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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장애아를 태어나게 하시는가?

LNCK 2019. 12. 29. 14:23

하나님은 왜 장애아를 태어나게 하시는가?        살전4:14       11/2/2005          *출처

 

박신 목사 

 

육체의 고난은 종종 맑은 영혼을 가져다 준다

 

매일 더러워지는 유리 창

미국 위스콘신 주의 장애인들을 돌보는 목자의 집’(The Shepherd’s Home)에는 매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있다. 닦고 닦아도 더러워지는 창문을 청소하는 일이다. 그렇게 자주 더러워지는 까닭은 장애인들 중 몇몇이 매일 유리창에다 코를 박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둥병자에게 이 땅에서 과연 어떤 가능성을 볼 수 있는가? 나아가 뇌성마비 환자의 경우 그 비틀어지고 꼬인 육체와 끝없이 공허하며 중심이 서있지 않은 정신에 어떤 희망이 있겠는가? 그야말로 정말 죽었다가 천국에서나마 정상적 육신과 정신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는가.

      

비록 그들의 육신과 사고 수준은 정상 이하지만 자신들의 상태가 인간의 힘으로는, 현대의 최첨단 의술로도 결코 치유 될 수 없는 상태임을 안다. 완전히 절망적인 자기들의 정신적, 육체적 장애는 재림하는 예수님만이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기대와 믿음에 단 한 치의 가식과 의심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들의 부족하고도 불편한 육체와 정신을 통해 짜낼 수 있는 모든 열정을 다 바쳐 진심으로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그 소원이 뜨겁고 간절하면 유리창에 콧물과 침을 질질 흘려가며 얼굴을 들이밀고 기다리겠는가? 혹시라도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못 보고 놓칠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길 원하고, 어느 누구보다 가장 먼저 만나길 소원하는 마음을 우리가 과연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런데 하루 종일 기다려도 오지 않았지만 그 다음 날 아침에도 실망하지 않고 또 다시 창문가로 갈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을 우리가 흉내라도 내겠는가?

      

왜 천재지변이 일어나는가?

또 졸지에 지진이나 홍수가 들이 닥쳐 수만 명의 인생이 한꺼번에 죽음으로 몰리는 경우를 본다. 이상하게도 그런 일을 당하는 자들 대부분이 가난하고 헐벗어 힘이 없는 자들이며 연약한 부녀자나 노인들이 더 많이 희생당한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들은 말할 필요도 없으니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신자들은 그 원인이 아담의 원죄로 인해 피조 세계도 함께 벌을 받아 부패되었기 때문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래서 온갖 질병들의 유전자가 대대로 변형되어 내려오면서 장애아나 기형아가 태어난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진, 홍수, 해일, 태풍도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자연의 오염으로 더 심해지고 있음을 안다. 그래도 여전히 그 피해자들만 억울한 것 같고 하나님은 공평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라. 지진, 홍수, 태풍, 해일 등 자연 재해가 단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매일 순풍이 불고 적당한 비가 내리며 따스한 햇볕이 쬐인다면 말이다. 그래서 인간이 씨 뿌리고 경작하는 그대로 수확량이 정확하게 비례해서 거둘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땅의 주인은 인간이고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먹은 대로 다 할 수 있겠구나 라고 교만이 하늘 보좌에까지 뻗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런 천재지변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항력적인 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래서 천지와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잠시라도 생각하게 한다.

      

그들에게 배울 점

장애아와 불치병처럼 평생을 불행 가운데 지내야 하는 인생도 마찬가지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억울한 환난을 겪거나 졸지에 죽음을 당하는 인생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이 있음으로써 인생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이가 따로 있음을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들을 보는 모든 자들더러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만사가 자기 힘으로만 안 된다는 것을 어지간히 지각이 깨인 자라면 쉽게 깨닫는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도 불행을 당한 자에 비교해 자신의 처지를 감사할 수 있다.

