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안의 천사들이 남긴 유산 기사스크랩
20대 후반의 꽃다운 나이에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한국에 와서
43년간 소록도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평생을 봉사하다가
70세 고령에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 노구가 행여 짐이 될까봐
말없이 본국으로 떠난 마리안느(71, Marianne Stoeger)와
마거릿(70, Margreth Pissarek) 두 수녀님은
출세지상주의, 성공주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한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크리스천 삶의 모델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들은 43년간 평생을 몸 바쳐 소록도에서 봉사하고
43년 전에 가져왔던 그 가방 하나 들고 말없이 한국을 떠났다.
그들은 크고 화려한 빌딩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정신적/신앙적 유산을 남기고 갔다.
▲출세지상주의, 성공주의가 만연하는 한국
옛날 의사는 ‘전문의’로 만족 못하고 의학박사 따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요즘 의사는 ‘의학박사’로 만족 못하고,
적어도 5층 이상 빌딩을 소유한 병원장이 되려고 한다.
학문을 연구한다는 교수도 마찬가지다.
‘교수’로 만족 못하고, ‘학장’ 또는 ‘총장’이 붙어야 명함을 내밈직하다.
작가도 아예 문학창작활동에는 뒷전이고, ‘작가협회 회장’ 이런데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의사가 의술에 별 관심이 없고
교수가 정작 학문에는 뒷전이고
모두가 출세하고, 성공하는데 혈안이 되고 있다.
일반 사람들의 시선도
순수 의사, 순수 교수보다 출세한 의사, 출세한 교수를 더 우러러보니
아예 초등학교 반장선거 열풍부터 잠재우지 않으면
한국의 출세지상주의, 성공주의 사회풍토를 개선하기 어려울 것 같다.
▲두 분 벽안의 천사들이 끼친 영향
지금도 아프리카에는 슈바이처가 세운 병원보다 더 큰 병원들이 많다.
슈바이처는 큰 병원을 세우는 것이 자기 삶의 목표가 아니었다.
또한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은, 큰 병원을 세웠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고상한 의술, 희생정신을 존경하는 것이다.
의료인으로서 의술에 충실한 삶!
그들은 다른 것(출세, 성공)에 눈 돌리지 않았다.
그것이 벽안의 천사들이 우리에게 끼친 크리스천 삶의 모델이다.
은퇴 후에도 자기 지시를 따르는 추종 세력을 조직하지 않고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는 큰 건물을 짓는 일에 몰두하지 않고
교수로서 학문 활동에 충실한 삶,
의료인으로서 의료 활동에 충실한 삶,
종교인, 법조인으로서 자기 영역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삶,
입신양명에 치우치지 않는 그런 삶이 아름답다.
보도는 안 되어도, 그런 분들이 아직 우리 사회에 많을 것이다.
▲양(量)에 대해 편중된 시각을 가진 기독교인
계시록에 7교회의 모습이 나온다.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두 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5교회가 주님께 책망을 받았는데,
그들은 양적인 문제를 놓고 책망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수님은 교회의 사이즈에 대해서 아무런 지적이 없으셨다.
반면 오늘날 우리의 시각은 대부분 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것의 좋고 나쁨을 논하기 이전에,
우리가 양(量)에 대해 매우 편중된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각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다.
큰 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라, 각자 부르심을 받은 대로 하되
자기 부르심에 자족하는 마음도 경건에 큰 유익이 되며(딤전 6:6)
이 세상에서 작아도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뜻.(눅 7:28)
출세, 성공과 관련 없이 자기 사명에 묵묵히 평생을 바친 두 분!
출세, 성공에 찌들린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신선한 삶의 모범이다.
마리안느 스퇴거 Marianne Stoeger
1934 오스트리아 출생
1955 Innsbruck 국립대학교 간호대학 졸업
1955~1962 Innsbruck 대학병원 간호사
1962 소록도에서 간호사로 봉사하려고 한국 입국
2005 소록도 병원에서 자원봉사 간호사 사역을 마치고 출국
마리안 수녀는 가톨릭 수녀로 서원한 후에,
1962년 한국에 와서 소록도에서 간호사로 자원봉사했다.
거기서 한센 병(나병) 환자들을 돌보고, 또한 환자들의 자녀(정상인)들을 돌보았다.
수 십 년 동안 그녀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는 희생적 사랑self-sacrificing love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마리안은 수녀로 서원할 때,
“한 섬에서 살면서, 그 섬 주민들을 위해 평생 죽을 때까지 봉사하며 살 것”을 서원했었다.
그 서원을 머나먼 한국의 소록도에 와서 지킨 셈이다.
그녀는 한센 병 환자들의 복지와 그 자녀들을 위해 여러 사업을 했으며,
환자들의 재활은 물론이요, 그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일에도 힘썼다.
그녀는 소록도에서 일할 때, 고국에서 의약품과 지원금을 받는 자원봉사자였다.
[조선일보 보도]
◑43년 봉사하고 가방 하나 들고 말없이 떠나…
소록도 벽안의 천사들
벽안(碧眼, 푸른 벽, 눈 안, 푸른 눈동자, 서양 사람을 지칭)
비록 이 세상에서는 크게 성공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현재 천국에서 날마다 보람된 행복한 삶을 누리시다가
미래 천국에서 영원토록 크게 성공하실 분들입니다.
“헤어지는 아픔을 드릴 수 없어 말없이 떠납니다.”
한센병 환우들이 모여 사는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43년 간 봉사하다 21일
홀연히 본국 오스트리아로 떠난 마리안느(71), 마가렛(70) 수녀의 사연이 감동을 주고 있다.
두 수녀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소록도 주민들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일손을 놓아버렸다.
주민들은 소록도병원 치료소와 성당에 몰려 열흘째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
이들 ‘벽안의 천사’들이 소록도에 들어온 것은 1962년 6월.
그리스도 왕의 시녀회 소속으로 간호사 자격을 가진 20대 후반의 두 수녀는
병마와 싸우며 힘겹게 하루 하루를 나던 한센병 환우를 돕기 위해 소록도를 찾았다.
이들은 당시 국내의 열악한 치료 여건 때문에 오스트리아에서 보내온 의약품과
지원금 등으로 온갖 사랑을 베풀었다. 환우들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등 헌신적인 치료 활동을 했다.
두 수녀는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하고,
물리치료기를 도입해 환우들의 재활의지를 북돋아주기도 했다.
한센병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 등 정부도 나서지 않은 일을 척척 해냈다.
한국생활에 익숙해진 두 수녀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고
한글까지 깨치는 등 완연한 ‘한국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했다.
주민들은 그들을 “할매”라고 불렀다.
하지만 평생의 선행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구 꺼렸다.
그 동안 국내외 수많은 언론이 그들의 선행을 알리기 위해 소록도를 찾았지만
인터뷰는커녕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수 백 장의 감사장과 공로패가 전달됐지만 되돌려졌다.
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이들이 받은 상훈의 전부였다.
두 사람은 떠나기 하루 전 병원 측에 이별을 통보했다.
주민들에게는 아픔을 준다며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 갖고 간 짐이라곤 낡은 여행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편지에서 이들은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했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며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빈다”
고 말문을 흐렸다.
그토록 큰 봉사와 희생을 한 평생 실천하고도
오히려 그 부족함을 말하는 두 수녀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 우리 시대에 진실로 필요한 크나큰 사랑이 느껴진다.
김명호 소록도 환우자치회장(56)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두 수녀님의 천사 같은
웃음과 기도에 큰 희망을 얻었다”면서 “그들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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