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부흥을 갈망함 느8:8~13 05.12.11.
느헤미야 8장의 부흥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말씀의 부흥의 역사는
깨닫는 단계 → 통회의 단계 → 기쁨의 단계 → 더욱 사모하는 단계 등
4단계를 거치는 것을 볼 수 있다.
◑1단계 : 말씀을 깨닫는 단계(8: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느헤미야 8:8)
하나님은 부흥의 역사를 위해서 먼저 말씀을 펼쳐 반포하게 하신다.
그러면 그 말씀을 깨닫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생긴다. 일어난다.
어떤 부흥운동도 먼저 말씀을 깨닫는 단계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말씀 앞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말씀 앞에서 자기 실존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게 된다.
다른 말로, 말씀 없이는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2~13)
우리의 마음과 뜻을 감찰할 역량이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다.
그 말씀이 감찰할 때 나의 실제 모습은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난다.
깨달으면 눈물, 통회가 나온다. 백성이 다 우는지라(느헤미야 8:9)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지, 부족한지....
율법(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죄를 깨닫는 역할을 하게 한다.
오늘 한국 사회 갈등 구조의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이 비춰질 때
눈물이 나오고 죄를 깨닫게 되는 역사가 나타난다.
무엇이 우리에게 불행을 갔다주었는지
무엇이 내 불행과 탄식의 원인인지 깨닫게 된다.
◑2단계 ; 통회하는 단계(8:9)
깨달으면 통회하게 되어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 8:9)
하나님의 완벽한 선하심과 대조되는 인간의 타락한 추악함을 깨달으면
눈물이 나오고, 회개가 일어난다.
에스라 10:1절에 보면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백성의... 큰 무리가 모인지라
에스라가 말씀을 선포할 때, 많은 백성 모든 백성이 그 앞에서 회개했다.
남녀노소 차별 없이 그들은 심히 통곡했다.
우리가 어릴 때 여름성경학교, 동계성경학교를 한다든지
또 어린 나이였지만 부흥사경회 등에 참석해보면
당시 성도들이 많은 회개를 하며 눈물을 흘린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오늘 이 예배가 영감이 있다면, 그런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통회하고 회개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자리에 모였기 때문에
이 예배가 영감이 넘치는 것이다. 감격의 눈물이 있는 것이다.
행 2:37절에 마음에 찔려 라는 반응이 있다.
하나님 말씀은, 때때로 예리한 칼로 베는 것 같은
우리의 무딘 마음과 양심을 찌르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는 반응으로 이어진다.
빅톨 위고는 <레미제라블, 장발장>과 같이
신앙적 교훈을 주는 매우 탁월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본래 개인 생활은 문란했다.
심한 주색과 타락된 생활은 그의 가정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러던 중 1841년 어느 여름 날
그의 사랑하던 딸 레오폴디느의 시체가 파리 세느 강에 떠올랐다.
딸은 아버지가 바른 생활로 돌아올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남기고
세느 강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위고는 "이 비극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심판이다." 라고 울부짖으며
"나는 이제 어찌할꼬?" 하며 며칠을 울고 회개하였다.
딸의 희생은 아버지와 온 가정을 바꾸어 놓았다.
그 후 변화된 후 그의 작품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야말로 극심한 방탕생활에서 문자 그대로 180도 전환하여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프랑스와 전세계에 영향을 준 것이다.
반대로 이런 반응도 있다;
사도행전 7:54절 이하에 보면
스테반 집사가 설교할 때 모인 군중들은 역시 말씀에 찔림을 받았다.
그런데 그 때 사람들은 저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고 했다.
듣기 싫다고 귀를 막고 달려 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쳐 죽였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아니까 내가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 앞에서 스스로 죄책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자기가 죄책감을 가지면, 함부로 남에게 삿대질 할 수 없다.
죄책감을 가지면, 교만해서 남으로 남을 비판하고 인격살인 못 한다.
