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
▲주기철 목사님은 당시 평양에서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 이셨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내용인즉, 일본의 천조대신 아마디라스 오오미까미 를 섬기는 것은
신앙과 상관없는 일종의 국민의례이니 신사참배를 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주기철 목사는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 목사에 동조하는 여러 성도들도 같이 투옥되었다.
어느 날, 일본 순사들은 주목사의 의기를 꺾으려고
주목사와 성도들을 감옥 마당에 데리고 나왔다.
“오늘 여러분 성도들이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면
주목사가 더 이상 고문을 받지 않도록 해 주겠다.”
교도소 마당, 그들 앞에는 널빤지에 못을 무수히 박아 놓고
못 위를 걷는 고문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들이 계속 신사참배 반대를 고집한다면
주목사는 이 못 위로 걷는 고문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주목사는 유명한 이런 말을 했다;
“성도 여러분, 나 주기철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직 주님과 여러분이 함께 다짐한 것을 굳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마치고 주목사는자진해서
못이 무수히 박힌 널빤지 위로 올라갔다.
순간 성도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주목사의 발자국 발자국 마다 붉은 피가 얼룩졌다.
그 때 성도들은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마 아래 찬송을 불렀을 것이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오늘 한국 교회가 이만큼 된 것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주님만을 섬기고 그 계명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헌신과 다짐을 했고, 그 다짐을 철저히 지켜나갔기 때문이었다.
한국 교회가 이런 복음적 전통 위에 굳건히 세워져 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사각오 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하리요.
나는 일사의 각오와 다짐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를 버리지 맙시다.
풀의 꽃같이 시들어 떨어질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더럽게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각오와 다짐과 정절을 지켜나갑시다.
다만 나에게는 일사각오의 결의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세례 요한도 스데반도 청장년의 때에
뜨거운 피를 흘려
주님을 향한 그의 다짐을 지켜 나갔습니다.
1944년도에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셨다.
당시 만 47세 이셨다.
우리는 이런 다짐을 되새기면서
우리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정화되기를 기도드리자.
다시 한 번 purify, 깨끗하게 될 수 있도록 저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다시 한 번 올곧은 신앙이 되도록 다짐하자.
▲주기철 목사님의 "다섯종목의 나의 기원"
▲순교하시기 직전에 쓰신 고난의 명상록이 이순겸 목사님께 전해져서
그 기록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이제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내가 당하는 수욕을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영광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어떤 말로 대답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으리이까?
'분류 없음 > 2006'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헨리 나우웬의 비즉응성 (0) | 2019.12.28 |
---|---|
개입 / 안수현 (0) | 2019.12.28 |
꿈이 없으면 노숙자 인생과 다름없다 (0) | 2019.12.28 |
신앙의 시험은 이기면 좋은 것이다 (0) | 2019.12.28 |
베드로의 비상한 믿음 (0) | 2019.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