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말씀으로” 세워 진다 행17:1~4 05.09.18.
박완철 목사
어린 아이라도 말씀이 새겨지면
추석 명절 때, 안 믿는 집안은 차례상을 차리고, 가족들이 절을 한다.
물론 크리스천 며느리는 거기에 절을 하지 않는다.
가족들도 다 안다. 저 며느리는 아무리 어르거나 협박해도 절하지 않는 것을.
그런데 문제는 그 며느리의 아들, 그러니까 4살 된 손자 아이였다.
어른들이 그 아이에게 차례상 앞에서 절할 것을 종용하자
“십계명 중 제 1계명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나님은 어떤 신에게도 절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는 절 안 할래요!”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당돌하게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말씀이 들어가서 그 영혼 속에서 역사하니까
불과 네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도, 말씀에 사로잡혀서,
믿지 않는 어른들을 향해서 감히 소리를 높여서 하나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다.
이렇게 말씀이 제대로 전파되면, 사람들에게 역사가 일어난다. 어린아이도, 어른도,
이방인도, 내국인도, 높은 자도, 낮은 자도... 말씀은 반드시 살아서 그 속에서 역사한다.
◑1. 원시적인 방법으로(말씀으로) 교회를 세운 바울
바울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말(언어)이라는 그릇에 복음을 담아 하나님의 심정을 전했다.
당시는 홍보용 비디오, 동영상 등이 없었으니, 전달수단은 “말” 뿐이었다.
당시 마이크도 없었으니, 가는 곳마다 목소리 높여 복음을 외치는 것이 전부였다.
바울은 참 원시적인 방법(오직 말)으로 복음을 전했다.
물론 당시에는 다른 방법도 쓸래야 쓸 수도 없었겠지만...
▶빌립보 교회는 말씀으로 세워졌다
행 16장에, 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다.
이렇게 유럽 복음화의 첫 관문(빌립보)은 “말로 복음을 전해” 열려졌다.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서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하신지라(행 16:14).
그 날, 루디아의 집에 유럽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다.
하나님은 이렇게 바울의 “말로 전해진 말씀”을 사용하셨다.
계속해서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들이 주를 영접했는데
역시 바울과 실라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기 때문이다.(행 16:32)
말로 전달되어진 말씀을 듣고 그들은 믿게 되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말씀으로 세워졌다
행 17장에 바울은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인 데살로니가로 갔다.
바울은 습관대로, 회당을 먼저 찾아가, 거기 모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세 번 안식일에, 즉 3주간 동안 머물면서 말씀을 전했다.
빌립보에서와 동일한 방법이었다.
말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모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식!
그래서 새 은혜의 시대, 교회의 시대가 열렸음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행 17:4)
바울이 말로 전한 이 복음을 듣고 - 헬라인의 큰 무리가 돌아왔다.
하나님의 ‘하’字도 모르던 이방인들이, 말로 전파된 복음을 듣고 믿기 시작했다.
한 두 사람 정도가 아니라 큰 무리가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의 지체가 높은 귀부인들도 말을 듣고 복음을 믿었다.
인종에 상관없이(아시아/유럽인),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말이라는 원시적인 방법을 통해 복음을 듣고 주께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처럼 말씀은 위력이 있고 신비한 힘이 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 말씀의 씨를 뿌리면, 조만간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힌다.
◑2. 오늘날도 과연 이런 원시적인 방법이 통하겠는가?
오늘 같은 멀티미디어 시대에, 단지 말로써 전하는 복음....
이런 <원시적인 방법)이 과연 통하겠는가? 아니면 도태되겠는가?
2천년 전 케케묵은 이 방법이, 오늘날에도 과연 효과적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지금은 TV, 컴퓨터 동영상 등, 시각으로 느끼는 비쥬얼 Visual 시대다.
현대인들은 보아야 믿고, 온 몸으로 느껴야 실감하는.... 그런 세대다.
▲ 설교의 권위가 떨어진 오늘날
그러므로 단지 말로써 전하는 복음은 오늘날 당연히 비효과적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오늘날 말로써 전하는 설교의 가치를 등한시 여긴다.
실제로 <설교는 짧을수록 좋다)고 한다. ←설교를 등한시 여기는 세태를 잘 반영.
과거에는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권위가 지나치게 높았다면
오늘날은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권위가 지나치게 낮아졌다.
설교는 말로 하는 것이라서 별로 효과 없고
들어봐도 그 말이 그 말이니까.... 늘 듣던 말이니까...
마음에 전혀 와 닫지 않는 설교보다, 감동을 쉽게 주는 음악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비주얼 효과가 있는 연극은 비중이 높아지고, 지루한 설교는 입지가 더욱 약화되었다.
어쨌든 오늘날 사람들은 <설교는 별로 효과가 없다)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해 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적나라한 현실이 아닌가.
▲설교 경시는 교회 약화
그런데 교회사를 연구해 보면, 설교가 경시되던 시대는 항상 교회가 약화되었다.