죄책감을 가지면, 남에게 함부로 말 못한다.
▶오늘 우리 민족의 문제가 무엇인가?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 내적으로도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소위 성경비평주의 textual criticism를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의 영향으로, 온갖 심리학적 이유를 내세워 동성애를 허용하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도리어 말씀을 취사선택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한 가지 특징은 윤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분명한 교리보다, 윤리를 더 강조한다.
예수의 유일성 - 이런 것이 어떻게 성경적으로 말이 맞나?
크게 중요하게 생각을 안 한다.
성경이 말하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성경 앞에서 자기 자신을 벌거벗기고 적나라하게 내어놓지 않으니까
겸손함이 없어진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 하고, 은혜의 눈물이 나오지 않으니까
서로 교만해서 싸우게 되고
그 결과 교회도, 사회도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만물을 벌거벗기시는 성경 말씀의 능력을 통해서
나 자신이 깨닫고 통회하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
▶최근 나는 성경을 읽다가 내 마음을 강타하고
회개하고 각성하게 하는 말씀이 있었다.
나를 통절하게 하고, 내 마음에 비수처럼 꽂히는 그런 말씀이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약 5:1~8)
이 말씀은,
영적 추수와 시대 상황을 향하여 볼 때
제 마음속에 통한의 심정을 가지게 했다.
성령의 채찍질이 왔고, 성령의 비수가 내 마음을 도려내었다.
사치란 육신의 사치와 더불어 영혼의 사치, 정신적 사치, 마음의 사치
즉 시대를 향하여 울고 통곡하는 마음 없이
마음을 편하게 놓았다가
오늘날 이런 아픔의 시대를 겪고 있는 것이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약 5:7~8)
▶하나님 아버지,
이 민족을 향한 이른비 와 늦은비 의 은혜를 다시 한 번
회복시켜 주시사
주여 베풀만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다시 한 번 참 용기,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인내하는 마음을 주님께서 복원시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과거부터 우리 민족이 갖는 인내와 끈기가 있었고
보이지 않게 참는 것 많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오늘날 한국 민족은 서로 참지 못하고 어렵게 하는지....
우리교회 속한 교우들이라도 이 말씀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하시고
경고 받게 하여 주셔서
길이 참고 인내하며 주님 앞에 매달리는
통회의 심령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큰 비극은 이 놀라운 말씀의 능력을
소수의 교회들, 소수의 크리스천들만 이해하고 깨닫는데 있다.
말씀의 부흥의 능력을 - 소수의 교회들만 안다는 것이 비극이다.
말씀의 능력이 약하니까 예배가 무디어진다.
예배가 무디어지고 역동력이 없으니까 점점 지루해진다.
예배가 지루해지니까 부흥의 능력이 사라진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우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울게 하시고 통회하게 하시는 말씀의 능력 앞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한다.
◑3단계 : 기쁨과 감격의 단계(8:10) .... 통회 후에는 기쁨이 주어진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헤미야 8:10)
말씀을 통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더러움을 닦아내면
자기도 모르게 기쁨과 감격이 들어온다.
진정 통회하고 나면 기쁨의 단계에 이른다.
기쁨이 생기는 이유는
용서받은 기쁨, 회복의 기쁨이다.
말씀 앞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을 비춰볼 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이 하나님의 용서의 기쁨의 강물이 사회에, 교회에 흘러 넘치기를....
마 5: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가 있는 줄 확신하자.
시대와 민족의 죄 때문에 가슴아파하고 애통하면
하나님은 위로와 기쁨을 주신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들은 자기의 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적인 죄,
거족적인 모든 죄를 같이 회개한 것이다.
