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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 비전 / 김명혁 목사

LNCK 2020. 1. 9. 19:52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 비전   사49:6          출처

 

2010. 8.15 대성회 다문화 포럼 / 김명혁 목사

 

성경은 본래부터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이었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찌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19:24,25).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2:8).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2:1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7:9,10).

 

따라서 성경은 본래부터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경계하며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49: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욘4:10~11).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6~8).

 

이방으로 가기를 싫어하던 민족주의자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서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

 

결국 베드로는 할 수 없이 가이사랴에 가서

로마 백부장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목격하고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인종 차별을 하지 않으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행10:34,35).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엡3:28).

 

▲주기철 목사님은 “민족주의자들은 산정현 교회에서 나가라”고 말씀했고

한경직 목사님은 “성서적 애국심은 민족지상주의나 국가 지상주의는 절대로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본래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비판적인 사람이었고

배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일본도 북한도 중국도 모슬렘도 모두 싫어하던 배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도 비판했고 조용기 목사님도 비판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교회 지도자들을 인정하고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일부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동족으로 인정하고 받아드리며 사랑하게 되었고,

중국 사람들과 아프간의 탈레반에 대해서도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을 존경하며 사랑하게도 되었습니다.

 

이것은 본래적인 저의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후천적인 마음입니다.

 

저는 북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에 가서 가뭄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우물 열 다섯 개를 파주었고,

방글라데시에 가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위해서

안과 진료소를 지어주었습니다.

 

저는 불쌍한 연변의 조선족 어린이들 200여명을 10여 년 이상 돕는 일이 너무너무 좋고,

불쌍한 아프간 어린이들을 돕는 일이 너무너무 좋고,

불쌍한 북한 동포들을 도울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기쁘고 기쁠 것 같습니다. 연변 지역의 어린이들이 예쁘고 귀엽게 보였고,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이 예쁘고 귀엽게 보였고,

북한 어린이들이 너무 예쁘고 귀엽게 보였습니다.

 

저는 1992년 4월 미국의 로스안젤스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을 때

흑인 학생 대표들 10 명을 한국에 초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흑인 청소년 10명이 1992년 10월 23일부터 11월 3일까지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들이 한국교회와 한국의 교육, 문화, 산업 시설 등을 방문하면서

많은 도전과 격려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와 사회에 대한 대단한 긍정적인 홍보를 했고

한-흑 화해와 협력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국내에 살고 있는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 형제자매들을 품으며

저들에게 사랑과 격려의 손길을 펴고 있는 김해성 목사님과

이선희 목사님의 사역을 너무 귀하게 생각하고,

국내에 살고 있는 소외계층의 이웃들을 품으며

저들에게 사랑과 격려의 손길을 펴고 있는 최일도 목사님과 임명희 목사님과

김범곤 목사님의 사역을 너무 귀하게 생각하며,

 

필리핀 앙헬레스 산지에 버려진 십 오만 여명의 아이타 원주민들을 찾아가서

저들에게 사랑과 격려의 손길을 펴고 있는 양남일 선교사를 비롯한

그 지역 한인 선교사들의 사역을 너무 귀하게 생각하며

이들 사랑의 봉사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의식적으로 힘써서 하여야 할 일은

단일 문화와 유교적 전통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의 지역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사고와 관점을 성경적 가르침과 비전에 따른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 사고와 관점으로 바꾸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점점 다문화 가정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극히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와 한국 민족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복의 통로로,

즉 새로운 선교의 도구로 쓰시려는 계획이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에 다가가고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리를 유창하게 설파하는 설교나 강의 보다는

저들을 이해하고 존경하며 품으려는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존경과 사랑의 마음과

삶의 자세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쳐야할 것입니다.

 

작은 예수로 살다가 죽은 장기려 박사님이 한 말을 귀 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도 이데올로기도 한낱 쓰레기일 뿐이다."

 

신경림 시인이 지은 “달라서 좋은 내 짝꿍”이란 제목의

소박하고 따뜻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내 짝꿍은 나와 피부 색깔이 다르다

나는 그의 커다란 눈이 좋다

내 짝꿍 엄마는 우리 엄마와 말소리가 다르다

나는 그 애 엄마 서투른 우리 말이 좋다

내 외가는 서울이지만

내 짝꿍 외가는 먼 베트남이다

마당에서 남십자성이 보인다는 나는 그 애 외가가 부럽다

고기를 잘 잡는다는 그 애 외삼촌이 부럽고

놓아 기른다는 물소가 부럽다”

 

그리고 제가 2007년 1월 3일 차를 타고 교회로 가면서 쓴 글을 읽어드리므로

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 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2007년 1월 3일 아침 교회로 운전하며 오는 차 속에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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