‘설교의 경시 풍조’와 ‘교회의 하강 곡선’은 정확하게 정비례했다.
말씀이 무시될수록 교회는 점점 더 힘을 잃어갔던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적나라한 현실이 아닌가.
◐3. 성경은 풀어 해석되어져야 한다
▲성경을 풀어주니 교회가 세워진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씀을 증거한지 불과 3주간 만에 세워졌다.
그들 성도들의 믿음의 좋은 소문은 온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알려졌다.(살전 1:8)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행 17:2)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말씀을 해석하는 사경회를 했다.
‘성경을 풀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성경을 열었다’는 뜻이다.
이전에 그들에게 성경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는데, 바울이 열쇠로 그것을 열어서
사람들에게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에 와 닿는 그런 주제의 설교(재정 관리, 심리적 주제 등)보다는
(딱딱할지도 모르는) 성경의 해석 및 해설을 했는데,
구약 성경을 풀어 설명했는데(당시 신약 없었음),
구약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에 대해 좀 더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했는데,
아마 구약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구절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가르쳤는데, 그런데 거기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성경은 누군가 지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깨닫는다. 강론이 필요하다.
성경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성경은 온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동시에 안으로 닫혀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군가 키를 가지고 닫혀 있는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열리지 않으면 성경은 침묵한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한다.
행 8장, 이디오피아 내시가 유대교를 믿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광야로 나간 빌립 집사와 만나게 된다.
그 내시는 병거 안에서 이사야서 53장을 읽고 있었다.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지도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느뇨?”
성경은 저절로 깨달아지지 않는 면이 있다.
누군가 설명해 주고, 그 닫힌 것을 열어 주어야 한다.
뜻을 풀어야 하고, 그 속에 알맹이를 끄집어내어 강론해야 - 사람들에게 이해된다.
그럼 성경은 신학 연구하는 사람의 전용물이란 뜻인가? 물론 아니다.
제 말뜻은 성경은 제대로 해석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바울처럼 성경을 강론하고 풀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는가?
성경을 풀어서 깨닫게 하는데서 교회는 시작된다.(사도행전 교회들의 예)
성경을 열어서 강론해서, 그 의미가 분명히 마음에 와서 닿도록 하고
그 의미가 이해되도록 도와주는 데서 교회가 시작된다.
교회는 돈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교회는 건물로 시작되지 않는다.
교회는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모으는 데서도 시작하지 않는다.
2천년 세월이 지났지만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것은 원시적인 방법이요, 비효과적인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성경의 닫쳐진 문을 열고, 성경을 강론하고, 그 의미를 풀어 해석해 줄 때
사람들은 그 의미를 깨닫고... 교회는 시작되어 진다.
단조롭고 재미없어 보이는 방법 -성경을 풀고 해석하는-을 통해
교회는 시작되어 진다. 교회는 세워진다. (다음 호 #89에 계속)
멀티미디어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하드웨어에 불과하다.
복음, 말씀의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별 효과 없는 무용지물이다.
나는 예전에 성공적인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분의 지론은, 오늘날 교회는 21세기 최첨단 멀티미디어를 도입해야 한다.
음향장비, 전자 악기, 인터넷 방송, 컴퓨터 동영상도 최첨단으로 갖춰야 한다.
그렇게 교회를 홍보하고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 뒤쳐져서 따라가지 말고, 오히려 문화적으로 사회를 선도해야 한다.
그래야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교회는 도태되고 말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정말로 현대인의 눈과, 현대인의 감각에 부응하면 교회가 성장할 것인가?
21세기 최첨단의 멀티미디어 기계들을 동원해서 현대인들의 감성에 호소하고
그들의 감정을 사로잡고 테크닉을 써서 거기에 호소한다고 교회가 과연 성장하겠는가?
만약 그런 최첨단의 장비들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침체하고 말 것인가?
◐4. 교회의 탄생과 성장의 원리는 .... 철저히 말씀 중심
사도행전이 처음부터 반복해서 보여주는 교회 탄생과 성장의 원리는 무엇인가?
교회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교회는 어떻게 유지되어 가는가?
교회는 어떻게 힘을 얻고, 교회는 어떻게 새로워져 가는가?
사도들은 어디에 집중했는가?
처음에 사도들은 구제하고 과부를 도와주는 그런 일도 했다.
그러나 구제에 바빠서 말씀을 잘 전할 수 없게 되자, 그 일을 집사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리라”고 사도 베드로는 천명했다.(6:4)
말씀 사역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사도들의 책임이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이 집중했던 일 - 말씀 전파
행 18장에서 바울은 음란과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 고린도에 갔다.
거기서도 똑같은 원시적인 방법인 말로써 복음을 증거했다.