주일 강단의 메시지 또는 매일 성경묵상을 통한 메시지와 동행하면서
날마다 솟는 샘물, 또는 큐티 책자로 매일 주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자복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독특한 기쁨을 주신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렘 15:16)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은 우리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샘솟게 한다.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면, 꼭 이 맛을 보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셔야 한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시 19:8)
▶사람이 많은 탈취물(보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시 119:162)
말씀을 읽고 회개를 통해 내 마음에 기쁨이 회복되면
이것이 얼마나 좋은지 많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보다 더 좋다는 것이다.
마태 13장에 밭에 감춰진 보화 비유가 있다.
우연히 가다가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했다. 너무너무 좋아서...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고, 회개를 통해 용서의 기쁨이 넘치는 것은
많은 보물을 발견한 기쁨처럼 좋다.... 이런 경지에 올라가자.
이 기쁨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도, 부를 많이 쌓는 것보다도
이것이 더 기쁘다...라고 고백하는 경지에 올라가자.
하다못해 그런 고백이라도 하고, 집에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고백하다보면 그런 기쁨이 생길 것이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느헤미야 8:10)
자기만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 기쁨의 손길을 펼치는 것이다.
이웃을 생각하는 성숙한 자리로 나가는 것이다.
▶이 기쁨이 얼마나 큰지 시 19: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지금부터 3천년 전, 시편을 쓸 당시 최고로 달디 단 음식은 송이꿀이었다.
송이꿀이란 벌집에서 흘러나오는 꿀을 뜻한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달콤한지,
세상에서 가장 단 음식보다 더 달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올라갔으면 좋겠다.
죠지 뮬러는 일생동안 5만 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가 이런 엄청난 기도 응답을 받은 계기는
그가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매우 극진했다는데 있다.
그는 자기가 말씀을 통해 누렸던 송이꿀 같은 기쁨에 대해
자기 인생의 황혼기에 해당하는 71세 때에,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어린 동료 신자들과 젊은이들에게
영적 기쁨과 즐거움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내가 말해주고 싶다.
여러분은 정말 기쁨을 누리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다른 길이 없다.
말씀을 읽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는 진실로 애정어린 마음으로 권면하고 싶다.
나는 성경을 백 번 이상 읽었지만 다시 읽을 때마다 늘 새롭다.
그러므로 나의 평안과 기쁨의 근원은 말씀을 읽는데서 온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삶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죠지 뮬러의 고백이 여러분에게 완전히 소화되었으면 좋겠다.
▶정말 어려우신가?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죽을 지경이신가?
살맛이 안 나는가?
이 큰 짐을 어이할꼬 하고 헉헉대는가?
말씀 앞에 다가가시기를 바란다.
특별히 시편의 말씀을 읽으면
이것이 여러분에게 송이꿀보다 더 달콤한 기쁨을 줄줄 믿는다.
많은 어려운 사람들
절망적인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그런 많은 분들의 고백이 “나는 시편을 통해 회복되었다!”
어디 시편뿐이겠는가?
추운 겨울에 훈련나간 군인들이 보초서면서 새벽 초승달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리아리하고 온 몸이 춥고 떨리고
정말 힘들고 추운 상황에서
성경을 호주머니에서 빼 내서 시편을 읽고 묵상하면서 고백한다;
‘야, 이 시편이 나를 살리는구나!’
◑4단계 : 말씀을 알고자 모여드는 단계(:13) ... 기쁘면 더 사모한다.
그 이튿날 뭇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여서(느헤미야 8:13)
말씀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알게 되면
말씀을 더 깊이 알고자하는 단계에 올라간다.
모여서 말씀을 더 사모하고자 하는 단계로 올라간다.
더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씀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다음날 또다시 말씀을 사모해서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였다.(:13)
막 사람들이 모여들어 영적인 역동성이 응집될 때 상승작용이 일어난다.
세계 교회 부흥뿐 아니라 한국교회 부흥도 이렇게 일어났다.
