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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도 지나치면 해(害)가 된다

LNCK 2019. 12. 28. 19:08

기적도 지나치면 해()가 된다         10:17      06.01.08.

 

 

*글의 요지 : 사도행전 10장에는 여러 기적 또는 신비적 체험이 나온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찾으라는 천사의 환상을 본 기적,

동시에 베드로에게도 비몽사몽간에 악하고 더러운 짐승들을 잡아먹으라는

환상을 3번이나 연속해서 본 신비적 체험, 등이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되는 것도 기적적인 인도하심이 있었다.

 

그런데 백부장 고넬료가 변화되는 것은, 이런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찾아가 증거한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때문이었다.

, 기적에서 시작하더라도 말씀으로 끝을 맺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른 신앙의 방향을 발견할 수 있다.

 

 

1. 모든 종교에는 기적이 있다.

 

모든 인간 사회에는 종교심이 있다.

원시사회는 원시 사회대로,

문명사회는 없을 것 같지만, 종교심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종교를 말살하려고 했던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종교는 살아있다.

(일례로, 지금 평양에서는 점집이 성업 중이라고 한다.)

 

이런 종교심의 뿌리는 초월에 있다. 좀 어려운 말인데,

쉽게 표현하자면 기적또는 초자연적인 힘이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강원도에 무전여행을 다닌 적이 있다.

그 때 어떤 마을에 갔더니 무당이 날카로운 작두 칼날을 세로로 세우고

그 위를 사뿐 사뿐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놀랐고 나도 살을 벨까봐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런 초월의 힘, 기적의 힘에 사람들은 굴복하고 무당을 믿었다.

무당도 이런 초월의 힘, 기적에 기초해서 무당 짓을 한다.

 

불교에도 기적이 있다;

이차돈(그의 순교로 신라에 불교 전래의 계기가 된 인물)의 목을 치니까

흰 피가 나왔다고 한다. 잘 믿어지진 않지만....

어쨌든 그런 기적적 사건을 통해서 종교가 전래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 외 승려들도 방언을 하는 등, 여러 기적들이 있다.

 

초월명법 뭐 이런 것 하는 사람들 중에 몸이 몇 센티 뜨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믿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기적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따른다.

 

요즘 살 뺀다고 요가하는 사람이 있는데, 요가라는 말의 뜻이 산스크릿

합일, 신과의 합일을 뜻한다. 요가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결국 명상 종교 속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천주교에도 기적이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무슨 성상, 마리아 상이 가끔씩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린다는 기적에

많은 사람들이 그 성상 앞에서 절하고 기도한다는 기사를 종종 접한다.

특히 남미의 천주교에서 이런 일은 매우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런 초월적 힘에서 종교심이 발생되고, 또한 유발시키는 경우도 본다.

 

기독교(개신교)에도 초월기적이 반드시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화 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 생활하면서 초월을 한 번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방언을 말하는 것 - 역시 신기한 초월적 체험이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들이 기도해서 낫는 것 - 기적이다.

이런 신앙적 체험이 우리 각자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면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초월 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썩게 되고, 미신화 되어버린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환상 중에 천사를 만나는 초월적 체험을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만나서는, 초월적 체험에 관해 서로 논의하지 않았다.

말씀을 증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것 때문에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고넬료가 변화되는 일이 나타난 것을 본다.

 

 

2. 기적주의 극단에 반발해서 이성주의 극단으로 치우치다

 

초월말씀으로 인도하는 일종의 화살표 또는 이정표 이어야 한다.

초월에만 계속 머물러 있으면 반드시 미신화 등 문제가 생기게 된다.

 

중세 기독교가 상당 부분 미신화 되었던 이유는,

초월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적을 찬양하고 미화하다 보니, 기적은 그 성격상 매일 안 일어나니까

결국 없는 기적까지 인위적으로 조작해 내게 된다. 그래서 종교가 타락한다.

초월에 머무르면 언제나 종교는 미신화되고, 썩게 되어 있다.

 

그 반발심으로 18세기 계몽주의, 과학주의 사상이 대두되었다.

그들은 교회의 기적주의를 웃기는 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초월이 아닌 것까지도 초월로 위장한 것을, 그 껍데기를 벗겨내었다.

 

과거에 큰 전염병이 돌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해석했다.

계몽주의자들은 무슨 심판이냐? 그 원인은 바이러스다

그래서 기도해서 낫게 하는 것 보다, 항바이러스 약을 먹여 치료했다.