      

특별히 장애아와 불치병의 경우는 사람들더러 천국에 관한 소망을 키워주려는 것이다. 도저히 이 땅에서는 해결 받을 방법이 전무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말해 오히려 죽음을 소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죽음에도 희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그들처럼 오히려 죽음에만 희망을 거는 인생이 있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야 할 정상적인 인생들도, 그런 순수한 내세 신앙을 그들로부터 배우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문둥병자, 중풍병자, 귀신들린 자, 나면서 소경인 자, 앉은뱅이, 심지어 죽은 자도 다시 살려 주셨다. 그분이 다시 오시면 그 모든 질병은 치유되고 이 땅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분은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오신다. 사랑하는 이가, 아니 내 생명을 완전히 새롭게 해 줄 치료자가 온다는 전갈은 받았지만 언제 도착할지 모른다면 하루 종일 정류장에 나가 목을 빼고 기다리지 않을 자 있겠는가?

      

희생양으로서의 본보기  

그런데 세상에 불행한 인생을 두는 하나님의 정작 중요한 뜻은 따로 있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우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되는지

너는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찌라

이 일이 이루면 너희가 나를 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24:16-19,24)

      

하나님이 멀쩡한 인생을 두고, 그것도 선지자로서 당신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에스겔에게 작심하여 큰 불행을 일으켰다. 그것도 당사자에게 아니라 본인의 눈에 가장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았다. 에스겔의 아내로선 아무 잘못도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를 통박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남편의 일을 좀더 드라마틱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졸지에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징으로 삼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순전히 본보기로 삼았다는 뜻이다. 그런데다 하나님은 그 일로 슬퍼하거나 일반적인 장례 절차마저 치르지 말라고 했다. 그냥 담담하게 불행이 아닌 양, 너무나 당연한 일상적인 일인 양, 그러나 깊이 묵상하며 감당해 내라고 한다. 도대체 이런 원통하고 억울한 죽음이 어디 있으며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신 것 아닌가?

      

그에 대한 답변은 단호하게 아니다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신자를 본보기(모델)로 불렀다. 에스겔과 그 아내도 맡은 역할의 경중(輕重)을 떠나 하나님이 쓰신 모델이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며, 그분만이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그리고 그 주관하는 원칙은 오직 당신의 뜻이되, 이 땅을 그분을 아는 백성으로 채우고 그래서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진리를 알도록 하는 본보기였다. 그리고 그 일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선 당신의 때에 당신만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 중에는 불행한 인생이나 억울한 죽음도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신자가 본보기라 해서, 가장 많이 죄를 지었거나, 같이 죄를 지었지만 대표로 벌을 받거나, 혹은 아무 잘못이 없는 반장이 다른 학생들의 잘못까지 책임지고 혼자 대신 벌을 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반장으로서 그 역할을 잘못했을 때에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 신자는 에스겔처럼, 아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희생양의 본보기로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신자의 인생은 경우에 따라 세상 사람에 비해 당연히 억울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신자는 무엇을 먹으나 마시나 주님을 드러내어야 할 뿐 아니라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은 자다. 입술로는 항상 그렇게 고백하면서 왜 죽음만은 아니 불행만은 자꾸 예외로 취급하려 드는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 그분이 허락하는 불행, 나아가 죽음조차 언제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 땅에 뇌성 마비가 있고, 문둥병자가 있으며, 자연 재앙이 설치고, 신자마저 억울하게 죽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이 땅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는 두 번 다시는 억울함이 없는 천국이 있고, 나아가 틀림없이 예수님은 재림하신다. 천국에 대한 소망과 예수님의 재림을 확신하여야 할 뿐 아니라 그 확신을 실제로 자기 인생을 통해 표징으로 보이는 자라야 신자다.

      

그런데도 사지가 멀쩡하고, 침도 흘리지 않고, 건강한 육신 뿐 아니라 고급한 지성을 가지고, 심지어 하나님을 알고 믿는 신앙마저 갖고 있으면서도 시기, 질투, 염려, 불안,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 자를 하나님이 어떻게 바라보실까? 그것도 천국에 대한 소망과 예수님 재림에 대한 기대는 도저히 눈 닦고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자를 말이다. 반면에 사지는 비틀려 있고 침을 질질 흘리며 구구셈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지능을 갖고 있지만 그 마음속에는 오직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그 소망만으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은 또 어떻게 바라보실까? 비록 그들이 매일 유리창을 자기 침으로 더럽힐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