말씀을 밝히 알고자하는 갈망이 불붙어 올라서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을 때에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가 Gold in Korea 책을 썼는데,
책 이름에서 ‘한국의 황금’이라고 밝힌 연유는 이렇다;
당시 한국 농경사회에서 겨울 농한기에 적어도 1~2주일씩 사람들이 모여서
사경회에 참석했다. 과거에는 부흥성회 보다 부흥사경회라는 말을 많이 썼다.
사경회라는 말은 성경말씀을 조사한다, 즉 밝히 알려고 연구한다는 뜻이다.
(査-조사할 사)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블레어 선교사는 한국에 강한 부흥이 일어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다른나라 사람들과) 달리 모여서 말씀을 연구하고,
관찰하고, 배우기를 그렇게 애썼다. 이것이 한국교회 부흥의 원인이었다.
▶한국교회 사경회에 대한 여러 증언이 있는데, 이런 증언도 있다;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는 150~3백리정도 떨어진 삭주,
창성, 의주 등지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그 불길이 확산되어 황해도, 서울,
호남의 목포 무안 사람들이 평양으로 올라갔다.
나중에는 강원도에서 평양까지 무려 320키로를 걸어서 왔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것은 선교지 교회가 하루 속히 독립적으로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물질적 도움을 베풀지 않았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은 1주일, 2주일 말씀을 들으려면
스스로 이불도 준비하고, 장작도 준비하고, 쌀도 짊어지고 갔어야 했다.
그렇게 고생스럽게 짐을 싸들고, 먼 길을 걸어가서 1~2주일씩 말씀을 들었다.
그런 열정과 그런 은혜가 1907년 평양 대부흥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읽기 위하여, 더 잘 듣기 위하여
2 ~ 3백 키로 떨어진 곳에서, 땔감을 준비하고, 겨울에 이불을 준비하고,
쌀과 먹을 것을 준비해서 가는 그런 마음만 가진다면
오늘 기쁨을 회복하지 못할 사람 없을 것이다.
통회자복 못 할 사람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 위기는 반드시 극복될 것이다.
여러분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시는가?
내가 말씀을 갈망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마르틴 루터는 말씀에 대한 갈망과 갈증을 이렇게 표현했다;
성경은 많이 길어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마르게 하는 이상한 샘물이다. ★
영적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다.
사모하면 할수록
말씀에 갈급함을 가지고 더 읽으면 읽을수록
더 귀한 것을 마시게 된다.
반대로
안 읽으면 안 읽을수록
갈증도 더 안 생긴다.
▶시 119편 147~148절에 보면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밤새도록 깨어있습니다.
방학기간동안에 이 말씀과 갈증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기도하자.
이북에 있는 지하교회 성도들은 말씀 한 페이지 받으려고
온갖 수모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다가
나중에는 들켜서 아오지 탄광, 광산,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져서
모진 고문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편할 때, 감사함으로 말씀에 대한 갈망을 회복해야겠다.
.........................
◑서론 / 성경과 뗄 수 없는 한국교회 초기 역사
▲1.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어 성경을 갖고 오게 된 계기, 1885.
매년 12월 둘째 주일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지키는 성서주일이다.
한국교회는 성경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세계선교 역사를 보면, 항상 성경보다 선교사가 먼저 들어갔다.
선교사가 먼저 들어가서 성경을 번역하고, 반포했다.
그런데 한국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에 들어올 때,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갖고 들어왔다.
1882년, 당시 조선시대 홍문관 관리였던 이수정은 일본에 갔다.
그는 일본에서 은혜를 받고,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인이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일본성서공회에서 일하던 루미스 라는 미국선교사는
이수정을 만나서 그에게 성경 조선어 번역을 부탁했다.
그래서 이수정은 일본에서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번역했다.
(한문 문장에 이두식 토를 단 것임)
그래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일본을 들러 한국에 오는 길에
이수정이 번역한 그 성경을 들고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2. 한국 개신교회가 백 년 뒤졌으나 천주교회를 앞서게 된 이유, 1875.
