성지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개신교 성지인 양화진 길 건너 천주교 성지를 일컬어 절두산 순교 성지라

부릅니다. 절두란 머리가 잘렸다는 뜻입니다. 조선말기 대원군 시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신자들은 소위 병인박해(1886),

무려 8천여 명 성도들의 머리가 같은 동족에 의해 잘려졌던 것입니다.

그중 28명이 성인으로 추대되어 안치되어 있습니다.

 

김 선일 형제의 죽음을 순교의 관점에서 승화시켜야

지금이나 그 옛날이나 참수형은 똑같이 반인륜적인 처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누가 그 절두성지를 비극의 터로 간주하겠습니까?

그들이 흘린 피는 거룩한 순교의 피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피흘림이 바로 오늘의 한국인들의 신앙과 그 거룩한 영향을

만들어온 영감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참수형으로 그의 선교 생애를 마무리했습니다.

초대 교부 터툴리안의 증언처럼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이런 관점과 시각에서 본다면 김 선일 형제의 죽음의 의미는

갑자기 그 차원을 달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김선일 형제의 죽음을 순교의 관점에서 승화시켜야 할 시간입니다.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의 차이

한국 교회를 잘 알고 있는 일본 신학교(지바 신학교) 교장님의 강의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는 강의에서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의 차이는

순교자의 차이라는 흥미 있는 지적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일본 교회가 한국 교회보다 선교의 역사에서 훨씬 더 오랜 역사와

더 우수한 선교인력을 가졌으면서도

일본 선교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지 못한 이유를

그는 순교 역사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일본에는 천황이라는 우상숭배에 대하여 대항하다가 흘려진

순교의 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거절하다가 많은 순교자를 낸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 한국 그리스도인이 아닌 제3자에 의해

한국 기독교가 가진 순교유산의 부요함을 감격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그 자랑스러운 순교유산을 이 땅만이 아닌

전쟁의 상흔으로 찌든 이라크까지 확산하게 된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인 김 선일 형제의 흘려진 피로 이제 우리는 수많은 복음의

열매가 맺어질 중동의 영광스런 선교미래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의 시간은 단순한 애도의 시간이 아닌

두 번째 세 번째 밀알을 위해 선교 축제를 준비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날의 이라크 기독교사에 한국인 선교사 김 선일의 이름이

소중하게 기억되도록 지금은 그의 죽음을 승화시켜야 할 시간입니다.

 

이동원 목사


.............................


영결식장에서 형 진국(38)씨가 낭독한


'이라크를 용서합니다. ....당신들을 사랑합니다'란 메시지 전문

 

'이라크를 용서합니다.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이역만리 이라크 땅에서 날아든 비통한 소식 앞에

형제들은 밤새 울부짖었고,

어머니 아버지는 혼절하여 몇 번을 넘어졌습니다.

선일이가 납치되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알려지면서

살을 도려내는 슬픔은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가족들의 분노가 선일이의 억울한 죽음을 조금이라도

웅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선일이는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앞에 죽지 않고 남겨진 선일이의 꿈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위험할지라도

영원히 품고 사랑하고자 했던 `이라크' 였습니다.

      

그 여린 생명을 바쳐 드러내고자 했던 선일이의 꿈을

우리가 알게 된 순간,

분노와 슬픔만으로는 선일이의 마음을 웅변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선일이가 죽기까지 당신들을 사랑했듯이

그 사랑으로 우리 모두는 당신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이번의 일을 지켜본 우리 모두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나라 이라크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선일이의 꿈이었음을

이 시간에 선일이를 대신하여

당신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한국이 이라크를 사랑하는 것,

세계가 이라크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되어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것 안에

선일의 꽃피우고자 했던 꿈이

있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시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여 주셨듯이

선일이를 천국으로 환송하는 이 자리에서,

선일이와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이 자리에서

슬픔과 고통의 언덕을 넘어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합니다.

    

이라크를 용서합니다.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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