 

과거에는 천둥 번개 떨어져서 그것에 맞아 죽으면 심판이다그랬다.

과학자들은 무슨 심판이냐? 저것은 전기다!’ 그랬다.

저것을 막기 위해서는 기도가 아니라 피뢰침 달면 된다.

 

포이에르바하로부터 시작된 자유주의는 종교를 심리적 현상으로 간주했다.

 

여기도 문제점이 있었는데, 초월이 주는 허구를 깨는데 집착하다 보니까

이런 이성주의, 과학주의가 지나친 극단으로 나아갔던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악한 마귀가 사용하는 방법은 양극단에 둘 중 하나이다.

지나친 초월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 - 그래서 미신화로 빠지게 하든지

지나친 이성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 - 그래서 무신론으로 빠지게 만든다.

 

초월에서 시작했지만(기적도 신앙에 도움을 준다) 말씀으로 가야하고

이성에서 시작했지만(이성도 신앙에 필수적이다) 이성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그 이성을 사용해서 말씀을 믿고 따르는 신앙으로 나가야 한다.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썩게 된다.

 

3. 성경을 봐도 기적보다는 말씀에 중점이 있다.

 

많은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 그것도 좋지만

풍성한 말씀으로 많은 성도들이 변화 받는 교회가 나의 소원이다.

그것이 훨씬 더 건강한 교회다.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출발은 초월이었다; 열 가지 재앙, 홍해 기적, 만나와 메추라기 등

그러나 그들은 시내 산에서 받았던 율법의 말씀으로 나아갔다.

모세 오경은 기적을 설명한 책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말씀을 강조했다.

말씀이 축복이라는 것이다. 잊어서는 안 된다.

 

어린 신앙, 초보적 신앙은 항상 초월에 머물러있다.

어린 신앙, 초보적 신앙은 되지도 않는 이성에 머물러 있다.

기적이나 이성으로 출발하지만, 말씀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사도바울도 고후 12장에 보면 천국을 경험했던 체험이 나온다.

그것은 14년 전에 경험했던 것이었다.(고후 12:2)

14년 동안 아무 말 없이 지내다가, (보통 사람은 14시간도 기다리기 힘든데)

그제야 한 마디 툭 던졌다. 초월이 메시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자기 메시지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등 말씀에 있었다.

 

예수님의 사역을 봐도, 기적을 통해서 회개한 사람보다는

말씀을 통해서 회개한 사람이 더 깊고, 더 많았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은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화와 말씀을 통해서 그 여인은 변화되었다.

(기적으로 물을 길으신 것이 아니라, 여인이 그냥 두레박으로 떴다)

그렇지만 그 여인을 통해서 사마리아 성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기적은 없었지만, 말씀이 역사하니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누가복음 19장의 삭게오 사건을 보라.

거기도 기적은 전혀 없었다. 뽕나무에서 (날지 않고) 걸어서 내려왔다.

예수님이 그 집에서 무슨 기적으로 음식을 만들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삭게오는 토색한 것을 4배나 갚겠다며 회개하고 변화받았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 치유의 은사를 가진 분이 있었다.

어떤 분이 암으로 거의 죽어갔는데, 그 분의 기도로 기적적으로 살았다.

병원의 진단을 받았는데, 진짜 암세포가 없어졌다고 했다.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정말 다 나았다는 것은 내가 목격했다.

 

그 후 1~2년 동안 병 나은 분은 펄펄 뛰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 그는 자기가 기도의 능력으로 나은 것이 아니다

생뚱맞게 말했다. ‘자기는 우연히 나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 부인하며 십 몇 년 동안 교회도 안 다니다가 결국 죽었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기적만 가지고 회개하는 것은 아니구나...

결국 믿음은 기적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0:17)

 

말씀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기적과 초월적인 능력이

나타나도, 그에게 구원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기적으로 시작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말씀으로 끝을 맺어야

구원의 역사가,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기적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

성경에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런 기적을 체험한 그가

그 후에 살아서 무슨 일을 했는지 성경에 기록은 없다.

복음 증거하며 살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다가 그냥 죽었다.

 

우리 가운데도 많은 영적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방언과 기적 등을 체험하는데, 그것을 자랑하거나 추구해서는 안 된다.

추구하는 방향은 말씀이 되어야 굳건하게 선다.

 

이성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성을 추구하고 이성에 머물러있으면, 안티기독교에 빠진다.

알량하게 들은 지식으로 기독교 신앙과 교회를 공격하는....

그 이성도 말씀에 굴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져야 한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