그 이전인 1875년 만주에서 존 로스, 존 메켄타이어 선교사는
이수정보다 앞서 한국어로 된 성경(권별)을 번역 출판했고,
그것을 서상륜 등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에 반포했다.
그래서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성경이 반포되어
선교사보다 성경을 먼저 접하게 되는
세계선교역사에 유례가 찾아보기 드문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조선에, 개신교 선교는 가톨릭보다 약 1백년이나 뒤져 있었다.
그런데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교세가 더 확장된 이유는 무엇인가?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성경 반포와 보급이 아주 급속하게 이루어졌고
성경을 제대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것이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가져왔다고 본다.
▲3. 토마스 선교사가 성경을 건네준 결과, 1866.
더욱 감사한 것은 1866년, 토마스 선교사(최초로 순교한 선교사)가
당시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조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동강에서 그 배를 침몰시키고 토마스 선교사는 거기서 순교했다.
(5년 후인 1871년, 미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북한 정권은 그곳에 제너럴 셔먼 호 격침 장소에 전적비를 세워 두었다.
김일성의 아버지가 그 전투에 참전했다고 정치적 선전을 하고 있다.
토마스는 순교했지만, 그 박춘권은 후에 그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는 참수 당하기 전, 다른 사람에게도 성경을 나눠 줬는데
그 성경은 한문 성경이었다. 박영식은 성경을 보고 참 좋아했다.
당시에는 책이나 종이가 매우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문 성경을 찢어서 그 종이로 자기 집 방에 도배를 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눈을 떠도 성경, 밥을 먹을 때도 성경,
그래서 도배한 성경을 읽다가 그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이렇게 성경을 도배했던 박영식의 집은 얼마 안 있어 널다리 교회가 되었다.
그 장대현 교회에서 1907년, 한국에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와 같이 위대한 기적이 일어난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 말씀을 순종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은혜의 길을 열어주신다.
누가는 참 부드러운 사람이지만,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이 있길레... 순교도 시키시는가....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가 결코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을 통한 부흥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도 마찬가지다.
왜냐면 당시 성경은 라틴어(고대 로마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라틴어는 배운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고, 교회 신부들의 용어였다.
그래서 일반 민중들은 성경말씀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 때 마르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쿠텐베르크가 공식적으로 인쇄한 첫 번째 책이 성경책이라고 한다.
루터의 독일어번역 성경은 일반 사람들의 손에 들려지자마자
그 성경이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고, 신앙에 역동적이 되었고
어두움의 터널 속에 있던 사람들이 환한 복음의 광명을 보게 되었다.
그들에게 새로의 삶이 펼쳐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희안한 일이었다.
빼치카 앞에서 불을 때는데, 위클리프가 (복음의) 불을 피우고 있었다.
불이 더 잘 타도록 그 곁에서 땔감과 석탄을 제공하고 사람은 후스였다.
어둔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사람은 다름 아닌 마르틴 루터였다.
마침내 도버 해협을 건너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에게 까지 번졌다.
당시 피의 메리 여왕이 非가톨릭 교도들을 굉장히 핍박했는데,
존 낙스는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메리 여왕이 두려워 떨 만큼
이 불길은 다시 요한 웨슬리(1703~1791)에게 점화되었다.
그는 전 생애 50년 동안 약 4만 번 설교로 말씀을 널리 전파했다.
더군다나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한 그의 열정은 참으로 대단했고
당시 18세기 영국과 미국에 큰 복음의 부흥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다.
이 불길은 20세기 초, 한국으로 건너와 평양 장대현 교회에 점화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마다 불길이 타올랐다.
다시 한국에 복음의 불을 던지시사, 영광이 충천케 하시기를 소원한다.
*마치는 말: 세계 교회 역사를 볼 때, 또한 한국 교회 역사를 볼 때
말씀의 횃불을 들고 시대의 어두움을 밝히고 부흥한 역사가 있었다.
오늘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려면, 이런 말씀의 부흥이 다시 일어나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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