“바울이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유대인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하였다”(18:5)
그는 1년6개월간 고린도에 머물면서 한 가지 일에 집중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 전하는 것)이었다. 위에 베드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6:4)
▲에베소 교회에서 바울이 주력했던 일 - 말씀 전파
행 19장에 바울은 에베소로 간다. 그 도시에는 마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씀이 전파되고 그 뜻이 풀어져서 깨달아지자,
많은 사람들이 값비싼 마술 책을 불태워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어두운 영적 세력의 사슬에 꽉 매인 자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성경은 이렇게 해답을 주고 있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19:20)
케케묵고 고답적이며 별로 효과 없어 보이는 방법인 것 같은데
뜨거운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자... 거기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 말씀 전파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그 날에 3천명이나 세례를 받았더라(2:41)
어떻게 평생 살아오던 과거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회심해서 주께로 방향 전환하는가?
말씀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도들은 핍박을 받아, 더 이상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 협박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5:42)
말씀을들은 자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4:4)
교회는 처음부터 말씀으로 탄생했다. 말씀 위에 세워졌다.
지금도 교회는 말씀으로 유지된다. 교회는 말씀으로 새로워진다.
말씀으로 힘을 얻는다. 말씀에 근거해서, 말씀을 붙들고,말씀을 의지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세상을 이기면서 나아간다.
오늘도 우리는 말씀으로 새로워짐을 받는다.
◐5. 말씀에는 능력power이 있다.
▲말씀에 능력이 있었다는 역설적 증거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야손의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거기까지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다.
시정잡배들과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야손의 집에 쳐들어갔다.
두 선교사를 못 찾으니까, 대신에 야손과 그 집에 있던 형제들을 끌어냈다.
그리고 대신 그들을 관원들 앞에 끌고 가서 고발했다.
이들은 염병 같은 사람들입니다. 내버려두면 큰 일 날 사람들입니다.
이 자들은 천하를 어지럽게 한 자들입니다.
가이사 황제 대신에 예수를 섬기라고 대역죄를 부추기는 자들입니다.(17:5~9)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베뢰아까지 원정 가서 이런 바울을 훼방했다.
왜 바울과 실라를 잡아 죽이지 못해서 이토록 안달인가? 원정까지 가다니....
역설적으로, 바울이 전했던 말씀, 그 복음이 아무 힘이 없었고, 능력이 없었다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극단적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살전 1:5)
말씀은 머리로 이해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말씀을 전하고 들을 때, 성령이 전하는 자와 듣는 자에게 동시에 역사하신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하고, 성령이 성경을 열어주신다.
강론하는 자의 심령에 성령의 뜨거움이 임한다.
그 말씀이 듣는 자의 심령 속에 깊이 박히도록 성령이 도와주신다.
(과거부터 개신교회는 성령의 조명이라는 표현을 썼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이 힘 있게 가서 듣는 자의 마음에 닿았다.
마음이 움직이며,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희안한 감동이 생긴다.
마음에 이상한 찔림을 받는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감동을 거절했다.
자기 마음과 영혼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리어 정면으로 대적했다.
나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야 되겠는가? (이 설교의 원제목: 당신의 반응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주께로 더욱 가까이 돌이킬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처럼 도리어 정면으로 대적할 것인가?
거대한 어두움의 세력을 이기려면 더 힘 있는 것이 필요하다
97년 5월에 나는 영국에 간지 7년 만에 한국에 나와 한 달간 머물렀다.
목회를 하는 우리 동기들을 많이 만났다.
당시에 동기들은 신학교 졸업 후 10년간 개척 목회를 하고 있었다.
개척한지 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개척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서 힘들어했다.
나는 밤새워 동기들과 목회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어려움을 서로 토로했다.
당시 동기 목사님들은
아무리 바른 신학으로 바른 교회를 세우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아무리 애쓰고 발버둥쳐도 잘 되지 않는다. 십 년 했는데도 별로 나아진 것은 없다.
그래서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바르게 하려고 애는 쓰는데
한국 사회를 온통 뒤덮고 있는,
한국 사회 안에 있는 교회들을 속속들이 공략하고 있는
거대한 어두움의 세력을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극복해 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이 어두움
태산처럼 큰 이 어두움
거기에 부딪히면 나도 산산조각 나버릴 것 같은 거대한 어두움의 세력...
나는 동기들의 이런 고백을 들으면서, 큰 고민에 빠졌다.
나는 앞으로 똑같은 고민과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에 존재하고, 내 안에도 침입하며,
심지어는 교회 구석에까지 들어와서 호시탐탐 노략질할 기회를 노리는
이 거대한 어두움의 세력에 어떻게 대항하고 이겨 나갈 것인가?
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 어두움보다 더 힘 있는 것이 내게 없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어두움이 아니다.
내가 일대일로 맞붙어서 극복할 수 있는 만만한 어두움이 결코 아니다.
거대한 어두움의 세력보다 더 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이다.
성경이 내게 열려서, 그 의미가 정확하게 내게 해석되어지고 깨달아질 때
나는 거대한 어두움의 세력보다 더 힘 있는 것을 가지고 승리하게 된다는
- 결론에 도달했다.
▲요점 정리:
1. 메스미디어 시대에도, 복음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말로써” 전해진다.
2. 교회는 말씀으로 세워진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3. 거대한 어두움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더 힘 있는 말씀을 가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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