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카데쉬 (거룩하신 하나님) 레위기 20:7~8, 롬6:13 06.01.15.
▲죄로부터 도망치는 죄인
청교도 시대가 남긴 에피소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당시 새로 입교한 자매가 나이 든 장로님으로부터 세례문답을 하던 중이었다.
“자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예!”
“그러면 지금 예수를 믿은 후에는 자신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지금은 이전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일면 정답이다.
“그러면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에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전에는 제가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인이었지만 a sinner running after sin
지금은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죄인 a sinner running from sin 입니다!”
이 대답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다.
▲오늘날 잊혀진 축복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았다고 죄와의 싸움에서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넘어뜨리고자 더욱 집요하게 공격하고
유혹한다. 이것을 ‘영적전쟁’이라 부른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죄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거룩해지는 일’이다.
신학자들은 예로부터 이 과정을 ‘성화 sanctification 의 단계’로 불렀다.
신학자 헨리 할러먼 Henry Holloman 교수는, 성화를 가리켜
‘오늘날 잊혀진 축복 the forgotten blessing'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거룩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인데, 특히 죄가 인류에게 어떻게 시작되는지 보여준다.
출애굽기는 죄의 노예의 땅에서 어떻게 떠나는 가 보여주는 구원의 책이다.
레위기는 죄로부터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거룩’을 주제로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레위기 20:7~8.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여호와 카데쉬(케데쉼)니라”
카데쉬 는 영어로 holy에 해당하는 ‘거룩하다’는 뜻이다.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은 무엇보다 그의 백성들이 거룩하기를 소원하신다.
문제는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소원인
거룩함을 실제로 이루어 드릴 수 있느냐? 이다.
바울은 롬 6:13절에서 그 실제적인 처방을 전해주고 있다;
◑1. 자신을 죄에게 드리지 말아야 한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3)
여기서 열쇠 단어는 ‘드리라’ 이다.
영어로 present(갖다 바친다), 혹은 yield(항복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 자신을 죄에게 갖다 바치지 말라,
또는 죄에게 항복하지 말라는 뜻이다.
개역개정판에는 너희 자신을 ’죄에게 내주지 말라’로 번역했다.
표준새번역은 너희 자신을 ‘죄에게 내맡기지 말라’고 했다.
▲크리스천이 되기 전과 된 후에, 죄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무엇일까?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밖에 없어서 죄를 지은 것이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서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이제 우리는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데, 죄를 짓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차이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갖고 있던 죄에 대한 관념은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믿고 정말 변화 받았다면 패러다임생각의 틀이 변해야 한다.
‘나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죄를 이길 수 있다. 승리할 수 있다!’를 믿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 자체가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너무나 쉽게 죄의 종으로 내어주는
자포자기의 굴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한 가지 도움이 되는 처방은, 우리가 죄 지을 유혹을 느낄 때마다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롬 6:11절에서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 6:11)
여긴다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훈련 mental exercise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죽으실 때 죄짓는 나도 거기서 함께 죽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죽은 자는 더 이상 죄에 반응하지 않는다.
시체는 미워하는 것, 화내는 것, 시기하는 것, 질투하는 일 등은 없다.
그래서 만약 죄 지을 일이 생기면 ‘나는 죄에 대해 죽었는데...’하고
죽은 나를 그려 보시라. 바울이 여기라고 한 것처럼...
그리고 반응을 더 이상 진척시키지 말라. 죽었으니까.
▲죽음은 천국 가는 길일뿐 아니라, 거룩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나의 옛사람이 죽어야, 새 사람이 산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어야 의에 대하여 산다.
죄의 유혹이 올 때마다 끊임없이 자신은 죄에 대하여 죽은자로 여기는
속으로 되뇌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죄를 이기고 거룩에 이르는 첫째 처방이다.
◑2. 자신을 다시 산 자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거룩은 무엇을 안 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제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하셔야 한다.
거룩의 첫째 처방은 죄를 향해 끊임없이 NO! 하는 것이라면
둘째 처방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서 YES!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에서 죄에 대해 죽은 자들이다.
그러나 주께서 다시 사심은 우리로 다시 산자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 인생을 살게 하고자 함인 것이다.(우리도 죽었고 다시 살았다)
▲그래서 롬 6:13에서 바울은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라고 한 것이다.
롬 6:11의 표현을 빌리면, 죄 지을 일에 대해서는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지만
그래서 반응하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생하게 산자답게 열렬하게 반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죄를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자신을 드려야 한다.
(이상하게 우리는 안 지으려고 하면 더 짓는다)
▲레위기에서 ‘거룩하다’는 단어를 원 의미에 가깝게 다른 단어로 대치하면
‘구별한다’ separate, set apart 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되는 ‘구별’이나 ‘분리’라는 단어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①‘속되고 더러운 것에서의 분리’의 의미도 있지만 (No)
②'이제 구별해 놓은 것을 하나님의 목적에 사용 한다'는 뜻도 된다. (Yes)
그래서 성경에는 ‘거룩하다’는 말이 아주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된다.
①성전, 성소(거룩한 곳)라는 말은
단순히 그 장소에서는 죄가 범해지지 않고 깨끗해서 성소인가?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그 장소가 쓰임을 받기 때문이다.
②성일(안식일, 거룩한 날)을 생각해 보자.
죄를 안 짓는 날도 되지만,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전념하는 날이란 의미의 ‘거룩함’이다.
③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된 우리들 스스로를 성도라고 부른다.
단순히 죄를 짓지 말고 사는 ‘거룩한 무리’ 보다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일, 거룩한 목적에 드려지는, 쓰임 받는 무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섬김은 성도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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